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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생애
1.1. 왕자 시절, 왕세제 시절
<colbgcolor=#bf1400> 연잉군 시절 영조의 젊은 모습 (21세) [1] |
하지만, 경종은 공은 없으나 실책도 하지 않으며 세자 자리를 유지했고 독특한 처신으로 노론 대신들에게 꾸지람까지 들었지만 요지부동이었다. 결국, 숙종의 병환이 나빠짐에 따라 세자의 자리는 굳건해졌고, 숙종 말년에 경종이 승지(丞誌)들이 자신을 기다리게 해서 폭발한 사건이 있었을 때는 숙종이 경종을 질책하자 소론 대신들이 "왜 세자의 기를 죽이느냐?"고 반발할 정도였다. 이는 일부 노론조차도 동의 할 정도이었다.[2] 성격이 더럽기로 유명한 왕 숙종은 "내가 세자 아빠인데 어디서 감히 이런 말도 못하냐?"라고 투덜거리면서도 너무 병환이 심해져서 별다른 조치도 취하지 못했다.
결국, 숙종이 60세를 일기로 승하하자 이복형 경종이 승계한다. 하지만 노론 대신들은 초반부터 즉위한 경종을 우습게 알면서 갖은 모욕적인 처사를 했으며 마침내 경종을 압박해 연잉군을 강제로 '왕세제(王世弟)'로 삼게 했다. 경종이 아들이 없었으되 30대 초반의 젊은 나이에 왕후가 고작 17세인 것을 감안하면 아들을 낳지 못하니 삼종의 혈맥을 근거로 동생이나 후계자 삼으라고 왕을 능멸한 것이다.[3]
각설하고, 이때 왕세제가 된 연잉군은 공부에만 힘을 썼으나, 노론은 경종을 아예 허수아비 임금으로 만들기 위해 세제에게 대리청정을 시킬 것을 완곡히 권했고 경종이 받아들이면서 결국엔 신임옥사의 난리가 난다. 우여곡절 끝에 노론은 지네가 역당이라는 것을 인증한 꼴이 되었으나, 세제 본인은 사양도 했었고, 유일한 혈육이다 보니까 무사했었다. 오히려 세제는 경종에게 청해 자신을 음해하려는 궁인들이 있다고 아뢰어 내시 박상검, 문유도 등을 지목하고 처형할 것을 주장했지만, 경종은 거부했다. 그러자 세제는 경종에게 그럼 "그 사악한 내시들을 전하 곁에 두면 되겠군요" 라고 말했다가 형 경종에게 쌍욕을 듣기도 했다.[4]
이에 세제는 "사악한 자들이 나를 해치려 하니 세제 노릇 못 해먹겠다"며 세제 자리에서 물러날 것을 선포했다. 이에 놀라서 노론은 물론이고 소론 신하들도 박상검, 문유도를 처벌한 것을 강력히 요청하였다. 정치적 입장이 어쨌든 세제 대신에 내시 편을 들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므로. 결국 경종은 자신이 총애하던 내시 박상검, 문유도 등을 처형해야 했고, 그들과 체결하여 웃전의 사정을 살핀 궁녀 석렬과 필정도 자결했다. 이렇게 세제는 정치적 위기를 정면 승부로 돌파하는 듯했는데 삼수의 옥이 터지면서 그는 반란 수괴로 몰리고 정말 죽음의 위기에 처한다. 김일경 등은 김성 궁인을 캐낼 것을 요구하며 세제를 공격했고, 세제는 "이런 죄인이 어찌 세제의 자리에 있겠냐"고 눈물로 호소하며 세제 자리를 벗게 해달라고 청할 뿐이었다. 하지만 경종이 유일한 혈족인 세제(금)를 보호한다. 결국 31세의 나이로 이복형이었던 경종이 오랜 숙환으로 승하하면서 인고의 세월을 견딘 세제는 드디어 왕으로 즉위하였다.
1.2. 경종 독살설
경종이 재위하던 기간에는 조그만한 꼬투리를 잡히지 않도록 처신을 일절 조심해야 했고 경종이 죽고 나서는 자신이 경종을 죽였다는 의심까지 받았기에 권위가 약해질 수밖에 없었다.전해지는 야사에는 영조가 음식 궁합을 이용해 이복형인 경종을 독살했다고 한다. 이 때 사용된 음식이 생감과 간장게장. 그것 때문에 남인 일파에서는 "게장대왕"이라고 불리기도 하였다고 하는데 이건 야사 수준이 아니라 당대에 흔히 떠돌던 소문으로 보인다. 1755년에 윤지, 심정연, 신치운 등이 일으킨 나주 괘서 사건 당시에 체포된 주모자들을 영조가 친국할 때 이들이 영조에게 "신은 갑진년[5]부터 게장을 먹지 않았습니다!"라고 외쳤을 정도. 이 표현은 《영조실록》에도 등장하는 표현이다.[6][7] 그 외에도 나온 말들이 조선 시대 표현으로 하자면 '지극히 흉참'했는데 "그거 글은 쟤가 썼지만 짓기는 내가 지었다!", "그 중에서 제일 불측한 말이 내 말이다! 어쩔래?", "니가 죽인 김일경이 사실은 충신이었던 것을 우리는 다 안다!" 등 대놓고 개겼다.[8]
경종은 1달정도 앓아누운 상황이었는데, 그 상황에서 게장과 감을 먹었다.[9][10][11] 그 뒤 복통과 설사를 호소하는 경종에게 인삼과 부자를 올렸다고 기록되어 있다.[12][13] 독살설을 주장하는 쪽은 어의들이 반대했는데도 자신의 처방을 고집했고 당시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있던 영조가 살아남기 위해서 독살을 꾀했을지도 모른다고 주장하지만 원체 경종의 건강이 좋지 않았기 때문에 진상은 알 수 없다. 특히 영조가 인삼과 부자를 올리자 경종의 상태가 일시적으로 호전되었다고 했을 정도로 경종의 상태는 심각했다.[14] 당시 어의들도 제대로 된 처방을 하지 않고 있었기 때문에 보다 못한 영조가 나서서 직접 처방을 했던 것.
아무튼 그 때문에 영조는 항상 자신이 이복형 경종을 독살했다는 의혹에 시달렸고 여러모로 괴로워해야만 했다. 다만, 경종 사망 직전 당시의 독살설은 그다지 신빙성이 있지 않으나 그보다 2년 쯤 전에 실제로 노론 측에서 경종을 독살하려고 음모를 꾸몄던 사건에 대해 국가 안위에 대한 걱정과 충성심의 발로로 그리하였던 것이라고 두둔한 적이 있기는 하다. 경종 독살설에 관한 직접적인 관여 여부를 떠나서 그 실제 내심이 과연 어떠했는지 여러모로 궁금해지는 대목. 영조는 이럴 때마다 화도 냈지만 펑펑 울기도 했다.[15] 영조는 독살 사건에 대해 억울한 것이 많았는지 1755년 《천의소감(闡義昭鑑)》에서 "그 생감과 간장게장, 내가 형님께 올린거 아니라고 이놈들아!"라는 글까지 쓴다.[16] 그러나 당시는 임금의 주장에 쉽게 반박이 허용되지 않는 시대였다.
그러나 당시 상황에서 왕세제였던 영조는 신임옥사로 인해서 이복형 경종을 죽일만한 세력을 가지고 있지 못하였다. 일단 몇 해 전에 그나마 자신의 지지 세력이였던 노론들이 대거 죽거나 쫓겨났으며 출생에서부터 천출이라는 차별[17][18]이 당시에도 있었기에 비록 '왕세제(王世弟)'라고 하더라도 그의 말을 듣고 따를 사람들이 거의 없었다. 또한 이인좌의 난 직전 중용된 많은 소론계 중신들은 신임옥사 당시 노론을 쫓아낸 사람들이였으며 경종 사망의 진상을 알 수 있었던 사람들이었다. 만약 경종이 독살되었다면 이들이 영조에게 신하로서 충성했었을리가 없다.
1.3. 재위 초반기, 정미환국과 이인좌의 난
<colbgcolor=#bf1400> 20대와 50대 시절의 초상의 얼굴 부분 확대 비교. 눈꼬리가 더 올라간 게 포인트. 매부리코 등의 특징이 잘 드러난다. |
갖은 핑계로 김일경과 삼수의 옥의 고변자인 목호룡을 처형한 영조는 삼수의 옥을 뒤집어 자신을 위해 죽은 노론들을 신원하고 여러 소론들을 내쫓고 노론 정권을 세운 다음에 과거는 잊자고 하였으나 4대신을 비롯한 거물들이 떼죽음당해 이를 갈고 있던 노론 강경파 정호, 민진원 등은 협상은 없다고 선포하며 소론들을 모두
일례로 즉위 초 사면 복권으로 기가 오른 노론들이 정치 보복을 하려할 때 몇 차례 설득을 시도해도 말을 듣지 않자 영조는 오히려 정미환국으로 노론을 내쫓고 정권을 뺏고는 소론(완론)을 다시 불러들인다. 한편 이인좌에게 협조했다는 혐의로 출사길이 금지된 영남 남인들이 억울하다며 상소를 연달아 써도 간단히 무시할 수 있을 정도였다. 아버지 숙종을 본받아 환국을 써먹은 적이 있을 뿐더러 이복형 경종 시절의 삼수의 옥으로 영조의 탕평은 시작부터 자기 모순이 됐다. 모든 당파에서 두루 인재를 뽑겠다는 영조의 구상은 강경파를 배제하고 각 당파의 온건파들만 모인 탕평당의 독차지로 변해 그나마 붕당 정치가 쇠퇴하게 되는 원인를 제공하게 된다.
그런데 윤휴의 손자 사위인 남인 이인좌가 소론 강경파와 남인을 규합하여 "영조는 숙종의 친아들이 아니다"라는 명분[19] 아래 초거대 규모의 반란을 일으키니 이것이 바로 이인좌의 난이다. 그나마 영조가 소론 탕평파 정권을 세워준 덕에 소론의 분노가 잠시 가라앉은 상태였지만 김일경, 목호룡의 처형에 어그로[20]가 잔뜩 올라 있던 소론 강경파와 남인들이 대거 참여하면서 반란은 서울, 삼남, 서북에서 동시다발로 치고 내려오는 대규모였다. 다행히 서울과 서북의 반란은 조기 진압되었다.
충청도의 이인좌는 소론 오명항의 진압군을 얕잡아보다가 화포 공격에 개박살났으며 전라도에서는 태인현감 박필현이 거병했으나 전라감사 정사효[21]가 배신하면서 와해된다. 경상도에서는 정희량 등이 거창, 합천을 점령하고 기세등등했으나 안동 등지에서는 근왕 의병이 일어나는 등 저항이 만만찮았고 결국 조선 중앙군의 반격으로 진압된다. 이쯤되면 열받아서 소론과 남인을 다 죽일만도 하지만 영조는 그러지 않고 소론 탕평파 정권을 놔두고 노론 탕평파 홍치중 등을 기용하여 탕평책을 지속했으니 영조의 업적이라 하겠다. 영조는 이인좌의 난(준론+남인)까지 진압하고 조선 조 마지막 공신 지정인 '분무공신(奮武公臣)'을 지정했다.
1.4. 집권 중반기, 쌍거호대
이후 영조는 당파 싸움을 뿌리 뽑자는 취지로 소론의 조문명, 조현명, 송인명 등과 노론의 홍치중, 홍치중 사후엔 김재로 등을 중용하여 노론과 소론의 균형을 맞추는 쌍거호대 정책을 유지한다. 하지만 깊어진 적대감으로 인해 유척기를 비롯해서 탕평에 응하지도 않는 사람이 많았으며 탕평파 중에서도 강경파인 이광좌는 노론의 공공의 적이었다.설상가상으로 남인과 소론 강경파가 끊임없이 반역을 도모하면서 영조는 싫어도 남인과 소론 강경파를 어쩔 수 없이 계속 처형해야 했고 1755년(영조 31년) 나주 괘서 사건이 일어나면서 최후의 소론 강경파들이 영조의 친림 시험장에 나타나서 영조에게 최후의 발악까지 했다. 결국에는 살아남은 소론 강경파는 반역 전문 집단쯤으로 몰려서 완전히 궁지에 몰리고 말았고 열받은 영조조차 조태구, 유봉휘를 역률로 추죄하고 조태억, 최석항, 이광좌도 관직을 추탈하면서 소론의 세력을 온건파 수준으로 줄이게 된다.
한편 노론은 신임옥사에서 죽은 사람들을 신원하기 위해 노력을 했는데, 이때 영조도 역안(逆案)에 써진 마당이었기 때문에 그 과정에서 저절로 노론의 힘을 싣게 되는 행보를 하게 되었다. 그러나 영조의 생각은 왕세제 시절에 역적으로 몰려서 죽을 뻔했던 신임옥사에서 본인의 죄를 사해 없애는 것이 목적이었지, 노론을 위해 하는 것은 아니었다. 영조가 신임옥사에서의 신원이 본인을 위해 한 목적이었음을 밝혀지게 된 것은 《천의소감》이라는 책을 지어 세제 책봉에서의 취약한 정통성 등 문제점을 변명하려 했다.
이 때는 조정에서 이미 강경파들은 다 떨어져 나가고 영합에 맞추는 온건파 일색이었다. 그래도 세도정치 시절과 다르게 당파색이 여전히 남아 있었는지, 거리낄게 없어보였던 노론은 마음껏 소론을 폄하하고 설치다가 오히려 영조에게 분노를 샀다.[22] 결국에는 싹싹빌고 다시는 안 까불겠다고 맹세한 일도 있다. 영조 자신과 정치의 안정을 위한 서적 간행을 다시금 정치 보복에 써먹으려던 노론에게 잠시 겁을 준 것이다.[23]
한편 영조는 선조 시절부터 붕당을 주도하고 조정에서 영향력을 행사했던 사림 세력들에 대한 정리를 시작하였고 사림과 붕당의 근원지라 할 수 있는 서원을 감소시키는 한편, 사림 출신의 관직 등용을 줄였다. 그 바람에 숙종 시절만 해도 영향력이 강했던 전통적인 사림들은 설 자리를 잃었다. 그 덕분에 지방 사림 출신들이 줄어나가는 반면, 서울(한성)과 경기 출신에게 관직이 많이 주어져서 이후에는 서울과 경기를 중심으로 한 관직 독주가 이어지게 되었다.
노론, 소론 할 것 없이 조정에 온건파들만 남자 영조는 자신의 영합을 위한 정치에 맛을 들였다. 영조는 한미하지만 외척이면서 똑똑한 노론 가문인 풍산 홍씨를 두루 중용한다. 풍산 홍씨의 수장 홍봉한은[24] 종9품 말직에서 7년만에 종2품 훈련도감의 훈련대장으로 진급을 거쳐 좌상, 영상을 역임하며 조정 최고의 권신이 되었다. 이것이 정조 즉위 후 홍국영 등의 집권 배경이 됐으며 세도정치의 물꼬를 터서 조선이 멸망 테크를 제대로 타게 만든다.
1728년(영조 4년) 이인좌의 난 이후에 상술했듯 노론과 소론의 온건파만 남자 붕당의 의미가 많이 퇴색되었고 조정에서 쌍거호대는 사라졌으며, 온건파들만 모인 탕평당의 1당 독재가 되고 말았다. 겉으론 붕당이 유지되고 있지만 실상은 탕평당의 독주가 이어졌다. 이렇게 왕에게 아부하는 예스맨의 탕평당들이 조정을 채우면서 정치 안정을 이루게 되었고 붕당은 남아있었지만 사실상 탕평당을 위한 1당이었기에 왕에게 아부하는 무리라서 당색이나 의리를 내세우지 않았다.
영조는 정비인 정성왕후 서씨가 당시로서는 꽤 장수한 64세에 사망한 후에도 생존해있었기 때문에 그래서 새 장가를 들어야 했다. 이 때 계비로 들어온 사람이 정순왕후 김씨. 영조는 조강지처 정성왕후의 친족인 대구 서씨 일족은 본체 만체 했지만, 정순왕후의 일족인 경주 김씨 처족들을 중용했다. 그래서 정순왕후의 오빠인 김귀주 등이 실세로 잠깐 얼굴을 들이밀기도 했다. 김귀주는 너무 기분을 낸 나머지 실세 홍봉한까지 목을 날리려다 실패하여 영조의 분노를 사서 함경도 이원으로 유배간 일도 있었다. 김귀주는 유배가 풀린 후 화완옹주의 양자 정후겸, 홍봉한의 동생 홍인한 등과 연합한 홍봉한을 견제하기 위해 김종수 등과 함께 청명당을 이뤄 맞서기도 했다.
1.5. 임오화변
그러던 중 마침내 친아들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둬 죽이는 희대의 대사건이 터진다. 이게 바로 한국 역사상 손꼽히는 비극 중 하나인 임오화변이다. 이때부터 영조는 치매 증상이 나타나면서 오락가락하는 행태가 보이기 시작한다.<colbgcolor=#bf1400> 임오화변을 다룬 KBS 〈한국사전〉 방송 영상 |
또한 무수리 출신 후궁 소생인 자신의 출신을 극복하기 위해[25] 사실상 유일한 후계자였던 아들 사도세자의 교육에 너무 열중한 나머지 사도세자를 지나칠 정도로 신하들 앞에서 질책하고 닦달하며 학대했다. 영조는 사도세자에게 매일 같이 "너는 왜 이거밖에 안 되냐"는 식으로 계속 몰아붙이기만 했고, 이를 견딜 수 없었던 사도세자는 시름시름 앓기까지 했다. 영조는 완전히 신용할 만한 상태도 아닌 아들에게 정사를 맡기고, 대리청정이라는 미명하에 뒷방으로 잠깐 물러나 있었지만 그렇다고 참견을 멈춘 것도 아니었다. 신하들과 조금이라도 부딪히거나 무시당했다는 생각이 들면 사도세자에게 양위를 하겠다고 난리를 쳤고, 이에 사도세자는 잘못한 것도 없이 영조의 침전 앞에서 전교를 거두어달라며 엎드린 채 석고대죄를 반복해야 했다. 이러면서도 영조는 사도세자에 대한 간섭과 질책을 멈추지 않았으며, 나중에는 사도세자를 자신의 자식이기보단 신하로 취급하며 학대하기에 이르렀다. 보다못한 사도세자를 가르치는 서연관 스승들과 신하들이 영조에게 세자를 잘 대해달라고 간청했으나[26], 영조는 오히려 화를 내면서 신하들의 간청조차 듣지 않고 계속해서 세자를 핍박했다.
결국 부왕의 가혹한 학대를 견디지 못한 사도세자는 끝내 미쳐버려서 대낮에 내관과 종들을 죽이거나 궁녀들을 겁탈하는 등, 세자로서 절대 보여서는 안될 온갖 범죄를 저지르기에 이르렀다. 사도세자의 이런 범죄 행각을 알고 격분한 영조는 끝내 정신병자가 된 아들에게 왕위를 물려줄 생각을 완전히 포기하고, 후계자로서 모자람이 없는 세손 정조에게 왕위를 물려주기로 결심하며 이에 방해만 되는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둬 죽이고 만다. 문제는 이 일이 정치적 보복을 두려워 한 신하들로부터 안 받아도 될 견제[27]까지 받게 만들었다는 것. 사실 정조는 정통성으로 보나[28] 자질로 보나[29] 왕위를 물려받기에 모자람이 없는 인물이긴 하다. 하지만 사도세자의 죽음 이후 몇몇 대신들은 과거에 일어났었던 폐비 윤씨와 관련된 연산군의 갑자사화를 기억하면서, 정조도 아버지의 복수를 위해 자신들을 숙청할 거라고 지레 겁을 먹어 선제적으로 견제하기 시작했다. 다만 영조 본인은 처음부터 세손만이 자신의 유일한 후계자임을 천명했고, 정조에게 자신이 왕세제 책봉 때 입었던 옷을 친히 입히는 등, 손자의 왕위 계승을 위해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다만 아무리 정치가 부자지간끼리도 서로 죽고 죽이는 것이라지만, 임오화변 건은 당시로서도 매우 불편하고 큰 흠이 될 행동이었다. 그렇게 아꼈던 손자 정조에게도 가혹하기 그지없었던 일이라는 건 말할 필요도 없다.[30]
임오화변 이후 영조는 정국 운영에서 사도세자에 관한 조금의 문제 제기도 받아들이지 않는 등 강경하게 대했고, 이에 반발하는 신하들을 친국[31]하고 죽이느라 당파 몇이 날아갈 정도로 강경일변도로 날이 선 태도를 보였다. 임오화변은 훗날 정조가 본의 아니게 세도정치의 씨앗을 남기는 직접적인 원인이 된다.
1.6. 집권 말기, 사망
사도세자가 죽은 이후 영조는 세손(정조)을 정식 동궁(東宮, 세자/세손 등 차기 왕위계승자)으로 삼았고 그를 후계자로 보호했다. 영조는 말년에 몇 달마다 영의정을 갈아치우는 등[32] 더 외골수적이고 변덕스러운 면모를 자주 보였으며 동시에 수천 명의 백성을 만나보는(격쟁) 등 여러 가지 행보를 이어갔으나 뚜렷한 업적은 잘 보이지 않는다.한편 풍산 홍씨는 자신들의 외손자인 세손을 당연히 보호하며 자신들이 후원자임을 자처했는데 상황이 반전되기 시작한다. 김종수, 심환지를 비롯한 노론의 젊은 선비들이 소위 청명당(淸明黨)이란 그룹을 이뤄 성리학에서 엄히 금지하는 척신 정치를 청산하고 건전한 붕당으로 돌아갈 것을 촉구하며 정치 세력화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들이 손을 잡은 것이 척신이되 깨끗한 척신을 자처하는 경주 김씨로 대표적 인물은 정순왕후의 오라비인 김귀주 등이었다.
풍산 홍씨는 세손이 자라나면서 자신들에게 등을 돌리는 모습을 보이자 매우 불안해하며 보험으로 사도세자의 서자들인 삼왕손(三王孫)[33]에게 연줄을 대고 있었다. 홍봉한은 경주 김씨들이 꽤 성장했다고 판단하고 그들과 공존을 꾀하려고 영조에게 경주 김씨를 중용할 것을 청하지만 영조는 "우리 마누라가 어질어서 안 된다."[34]라고 거부했고 얼마 후 홍봉한은 천거를 많이 한다는 이유로 1770년(영조 46년)에 십수 년간 지켜온 권좌에서 쫓겨난다.
이에 빡친 홍봉한(북당)과 김귀주(남당) 측 간의 치열한 정쟁이 벌어졌고, 이 와중에 왕손들(은언군, 은신군)이 유배를 가는 등 정국은 혼란해졌다. 그러나 김귀주가 홍봉한을 치는 탄핵 상소를 올린 것을 읽은 영조가 저 난장판이 다 김씨와 홍씨간의 정쟁이었다는 것을 알았고, 열받은 나머지 청명당과 경주 김씨를 모조리 싹다 유배보낸다. 이 싸움으로 풍산 홍씨와 경주 김씨 모두 타격을 입었는데 이 권력 공백기를 틈타 조정을 장악한 것이 홍봉한의 동생 홍인한과 화완옹주의 양자 정후겸이었다.
1768년(영조 44년)에 노론 대신인 김약행이 칭제를 하자는 상소를 올린 적이 있지만 거부했다. 1760년대 후반이면 청나라는 건륭제 치세 중반으로 역사상 국력이 최정점을 찍었던 시절이다. 혹여 칭제(稱帝, 황제국가로 호칭)한 것이 들켰더라면 정묘호란, 병자호란에 이은 호란 시즌3가 될 수도 있었다. 애초에 훗날 고종이 대한제국을 세운 것도 대국인 청나라가 아편전쟁, 청일전쟁에서의 패전으로 국제적 위상이 저 밑, 나락으로 떨어졌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在魯又曰: "頃日觀象監燕貿冊子及測候器、千里鏡與圖內入之後, 冊子半帙還下, 半帙不下, 鏡與圖、器, 各有用處而未下矣" 上曰: "所謂窺日影, 雖云有功於察見日食, 而直見日光本非美事。 蔡京視日不瞬, 知其爲小人, 今名之曰窺日, 則不逞之徒窺上之象也, 已命碎之, 冊與圖亦已洗草矣。" 諸臣皆贊歎。
김재로가 또 말하기를,
"지난번 관상감(觀象監)에서 연경(燕京)에서 무역(貿易)해 온 책자(冊子) 및 측후기(測候器)·천리경(千里鏡)·지도(地圖) 등을 안으로 들여간 후, 책자는 반질(半帙)만 다시 내려 보내고 반질은 내려 보내지 않았으며, 천리경 및 지도, 측우기는 각기 쓸 곳이 있는데도 내리지 않았습니다."
하니, 상(上)이 말하기를,
"이른바 규일영(窺日影)이란 것이 비록 일식(日食)을 살펴보는 데는 공효(公效)가 있으나 곧바로 일광(日光)을 보는 것은 본디 아름다운 일이 아니다. 채경(蔡京)은 해를 보고도 눈을 깜박거리지 않았으니 그가 소인(小人)임을 알겠는데 이제 이름하기를 ‘규일영’이라 하면 좋지 못한 무리들이 위를 엿보는 기상(氣象)이 되는 것이므로 이미 명하여 깨버렸고, 책과 지도도 역시 세초(洗草)해 버렸다."
하니, 여러 신하들이 모두 찬탄(贊歎)하였다.
《영조실록》 61권, 영조 21년(1745년, 을축) 음 5월 12일자 기사
왕권에 대한 도전을 조금이라도 억제하려는지 재위 후반에 중국에서 들여온 망원경 등 각종 천체 관측 장비들을 파기하고 자료를 없앤 일도 있다. 단, 파기한 것은 천체 관측용 망원경이고 《승정원일기》를 보면 지상 관측용 망원경은 군사용으로 사용을 계속 허락한 것으로 보인다. 1770년(영조 46년, 경인) 음4월 5일 《승정원일기》 기사에서 태양의 흑점을 망원경으로 관측한 결과에 대해 관상감 관원에게 물어보는 내용이 나오기도 한다. 저 사건에 대해 《승정원일기》에서는 망원경의 성능이 좋지 못해서 부쉈다는 말도 함께 나와 규일경을 부순게 천체 관측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을 해서 한 일인지 아니면 성능이 마음에 들지 않아 한 일인지 불확실하다는 주장도 있다.김재로가 또 말하기를,
"지난번 관상감(觀象監)에서 연경(燕京)에서 무역(貿易)해 온 책자(冊子) 및 측후기(測候器)·천리경(千里鏡)·지도(地圖) 등을 안으로 들여간 후, 책자는 반질(半帙)만 다시 내려 보내고 반질은 내려 보내지 않았으며, 천리경 및 지도, 측우기는 각기 쓸 곳이 있는데도 내리지 않았습니다."
하니, 상(上)이 말하기를,
"이른바 규일영(窺日影)이란 것이 비록 일식(日食)을 살펴보는 데는 공효(公效)가 있으나 곧바로 일광(日光)을 보는 것은 본디 아름다운 일이 아니다. 채경(蔡京)은 해를 보고도 눈을 깜박거리지 않았으니 그가 소인(小人)임을 알겠는데 이제 이름하기를 ‘규일영’이라 하면 좋지 못한 무리들이 위를 엿보는 기상(氣象)이 되는 것이므로 이미 명하여 깨버렸고, 책과 지도도 역시 세초(洗草)해 버렸다."
하니, 여러 신하들이 모두 찬탄(贊歎)하였다.
《영조실록》 61권, 영조 21년(1745년, 을축) 음 5월 12일자 기사
영조 본인 스스로가 즉위 49년, 80세 때 본인의 치적을 정리한 '어제문업(御製問業)'이라는 시가 전한다. 이 시에 따르면 본인이 생각한 여섯 가지 치적은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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八旬事業 若問於予80살 동안의 사업을 만약 내게 묻는다면
心窃靦然 其何以答
부끄러운 마음이 들어 무엇이라 답해야 할까?
一則蕩平 自恧二字
첫번째는 탕평이지만, 스스로 그 두 글자가 부끄럽다.[35]
二則均役 效流緇徒
두번째는 균역으로, 승려에게까지 그 효과가 미쳤다.
三則濬川 可垂萬歲
세번째는 준천으로, 만세동안 (공이) 드리우리라.
四則復古 婢類皆閑
네번째는 복고[36]로, 여종들이 모두 한가롭도다.
五則叙衆 子光後初
다섯째는 서중[37]으로, 유자광 이후 처음이다.
六則昨政 卽大典法
여섯째는 작정[38]으로, 바로 대전의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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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문업 전문
한편 영조는 즉위 51년 쯤인 1775년(영조 51년)경에 건강이 갈수록 악화되자 세손인 정조에게 대리청정을 맡기려 했으나 정조의 반대파인 홍인한이 반대하면서 우여곡절을 겪기도 했다.
이때 상(上)의 연세가 이미 대질(大耋)에 올라 몸에 병이 해마다 더 많아지니[39] 조용히 조섭을 하는 중에 늘 군국(軍國)의 여러 가지 일들로 근심하였다. 이해 10월 7일에 연화문(延和門)에서 상참(常參)을 행하였는데, 담후(痰候)가 매우 심하여 여러 신하들이 감히 일을 아뢰지 못하고, 임금은 곧 대궐로 돌아와서 왕세손에게 하교하기를,
"지난 여름 너에게 명례궁(明禮宮)의 일을 살펴보도록 명하였는데, 이는 비록 작은 일이지마는 궁부(宮府)와 다를 것이 없다. 근래의 대소 사전(祀典)에 꼭 너를 시켜 대신 섭행(攝行, 섭정)하게 한 것은 내가 깊이 생각한 것이다. 오늘 나의 근력(勤力)을 시험하여 보려고 하나, 스스로 버틸 방도가 전연(前然) 없다. 어린 세손이 숙성(熟成)하여 나를 지성(智誠)으로 섬기니, 결단코 나의 소망을 저버리지 않을 것이다. 이때를 당하여 기무(機務)를 대신 듣게 한다면 내 생전에 친히 볼 수 있을 터이니, 어찌 빛나고 아름답지 않겠느냐?"
하니, 왕세손이 감히 대답하지 못하였다. 이 때에 이르러 시임 대신·원임 대신이 집경당에서 입시(入視, 임종을 들어가 지켜 봄)하였는데, 상(上)이 이르기를,
"근래 나의 신기(神氣)가 더욱 피로(疲怒)하여 한 가지의 공사(公事)를 펼치는 것도 역시 수응하기가 어렵다. 이와 같고서야 만기(萬幾)를 처리할 수 있겠느냐? 국사(國事)를 생각하니 밤에 잠을 이룰 수 없은 지가 오래 되었다. 어린 세손이 노론이나 소론을 알겠으며 남인이나 소북(小北)을 알겠는가? 국사를 알겠으며, 조정 일을 알겠는가? 병조판서를 누가 할 만한가를 알겠으며 이조판서를 누가 할 만한가를 알겠는가? 이와 같은 형편이니 종사(宗社)[40]를 어디에 두겠는가? 옛날 나의 황형(皇兄)께서는 ‘세제(世弟)가 가한가? 좌우의 신하가 가한가?’라는 하교(下敎)를 내리셨는데, 오늘의 시기는 더욱 황형(皇兄)의 시기보다 더할 뿐만이 아니다. 두 자[41]를 하교하려 하나 어린 세손의 마음을 크게 상하게 할까 두렵다. 청정(聽政)에 있어서는 우리 왕조(王朝)의 고사(故事)가 있는데, 경(卿) 등의 의향은 어떠한가?"
하니, 적신(賊臣) 홍인한(洪麟漢)이 앞장서서 대답하기를,
"동궁(東宮)께서는 노론과 소론을 알 필요가 없으며, 이조판서와 병조판서를 알 필요가 없습니다. 조정의 일에 이르러서는 더욱이 알 필요가 없습니다."
하였다. 상(上)이 한참 동안 흐느껴 울다가 기둥을 두드리며, 이르기를,
"경(卿) 등은 우선 물러가 있거라."
하니, 대신 이하가 문 밖으로 나갔다. 다시 입시(入視)를 명하고, 상(上)이 이르기를,
"나의 사업(事業)을 장차 나의 손자에게 전할 수 없다는 말인가? 나는 이와 같이 쇠약해졌을 뿐 아니라 말이 헛나오고 담이 끓어 오르는 것[42]이 또 특별한 증세이니, 크게는 밤중에도 쪽지[寸紙]를 내보내어 경 등을 불러 들이게 될 것이고 작게는 담(膽)의 증세가 악화되어 경 등이 비록 입시하더라도 영의정이 누군지 좌의정이 누군지 알지 못하는 것이다. 만일 중관(中官)들을 쫓아내 버리면 나라의 일이 장차 어떻게 되겠는가? 마음 속에 있는 말을 지금 다시 경(卿) 등에게 말할 수가 없다. 차라리 과인의 손자로 하여금 나의 심법(心法)을 알게 하겠다. 이 다음부터 동궁(東宮)이 소대할 때에는 《자성편》과 《경세문답》을 진강(進講)하여 다만 나의 사업(事業)을 알려서 후세로 하여금 나의 마음을 모르지 않게 하라."
하였다.
신(臣)이 삼가 살펴보건대, 옛날의 성인은 장차 천하를 다른 사람에게 전하기 위하여 반드시 천하를 다스리는 법까지 전하여 주었으니, 대순(大舜)이 전한 정일 집중(精一執中)의 훈계가 이것이다. 다만 이 두 편의 어제(御製)는 곧 우리 성조(聖祖)께서 50년 동안 몸소 실천하고 마음에 체득한 것을 모훈(謨訓)으로 삼는 글을 내놓아 우리 성상(聖上)에게 넘겨 주었으니, 부탁의 친절함과 주고 받음의 광명(光明)은 참으로 훌륭하였다. 아! 성상(聖上)께서 수고로움을 쉬시고 조용히 조섭을 하시는 때를 당하여 종사(宗社)[43]가 의지할 것이나 신민(臣民)이 바라는 바가 오직 우리 왕세손뿐인데, 국사나 조정(朝政)을 우리 세손께서 알지 못하면 누가 알아야 하겠는가? 또 더군다나 실패한 아버지의 대를 이은 적자로서 떳떳한 직분인 대리 청정(代理聽政)하는 것은 열성(列聖)의 고사(故事)에 있는 것이겠는가? 진실로 국사(國事)에 몸담은 대신이 있다면, 본디 명령하지 않아도 뜻을 받들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아! 저 적신은 보필(輔弼)하는 지위에 있으면서 임금(영조)의 간곡하신 하교를 듣고도 오만하게 감동하지 않을 뿐 아니라 이내 감히 공공연히 드러내놓고 저희(沮戱)하여 그 말이 비할데 없이 아주 극도로 패악(稗惡)하여 신하의 례(禮)를 회복할 수가 없었다. 우리 성상(聖上)께서 부탁하고 수수(授受)하신 고심(苦心)과 대계(大計)로 하여금 달포(한달이 좀 지나는 시간)가 지나도록 시간을 끌게 해서 막고 시행하지 못하게 하였다. 그가 안팎으로 체결(締結)하고 앞뒤로 선동(煽動)한 죄를 살펴보면 우선 그 죄는 셀 수 없을 정도인데, 곧 이 하나의 연주(筵奏)를 가지고 보더라도 반역하려는 마음이 드러난 것이요, 역적의 죄안(罪案)이 갖추어진 것이다. 조진(朝診) 때에 홍씨가 ‘세 가지 알 필요가 없다는 말[三不必知說]’로써 상(上)에게 우러러 대답하였는데 혜경궁(惠慶宮)께서 이 말을 듣고 작은 종이에 써서, 반드시 수고를 덜고자 하는 성상(聖上)의 뜻이라고 자세하고도 간곡한 하교(下敎)를 홍인한에게 통지하였으나, 그가 석연(夕筵)에 이르기까지도 주대(奏對)한 것은 조진(朝診) 때와 같았다. 아! 만일 홍인한이 과연 성상(聖上)의 본뜻을 알지 못하고 조금도 딴마음이 없었다면 ‘세 가지 알 필요가 없다’는 말은 신자(臣子)로서 감히 입에서 나올 것이 아닌 것이다. 그런데 조진(朝診) 때에 대답한 것은 그래도 임금의 마음을 알지 못하고 당황한 마음을 미봉하려고 하였다는 핑계를 댈 수도 있다. 그러나 마침내 혜경궁의 글을 본 뒤에 입시(入視)하여 주대(奏對)한 것도 또다시 전과 같았으니, 조진 때엔 비록 임금의 마음을 알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이미 알고 난 뒤에도 그 말이 똑 같았다면 그에게 과연 딴 마음이 없었겠는가? 이런 까닭으로 홍인한 일당이 이 일에 대하여 발명(發明)하려고 하였으나 참으로 수고를 덜고 싶어하는 성상(聖上)의 뜻임을 몰랐다고 하는 등의 말에 이르러서는 오히려 감히 내어놓고 공공연히 말하지 못한 이것은, 그날의 글로써 알린 뒤에도 오히려 다시 사실(事實)과 배치(背馳)되었기 때문이다. 그가 먹은 마음의 자취(自取)가 나타난 것이 이와 같았으니 비록 그들이 생사(生死)를 같이하는 당(黨)으로 하여금 변명하게 하더라도 그 사이에 딴 뜻이 없었다고 감히 말하겠는가?
《영조실록》 125권, 영조 51년(1775년) 11월 20일 계사 1번째기사
"지난 여름 너에게 명례궁(明禮宮)의 일을 살펴보도록 명하였는데, 이는 비록 작은 일이지마는 궁부(宮府)와 다를 것이 없다. 근래의 대소 사전(祀典)에 꼭 너를 시켜 대신 섭행(攝行, 섭정)하게 한 것은 내가 깊이 생각한 것이다. 오늘 나의 근력(勤力)을 시험하여 보려고 하나, 스스로 버틸 방도가 전연(前然) 없다. 어린 세손이 숙성(熟成)하여 나를 지성(智誠)으로 섬기니, 결단코 나의 소망을 저버리지 않을 것이다. 이때를 당하여 기무(機務)를 대신 듣게 한다면 내 생전에 친히 볼 수 있을 터이니, 어찌 빛나고 아름답지 않겠느냐?"
하니, 왕세손이 감히 대답하지 못하였다. 이 때에 이르러 시임 대신·원임 대신이 집경당에서 입시(入視, 임종을 들어가 지켜 봄)하였는데, 상(上)이 이르기를,
"근래 나의 신기(神氣)가 더욱 피로(疲怒)하여 한 가지의 공사(公事)를 펼치는 것도 역시 수응하기가 어렵다. 이와 같고서야 만기(萬幾)를 처리할 수 있겠느냐? 국사(國事)를 생각하니 밤에 잠을 이룰 수 없은 지가 오래 되었다. 어린 세손이 노론이나 소론을 알겠으며 남인이나 소북(小北)을 알겠는가? 국사를 알겠으며, 조정 일을 알겠는가? 병조판서를 누가 할 만한가를 알겠으며 이조판서를 누가 할 만한가를 알겠는가? 이와 같은 형편이니 종사(宗社)[40]를 어디에 두겠는가? 옛날 나의 황형(皇兄)께서는 ‘세제(世弟)가 가한가? 좌우의 신하가 가한가?’라는 하교(下敎)를 내리셨는데, 오늘의 시기는 더욱 황형(皇兄)의 시기보다 더할 뿐만이 아니다. 두 자[41]를 하교하려 하나 어린 세손의 마음을 크게 상하게 할까 두렵다. 청정(聽政)에 있어서는 우리 왕조(王朝)의 고사(故事)가 있는데, 경(卿) 등의 의향은 어떠한가?"
하니, 적신(賊臣) 홍인한(洪麟漢)이 앞장서서 대답하기를,
"동궁(東宮)께서는 노론과 소론을 알 필요가 없으며, 이조판서와 병조판서를 알 필요가 없습니다. 조정의 일에 이르러서는 더욱이 알 필요가 없습니다."
하였다. 상(上)이 한참 동안 흐느껴 울다가 기둥을 두드리며, 이르기를,
"경(卿) 등은 우선 물러가 있거라."
하니, 대신 이하가 문 밖으로 나갔다. 다시 입시(入視)를 명하고, 상(上)이 이르기를,
"나의 사업(事業)을 장차 나의 손자에게 전할 수 없다는 말인가? 나는 이와 같이 쇠약해졌을 뿐 아니라 말이 헛나오고 담이 끓어 오르는 것[42]이 또 특별한 증세이니, 크게는 밤중에도 쪽지[寸紙]를 내보내어 경 등을 불러 들이게 될 것이고 작게는 담(膽)의 증세가 악화되어 경 등이 비록 입시하더라도 영의정이 누군지 좌의정이 누군지 알지 못하는 것이다. 만일 중관(中官)들을 쫓아내 버리면 나라의 일이 장차 어떻게 되겠는가? 마음 속에 있는 말을 지금 다시 경(卿) 등에게 말할 수가 없다. 차라리 과인의 손자로 하여금 나의 심법(心法)을 알게 하겠다. 이 다음부터 동궁(東宮)이 소대할 때에는 《자성편》과 《경세문답》을 진강(進講)하여 다만 나의 사업(事業)을 알려서 후세로 하여금 나의 마음을 모르지 않게 하라."
하였다.
신(臣)이 삼가 살펴보건대, 옛날의 성인은 장차 천하를 다른 사람에게 전하기 위하여 반드시 천하를 다스리는 법까지 전하여 주었으니, 대순(大舜)이 전한 정일 집중(精一執中)의 훈계가 이것이다. 다만 이 두 편의 어제(御製)는 곧 우리 성조(聖祖)께서 50년 동안 몸소 실천하고 마음에 체득한 것을 모훈(謨訓)으로 삼는 글을 내놓아 우리 성상(聖上)에게 넘겨 주었으니, 부탁의 친절함과 주고 받음의 광명(光明)은 참으로 훌륭하였다. 아! 성상(聖上)께서 수고로움을 쉬시고 조용히 조섭을 하시는 때를 당하여 종사(宗社)[43]가 의지할 것이나 신민(臣民)이 바라는 바가 오직 우리 왕세손뿐인데, 국사나 조정(朝政)을 우리 세손께서 알지 못하면 누가 알아야 하겠는가? 또 더군다나 실패한 아버지의 대를 이은 적자로서 떳떳한 직분인 대리 청정(代理聽政)하는 것은 열성(列聖)의 고사(故事)에 있는 것이겠는가? 진실로 국사(國事)에 몸담은 대신이 있다면, 본디 명령하지 않아도 뜻을 받들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아! 저 적신은 보필(輔弼)하는 지위에 있으면서 임금(영조)의 간곡하신 하교를 듣고도 오만하게 감동하지 않을 뿐 아니라 이내 감히 공공연히 드러내놓고 저희(沮戱)하여 그 말이 비할데 없이 아주 극도로 패악(稗惡)하여 신하의 례(禮)를 회복할 수가 없었다. 우리 성상(聖上)께서 부탁하고 수수(授受)하신 고심(苦心)과 대계(大計)로 하여금 달포(한달이 좀 지나는 시간)가 지나도록 시간을 끌게 해서 막고 시행하지 못하게 하였다. 그가 안팎으로 체결(締結)하고 앞뒤로 선동(煽動)한 죄를 살펴보면 우선 그 죄는 셀 수 없을 정도인데, 곧 이 하나의 연주(筵奏)를 가지고 보더라도 반역하려는 마음이 드러난 것이요, 역적의 죄안(罪案)이 갖추어진 것이다. 조진(朝診) 때에 홍씨가 ‘세 가지 알 필요가 없다는 말[三不必知說]’로써 상(上)에게 우러러 대답하였는데 혜경궁(惠慶宮)께서 이 말을 듣고 작은 종이에 써서, 반드시 수고를 덜고자 하는 성상(聖上)의 뜻이라고 자세하고도 간곡한 하교(下敎)를 홍인한에게 통지하였으나, 그가 석연(夕筵)에 이르기까지도 주대(奏對)한 것은 조진(朝診) 때와 같았다. 아! 만일 홍인한이 과연 성상(聖上)의 본뜻을 알지 못하고 조금도 딴마음이 없었다면 ‘세 가지 알 필요가 없다’는 말은 신자(臣子)로서 감히 입에서 나올 것이 아닌 것이다. 그런데 조진(朝診) 때에 대답한 것은 그래도 임금의 마음을 알지 못하고 당황한 마음을 미봉하려고 하였다는 핑계를 댈 수도 있다. 그러나 마침내 혜경궁의 글을 본 뒤에 입시(入視)하여 주대(奏對)한 것도 또다시 전과 같았으니, 조진 때엔 비록 임금의 마음을 알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이미 알고 난 뒤에도 그 말이 똑 같았다면 그에게 과연 딴 마음이 없었겠는가? 이런 까닭으로 홍인한 일당이 이 일에 대하여 발명(發明)하려고 하였으나 참으로 수고를 덜고 싶어하는 성상(聖上)의 뜻임을 몰랐다고 하는 등의 말에 이르러서는 오히려 감히 내어놓고 공공연히 말하지 못한 이것은, 그날의 글로써 알린 뒤에도 오히려 다시 사실(事實)과 배치(背馳)되었기 때문이다. 그가 먹은 마음의 자취(自取)가 나타난 것이 이와 같았으니 비록 그들이 생사(生死)를 같이하는 당(黨)으로 하여금 변명하게 하더라도 그 사이에 딴 뜻이 없었다고 감히 말하겠는가?
《영조실록》 125권, 영조 51년(1775년) 11월 20일 계사 1번째기사
이들은 영조가 자신들에게 적대적인 세손 정조에게 대리청정을 승계하는 것을 저지하려 했으나 정순왕후 김씨가 오히려 세손을 지원 사격하고 홍국영, 서명선, 정민시 등의 정조의 측근들이 홍인한을 탄핵했다. 영조는 이를 받아들여 정조에게 임명권과 군대를 움직일 수 있는 병권을 직접 넘겨주었고 정조는 무사히 대리청정을 시작할 수 있었다. 그 덕분에 정조는 죄인의 아들[44]이었어도 효장세자의 양자로 입적하여 탈없이 즉위할 수 있었다.
그리고 3달 후인 1776년(영조 52년) 음3월 5일 묘시(아침 6시경) 영조는 경희궁 집경당에서 승하하였다. 사망하기 전 피가 섞인 가래침과 구토를 자주했다는 증상으로 보아 일종의 폐렴으로 인한 사망인 듯 하다.
영조 사후 정조의 왕위 승계를 방해하려 했던 홍인한, 정후겸은 즉위 이후 처형당했고, 김관주는 순조 때 정순왕후가 수렴청정을 할 당시 우의정에 올라 신 안동 김씨들을 견제하려다 실패해 함경도 북청으로 유배가다가 사망했다. 홍봉한은 정조의 등극과 함께 새로 떠오른 척신 홍국영 덕에 실각에도 불구하고 목숨을 부지했다. 잠시 풍산 홍씨 세도 정치를 기획, 획책한 홍국영 역시 정조에게 숙청당하며 척신 정치는 수면 아래로 가라앉나 싶던 찰나에 정조가 어린 아들 순조를 위해 김조순으로 대표되는 신 안동 김씨 세도 세력을 끌어들이면서 세도정치의 서막이 오른다.[45][46]
태조(조선)와 같이 장수한 왕이다.
1.7. 사후
본래 묘호는 '영종(英宗)'이었으나 1889년(고종 29년)에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묘호, '영조(英祖)'로 고쳤다. 때문에 《영조실록》의 표지엔 '영종대왕실록(英宗大王實錄)'이라 적혀있다.(선종 → 선조와 마찬가지) 참고로 영종의 "영"(英)은 생전에 영조 본인이 골라 둔 묘호이다.[47]1897년,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해 종묘제도를 칠묘제로 개선한 후 영조를 칠묘에 배향하였다.
수명과 재위 기간 외에 영조가 세운 기네스가 하나 더 있는데, 역대 조선 국왕 중 가장 정식 시호가 긴 임금[48]이다.
정식 시호는 '영조장순지행순덕영모의열장의홍륜광인돈희체천건극성공신화대성광운개태기영요명순철건건곤녕배명수통경력홍휴중화융도숙장창훈정문선무희경현효대왕(英祖莊順至行純德英謨毅烈章義洪倫光仁敦禧體天建極聖功神化大成廣運開泰基永堯明舜哲乾健坤寧配命垂統景曆洪休中和隆道肅莊彰勳正文宣武熙敬顯孝大王)'. 총 70자다. 그야말로 시호에 쓰는 글자들 중 좋은 글자는 거의 다 가져다 붙였다. 성군의 대명사로 알려진 요(堯)와 순(舜)의 이름까지 들어가 있을 정도니 말 다한 셈이다.
<colbgcolor=#bf1400> 원릉 |
정조가 사도세자를 죽인 영조를 증오해서 일부러 파묘자리에 묻었다는 주장이 있는데 이는 짜맞추기식 음모론이다. 효종의 파묘자리인 것은 사실이나[50] 실록[51]을 보면 관련 논의에 대한 확인이 가능하다. 또한 산릉도감의궤를 비롯한 당시 사료를 확인한 논문에서는 '영조가 생전에 고른 묫자리가 '장년갑피지법'상 쓸 수 없는 자리라는 것을 정조가 뒤늦게 알았고 (분노한 정조는 담당자를 처벌했다.[52])다른 후보지를 급히 찾았으나 시간이 부족했다'고 밝히고 있다. 영조가 승하한 지 이미 1개월이 지난 상황이었고, 계속해서 후보지를 물색했으나 지관들의 의견이 갈리고 있었다. 이 상황에서 정조는 지관들의 의견이 일치하는 가장 나은 대안을 찾은 것이다.정조가 후보지로 고려한 곳으로는 영조의 생모(生母) 숙빈 최씨의 소령원(昭寧園)이 있다.
[1] 오른쪽 부분이 소실되었는데 부산 용두산 대화재 당시에 불에 탔기 때문이다.[2] 상황을 볼 때, 이유없는 꼬장이라기보다는 이유가 있는 분노이기도 했고.[3] 참고로 선조 시절에는 정철이 아들을 세자로 삼을 것(건저 문제)을 건의했다가 "내가 아직 젊은데 이게 장난하냐?"라고 처참히 개박살이 났고, 후일 홍국영도 정조 시절에 양자를 제멋대로 들이고 국정을 무단으로 전횡 하다가 끝장났다.[4] 《경종실록》에서는 세제에게 경종이 '차마 들을 수 없는 하교'를 내렸다고 나온다. 이는 왕이 부적절하게 쌍욕을 했을 때 《조선왕조실록》에서 쓰는 일종의 필터링이다.[5] 경종이 죽은 해인 1724년.[6] 1755년 신치운의 심문 과정에서 나온 말. 헌데 이 말은 1725년 이천해의 공초에서 영조가 '음참하여 차마 들을 수 없는 말이어서 입에 담을 수가 없으니 좌우의 사관은 쓰지 말아야 한다'라고 하여 기록되지 못했던 말과 같다고 한다. 그 때는 즉위 초의 대사건이라 사관도 어지간히 겁이 났는지 '그 말이 아주 흉참하기 때문에 차마 초책에 쓸 수가 없었습니다'라고 설설 기었다.[7] 영화 <사도>에서 잘 구현해냈는데 국문에 끌려온 죄인 하나가 "경종대왕을 독살한 당신이 어찌 왕이란 말이오!"라며 소리치자 영조가 "25년이나 지났는데 지겹지도 않냐"라며 죄인 2명의 입을 찢으라 명령하는 장면이 나온다. 국문이 끝난 후에 영조가 귀를 물로 씻는 장면이 나오는데 사형을 꺼렸던 영조가 입까지 찢으라 했으니 본인도 정통성 문제만큼은 어지간히 스트레스 받았던 모양이다.[8] 이상하게도 조선 초 사육신을 빼면 《세조실록》에 따르면 사육신조차도 역모 혐의로 체포된 혐의자들은 자기 죄를 시인하며 고분고분하게 굴어 고통이라도 줄여보고자 했는데 조선 후기로 가면서 친국에서도 개기는 사람들이 늘었다. 1755년 나주 괘서 사건 이전에도 "김일경의 상소를 보고서야 충성이고 뭐고 충신이 누군지 알게 되었다. 누구 마음대로 우리를 역적이라고 하냐?"고 왕에게 바락바락 달려드는 사건도 있었고 김일경도 매를 맞으면서도 눈을 부릅뜨고 자신의 무죄를 조목조목 따지며 항변했다. 정조 시기에는 아예 스스로를 "신(臣)"이라 칭하지 않고 "나"라고 칭하면서 정조를 왕 대우 안하고 개기는 죄인들도 있을 정도였다.[9] https://sillok.history.go.kr/id/kta_10408021_001[10] 《영조실록》에 따르면 경종은 한동안 음식을 먹지 못하다가 게장과 감을 올리자 모처럼 식욕이 돋아 잘 먹었다고 한다. 게장과 감은 오늘날에도 음식 궁합 이야기할 때 최악의 궁합 중 하나로 자주 이야기되는 메뉴다. 좋게 생각하면 식욕이 없는 경종을 위해 맛있는 음식을 올리다 보니 음식 궁합을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고 볼 수 있지만 나쁘게 생각하면 병약한 경종에게 부담을 주기 위해 감과 게장을 올렸다고 볼 수도 있다.[11] 게장은 기본적으로 직접적 가열을 하지 않기 때문에 식중독이나 기생충 감염을 굉장히 주의해야 하는 음식이다. 게를 제대로 세척하지 않거나 게장에 쓰일 간장을 제대로 처리하지 않아 식중독에 걸리는 사람이 현대 한국에서도 나오고 있을 정도. 거기에다 고단백질, 고나트륨 음식이기까지 하니 게장은 소화력이 현격히 저하된 와병 중인 환자에게 먹일만한 음식은 아니다.[12] 삼부탕 자체는 왕실에서 자주 쓰이는 처방이다.[13] 부자는 잘만 쓰면 좋은 약이지만 흔히 사약의 원료로 추정되는 강한 독성을 지닌 식물이다. 지금도 해마다 제대로 처방없이 부자를 달여먹다가 죽는 사람이 간혹 나온다. 물론 임금에게 올려야 하니 당연히 어의들도 정성스레 추출하고 정제를 했겠다만 그 특유의 독 이미지 때문에 독살설 지지자들은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본 것은 자명한 일. 사약을 넣을 때 인삼을 넣었다는데 부자는 열을 받아야 최고로 활성화되기 때문이라고 한다.[14] 눈빛이 안정되고 콧등이 따뜻해졌다고 한다. 그러나 이는 인삼과 부자를 복용한 일시적인 효과일 뿐, 당장 시간이 지나면 원래 상태보다 더 심각해질 수도 있었다. 이를 본 영조 왈, "내가 약은 잘 몰라도 인삼과 부자가 양기를 회복시키는 것 정도는 안다."[15] 심지어 울다 지쳐 나가 떨어져서 사관에게 기록하지 말라는 말을 못한 바람에 소론과 준론들의 소위 참람한 언사가 《영조실록》에 적혔다.[16] 《천의소감》은 영조가 경종의 '왕세제(王世弟)'로 즉위할 때부터 나주 괘서 사건까지 정치적 사건의 전말을 기록해놓은 책이다. 책의 집필 목적이 영조의 정통성을 밝혀서 왕권의 안정화를 위한 작업이기 때문에 쉽게 말하자면 경종 독살설을 변론하기 위한 변명 가득한 책이다.[17] 그나마 숙종의 살아있는 아들이 연령군이야 일찍 죽었고 당시 경종과 영조가 유일했다. 이것만 아니었다면 적서에 대한 차별이 강했던 조선 사회에서 무수리의 아들을 왕으로 올리자는 이야기를 아무도 하지 않았을 정도였다.[18] 조선시대에는 후궁들도 양반 가문에서 선발하였고 궁인 중에서 되더라도 상궁-나인들은 상민 이상 계층에서 선발된다. 궁인의 잡역을 위해 고용된 무수리가 후궁이 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였다.[19] 그의 생모 숙빈 최씨가 과부였기 때문에 숙종의 아들이 아니라 최씨 전 남편의 아들이라는 것이다. 숙빈 최씨는 과부였다는 설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해당 사항이 없는 게 영조는 숙종과 숙빈 최씨 사이의 차남이었다. 장남은 일찍 사망. 일부 반대 세력들은 영조가 사실 숙종이 아니라 김춘택의 아들이라는 설마저 제기했다. 이런 의혹은 영조에게는 상당한 콤플렉스로 작용하였다.[20] 이인좌의 난 명목 중 큰 것이 바로 '당시 세제였던 주상(영조)이 선왕인 경종대왕께서 돌아가기 전에(한의학적으로 서로 상극이라 병자가 먹으면 죽음에 이를 수 있는 치명상을 입을 수 있다.) 상극이었던 생감과 간장게장을 진상해 올린 일이다. 그거 먹고 바로 돌아가셨다는 것에 의혹을 품고 명분을 내세워 대규모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21] 정사효는 경북 상주목사, 제주목사, 사헌부 지평, 경기도 도사, 강원도 관찰사, 승지, 전라도 관찰사를 역임한 인물로 상주목사 시절에는 우수 수령으로 뽑히기도 하였고 경기도에는 그의 선정을 기리는 선정비가 세워져 오늘날까지 남아 있으나 이인좌의 난에 연루되어 처형당했다.[22] 영조는 "이 미친 놈들이 숙종 시절의 남구만, 유상운까지 들먹이면서 헛소리를 해? 이 당론을 위해 이 책을 지었느냐? 태아검(왕권을 상징)이 누구에게 있는지 니들이 까먹었나 보지?"라는 일갈을 했다.[23] 애초에 영조가 천의소감이라는 책을 편찬한 것도 경종조의 역모에 연루된 자신을 신원하고 왕위 계승의 정통성을 바로 세우기 위한, 일종의 의리명변용으로 편찬한 것인데 노론이 분위기를 파악하지 못하고 천의소감을 자파의 의리를 세우는데 정치적으로 써먹으려하니 더욱 격분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24] 사도세자의 장인어른이자 세자의 정실 혜경궁 홍씨의 친정 아버지. 즉, 영조의 사돈이자 정조의 외할아버지.[25] 이에 대해서 '선조'의 예를 들면서 방계출신이라는 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영조의 왕위 콤플렉스는 선조와는 상당히 달랐다. 선조는 방계 출신이라 해도 명종이 생전에 직접 선정한 후계자였으며 종법상으로도 명종의 양자로 입적되었고, 그를 후계로 선정하는 과정에서도 이준경이 원임 정승으로 즉위 과정을 적극 보호하는 등 주위의 저항이 없었다. 반면에 영조는 이미 세제 시절부터 경종 독살설에 시달리고 숙종의 친자가 아니라는 의혹이 있었으며, 실제로 그것이 이인좌의 난이라는 형태로 이어질 정도로 지지기반이 너무나 빈약하고 위태로웠다. 그러다보니 예민함을 넘어서 집착 수준으로 매사에 깐깐하고 예민한 편집증적일 수밖에 없었다.[26] 실록을 보면 문자 그대로 노론, 소론, 남인 할 것 없이 대부분의 신하들은 영조의 학대에서 사도세자를 필사적으로 보호하는 쪽이었다는 걸 알 수 있다. 심지어 임오화변 초기에 영조의 강요를 못 이긴 사도세자가 칼을 들고 자결하려고 하자, 신하들이 달려와 뜯어 말리고 제발 세자를 용서해달라고 영조에게 무릎꿇고 비는 일까지 있었다.[27] 이 견제로 인해 정조는 즉위 후 1년도 채 안 되어 암살 위협까지 받아야 했다. 정조 항목의 존현각 암살 미수 사건 참조.[28] 사도세자의 아들들 중 세자빈 혜경궁 홍씨 소생의 유일한 적자이자, 영조의 친손자들 가운데서도 유일한 적손자였다. 영조대에 이르러 조선 왕실에서는 정비 소생은커녕 후궁 소생의 왕자도 별로 없을 정도로, 갈수록 남계 후손이 귀해졌다는 걸 생각하면 오랜만에 정실 소생으로 태어난 정조는 정말 금지옥엽이었다.[29] 어렸을 때부터 취미가 공부였을 정도로 문무를 모두 겸비하여, 훌륭한 후계자로서 그 까다로운 할아버지 영조마저 크게 만족시켰다.[30] 실제로 정조는 즉위 후 사도세자의 묘를 명당이라는 수원 화산(花山)으로 이장하고, 친히 편액까지 써서 달고, 무덤의 호칭도 묘라는 낮은 격식에서 현륭원(顯隆園)으로 격상시키고, 하루가 멀다하고 성묘를 하며 통곡하는 등 지극한 효성을 보였다.[31] 親鞫, 임금이 친히 죄인을 심문하는 일. 사실 여기에 고문도 포함된다.[32] 1년에 세 명을 10번이나 영의정에 제수했다. 다만 김상복, 신회는 말기에 재임할 때에는 1년 이상 재임했다.[33] 은언군, 은신군, 은전군 등으로 당시 세자빈 혜경궁 홍씨가 아닌 사도세자의 후궁에게서 난 자식들을 말한다.[34] 경주 김씨 일파를 등용하는 것은 지나치게 외척을 중용하는 것이라며 정순왕후 김씨가 직접 반대했다.[35] 영조가 평생에 걸쳐 이루고자 했던 사업이기도 하였지만, 정작 본인은 만족하지 못했던 것 같다.[36] 옛 제도를 회복함[37] 서얼들을 중용함[38] 예전의 법[39] 박시백은 영조가 정국의 안정을 생각했다면 적어도 세손의 나이 스물에는 전위(傳位)하고 상왕으로 물러났어야 했다며 "다 늙어서 골골거리는 와중에도 권력을 끝까지 놓지 않고 있었던 것만 봐도 그가 얼마나 권력지향적인 인물이었는지 알 수 있다"며 깠다. 영조: 니들도 권력 한 번 잡아봐라 그게 얼마나 놓기 힘든데[40] 종묘와 사직.[41] 대개 전선(傳禪) 2자를 가리킨다.[42] 이 병이 바로 영조가 할머니 명성왕후에서 기인한 다혈질적인 화병인 산증(酸症) 증세이다.[43] 종묘와 사직.[44] 逆敵之子 不爲君王 / 역적지자 불위군왕, 죄인의 아들은 왕이 될 수 없다.[45] 다만 영조는 다른 왕들에 비해 정통성이 취약했다는 것을 감안해야 한다. 심지어 재위한지 30년이나 되는데도 역모가 일어났으니 더욱 권력에 대한 집착이 커질만도 했다.[46] 다만 정조에게도 김조순에게도 다소 억울할 것이 김조순까지는 정말 무난하게 능력있는 신하 였지만 김조순이 물러난뒤 효명세자가 단명하고 뒤이어 헌종까지 급사하면서 왕권은 흔들리는데 신하들을 제어할 수단이 없어진 상황에서 세도정치가 극심해진 부분은 감안해야 한다.[47] 일성록 1776년(정조 즉위년) 3월 12일[48] 추존 왕까지 포함하면 그의 현손자인 효명세자가 정말 가장 길다. 왜냐하면 고종과 물론 무려 17촌까지 차이가 나는데도 불구하고 여러 양자 입적 과정을 통해서 즉위하기 전에는 사도세자의 서자이자 정조의 동생인 은신군 계열의 혈통으로 입적되어 있었는데 효명세자, 익종의 비인 조 대비가 흥선군과의 밀약을 통해 흥선군의 차남 이명복을 사위(嗣位)로 올려 계승하게 하였다. 이로 인해 고종은 법적으로 아버지인 익종(翼宗大王)을 대한제국 시기에 황제(文祖翼皇帝)로 다시 재추존하다 보니 법적으로 6대조 할아버지 영조보다 정식 시호가 더 길어진 것이다.[49] 사실 영조는 정성왕후의 묘를 만들 때 자신이 들어갈 자리도 만들어 뒀으나, 정조가 정순왕후 김씨를 생각하여 따로 묻히게 하였다.[50] 현종때 침수의심징후가 보여 파묘하였으나 사실이 아니었다.원인은 부실공사였던 것으로 보인다.[51] https://sillok.history.go.kr/id/kva_10004011_001[52] https://sillok.history.go.kr/id/kva_10003019_0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