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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03 12:00:49

세조(조선)/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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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부정적 평가
2.1. 계유정난을 통한 즉위
2.1.1. 정통성에 맞지 않는 즉위 과정
2.1.1.1. 정통성이 문제가 된 이유
2.1.2. 패륜 및 도를 넘는 숙청 행위
2.2. 취약한 공신 관리와 공신 세력의 비대화2.3. 권신의 세력화2.4. 노비 폭증을 초래한 일천즉천 제도2.5. 군사 분야
2.5.1. 국방 정책에서 드러난 문제점
2.6. 집현전 폐지
2.6.1. 악영향
2.7. 계유정난 미화2.8. 법 체계 파괴2.9. 근시안적인 안목
3. 긍정적 평가
3.1. 공납 개선
4. 결론 및 총평5. 당시 백성들의 인식6. 야사
6.1. 불교 관련
7. 현대의 평가8. 태종과의 비교
8.1. 쿠데타의 명분 차이8.2. 국왕으로서의 역량 차이8.3. 업적 차이

1. 개요

조선 7대 임금 세조에 대한 평가를 정리한 문서.

2. 부정적 평가

2.1. 계유정난을 통한 즉위

2.1.1. 정통성에 맞지 않는 즉위 과정

세조 치적의 가장 큰 지분을 차지하는 왕권 강화에 기반을 다졌다는 것은 단종을 몰아내고 아무런 명분도 없이 자신 스스로 즉위했기 때문에 정통성이 없어서 현실적으로 무리가 있었다. 흔히 세조를 태종에 비교 하는데, 세조와 태종은 명분과 그 행동 사이즈가 차이가 컸다. 특히 태종 시절에 경우 태조가 방석을 세자로 앉히는 실수[1]를 저질렀기 때문에 사실상 명분도 태종에게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여기에 우선 차장자인 형 정종을 왕으로 앉힌 후에 정당한 세자책봉을 통해 집권하면서[2] 집권의 명분을 치밀하고 착실하게 만들었다.

태종과는 다르게 세조가 단순히 배신자로서의 이미지가 강한 이유는 여기 있다. 명분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단종의 정치 기반이 낮은 것도 아니었다. 당시 조정에 충신만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세종과 문종 때 워낙 잘 길을 닦아놓아서 적정 수준의 간신과 충신이 섞여 있었다. 단종이 단명했기 때문에 그 치적을 알 수 없으나 원래대로 단종이 계속 이어 나갔다면, 앞서 언급한 정통성 문제 또한 해결이 되고(문종에 이어 2대째 장남이 이어가는 상황), 단종 본인만 조심하면 문종 때까지 이어졌던 강화된 왕권이 흔들릴 이유도 없으며, 설령 단종의 직계가 모종의 이유로 단절되어 세조의 후손이 왕위를 계승하더라도 쿠데타가 없는 정상적인 왕위 계승이 되어 정통성 문제 자체가 없었을 것이기 때문에[3] 지지 기반을 보나 환경을 보더라도 더 나았을 것이라 추측이 가능하다.

하지만 유일한 단점은 단종이 너무 어렸다는 것인데, 그 당시가 조선이 개국하고 고작 5대째였다는 것을 감안해 보자. 성인은 아니었지만, 그렇게 적은 나이라고만 보기도 어려웠다. 물론 국정 수행 능력은 상대적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었지만 김종서 등 좋은 스승이 있었다. 그래서 그가 쫒아낸 조카 단종은 조선 시대 통틀어 가장 정통성이 충분했던 군주 중 한 명이었다. 그런 단종을 딱히 능력을 검증할 틈도 안 주고 하늘나라로 보내버렸기 때문에, 이런 단종에 대한 아쉬움 역시 세조에 대한 평가에 상당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2.1.1.1. 정통성이 문제가 된 이유
태종무인정사로 아버지 태조의 정치적 입지를 몰아내고 즉위했지만, 형제들 중 가장 건국의 공로가 컸기에 명분이 충분했다. 무인정사의 명분이 장자계승이었기 때문에 그 공로만으로는 명분이 충분치 않았지만, 형 정종적자를 보지 못했고 회안대군이 섣불리 나서 왕위 계승에 대한 정통성을 잃었기에 별 문제 없이 즉위할 수 있었다.[4]

성종은 친형 월산대군예종적자이자 4살인 어린 제안대군을 제치고 예종의 뒤를 이었지만, 당시 대왕대비였던 정희왕후가 후계자로 지명하였고, 예종의 양자로 입적되어 즉위하였기 때문에 정통성이 크게 문제 되지는 않았다.[5] 또한, 제안대군세종의 아들이었던 5촌 당숙인 평원대군의 봉사손으로 출계함으로써 직계 왕위와 한참 멀어졌고, 성종은 아버지 의경세자덕종대왕(德宗大王)으로 사후 추존하여 정통성을 높이고자 했다. 그러나 세조의 적장손이자 덕종(의경세자)의 적장자 월산대군의 정통성은 성종보다 우월할 수밖에 없었고, 이는 정희왕후의 지명 정도로 무마할 수 있는 게 아니어서 정통성 문제는 두고두고 성종의 발목을 붙잡았다. 이에 성종은 세종과 두 형인 양녕대군, 효령대군의 전례대로 친형인 월산대군을 배척하거나 귀양보내지 않고 지극정성으로 모셨으며 형제간의 우애가 매우 돈독했다고 한다. 또한 신하들을 무력으로 다스리지 않고 아끼고 잘 대해주어 자기 사람으로 만들면서 정통성 문제도 점차 누그러지게 되었다. 사실 신하와 백성들 모두가 존경하고 우러러 보는 성군이 되는 게 강력한 정통성을 가질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다. 당장에 세종도 맏형인 양녕대군이 워낙 초막장이라 그렇지 바로 위의 형인 효령대군은 조용히 지낸지라 그와는 딱히 정통성 측면에서 유리할 것도 없었지만 정치를 잘 했기에 아무도 이의를 걸지 않았다.[6]

인조인조반정으로 공을 세워 즉위했지만, 선조서자이자 다섯째 정원군의 아들이기 때문에 장자, 적자계승을 모두 어겼기 때문에 조선 왕 중 가장 정통성이 부족하다. 또한, 선조의 양자로 즉위해 놓고선 친부 정원대원군원종대왕(元宗大王)으로 추존해 정통성을 잃어버렸다. 그럼에도 인조의 정통성이 저평가받지 않는 이유는 이후 왕들이 전부 인조직계후손이기 때문이다. 결정적으로 인조반정의 명분도 적어도 계유정난에 비해서는 훨씬 충분했다. 정원군의 동복형 의안군신성군은 후사 없이 선조 치세(1567-1608)에 요절했고, 영창대군은 이복형 광해군에게 어린 나이(9세)에 의문스럽게 살해당했다. 게다가 신성군은 세자 후보이기도 했었고, 인조반정 당시 인조의 직접적인 공로와 명분이 확실했기에 정원군의 혈통이 인조에게 걸림돌이 되지도 않았고 의 고명 책봉을 받은 이후 인조의 정통성은 문제시되지 않았다. 또한 정원군을 추존왕인 '원종(元宗)'으로 추존한다는 것은 선조-원종-인조의 대통을 하나로 이음으로써 정통성을 강화하겠다는 뜻이었고, 추존할 명분이 취약해 크게 비난받았지만 적어도 자신의 정통성을 내치는 짓과는 거리가 있었다. 더욱이 인조반정의 원인은 광해군 본인이 정치적인 면으로나 인륜적인 면으로나 실책이 컸기에 그 원인을 제공한 것도 있으니 그 명분 자체는 어느 정도 납득할 부분이라도 있다.

반면에 세조는 장자계승은 어겼지만 적자이자 차남이기 때문에 '직계승통(直係承統)'으로 넘어갈 만하다. 적자>서자, 장자>차자>…라는, 즉 적장자와 그 자손 부재 시 적자이자 차남인 게 정통성으로 작용한다는 것 자체가 장자계승의 논리이다. 조카 단종을 명분 없이 내쳐 장자계승을 어겼지만 장자계승을 통해 명분을 얻었다는 것은 모순 그 자체다. 특히나 세조의 왕위 찬탈을 반대하는 조의제문사화의 발단이 된 예가 있듯이 실록에 있어 조카의 왕위 찬탈 및 살해라는 패륜 행위로 왕이 된 세조에 대한 부분만은 당시로서는 더욱 예민한 부분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세조의 찬탈 과정 역시 본인의 야심으로 인한 것이 원인이었지, 단종이 광해군처럼 실정을 하거나 그런 일도 없었고 오히려 당시 조선 조정은 김종서 등의 중신들이 균형을 유지하고 있었기에 권력의 구도는 안정적인 상황이었다. 그런 상황을 무너트린 정도로 모자라서 결국 자신의 조카를 숙청까지 한 것은 조선 역대 임금들을 통틀어봐도 그 전례가 없는 크나큰 참행이나 다름없었던 것이다.

간단히 생각해봐도 만약 후대 임금에서 세조의 찬탈과 시역을 비판한다면 그것은 '현 왕의 왕위 정통성 부정→ 역모→ 숙청' 루트일 텐데 저 난폭하고 거칠 것 없는 세조 본인의 시대에는 실록의 기록에 대한 감시는 단언컨대 조선 왕조 기간 전체를 통틀어 가장 살벌했을 것이다.[7] 심지어는 사관이 배속되어 있었을 리 만무한 수양대군의 사저에서 심복들과 나눈 대화가 실려 있는 게 바로 《단종실록》이다. 이를 두고 《조선국왕 이야기》의 저자 임용한 교수는 《단종실록》에 대해 '《단종실록》은 《세조실록》의 예고편이다'라는 촌평을 남기기도 했다.

이것만 봐도 알 수 있듯이 《단종실록》과 《세조실록》은 태종의 신하들이 편찬한 《태조실록》처럼 수양 일파의 사관이 철저히 반영된 총체적 편집물이라는 것을 감안을 하고 조심스럽게 해석을 해야 하며, 계유정난과 세조의 찬탈에 이르는 역사는 역사 해석을 실록에만 지나치게 의존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잘 보여주는 예라고 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후대의 사림파들은 세조가 조선 역사상 가장 정통성이 부족한 왕이라고 평가한다.

2.1.2. 패륜 및 도를 넘는 숙청 행위

동생들과 조카이자 선왕, 서모와 사돈 송현수, 조카사위[8], 아버지가 아낀 신하들을 마구 죽였다.

먼저 형제 관계에서도 친형인 문종에게 엄청난 불경을 저질렀다. 계유정난병조판서 민신을 살해하는데, 이 때 살해당하는 장소가 형 문종의 무덤인 현릉 비석소(비석을 관리하는 곳)였다. 말이 비석소지 비석소를 보통 무덤 근처에 만드는 것을 생각해보면, 형의 무덤에서 사람을 죽여버린 것이다. 현대 기준으로도 고인 모욕급 행동이고, 당시 기준으로는 저주나 다름없는 행동이다. 또한, 문종의 정실이자 자신의 형수인 현덕왕후 권씨친정 일가가 단종 복위 운동에 가담하자, 현덕왕후를 폐서인하고 무덤을 현릉[9]에서 파헤쳐 평민의 무덤으로 만들었다. 문제는 당시 현덕왕후는 남편이자 세조의 친형인 문종과 이미 합장되어 있는 상태였다. 그러니 형수에게도 불경을 범한 것인 데다, 애꿎은 형이자 선왕에게까지도 패륜과 무례를 범한 셈이다. 이것 때문에 세조가 너무나도 잘난 엄친아 형이었던 문종에게 어릴 적부터 심한 열등감과 그에 따른 자격지심을 가졌던 게 아닌가 하는 추측도 있다. 게다가 현덕왕후의 무덤을, 무덤터로는 최악인, 범람이 잦고 습한 지역으로 이장해버렸다. 이를 두고, 세조가 단종을 죽인 뒤에 형수 현덕왕후의 원혼이 세조의 꿈에 나타나 저주를 걸었고, 이 때문에 의경세자가 일찍 죽었다는 야사까지 나왔다. 실제로 의경세자는 사촌동생 단종보다 먼저 요절했기에 이는 애초에 사실과 맞지 않았음에도 말이다.

태종조차 확실히 반란을 일으켜 시가전까지 만든 동복형을 살려주었으나 세조는 반란 혐의만으로 동복형제들까지 살해하는 짓을 저질렀다. 자기 기준에서 세조의 찬탈 행위를 방해 혹은 반대했다는 이유로 계유정난 때 사살한 역적이나 사육신 등 역모[10]가 있었다고 해도 조카 단종은 정통성이 높았다.[11][12] 명신인 황보인, 김종서 등 대신들을 아무런 명분도 없이 그냥 살해했는데 김종서 또한 청렴결백하고 흠잡을 이유가 없고 북방 개척, 뛰어난 행정 능력, 《고려사》 편찬까지 한, 아버지 세종이 신임하던 명신들 중 1명이다. 정분 또한 두 사람에 비해 행정 능력은 딸리지만 토목 사업이나 건축에는 업적이 있을 정도로 뛰어난 건축물을 설계한 공도 있었다. 이러한 명망 높은 대신들을 별다른 이유 없이 권력을 찬탈하기 위해 죽여댄 것이다.[13]

이복동생들(한남군, 수춘군, 영풍군)도 단종을 지지한다는 이유로 마음대로 죽이고 식솔을 노비로 부리는 잔학한 면모도 있었고, 세종의 후궁으로 자기에게는 서모에 해당하는 혜빈 양씨 또한 찬하려던 것을 막으려 하자 그녀도 죽여버렸다. 그것도 강제로 머리를 깎고 비구니로 만들어서 절로 내쫓은 다음에 목숨을 빼앗은 것이다. 친조카인 단종까지 시해하는 만행을 저지른 세조인데, 심지어는 친동생 안평대군의 양어머니이자 자신의 친숙모였던 성녕대군 부인을 양자를 두둔한다는 이유만으로 폐서인시키는 짓도 서슴치 않고 벌였다.[14] 아이러니한 사실은 성녕대군의 장례식 때 당시 아직 세자였던 양녕대군활쏘기와 음주가무 중이었고 참고 참던 아버지 태종조차 "세자는 이제는 사람의 마음이 없다."고 분노했다. 그런데 양녕대군은 세조의 왕위 찬탈을 적극 지지했다.[15] 한 마디로 존속살해에 전혀 거리낌없이 할아버지 태종조차 정치적 목적 없으면 하기를 꺼린 일을 예사로 해댄 희대의 패륜아다. 조선의 역사상 자기의 작은 어머니, 이복형제에 더해서 동복형제까지 이렇게 마음대로 다 죽여버리고 작은 어머니를 폐서인시키는 왕은 세조 이외에는 없었다.

세조가 가장 까이는 부분은 조카 단종 관련 문제이다. 단종은 사육신 사건 때 사육신들에게 도움을 준 것이 발각되어 상왕에서 '노산군(魯山君)'으로 강제로 강등당해 강원도 영월유배를 갔다가 그 곳에서 어린 나이(16~17세)에 사약을 받았다. 하다 못해 세조 사후에 집권하여 후세에게 암군이라고 자주 비난받는 인조조차도 전 국왕이던 광해군을 죽이지 않고 멀리 제주도로 유배 보내는 선에서 그쳤는데[16][17] 세조는 친조카를 살해했을 뿐 아니라 시체 수습도 안하고 야생동물들이 뜯어먹게 방치하는 짓을 저질렀다. 하지만 정작 《조선왕조실록》에는 단종이 자살해서 예를 갖추어 장사 지냈다.[18]고 적어놓는 씨알도 안 먹힐 역사왜곡까지 대놓고 해놨다. 훗날 중종 때 노산군(단종)의 묘소 정비를 시작하면서 단종의 최후에 대한 전모가 드러났다. 중종 대 유학자 음애 이자는 《음애잡기》에 세조실록의 기록들은 쥐새끼와 여우새끼들이 아첨을 하는 간사한 붓장난이니, 이에 속지 말라고 대놓고 까버리는 글을 적었을 정도였다. 심지어 단종을 시해한 뒤에는 왕실 족보인 《선원보략》에서 파 버리는 짓도 벌였다. 바로 적장자 단종을 살아 있을 때는 문종서자로 만들어 버린 뒤 사후에는 서자 아래인 사생아로까지 격하시킨 것이다.[19] 이래놓고 왕위 찬탈 전에는 자기 측근들을 시켜서 자신을 삼촌으로 어린 주성왕을 보필했던 주공단에 비유하는 어처구니없는 모습도 보였다.

친족은 아니지만 세조 본인과 매우 가까운 왕실의 인척도 방해가 되면 가리지 않고 죽인 전적도 있다. 단종의 장인어른이자 정순왕후의 아버지 여량부원군 송현수는 단종복위운동에 휘말려 사사당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이 사람은 세조 본인과 매우 절친한 사람이었다. 애초에 그가 단종의 장인이 된 것도 세조의 영향이 매우 컸는데[20] 송현수 입장에서는 옛 속담처럼 모진 놈과 친했다가 정말 날벼락 맞은 격이다.

원천석이라는 인물이 있었는데, 이 사람은 태종을 가르친 스승이다. 태종이 저지른 왕자의 난 때문에 제자들에게 정나미가 떨어져서 자신을 만나러 며칠을 기다리는 태종을 피해 도망다닐 정도였는데, 후에 상왕으로 은거한 태종의 부름에 마지 못해 만나러 왔다. 이 때 태종이 스승에게 자신의 손자들을 직접 소개시켜 주었는데 노인이 아직 어린 세조를 보고 "조부를 닮았는데 부디 형제를 사랑해라." 라고 거듭 강조했다 한다. 오죽하면 이런 야사가 남아 있을까? 그리고 태종의 스승이었기에 원천석에게 관직을 주었으나 모두 거절하였고 나중에는 태종이 직접 스승을 만나러 강원도 원주치악산까지 찾아가는데 이를 알고 원천석이 미리 피했고 결국 끝내 만나지 못하였다. 그래서 치악산을 가보면 태종이 행차했던 길이나 잠시 앉아있던 곳이 남아 있다.

2.2. 취약한 공신 관리와 공신 세력의 비대화

기록상, 세조 본인은 상당히 금욕적인 왕이었다. 사치품 같은 것에 거의 관심이 없었고 스스로 자신의 검소함을 자주 강조하기도 했다. 세조는 여색에도 관심이 별로 없어서 후궁도 매우 적었다. 그 후궁들조차 신하들이 왕실의 장래를 위해서 라며 부린 고집을 받아준 것이다. 술을 좋아해서 신하들과 연회를 자주 가진 것 정도를 제외하면, 세조는 '개인적 처신' 측면에서는 큰 결격 사유는 없다.

그러나 사생활의 검소함과는 별개로 국가를 운영하는 왕으로서는 결코 검소했다고 보기 어렵다. 가장 심각했던 문제는 자신의 부족한 정통성을 커버하기 위해 '공신전'을 남발한 것이었다. 법제상으로는 몇 대가 지난 공신전은 회수하도록 되어있었지만, 실상 회수된 경우는 거의 없었다. 또한, 세조의 공신들조선 역사 전체를 통틀어 비교대상을 찾기 어려울 정도로 그 부패가 심각했다. 그럼에도 세조는 별다른 처벌을 하지 않았다.[21] 일례로, 세조의 공신 중 하나인 홍윤성평안도의 군량미 30만 석을 혼자 다 횡령하는 짓을 벌여놓고도 아무 처벌을 받지 않았다.[22]

외척들도 견제하기는 커녕 세조의 처남들인 윤사분, 윤사흔과 세조의 사돈인 한확 등을 요직에 등용했고, 세조의 또다른 외척인 정인지 역시 비리가 많음에도 오히려 계속 요직에 등용했다. 그리고 부인인 정희왕후의 인척인 한계순, 한계희, 한계미, 성봉조와 다른 공신인 최항, 정창손, 김질, 이사철, 권람, 황수신, 김국광, 김겸광 등도 요직에 등용했다. 그 외의 외척들인 윤사로, 윤필상, 한치형, 신승선, 노사신, 심회 등도 다 요직에 등용했다. 심지어 한명회세자빈으로 들였다. 장순왕후가 18세의 나이로 요절하여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자칫하면 안 그래도 권세 높은 공신이 의 장인, 외조부까지 되면서 조선 후기에나 나올 세도정치 못지 않은 권세를 휘두를 수도 있는 일이었다.

세조 입장에선 어쩔 수 없었을 터다. 계유정난조선 시대의 성공한 정변들 중 명분의 정당성이 가장 빈약한 정변이었다. 사육신생육신, 조의제문 그리고 후대의 김종서단종에 대한 동정적인 평가에서 볼 수 있듯 사대부들의 전반적인 지지를 얻기 어려웠으며 아예 이징옥의 난을 시작으로 단종복위운동같이 세조의 찬탈에 반기를 든 시도가 계속 벌어졌고, 이런 혼란을 틈타 말년에는 이시애의 난까지 일어났다. 참고로 세조 시절 처음으로 등용된 사림의 거두 김종직이 세조의 계유정난 소식을 듣자마자 극도로 분노하여 곧바로 조의제문을 쓴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사림들에게도 세조의 정변은 굉장히 부정적인 평가를 받았었다. 태종은 반정에 참가하지 않은 신하들도 상당 부분 공감해주는 명분('적장자 계승')의 쿠데타였기에 공신집단에게만 과하게 의존할 필요가 없었지만, 세조는 그렇지 못했다.

2.3. 권신의 세력화

무엇보다 세조는 전제 왕권을 통한 독재 정치를 선호해서 이러한 시스템을 철저히 왕에게 집중된 독재 스타일로 꾸준히 밀어붙였다. 주변 훈구 대신들의 왕당파가 있었긴 했지만, 이 훈구 대신들은 세종과 문종의 훈련을 통해 배출되는 관료가 아닌 기득권 유지를 위한 전형적인 도구들에 지나지 않았다. 게다가 세조는 태종, 세종과는 달리 훈구 대신들을 철저히 관리 및 감독하지 않았기에 이들은 권력의 맛을 보자 차츰 타락하여 부정부패를 저지르게 된다. 세조가 그 부패하는 절대 권력의 가장 정점에 위치한 폭군 유형에 속했던 만큼, 공신 우대 정책이 너무 과해서 그러한 권신들의 부정부패가 극에 달했던 것.

세조가 신하들의 의견에 귀를 기울이고 철저한 반대에 져주는 아버지와 형을 신권에 의해 농락만 당하기 급급한 임금들이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이 때문에 황보인김종서가 고명 대신으로 활동하고 황표 정사를 시행할 때 수양대군의 이러한 분노이자 배신감은 꽤나 커졌을 것이다. 그들의 목숨을 직접 거뒀을 때 왕권을 유린했다는 죄목을 뒤집어 씌웠다. 그러나 세조가 어떻게 생각했든 간에, 세종과 문종은 신권에[23] 농락을 당하고 늘 져주는 임금이 결코 아니었다는 것이 함정.

오히려 세종은 반대 의견이 있으면 경청하고, 설득하면서 끈질기게 자기 정책을 추진해나가는 스타일의 임금이었다. 게다가 세조 측이 엄청난 국정농단으로 홍보했던 황표정사도 그리 오래 시행된 것이 아니었을 뿐더러, 아직 제왕 수업을 받지 못한 단종을 합법적으로 후견인이 된 대신들이 일시적으로 보좌하는 과정에 불과했다. 오히려 세조의 지나친 공신 우대 정책 때문에 후대의 임금들이 이를 견제하기 위해 사림파들을 끌어들이면서 정치 싸움의 의도치 않은 원인을 제공했다. 결국 아버지와 형을 신권에 휘둘리는 왕으로 여긴 세조의 생각 자체가 매우 근시안적인 오착이었던 것.

세종과 문종은 한 제도나 정책을 결정할 때 방법이나 과정, 미래의 파장을 생각하고 어떤 것을 감수하고 희생해야 하는지까지 죄다 토론하고 연구해 나가는 유형이었다. 이러한 유형은 경우에 따라서는 우유부단하여, 신속한 판단력과 추진력이 필요한 난세에서는 혼란만 자초할 뿐이라는 한계가 있다. 그러나 세종 - 문종의 치세는 태평성대였지 난세가 아니었다. 오히려 국방상 중요한 사안들, 이를테면 북방개척 같은 정책들은 세조 때와 비교해도 과감함과 신속함에 있어 별 차이가 없었다.

세조가 키운 공신 세력은 세조 이후의 왕권을 약화시켰다. 재위 말기에는 세조 자신도 너무 커져버린 공신들이 걱정되었던지 남이구성군이시애의 난을 정벌한 세력을 신공신들로 새로이 책봉해서 한명회신숙주, 권람 같은 구공신들을 견제하려고 했지만[24] 신공신 세력이 안착하기도 전에 세조 본인이 곧바로 사망해버리면서 결과적으로 대실패했다. 오히려 위기감을 느낀 구공신들의 대반격으로 신공신들은 예종 즉위 초기에 전부 숙청당했고 예종도 구공신들을 나름대로 견제해보려고 했지만 예종도 재위한 지 얼마 안 되어 일찍 죽으면서 실패로 끝났다.

예종의 뒤를 이어 즉위한 어린 성종의 즉위는 왕권 약화로 인한 결과였는데 원래 예종의 아들 제안대군과 성종의 친형 월산대군이 멀쩡히 살아있음에도 서열 3위 자을산군이 즉위한 것은 제안대군과 월산대군의 부득이한 사정 때문인 것도 있었지만[25] 그가 권신 한명회의 사위[26]였기 때문이다. 즉, 왕실에서 명백한 왕위계승자인 1위 제안대군과 2위 월산대군이 있음에도 조선 왕실은 차기 국왕 하나도 누구로 할지도 제대로 결정하지도 못하고 권신에게 휘둘린 것이다. 한마디로 권신의 입김에 따라 다음 국왕이 바뀌는 이상한 사태가 생겨버린 것.[27] 성종 즉위 초기에는 훈구파에 의해 원상제가 실행되었다. 원래 원상(院相)이라는 건 조선시대 국왕이 병이 나서 부재 중이거나 너무 어린 왕이 즉위하였을 때 국정(國政)을 의논하기 위하여 원임(原任)•시임(時任)의 재상들로 하여금 승정원에 주재하게 한 임시 관직이었지만 세조의 공신들로 구성된 원상은 1467년(세조 13년)부터 1476년(성종 7년)까지 무려 10년간 지속됨으로서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왕권을 굉장히 약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하게 만들었다. 성인이 되어 수렴청정과 원상을 다 끝내고 정식으로 친정을 시작한 성종 본인도 구공신들을 견제해 보려고 사림파들과 친위 세력들을 등용했다.[28] 하지만 이 또한 대간에 포진한 사림파들의 입지가 너무 커지면서 비논리적이고 불합리적인 비판까지 일삼으면서 이상적인 형태로 성공하지는 못했다.[29] 또한 성종 본인이 등용했던 친위 세력 역시 서로 반목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에 성종은 무신들을 등용시켜 왕권을 강화시키려고 했지만 역시 실패로 돌아갔으며 역관 및 의관까지 등용시키는 시도까지 했지만 이마저도 실패. 그 탓에 위상이 더더욱 강화된 구공신들이 권신으로서 영향력을 행사함에 따라 성종 시절에는 세조의 바람과 반대로 신권이 왕권을 위협할 정도로 비대해져버리고 말았다.[30]

한편 세조 때 등용돼서 성종이 훈구세력에 대한 대항 세력으로 키워준 사림 세력은 세조에 대한 안 좋은 소문들을 사초에 집어넣어서 수십 년 뒤 초대형 폭탄을 만들어 냈다. 성종 때 사관 김일손이 '현덕왕후의 관을 파내서 바닷가에 버렸다', '세조의 아들 덕종의 후궁 권귀인을 세조가 찝적댔다', '사육신의 난 직후 세조가 신숙주를 통해 사육신을 회유하려고 하자 역으로 면박을 받았다' 등의 소문들을 성종의 사초에 고대로 기록해버렸다. 아울러 《세조실록》의 공식 기록엔 '단종은 자살했고 세조가 이를 불쌍히 여겨서 대군의 예로 장례를 치러줬다'고 조작해놨지만, 중종 때까지는 소문이어야 했던 '세조가 단종을 살해한 후 들짐승이 뜯어먹게 방치했고 이후 어느 사람(영월 고을 향리 엄흥도)이 몰래 묻어 주었다.'는 기록까지도 김일손은 성종의 사초에도 그대로 기록해버렸다. 《성종실록》 집필 과정에서 이것이 발각되면서 김일손의 스승 김종직조의제문과 연쇄작용을 일으켜 무오사화라는 초대형 폭탄을 만들어 버렸다. 다만 이는 김일손의 병크로 기록자로써 올바른 기록을 하려 한 게 아니라 걍 김일손 한 사람만의 일방적인 잘못이다. 결과적으로 공신들을 향한 세조의 견제는 공신들이 성종 시절까지에도 상당 기간 동안 국정을 좌우함에 따라 실패로 돌아갔다. 이 공신 세력들을 1차로 싹쓸이해버린 인물이 바로 갑자사화를 일으킨 연산군이었다는 사실은 세조가 남긴 권신 집단들이 자신의 증손자 대까지도 영향력이 매우 컸음을 반증한다고 할 수 있겠다.

혹자는 태종이 세종을 위해 손에 피를 묻히며 '악업은 내가 지고 가니 주상은 성군이 되어라'는 말을 똑같이 세조에게 적용시키며 성종조의 태평성대가 마치 수양이 악업을 지어 준 덕분인 것처럼 말하나, 전혀 사실이 될 수 없다. 태종이 말한 '악업'은 이방석, 이방간 등을 제거한 제1차 왕자의 난제2차 왕자의 난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외척 세력이 될 수 있는 민무구, 민무질 등의 외가 세력, 심온 등의 처가 세력 등을 제거한 행동을 말하는 것이고, 이를 통해 세종의 정치적 부담을 줄여주려는 목적이 있었다. 그러나 세조의 '악업'은 오로지 자신이 권력을 찬탈하고자 일으킨 계유정난, 사육신의 옥사, 단종의 사사 등 자신이 왕위를 찬탈하고 자신의 왕권을 위협할 수 있는 세력의 숙청이었지 정작 후대에 부담이 될 수 있을만한 외척과 공신 세력은 철저히 비호하면서 권력을 부여해주는 실책을 범했다. 즉, 태종의 저 말을 가지고 수양을 변호할 수는 없고, 성종이 왕권을 확립하고 치세를 만들어 낸 대부분의 공은 바로 그 자신에게 있는 것이지 결코 세조의 덕이 아니다.

2.4. 노비 폭증을 초래한 일천즉천 제도

한국사의 전개 과정 속에서 조선시대는 奴婢인구의 大擴張期였으며 奴婢制의 最全盛期였다. 조선시대에 들어와 노비인구가 늘어나게 된 주요 원인은 고려 시대에 마련된 ‘賤者隨母法’과 ‘一賤則賤’의 원칙이 조선왕조에서도 그대로 적용되었을 뿐 아니라, 특히 良賤交婚이 성행하여 良役인구를 크게 잠식했기 때문이었다.

이에 조선 정부는 양역인구의 노비화를 막기 위해 양천간의 교혼을 금지하거나, 그때그때의 사정에 따라 良人과 婢간의 소생에게는 ‘從父法’을, 그리고 奴와 良女간의 소생에게는 ‘從母法’을 적용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소유 노비 인구의 규모를 늘리려는 兩班士族의 집착에 의해 결국 『經國大典』(1485년 반포)에서는 양천교혼의 소생에게 모두 ‘일천즉천’의 원칙을 적용하는 것으로 규정하게 된다.

‘일천즉천’의 원칙은 18세기에 들어와 수정되기에 이른다. 즉 양역인구의 증대를 위해 고심하던 조선정부가 ‘奴娶良妻所生從母從良役法’을 1731년부터 永久的으로 시행하면서 노와 양녀간의 소생을 모두 양인 신분으로 귀속시켰던 것이다. 더군다나 19세기에 이르러 納貢하던 內․寺奴婢의 從良(1801년), 奴婢世襲制의 폐지(1886년), 노비제의 전면 폐지(1894년) 등으로 귀결되었다.

그런데 1894년 甲午更張에 의한 노비제의 혁파는 법제상의 조치였을 뿐이며, 일제강점 초기까지도 노비는 殘存하고 있었다. 오랜 세월 동안 존재하던 노비가 법제상의 변화로 인해 급격히 사라지기 어려웠던 것이다.
- 조선시대 奴婢制의 推移와 노비의 존재 양태 -동아시아의 奴婢史 비교를 위한 摸索-《역사민속학》 2013, vol., no.41, pp. 73-99 (27 pages)
고려 시대 이래로 양천교혼은 금지됐고, 만약 양천교혼 소생이 있다면 모두 천인계를 따라 천인으로 규정됐다. 문제는 그로 인해 양역을 부담할 양인의 수가 갈수록 감소해 국방이 취약해진다는 사실이었다. 따라서 조선은 건국 초부터 대책을 빈번히 논의했고, 1414년(태종 14)부터 노비종부법을 양인의 비처첩소생에 대해 실시했다. 그렇지만 노비종부법 실시에 따른 여러 폐단 때문에 갑론을박이 있었고, 마침내 1432년(세종 14)에 이를 폐지하고 노비종모법으로 바꾸었다.출처
세종 때의 노비종모법은 아버지가 노비여도 어머니가 양인이라면 그 자식은 양인이 될 수 있었다. 하지만 세조가 확립한 일천즉천은 그조차 없었다. 이러한 제도적 퇴보 탓인지 그간 불법이었던 투탁노비(양민이나 천민 가운데 군역이나 조세를 도저히 감당할 수가 없어 권문세족의 종으로 제 발로 들어가는 행위)세조시기에 활성화됐다.[31]

세조 때인 1461년에 일천즉천이 못 박아진 이후 노비를 줄이고 양인들을 늘리기 위해 노비종모법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기득권층의 맹공을 받았다. 조광조는 노비종모법과 한전론을 중심으로 하는 민생 개혁을 시도하다 사약을 받았고, 율곡 이이도 노양처소생종모종량법을 주장했지만 성공하지 못했으며, 송시열은 1669년에 공사천 양처소생은 남녀 불문하고 어머니의 신분을 따르게 하자고 주장했다가 주위의 거센 반발과 매도에 시달렸다.

결국, 영조 때에 이르러서야 세종시절의 노비종모법이 다시금 시행됐고 그럼으로써 조선의 노비 인구는 전체 인구의 10% 미만으로 크게 감소했다.

2.5. 군사 분야

세조가 남긴 업적 중 군사 분야로는 진관 체제 완성이 있다. 이전까지 조선의 지방군은 함경도와 평안도는 군익도 체제로, 한반도 남부 해안 일대는 영진군과 기선군이 존재했지만, 그 외의 내륙 지방은 마땅한 군사 조직이 없다는 문제를 가지고 있었다. 잡색군이 편제 되어 있지만 훈련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다보니 만약 국경이 외적에게 뚫리면 내륙까지 그대로 뚫린다는 문제가 있었다. 세조는 이렇게 지방별로 나눠진 군사 조직을 하나로 통일시키고자 1456년(세조 2년), 함경도와 평안도에만 있었던 군익도 체제를 전국 8도에 도입하고 획일화했다. 그리고 1457년(세조 3년)에는 기존의 군익도를 주진과 거진으로 나눠서 개편하는데 이것이 바로 진관체제였다. 그리고 이를 위해 기존의 지방별로 달랐던 지방 육군을 정병(正兵)으로 일원화해서 지방군의 주력으로 삼았다.

또한 이시기에 조선군의 병력과 군량이 대폭 확대되었다. 보유하던 군자곡이 90만석에 달했고, 1448년(세종 30년)에 10만명이었던 군액은 18만~22만명으로 늘어났다. 군사들 중 활을 잘 쏘는 병졸이 30만 명에 정예는 10만 명에 용맹한 군사는 3만 명이라고 양성지가 말하는 기록[32]이 나올 정도 였다. 또한 무신들을 적극적으로 기용해 실전에서도 성과를 낸다. 일례로 1467년 조선과 명나라의 건주 여진 협공 당시 조선군은 1만 명이었는데 총 286급을 참수하고 23명을 사로잡았으며 피로인(被虜人) 7명을 탈취하였다. 반면 명군(明軍)의 군세는 50,000명이었는데 총 638급을 참수하고 253명을 사로잡았으며 피로인 1,165명을 탈취하였다. 언뜻 보면 조선군의 전과보다 명나라군의 전과가 월등해 보이지만 조선의 동원 병력이 명나라군의 1/5이었다는걸 감안하면 오히려 조선군이 명나라군보다 병력 대비 여진족을 더 많이 죽였다.[33] 조선군이 건주 여진 정벌에서 이만주를 죽인건 명나라에서도 높이 평가했는데 당시 명나라의 황제인 성화제가 세조를 칭찬하며 후하게 상을 하사한 기록이 있다.[34] 하사품이 하도 많아서 세조가 "우리 나라는 작은 공(功)으로써 천은(天恩)을 우악하게 받으니, 황공하여 몸둘 바가 없다."고 했을 정도였다.

다만, 이러한 군사력 확대에는 부작용도 있었으니 대표적인 것이 보법이었다. 이전까지는 봉족제에 따라 군사 1명당 조호[35]가 병종과 빈부에 따라 차등적으로 지급되었다. 평균적으로 3명이 한호를 이루되, 토지 소유의 빈부를 기준으로 의무자의 재산에 맞추어 부유한 집안은 1정을 1호로, 가난한 집안은 5정을 1호로 배정하고 부유한 이가 군역을 지는 경우에는 조호를 지급하지 않는 식으로 각 가구의 경제 사정에 맞추어 유연하게 책정되었다.

그러나 세조 때 군액을 확대하기 위해 보법을 시행하면서 호가 아닌 인정을 기준으로 계산하게 되어 1명당 2정으로 줄어들게 된다. 이는 군역을 번거로운 조사와 산정 과정 없이 간단하게 부과하고 군사의 수를 크게 늘릴 수는 있었지만 보인이 맡는 경제적 부담이 심각하게 커진다는 문제점이 있다. 특히 이전에는 가계 수준에 맞추어 유연하게 책정되던 군역 부담이, 세조의 보법 이후로는 일률적으로 인정을 기준으로 하게 된데다 이전보다 부담 자체도 커져서 보인들이 이를 감당할 수 없게되어 이를 피하려고 유망이 빈번해지는 결과를 초래했다.

경제적인 지원이 사라지자 군역을 실질적으로 수행해야 하는 정병 역시 제대로 기능을 발휘할 수 없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걸 고려 시대에 비유해 보면 군인에게 지급되는 군인전이 복무 비용을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줄어버린 것이었다. 물론 그 이전에도 군역의 폐단이 없던 것은 아니었지만, 이 보법을 계기로 조선은 군인층의 붕괴와 양인의 감소가 점차 심각해지기 시작한다.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이 시작된 시점에서 조선에 제대로 된 군인층이 거의 없는 수준이었던 것은 여기에서 기인하는 바가 크다.[36]

또한, 문종 대 개편된 오위를 재개편할 때, 갑사를 5위 중 하나인 의흥위로 몰아버린 것도 실책으로 꼽힌다. 원래 갑사는 5위에 골고루 편제되었고 필요시에 군관 역할을 맡아 부대를 통제하고 지휘도 할 수 있었는데 이러한 조직을 의흥위 하나에 몰아넣은 것이다. 전시에 장군이나 장교가 전사하거나 사기가 조금이라도 꺾이면 일선 부대가 순식간에 와해될 수 있다는 점에서 매우 부적절한 조치였다. 아랫사람들의 말을 무시하고 지도자가 자기 마음대로 하는 걸 이상적인 정치로 여겼던 세조 본인의 성향이 군사 분야에서도 반영된 셈이다.

총통위를 폐지하여 화포 개발이 약화되었다는 인식이 강한데 총통위가 폐지된 실제 이유는 화약 병기가 널리 지방군에게도 보급되고 민간에서도 염초 제조 기술이 퍼져 관영 수공업으로 염초를 공급받는 것보다 민간에서 구매하는 것이 나았기 때문이었다. 화포 개발은 그것과는 별개로 이루어졌다. 세조가 창기병을 없애고 궁기병만 남겼다며 이를 비판하는 인식이 강한데 이미 세종시대부터 창기병과 궁기병을 별도로 분리하는 것이 무의미할 정도로 기병이 창과 활을 모두 다 써야 한다는 인식이 자리잡고 있었고 세조는 이 인식을 공식화 시킨 것 뿐이다.[37]

거기다가 위에 얘기한 진관 체제 역시나, 기존보다 군사 체계를 뿔뿔이 흩어놓는 바람에 기존 체계라면 큰 피해가 발생하지 않았을 을묘왜변때 조선의 남부 지역이 박살나는 원인을 제공했다.

2.5.1. 국방 정책에서 드러난 문제점

문종 때까지 세계적인 수준에 있었던 화약 병기는 15세기 후반, 즉 단종 때부터 혼란한 국내 정세[38]의 영향을 받아 서서히 쇠퇴하기 시작하였다. 특히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에 오른 세조는 화기의 개발에 매우 소극적이었는데, 반대 세력이 화기를 반란에 이용할까 두려워하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화기의 발달은 현상 유지에 머물면서 오랜 기간 침체 국면을 벗어나지 못하였다. 특히 세조대의 소극적 화기 개발은 부대의 편제에도 영향을 주어 총통군이라는 화기 부대마저 해산시키는 결과를 초래하였는데, 이러한 총통군의 해체는 곧 화기의 전술적 운용을 퇴보시켰다.
모반에 사용될 수 없다

이 외에 군사적인 실책도 꽤나 저질렀다. 대표적으로 의흥 삼군부를 오위 도총부로 개편하면서 갑사를 오위 중 하나인 의흥위로 몰아버리면서 부사관에 해당하는 군 계층을 사실상 없애버린 것, 지나치게 궁시 위주로 고과를 편성해서 백병전을 취약하게 만든 것, 보법으로 정군 1명당 보인이 3명으로 편성된 것을 보인 2명으로 줄어들게 해서 보인들이 대거 이탈하게 만들고 조호[39]를 지급하는 기준을 호 기준에서 인정 기준으로 바꿔서 군인층 붕괴를 유발한 것, 총통위를 없애서 화력을 약화시켜버린 것[40] 등이 있다. 이러한 세조의 실책은 조선군을 약화시키는 원인이 되었다.

2.6. 집현전 폐지

큰 실책 중 하나로 집현전의 폐지를 들 수 있다.[41] 물론 사육신을 위시한 자신의 반대파 대부분이 집현전 출신인 이유도 있었겠지만, 본인이 이런 자문 기구의 필요성을 모르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이런 국왕 자문 기구의 역할은 뒤에 홍문관, 규장각 등이 계승하기는 하지만 일단 한번 끊어진 맥락을 연결시키는 것도 어렵다.

문, 무, 잡학에 관련된 모든 국가 전반의 일을 연구하고 다양한 학자들이 참여했던 집현전에 비하여, 후대 자문 기관인 홍문관은 아무래도 문에 치우친 기관이었고 덕분에 성종조에는 문치적으로는 큰 치적들이 있었으나, 국방력 약화, 성리학 일변도의 정치 흐름 등의 현상이 나타날 수 밖에 없었다. 즉, 국가 운영의 브레인 집합소였던 집현전을 폐지함으로써 수양은 자신 이후의 국가의 성장 동력을 없애 버렸으며, 그나마 문치 부분에서는 홍문관이 이를 계승할 수 있었으나 결국에는 그마저도 연산군의 폭정과 중종반정으로 옹립된 중종의 잦은 옥사와 실정으로 인해 관학의 성장 동력은 멈춰버리게 된 것이다.

이 때문에 조선의 학문은 연산군과 중종 시대를 거치면서 관학은 몰락의 길을 걷게 되었으며, 이후에는 사림들이 주도했고 사림들이 성리학에 대한 이론에 몰두하느라 임진왜란, 정유재란, 정묘호란, 병자호란 등의 위기에 직면했을 때 큰 어려움에 처하게 했으며 그럼에도 사림의 학문은 숙종 때까지 우위를 점하게 되었다. 이렇게 침체기에 빠진 관학은 영조와 정조 시절이 되어서야 다시 부활하게 되었으나 이후 순조 때 도로 퇴보하고 말았다.

단, 집현전이 세종의 능력으로 유지되었던 기관이었다는 점 또한 있다. 거기다가 집현전이라는 시스템 자체가 명확한 규정이 없는 것이라서 변질되기도 쉬운 환경이긴 했다. 실제로 원래 집현전의 기능은 실무직 육성이 아니었고, 오히려 홍문관 쪽이 기존의 기능에 가깝다. 즉 집현전 폐지≠실무자 육성 차단이라는 점을 감안할 필요는 있다.

2.6.1. 악영향

집현전을 폐지하여 건전한 관학파를 양성하는 인재 집합소를 없애버려서 당대에 자신이 멋대로 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는데 일조했다.[42]

집현전 폐지와 더불어 세종 대에 육성된 인재들을 세조가 대거 도륙냄으로써 조선의 인재풀은 일거에 박살내버렸고, 결국 이것이 세조가 그나마 있는 능력있는 공신들이 잘못을 저질러도 숙청하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로 지적된다.[43]

2.7. 계유정난 미화

수양대군 일파는 단종 시대를 난세로 규정했지만, 계유정난 직전까지만 해도 평온한 시대였다고 볼 근거가 꽤 되는 편이다. 단종이 섭정인 김종서, 황보인 등의 선대 왕의 충신들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지만, 단종에겐 흠결 낼 수 없는 명백한 정통성이 있었으며 김종서, 황보인 등이 그의 왕권을 제약한 바는 결코 없었다. 수양 측은 김종서, 황보인 등이 엄청난 전횡을 저질렀다고 선전했지만, 실제 기록을 면밀히 살펴보면 딱히 그렇게 볼만한 근거도 부실할뿐 아니라, 김종서, 황보인의 권력은 어디까지나 조건부로 부여된 권력이었다. 애초부터 김종서와 황보인은 외척도 아니고, 그렇다고 중앙 정계를 좌지우지하는 명문 세도가의 좌장도 아니었다.

당시 조선에서 중앙의 정치명문가라면 고려시대부터 내려온 전통의 명문귀족가문이 아니라면 개국공신이나 태종의 즉위를 도운 공신가의 후예들을 말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김종서의 경우 이중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다. 그는 어디까지나 세종과 문종의 신뢰를 바탕으로 정승이 되었고, 그 정승이라는 지위로 인해 어린 국왕의 보좌 역할을 잠시 맡았을 뿐이다. 그래서 김종서를 비롯한 대신들의 권력이 아무리 크다 한들, 그것은 단종이 성인이 되는 순간 무조건 반납되게 되어있었다. 애초에 이렇게 기반 없는 김종서에게 권력을 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왕 > 왕의 총신 > 세도가 공식이 성립할 만큼 왕권이 강력하다는 뜻이다. 세도가 > 왕 공식이 성립하는 훗날을 생각해보면...

때문에 계유정난은 수양대군처럼 막가는 성향의 인간이 아니었다면 쉽사리 성공할 수가 없는, 생각보다는 성공하기 어려운 쿠데타였던 것이다. 물론 그 어려운 쿠데타를 성공시킨 원인이 수양 대군의 탁월한 결단력에 있는 건 사실이지만, 향후 국정에 미친 영향을 생각하면 긍정적 평가를 받긴 상당히 힘들어 보인다. 즉 탁월한 판단력과 결단력은 좋은 군주의 자질이었을 지 모르나 그게 좋은 왕의 덕목이 아니었다는 것.

사실 세조 입장에선 저럴 수밖에 없었던 것이 근본적으로 보면 계유정난의 명분은 없다. 단종은 적법한 절차를 걸쳐 즉위한 정통성이 완벽한 왕이며, 김종서와 황보인이 권신이었다고 볼 근거도 부족하다. 단종이 왕위에 부적합한 천치였던 것도, 나라가 파탄지경이 난 것도 아니다. 즉, 계유정난은 근본적으로 세조가 자기가 왕이 되고 싶어서 멀쩡한 왕실을 뒤엎은 것이다.

물론 단순히 권력욕에 눈이 뒤집혔다기보단 자신을 좋게 봐주던 문종이 죽고 난 뒤 즉위한 단종이 아직 어려 왕권이 탄탄하지 못했기 때문에, 정치적 입지가 어느 정도 있던 수양대군이 자칫 오해받으면 목숨이 달아날 수도 있는 상황이란 것도 있었을 것이다. 어쨌거나 '내가 왕이 되고 싶어서'나 '내가 목이 달아나기 전에 선수쳤다'고 할 수는 없기 때문에, 억지로라도 명분을 만들어내려면 '당시는 혼란한 시기였다' 그리고 '저놈들은 천하의 간신이었다'고 폄훼할 수 밖에 없었다.

2.8. 법 체계 파괴

일례로 들 수 있는 것이 몇 가지 있는데, 그 중 하나는 조선의 법 체계였다. 이전의 법 체계에서는 법 조문이 있으면, 왜 이런 법이 만들어 졌는지, 어떤 논의가 오갔는지 이런 부분들이 먼저 기록되고 이후 이에 대한 처리 등이 나열되는 방식이었는데, 세조는 이런 방식이 답답하다고 여겨 이를 싹 잘라 버리고, 어떤 형벌에 해당하는 죄는 무엇 무엇이고, 형량은 어떻다 라는 식으로 깔끔하게 보이도록 정리했다. 하지만 이는 당장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으나 시대가 흐름에 따라 문제가 점점 생기게 되었는데, 시간이 좀 지나자, 이런 조항은 왜 생겼는지, 왜 이렇게 조치를 취하게 되어 있는지 이 부분을 전부 다 잘라 버려 오히려 왜 이런 이야기를 해야 했는지를 찾는데 시간이 더 걸리고 업무 처리에 효율이 떨어지게 되는 문제를 가져왔다.

당장 자신의 시대에서야 사람들이 왜 법 조문이 만들어 졌는지 당사자들이니 알고 있으나, 이후 세대를 고려한 정보들을 모두 날려버림으로써 문제를 가져온 것. 당장 세계의 황당한 법 조문이라고 만들어진 인터넷 문서를 봐도 시대 상황이 바뀐 상황에서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법들이 보인다. 문제는 이런 조문들이 왜 생겼는지 이유를 안다면, 현실에 맞게 개정하거나 삭제하는 등의 조치를 취하기 쉬운데 이 부분들을 날려 버렸으니 법률 체계에 문제가 생길 수 밖에 없다.

2.9. 근시안적인 안목

또한, 그 자신이 왕권 강화를 위해 펼친 정책들 또한 얼마나 그가 근시안적인 안목을 갖고 있었는지 보여준다. 가장 대표적인 문제가 공신 문제. 평생 그가 싫어하고 비판했던 인물들인 한고조, 송태조와의 공신 처리 문제를 보면, 그가 갖춘 정치력이 얼마나 형편없는 것인지가 드러난다. 공신 세력을 어떻게 처리하느냐는 군주의 통치에 있어 상당히 중요한 문제가 된다. 국가 운영에 큰 지분을 가진 이들은 군주에게 있어 정치적인 부담이 될 수도 있고, 힘이 되어줄 수도 있다.

자신의 할아버지와 마찬가지로 한고조는 숙청을 통하여 자신의 왕권을 확보하였고, 그가 유약하다고 비판한 송태조는 배주석병권을 통해 그들의 부귀는 보장하면서 정치적 권력에서는 떼어놓는 온건한 방식으로 공신들을 처리하였다. 덕분에 그들의 후대는 기존의 공신 세력에 대한 부담 없이 정치를 할 수 있었다. 물론 한고조부인 문제로 좀 골치가 썩었으나. 반면, 세조는 오히려 이런 공신 집단을 키워 강력한 왕권을 구축했는데, 이들 집단이 제거되지 않아, 이후 아들, 손자 대에 왕권의 제약과 옥사가 일어난 것을 보면, 얼마나 그의 안목이 근시안적인 것인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애초에 명분없는 쿠데타를 한 것부터가 만악의 근원이지만...[44]

3. 긍정적 평가

3.1. 공납 개선

공납은 페단이 심한 정책이었다. 일단 공납이 고을에 분정되고 그 다음 고을 내에서 어떻게 분정하는지는 안 정해서 대체로 약한 사람들에게 부담이 커지는 폐단이 있었다. 세조는 공납 분정 기준을 토지 8결 단위로 나누어서, 가난한 사람들은 공동체로 묶어서 공물 공동 상납하게 했다. 반면 노비를 소유하면 노비 인구에 비례해서 토지가 더 있는것으로 계산해서 대토지 보유하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공물 상납이 누진세화 되게 만들었다. 세조는 또한 대납을 전면 허용해서 저 8결 단위 납세 조직을 그대로 활용, 8결 단위로 대납가를 똑같이 내게 만들었다. 대납할 때 상인들이 폭리를 취하려고 가격 사기 못 치게 대납가를 정해놓는 등 공납의 폐단을 상당히 해소했다고 볼 수 있다. 이런 긍정적인 일이 별로 스포트라이트를 받지 못한 이유는 바로 다음 왕 자기 아들 예종이 개혁을 없애버리고 옛 공납의 방식으로 회귀시켜버렸기 때문이다.

4. 결론 및 총평

호불호가 여러모로 엇갈리는 군주로, 어떤 관점으로 보느냐에 따라 폭군과 패륜아라는 부정적 평가와 왕권 강화에 노력한 긍정적 평가까지 그야말로 다양한 평을 받고 있다. 다만 폭군 타이틀을 떼려면 치세나 업적이 저런 행적을 무마할 정도로 출중해야 하는데, 물론 세조의 치세가 나쁜 건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훌륭했다고 보기도 애매해서 재평가에 걸림돌이 되고 있다. 특히 조선시대 통들어 가장 정통성이 부족한 군주였다는 점도 그의 평가를 낮추는데 일조하고 있으며, 심지어 평가할 가치가 없는 인물로까지 인식되고 있다.

세조는 왕위찬탈이라는 정치적 정당성의 결여 이외에도 장기적인 국가 전략이나 정치 계획을 세우는 능력이 너무나 부족했던 탓도 있다. 후대에 큰 부작용이 따를 소지가 큰 정책들을 별다른 대안과 협의도 없이 무작정 실행에 옮겨버렸고, 그것이 민생에 직접적으로 큰 부담을 주었다는 것도 세조의 부정적 평가에 기인한다.[45]

아버지 세종이 가까스로 완성시켰던 혁신적인 정치 문화와 우수한 제도를 일거에 뒤바꾼 세조의 행태는 지적하지 않을 수 없는 치명적인 실책들 중 하나다. 아버지 세종대왕과 형 문종은 국가 시스템을 굉장히 중요시한 군주들이었다.[46] 집현전 등을 통한 지속적인 학자 배출과 토론을 통해서 안정적인 국가 체제를 구축했고, 이를 통해 조선 특유의 관료제를 긍정적인 쪽으로 강화시켰다.

세종과 문종 치세에는 신하와 군주가 상하일치하여 신하들은 군주를 존경하고, 군주는 신하들을 예로 대하여 국가의 발전을 위해 서로 상생하며 나아갔다. 하지만 그 뒤를 이은 세조는 조선의 정승이자 고명대신들인 김종서, 황보인을 비롯한 수많은 뛰어난 원로 인재들의 목숨을 함부로 빼앗았고, 그 목을 저잣거리에 효수하는 기행을 저질렀다. 이는 실로 세종과 문종이 쌓아놓은 인의의 정치 시스템의 실질적인 붕괴를 뜻하는 것이었다.

같은 묘호를 가진 수양제와 여러모로 비슷한 모습을 가진 군주로 볼 수 있다. 실제로 두 군주는 친족을 살해하는 패륜을 저질러 찬탈하고 여러 실책을 남겼다.

5. 당시 백성들의 인식

당시 조선 백성들에게 세조에 대한 평가는 상당히 좋지 않았다. 백성들은 어린 나이에 아무 죄도 없는데 시해당한 단종을 크게 연민[47]하고 있었고 계유정난(세조의 반정) 공신들의 악행을 말리지도 않는 세조를 잔혹하고 무자비한 인물로 인식하고 있었다.

당장 계유정난의 공신 중에는 권력을 이용한 재산강탈이나 기타 만행을 서슴지 않는 자가 더러 있었고, 홍윤성과 같은 끔찍한 살인마도 존재했다. 이 때문에 당시 조선사회 전반에는 세조를 부정적으로 묘사하는 수많은 소문이 생겨났다. 대표적으로 조카 단종의 어머니이자 형 문종의 아내였던 형수 현덕왕후가 세조의 꿈에 나타나 침을 뱉었더니 그 자리에 피부병[48]이 생겼다는 것과, 단종이 이른 나이(16~17세)에 죽자 분노한 현덕왕후의 혼령의경세자를 죽게 했다는 소문이 있다.

그 외에도 의경세자의 죽음에 분노한 세조가 현덕왕후의 관을 파내어 바다에 수장시켰다는 소문이 나돌거나[49] 단종의 친조카이자 경혜공주의 장남 정미수를 세조가 죽일까봐 정희왕후가 여장을 시켜서 자라게 했다는 등, 세조 치세 동안 세조가 무자비한 사람이라고 생각될만큼 달갑지않을만한 소문이 계속 쌓여만 갔다. 현덕왕후의 소문은 세조가 형수였던 현덕왕후의 시신을 인 현릉에서 파내어 물난리가 나는 곳에 이장해 버렸던 실제 역사적 사실에 기인한 것이기도 하다.

6. 야사

많은 야사에 등장하는 임금이기도 한데 그 야사의 대부분이 그의 왕위찬탈과 그로써 비롯된 일과 관련된 내용이다. 아래의 문수보살 이야기나 수종사의 설화처럼 그에게 호의적인 내용도 조금 남아있지만 그런 일부를 제외하면 거의 대부분이 그의 잘못과 그로 인한 인과를 다룬 내용이며, 그 중에는 정축지변 전설처럼 그의 추악한 인성을 부각시키는 이야기도 있다. 무엇보다 세조와 관련해서 그나마 남아있는 긍정적인 야사조차 왕위찬탈을 대놓고 정당화하는 내용은 아니다.

고양이 문수보살 일화도 그렇다. "왜 자객이 세조를 암살하려 했을까?" 라는 질문을 던져본다면 일단 세조 개인에게 원한을 가진 자가 있다는 반증이 되어버린다. 조선의 대부분의 독살설의 주범으로 지목되는 이들이 권력 쟁취를 이유로 하는데 비해 자객이 직접 세조를 암살하려고 했다는 대목, 그러나 그 배후에는 아무도 없었다는 부분을 보면 자객은 결코 권력욕으로 세조를 죽이려던 건 아니었던 것이라 추정할 수 있다. 그럼 권력욕이 아니라면 실패하면 사지가 뜯겨 죽을 일을 왜 하겠는가? 답은 간단하다. 세조를 죽일 수만 있다면 그런 건 간단히 씹어먹을 정도로 매우 증오하기 때문이었을 것이고, 그 배경은 이루 말할 것도 없다.

라이벌 김종서와 엮어서 (현덕왕후의 저주로 생긴) "피부병을 치료하기 위해 온천을 찾아갔더니 거기의 아낙네가 사실 아버지를 비난하다 궁을 떠나버린 세조의 딸이었던데다 그 남편이 계유정난 때 살해당한 김종서의 손자였더라" 라는 야사도 있다. 야사의 끝에 따르면 세조는 그 사실을 알고 너그러워져서 자신이 죽인 김종서에 대한 속죄 같은 의미로 그 김종서의 손자를 정식으로 부마로 맞으려고 했지만, 딸 부부는 소식을 끊고 어디론가 사라졌다고. 이 야사를 기반으로 만들어진 드라마KBS2 드라마, 《공주의 남자》다.

6.1. 불교 관련

다만 숭불 정책 때문인지 불교와 관련해서 세조를 긍정적으로 보는 야사도 많이 남아있다. 대표적으로 등에 종기가 난 세조가 온천을 찾아가 어떤 동자승에게 등을 밀어달라고 한 후 동자승에게 "내가 왕이니 등을 밀어줬다는 것을 비밀로 해라."라고 하니 그 동자승도 "당신도 문수동자가 등을 밀어줬다고 알리지 마십시오."라는 말을 해 사라져버렸고, 깜짝 놀란 세조가 자신이 본 문수동자의 모습을 그림과 조각으로 남겨 상원사에 맡겼다든지, 불당에 절하는데 고양이가 나타나 자객을 알려줘서 그 보답으로 상원사에 양묘전을 내렸다든지, 속리산 법주사로 갈 때 가마 걸리지 않게 가지를 들어다 준 소나무가 기특하다며 정2품의 품계를 내려줬다든지 하는 속리산 정이품송 소나무 야사도 있는데, 이는 불교를 숭상하던 세조의 모습을 보여주는 동시에 위의 야사들이 보여주는 세조의 나쁜 면모를 희석시키기 위해 의도적으로 만들어졌다는 이야기도 있다. 게다가, 세조의 후원을 받는 불교로서는 이런 인식을 좋든 싫든 널리 퍼뜨려야만 했을 것이다. 영화광대들: 풍문조작단》은 이 설화들이 세조와 한명회의 사주를 받고 연출한 프로파간다라는 설정으로 만들어졌다.

그리고 다른 야사에서는 세조가 강원도에 위치한 오대산을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해질녁이 되어서야 경기도 양주목 양수리에 도착하였다. 세조는 속리산을 비롯해서 오대산에 이르기까지 지난날 과오를 속죄하고 자신의 말년을 괴롭힌 피부병을 치료하기 위해 전국의 명산대찰들을 찾아서 부처님께 예를 올리고 한양으로 돌아가던 참이었다. 세조의 행차는 화려하지 않았고, 세조가 머무르는 행궁 주위인 남한강북한강이 한곳으로 모이는 양수리(두물머리)의 아름다운 저녁노을을 바라보다가 잠에 들었다. 잠이 든지 얼마 지나지 않아 맑고 청아한 종소리가 들렸는데 세조는 "행궁 근처에 큰 사찰이 있음이 분명한데 어찌하여 대신들은 사찰이 있다고 얘기를 하지 않았냐"며 의아해 하였다. 다음날이 돼서야 찾아보라고 일렀지만 대신들은 "이곳 인근에 종소리가 들릴만한 절은 없다"며 말을 했지만 강 건너를 찾아가 보라고 하였다. 행궁을 떠난 대신들이 한 나절이 지나서야 뜻밖의 이야기를 했는데, "강 건너에 있는 산은 운길산이고, 산 정상 가까이에 그리 깊지 않은 동굴이 있으며 동굴 앞에 절터의 흔적은 있으나, 이미 폐허가 되어 사찰의 모습은 온데간데 없고 동굴 안은 열여덟분의 나한님들이 가지런히 조성되어 있었다"고 얘기해주었다. 대신들이 무엇보다도 동굴 앞에 가까이 이르니 십팔나한상 앞쪽의 천정에서 물방울이 일정한 간격으로 떨어지니 그 소리가 큰절에서 듣는 아름다움의 범종소리와 흡사하다는 보고를 받고 세조는 "그 소리가 내 귀에만 들렸으니 분명 나한님들의 조화일 것이다"며 길을 직접 잡고 경건하게 참배하였다.

참배 이후 앞에 펼쳐진 광경을 보고 '신묘한 조화로 자신을 이곳까지 오게 한 그 신력에 감복'하고 "이곳이 절터이나 나한님들의 계시가 분명하다"며 속히 절을 짓게 하였다. 절 이름은 물방울 소리가 종소리로 울려 퍼진 뜻을 새겨 수종사라 함이 좋은 듯하다고 명을 내리고 두 그루의 은행나무를 심는 등 세조에 있어 불교가 직접적으로 연관, 관련이 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7. 현대의 평가

재미있는 점은 정권이나 정파에 따라서 세조를 보는 관점이 상당히 다르다는 것이다. 대한민국의 현대사를 보면 세조와 비슷한 쿠데타로 정권을 획득한 사례라고 볼 수 있는 5.16 군사정변, 12.12 군사반란 등으로 집권한 정권이 있던 시절엔 잔혹한 숙청을 저지르기는 했지만 권신들로부터 왕실을 지켜낸 필요악적인 존재라는 평가가 대세였다.[50]

물론 군사정권 시절에 무조건 세조를 옹호하던 사람들만 있었던 건 아니었고 비판하던 사람들도 있었다. 대표적인 사례로 고우영 화백은 만화에서 아예 세조의 별명을 '쿠데타 리'라고 붙였다.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아예 5.18 당시의 전두환에 빗댔을 정도인데 《단종실록》을 100% 신뢰하고 세조의 행적을 보자면 그야말로 구국의 영웅 그 자체다. 그리고 그것에 맞추기 위해 말 같지도 않은 소리도 했다.[51][52]

똑같이 쿠테타로 왕이 된 인조는 왜 군사정권이 미화하지 않았냐는 의문을 제기할 수도 있는데, 인조의 경우 삼전도의 굴욕이라는 최악의 흑역사 때문에 군사정권조차도 차마 미화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높다.[53] 청나라에게 허무하게 굴복인조롤모델로 삼는 건 합법적으로 집권한 지도자에게든 쿠데타로 집권한 지도자에게든 똑같이 말도 안 되는 일이었을 테니 말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쿠데타의 명분은 세조보다 인조가 훨씬 충분했다.

세조를 미화하는 사극 대다수가 계유정난을 정당화하면서 정작 세조의 진짜 업적들을 다루는 데에는 소홀했던 것도 아이러니한 점이다. 설령 다루더라도 내레이션으로 때우는 등 매우 짧고 간략하게 이루어지는 경우가 대다수였다. 어쩌면 군사정권의 세조 미화가 세조가 왕위에 있을 때 남긴 진짜 업적들을 부각시키기보다는 자신들의 쿠데타를 정당화하는 차원에서 계유정난 자체를 세조의 최대 업적으로 여기는 식이었기에 세조를 미화한 사극들 또한 그 영향을 받은 것이었을 수도 있다.[54]

제대로 된 민주주의 정권이 들어선 1990년대에도 오명을 감수한 구국의 결단자라는 식의 평가가 대세였다. 이는 세조 즉위 이후를 다룬 김동인의 역사 소설 대수양 같은 작품들의 영향도 있었고, 결정적으로 1990년대엔 《조선왕조실록》의 완역이 진행 중이었던 데다 《단종실록》과 《세조실록》을 곧이 곧대로 해석하면 이런 평가가 나올 수밖에 없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1990년대에서 2000년대 초반까지는 세조를 미화하는 사극들이 많이 나왔고 이러한 사극들을 접한 대중들에게 세조에 대한 이미지는 나쁘지 않았다.

따라서 문민정부이자 하나회 숙청과 민정계 공천 탈락으로 유명한 김영삼 정부 시절엔 세조가 많이 비판받지 않았다. 김영삼 정부가 하나회와 신군부를 싹이 다시 피어나지 못하도록 싸그리 숙청하기는 했지만, 김영삼 자신이 3당 합당으로 보수정당 소속이 된 면도 있고 문민정부 때만 해도 권위주의 정권의 잔재들이 상당히 많이 남아있었기 때문이다.[55] 국민의 정부 시절도 역시 정권교체가 이루어졌기 때문에 군사정권과는 관계는 없지만 권위주의 정권의 잔재가 제법 남아 있었던 측면도 있었으며, 더군다나 김대중 자신이 당선을 위해 자유민주연합과 연정해야 했기 때문에 군사정권이 고평가해 놓은 세조를 무작정 부정적으로 평가할 수 없었다. 그래도 세조의 계유정난에 명분이 없다는 인식이 조금씩 퍼지기 시작했다.

21세기에 들어와서는 본격적으로 세조에 대한 부정적 평가가 확산되면서 대중적 이미지가 추락했다. 《조선왕조실록》이 완역되면서 《단종실록》과 《세조실록》이 한글화되어서 접근성이 높아졌는데, 여기에서 세조와 공신 세력들이 자신들과 관련된 역사를 어떻게 미화하고 조작했는지에 대해 그 진면목이 고스란히 드러난 것이다. 여기에 권위주의를 부정한 참여정부가 들어서고 노무현 탄핵 사태로 인해 기성정당에 대한 불신이 확산되었으며, 17대 총선으로 인한 정치인들의 세대교체도 더해지면서 2000년대 중반부터는 세조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가 많이 퍼졌다.

각종 역사 카페와 인터넷 커뮤니티가 발전한 2010년대부터는 계유정난 뿐만 아니라 군주로서 능력적인 부분에서도 잘못된 부분이 많았다는 혹평이 급증했다. 일각에서는 '군사정권에 의해 거품만 잔뜩 꼈고 정통성은 물론 업적과 인간성도 0에 수렴하는 암군' 수준으로 급격히 격하되었고, 잘 굴러가던 초기 조선의 정치 시스템을 무너뜨린 파괴자로서 헬조선의 발판을 만든 인물 중 한 명이라는 극단적인 악평까지 듣고 있다. 현재도 '세조(世祖)'라는 묘호가 이 사람에게 너무나 과분하다면서 수양대군 내지는 수양으로 낮춰 부르는 사람들이 상당히 많다.[56]

그래도 2000년대 ~ 2010년대엔 21세기 이전에 세조를 미화하는 작품들을 자주 접해 온 기성세대들을 중심으로 세조를 부정적으로 보지 않는 시각이 어느 정도 남아 있었기 때문에 세조 미화 사극들이 꽤 나왔고, 세조가 비록 잘못은 많이 있을지언정 그의 업적만큼은 최소한 인정해 주자는 주장도 있었다. 하지만 2020년대에 들어서는 그 업적들마저 싹 다 부정당하고 있는 중이며, 세조를 비판하는 사극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고, 나아가 중장년층들 사이에서도 세조의 평판은 대체적으로 부정적이다.[57][58]

의외로 정치 성향이 보수적인 사람들 중에서도 세조를 싫어하는 사람들이 제법 있다. 당연하지만 보수 분파 중 하나가 왕당파인데, 세조는 왕당파의 지상 윤리인 정통성을 완전히 말아먹은 패륜아다. 유교적 논리로 도저히 옹호가 불가능한 만행을 워낙 많이 저질렀기 때문에 평가가 바닥을 기는 것도 전혀 이상하지 않다. 이런 시각을 가진 사람들은 위의 수정주의적 시각에서 한 술 더 떠서 아예 수양도 아닌 이유라는 (이름)를 그대로 부르며 왕족으로도 인정하지 않겠다고 하는 경우도 있다.

비슷하게 집권한 할아버지 태종 이방원이나 당태종처럼 정치력과 여타 능력이라도 좋았다면 그나마 명군으로 평가받을 여지가 있었겠지만, 조선 후기 사회적 적체의 원인을 대부분 자신이 제공했다는 점 때문에 더더욱 비판을 받는다.

종합하자면 민주화 이후 한동안은 단순히 군사정권 시절 쿠데타 이미지 때문에 억지로 고평가를 했던 데에 대한 반발로 "잔혹한 숙청과 그에 대한 정당성" 정도의 인식에 머물렀다. 반면 2000년대 중반 이후의 평가는 복합적으로 변화했으며, 특히 형 문종과 조카 단종의 정통성을 중시하는 군주주의적 시각과 함께 잊혀졌던 문종의 업적이 재평가받는 반면 세조는 새롭게 재조명되면서 부정적 평가가 증가했다.

8. 태종과의 비교

세조에 대해서 할아버지 태종 이방원과 정말 많이 닮았다고 오해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 자신의 반대파의 거두와 혈육들을 죽이고 전대 왕으로부터 왕위를 양위받아 즉위했으며, 무인의 기질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문에도 능통한 능력자라는 점에다 강력한 왕권 확립을 추진했다는 점이 겹쳐서인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세조는 태종의 격세유전이라기보다는 능력은 매우 떨어뜨리고 폭력성과 잔혹성만 잔뜩 키운 태종의 열화판이라는 표현이 가장 잘 어울린다. 한 마디로 잔인함은 태종보다 심하고 능력은 태종보다 한참이나 모자랐다. 또한 세조는 실질적으로 왕권을 약화시킨 장본인이다. 세조의 업적은 대부분이 왕권 강화책인데 이미 강력했던 왕권을 계유정난 일으키는 데 꼴아박아서 그 왕권 강화책을 쓰고도 원래보다 오히려 약해진 거다(...).

그러니 왕권을 강화하며 신생국가의 기틀을 다지는 막중한 책무를 성공적으로 완수하여 '태종(太宗)'의 묘호를 받은 이방원공신들의 힘이 비대해지도록 두어 결국 장기적으로 왕권이 흔들리게 되고 선조들(태조, 태종, 세종, 문종)이 피땀흘려 일군 조선이라는 나라의 근간을 송두리째 흔든 수양대군할아버지를 닮기는커녕 정반대의 길을 간 인물이다. 단순히 쿠데타를 일으켰다라는 점만 놓고 비슷하다고 하는 건 어불성설. 심지어 그 쿠데타도 명분 면에서 너무나 차이가 크다.

다른 왕과 비교하자면 태종은 자기 이복형제는 죽였으나 동복형제는 자신에게 칼을 겨누었음에도 살려 주었고, 오히려 아버지인 태조 이성계가 아들인 태종을 죽이기 위해 조사의를 시켜 반란을 일으키자 그나마 태종을 싫어했던 이들마저 모두 지지하는 쪽으로 입장을 바꿨다. 사회악이었던 동복형제걸림돌이었던 이복형제를 죽인 광해군도 자의는 아니었을지라도 계모는 죽이지 않았다. 심지어 연산군마저도 자신의 최후를 예측하고도 이복형제를 살려주었다. 반면 세조는 자기가 보필해야 마땅한 임금인 조카도 모자라 서모인 혜빈 양씨, 동복형제인 안평대군금성대군, 이복형제인 한남군과 수춘군 및 영풍군 등 자기에게 반대하는 일족들을 자비없이 싸그리 죽여버렸다.[59] 반면 태종은 이복동생 이방석이방번은 죽였지만 동복형인 회안대군과 정적이었던 정도전의 자손들은 살려주었는데 이는 쿠데타의 명분도 충분하거니와 당시 기득권층이 태종을 지지했고[60][61], 태종 본인 또한 뛰어난 정치력으로 이들이 다른 마음을 품지 못하게끔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62] 즉, '빈약한 정통성+집권층의 지지 결여+본인의 부족한 정치력'의 3가지 요인으로 인해서 세조는 조금이라도 역모가 의심되거나 연관성이 있다고 여겨지는 사람은 모조리 죽일 수밖에 없었다.

태종신덕왕후의 무덤을 이장한 건 맞지만 단순히 그녀에 대한 악감정 때문에 이장한 건 아니다. 고려 때까지만 해도 도성 안에 왕실의 무덤을 쓸 수 없었는데, 아버지 태조가 신덕왕후의 무덤을 조성해 만들 때 이를 따르지 않았기 때문에 문제가 있었다. 태종 입장에서 왕자의 난을 일으킨 이유가 신덕왕후의 배겟머리 송사로 인한 잘못된 세자 책봉 문제였기에 이방원 입장에서는 명분 수립을 위해 그녀를 일개 후궁으로 격하시킬 필요가 있었으나 아버지가 살아있을 때는 제대로 예우하지 않는 것에 그쳤을 뿐 무덤을 정동에서 지금의 성북구 근처로 이장한 것도 후궁 수준으로 완전히 격하시킨 것도 아버지 사후에야 했다. 형 정종과의 사이도 매우 좋았다. 즉, 세조가 조카와 형제들을 죽인 일은 정당한 이유가 전혀 없는 명백한 패륜이었다. 결과적으로 세조는 자신의 권력에 도전할 만한 존재는 송두리째 뽑아버린다는 방침 때문에 단 한치의 빈틈도 없이 철저하게 말살을 해버린 것이다.

8.1. 쿠데타의 명분 차이

태종의 쿠데타는 태조 이성계가 장자 계승의 원칙을 어겼다는 것과 건국 초기라 정국이 불안정하다는 명분이 있었던 반면, 세조의 쿠데타는 오히려 멀쩡한 의 정통성을 해치는 행동이 되었다. 태종의 쿠데타 명분이 장자 계승이라는 원칙에 근거한 반면 세조의 쿠데타는 권신 세력이 역모를 계획했다는 주장만 내세우고 있다. 우선 태종이 아버지 태조에게 항거한 이유는 어느 정도 명분이 있었는데 조선이 건국된지 얼마 안된 시점에서 후계자에게 필요한 것은 정통성임에도 태조는 정실부인 소생들인 태종의 첫째 형인 진안대군도 둘째형 정종도 아닌 정치에 아무 것도 모르는 새파랗게 어린 막내 아우 이방석을 세자로 책봉해 버린다. 그나마 나이가 어려도 유일한 적통이라는 식의 정통성이 있다면 이 책봉을 누구나 납득할 수 있었겠지만 이복형들도 정실 부인의 소생들이라 이방석유교 왕국 조선에서 보더라도 태조의 2번째 정실인 신덕왕후차남이라 정통성이 뛰어나지 않았고 태조의 일방적인 독단으로 세자에 책봉된 것에 불과했다. 결국 태조가 조선을 건국하는데 큰 공을 세우고 능력도 출중했던 태종이 크게 반발한 것. 태종이 반란을 일으켜 시가전까지 벌였던 동복형제를 어떻게든 살리려고 편법까지 동원하였고 숙청한 정적 정도전도 정도전의 자녀와 아우들도 살려주고 나중에 벼슬길도 다시 열어주는 관대함을 보였다.[63] 또한 본인이 쿠데타를 일으켰던 명분인 장자 계승의 원칙을 지키기 위해 둘째형 정종의 양자로 들어갔다.

반면, 세조는 동복형제부터 본보기로 죽였으며 이미 죽은 (현릉)까지 능욕했으니 똑같은 패륜이라고 보더라도 클래스 자체가 다르다. 나이는 어리나 정당하고도 확고한 왕위 계승 자격[64]을 가진 조카 단종을 강압적으로 몰아내고 개인의 욕망만으로 왕위에 오른 명분이 전혀 없는 찬탈이었다. 세조의 왕위 찬탈에 대해 세조 사후 시간이 흘러 세조의 후손들이 계속 왕에 즉위한 후에도 세조의 찬탈에 대해 조선에서 계속 논란이 끊이지 않았고 무오사화의 원인으로 작용하기에 이른다.

시중에 발간된 어떤 책에서는 태종과 비교하며 세조를 변호하기도 하지만 애시당초 권력을 잡는 과정에서의 정통성의 유무부터 권력을 잡은 이후의 행보까지 도저히 태종과는 비교할 수 없는 패륜과 무능의 극치를 보인다. 심지어 그 책에서는 심리학적으로 분석해보면 수양은 양위를 원하지도 않았는데 단종이 지레 겁먹어서 양위를 했다고 하는 말까지 하며 세조를 변호하지만 말도 되지 않는 소리다. 양위 이전에 수양대군이 여러 관직을 독식하여 단종을 꼭두각시 왕으로 만들고 정치적 후견인이라 할 수 있는 안평대군, 금성대군, 혜빈 양씨유배 보내는 등 “네가 물러나지 않으면 가만히 있지 않겠다”는 제스처를 보냈다. 이미 권력을 다 빼앗은 다음에도 계속 이와 같은 압박을 하면서 양위받을 생각은 없었다니 상식적으로 이해가 가지를 않는 부분이다. 이는 다른 선위의 예와 비교해 보아도 알 수 있는데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을 참고해 보아도 태조양위를 받는 부분과 비교해보면 태조는 3일 동안 왕위를 사양한 반면[65] 수양은 거의 덥썩 받는 수준임을 알 수 있다. 1~2마디 사양이야 하고 있지만 이 상황을 문자 그대로 읽지 않는 한 세조가 왕위를 받을 마음이 정말 없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8.2. 국왕으로서의 역량 차이

이 부분에서 태종과 세조 사이의 평가가 극명하게 갈린다. 앞서 한계점을 거론하는 단락에서 나오는 그 수많은 실정은 세조의 이 일방주의 성향에서 기인하고 있다. 특히 세조가 명분도 없이 자신의 권력을 공고하게 하기 위해 이것 저것 핑계를 대며 친족을 학살한 것은 씻을 수 없는 오점이다. 집현전을 없앤 것만 봐도 더욱 잘 알 수 있다. 물론 사육신 문제도 얽혀 있었겠지만, 사실 수양대군은 아버지의 지지부진해 보이는 장기적 정책 연구를 단순한 탁상공론이라고 치부해버렸다. 게다가 그는 집현전을 고비용 저효율이라고 단정지었다. 이것이 이어져 결국 피를 보고야 만 게 바로 치세 말년에 일어난 이시애의 난이었다.[66]

그렇다고 세조의 업적들을 간과할 수는 없겠지만 그가 지나치게 냉혹하고 권력에 유난히 병적으로 집착하는 성격을 가졌던 탓에 저지른 실책과 과오들이 그 업적을 덮고 남을 정도로 굉장히 심각하다. 특히나 정당성을 지금보다 몇십 배로 따졌던 유교를 통치 이념으로 세운 조선 왕조에서 그의 왕위 찬탈과 형제들을 무차별적으로 죽이는 살육 행위는 당시 관점으로도 공으로 덮기에도 부족할 정도로 무척 심각한 문제였다.

또한 유사한 방식으로 집권한 할아버지 태종과의 정치적인 안목과 역량의 차이도 두드러진다. 태종이 외척은 처남이고 사돈이고 역모를 생각했던 이유로 제거하고, 공신인 이숙번을 후계자에게 방해되지 않게 귀양을 보냈던 반면 세조는 자신의 최측근 공신인 한명회를 자신 인생의 참모이자 친구라는 명분으로 잘 대해주고 그것으로도 모자라 혼인 관계까지 맺어 외척으로 만들어주었다는 점에서 두 사람 간의 차이를 알 수 있다.[67]

8.3. 업적 차이

태종은 이후 국왕이 되면서도 조선의 기반을 단단히 쌓는데 밑거름 역할을 제대로 해냈다. 우선 왕권 강화를 위해 자기 아내 원경왕후 민씨와 민씨 가문의 권력 남용이 발생하자 민씨 가문을 거의 멸문지화할 정도로 싸그리 쓸어버렸고 아들 세종을 즉위시킬 때 아무 죄 없는 세종의 장인 심온까지도 누명을 씌워 숙청할 정도였다. 물론 민씨 가문과 심온은 사형당할 정도로 큰 죄가 없었는데 죽인 것이라서 도덕적으로는 큰 비판을 받지만, 적어도 결과적으로는 후에 세종과 문종태평성대에 안정적으로 통치하는데 큰 이바지가 될 확률이 높았고 무엇보다 실제로도 그렇게 되었다.[68] 하지만 세조는 한명회사돈까지 맺어가며 공신들을 방치하고 큰 권력을 줘서 훗날 후대에 훈구 세력이 형성이 되어 왕권이 약화되는 원인을 직접적으로 제공했다.

태종은 국왕으로서의 자질을 건국 전부터 가지고 있었고 자신이 싫어하는 것들에 대해서도 필요하다고 생각되면 이를 인정하고 받아들인 반면, 세조는 전혀 그런 모습도 없었고 아예 이러한 것들을 받아들일 노력조차 하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대신들의 횡포와 부패를 견제할 언론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사관을 싫어함에도 사관의 권한을 인정하고 대신들이 사관을 압박하는 것을 막아준 임금이 바로 태종이다. "(태종 본인이) 말에서 떨어졌다는걸 사관이 알지 못하게 하라"는 발언[69]을 그대로 사관이 《조선왕조실록》에 남긴 유명한 사례도 태종 시기의 일이다.[70] 반면, 사관의 활동이 가장 위축된 시기가 세조인데 찬탈 이후 조선을 어떻게 이끌 것인가에 대한 거시적인 시각이 전혀 없었음을 알 수 있다. 세조만 눈치 보면 나머지는 꺼릴 게 없었던 훈구파 권신 세력이 엄청나게 성장하여 세조 사후 예종을 거쳐 성종조차도 왕위 서열에서 밑이었음에도 장인어른이 한명회이기 때문에 왕이 될 수 있었다.

인사 정책의 차이도 있는데 태종은 왕권에 위협이 될 만한 공신들을 숙청해서[71] 아들과 손자인 세종문종에게 강력한 왕권을 부여했고 공신들도 함부로 전횡을 부릴 수 없었으며 백성들에게 존경을 받았다. 그러나 세조는 자신을 도와준 공신들이 죄를 범하였어도 홍윤성의 예를 보듯 너무 오냐오냐하게 관대하고 신상필벌을 흐지부지하게 하며 그들의 전횡을 묵과하여 백성들에게 비판을 받았다.[72]

세조는 정책적으로도 선대들의 업적을 큰 비전 없이 다 없애버리는 등 장기적 안목도 부족하다는 비판이 있다. 세조의 잘못들이 즉시 크게 문제가 터지지는 않지만 근본적으로 잘못되어 있어 여러 왕을 거치며 오랜 기간을 지나는 동안 크게 악화된다는 것이다. 특히, 조선 전기 암운의 근원이던 연산군의 폭정, 중종의 잦은 옥사와 정치 혼란의 배경을 살펴보면 세조가 원인 제공을 했다는 평가가 있을 정도였다.


[1] 이걸 실책으로 판단할 수밖에 없는 것이, 개국에 공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멀쩡히 첫 부인 소생의 장성한 아들들이 여럿 있었다. 설사 장남이 없었다고 해도 차남을 세자로 책봉했어야 했는데 그 대신 둘째 부인의 둘째 아들에게 왕위를 넘기려고 했다.[2] 정종 이방과는 적자가 없었기 때문에 형제승계의 명분이 충분했고, 셋째 형 이방의와 넷째 형 이방간이 모두 자의로든 타의로든 태종 이방원에게 후계자 자리를 '양보'하면서 형제들 중 막내라는 입지상의 문제도 해결했다. 특히 이방간은 하필이면 먼저 무력을 행사했다가 다른 사람도 아니고 태조 이성계의 분노를 사면서 이방원의 집권에 결정적인 명분을 제공했다.[3] 당장 조선의 후대 왕들 중 선조, 철종, 고종이 그런 식으로 왕위에 오른 사례다.[4] 사실 셋째형 익안대군 이방의도 있었지만 그는 눈꼽만큼도 야심이 없었던 인물에다 지병이 있어서(제2차 왕자의 난에도 병중에 있었다. 심지어 태종 즉위하고 겨우 4년 뒤 죽어 신의왕후 소생 6명 중 3번째로 죽었다.) 제치는데에 문제는 없었다.[5] 그리고 예종의 양자로 입양된 것 또한 절차상 문제가 없어서 보통 양자로 가는건 집안의 장남 이하였기에 보통은 장남인 월산대군이 아니라 차남인 성종이 양자로 가는게 맞긴 했다. 물론 예종에게 자식이 있었던게 흠이긴 한데 다행히 그 자식이란 사람이 당대 소문난 바보인지라 문제는 없었다.[6] 심지어 후일 정통성이 굉장히 취약했던 효종 역시도 부족한 정통성을 유학자들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군주상을 보여주어 극복하려고 했던지 재위기간 내내 금주, 절제, 성실 등 처신에 굉장히 신경을 많이 썼다. 어쨌든 왕의 장남이었던 현종이 아버지와는 달리 경연을 꽤 소홀히 했고 왕의 적장자, 적장손이던 숙종은 내키는대로 산 것을 감안하면 큰 차이점이다.[7] 물론 이러한 실록을 칼을 든 채로 대놓고 감시한다는 것 자체가 세조 본인이 자신의 왕위 정통성을 흔드는 역린 행위이므로 눈에 띄게 감시를 하는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래도 목에 칼 들이대면 장사 없다는 사실만 명심해두자.[8] 거열형으로 죽었다. 말 그대로 조카사위를 찢어죽인 것이다.[9] 현덕왕후는 남편 문종이 즉위하기 전인 세자빈 시절 먼저 죽었고, 남편 문종이 현재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에 위치한 동구릉 경내에 모셔지기 전에 현덕왕후는 현재 경기도 안산시에 소재한 '소릉(昭陵)'이란 곳에 묻혔다. 이후 문종이 1452년 재위 2년 만에 죽고 동구릉에 모셔지면서 현덕왕후의 능도 이장하여 합장하였다.[10] 다른 사람 기준에서는 복위 운동.[11] 초대 군주인 태조의, 그 정실 소생 적자인 태종의, 그 정실 소생 적자인 세종의, 그 정실 소생 적장자인 문종의, 그 정실 소생 적장자(단종 본인)인 완벽한 적손이다. 그야말로 적자&적손+장자&장손+원손+세손+세자+왕이라는, 조선 역대 왕들 중 순도 100% 정통성을 자랑한다.[12] 계유정난 때 살해당한 신하들과 세조의 찬탈 과정에서 살해당한 왕족과 비빈들, 단종복위운동을 계획한 사람들에게도 죄는 없으며, 죄는 수양대군과 그 일파에게 있었을 뿐이다.[13] 세조를 비롯한 공신 세력들은 김종서의 행렬에 많은 사람이 모인거나 황보인과 김종서의 아들이 특진을 한 걸 꼬투리 잡기는 했지만 당시에는 흔한 일이었고 그 외에 치부 사실이 없다. 최대한 지어내서라도 흠을 만들려고 했을 텐데 없다는 건 정말로 김종서가 치부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외려 치부나 부정부패는 공신들이 훨씬 더 심했는데 행렬에 사람이 많고 아들들이 특진한 것은 애교로 보일 정도로 말이다.[14] 성녕대군은 세종의 하나뿐인 동복 친동생이자 세조의 조부모님들인 태종과 원경왕후 사이 막내아들인데 다른 형제들과도 나이차가 많이 나는 늦둥이라서 그런지 끔찍히 귀여워해서 결혼 후에도 궁궐에서 끼고 살았을 정도. 병약해서 14살에 죽고 말았는데 죽을 즈음에 당시 충녕대군이었던 세종이 동생을 살리려고 어의들과 함께 의서를 연구하고, 곁에서 밤낮으로 간호할 정도로 세종도 몹시 아꼈던 동생이다. 그래서 자기 아들 안평대군을 자식 없이 죽은 동생의 양자로 보낼 정도였는데 이런 짓을 저지른 것이다.[15] 양녕대군의 인성이 워낙 막장급이었던 것도 있지만, 그 역시 세조처럼 왕권 강화를 지지하는 유형이어서 그랬을 거라는 의견이 있다. 아니면 설령 양녕대군이 실제로는 수양대군의 처신을 좋게 보지 않았다더라도 이미 수양대군이 계유정난 이후 거슬리는 자들은 친족도 포함해서 싹 잡아 죽이고 있었으니, 이런 무서운 상황에서 제대로 살아 남으려면 그의 편에 하루빨리 붙어야 한다고 생각해서 우호적인 태도를 취한 것일 수도 있다.[16] 사실 인조는 광해군에 의해 자신의 가족이 풍비박산났던지라 개인적인 원한이 매우 컸던 사람이었다. 물론, 인조가 자비로워서 안 죽인 게 아니라 죽일 명분이 없어서 못 죽인 것. 달리 말한다면 친척이자 전 왕이라는 사실이 명확했기에 원수였던 광해군을 죽이지 못했다는 것이니 세조의 막장성을 부각시켜주는 사례라고 볼 수 있다.[17] 게다가 광해군은 세자 시절 임진왜란에서의 분조로 일부 신하들의 지지를 받던 사람이었다. 만약 명분 없이 전쟁영웅인 광해군을 죽였다면 인조 또한 반정으로 몰락할 수 있는 빌미를 제공하는 셈이다.[18]세조실록》 9권, 세조 3년(1457년, 명 천순(天順) 원년) 10월 21일 (신해) 2번째 기사. #.[19] 이는 영락제도 하지 않은 행동으로 정난의 변으로 집권한 영락제는 먼저 황제로 추존되어 있던 형을 태자로 추탈시키고 조카도 실종시키고 그의 재위기간중에 있었던 건문 연호를 무효화시키긴 했지만 그 외엔 특별한 조치를 하진 않았다.[20] 사실 단종의 국혼 자체도 세조가 억지로 밀어붙인 것이었고, 정작 당사자였던 단종은 아직 부왕인 문종의 국상이 끝나지 않았다는 이유로 국혼을 성사시키는 것에 대해 부정적으로 보았다. 하지만 실권은 이미 영의정이었던 수양대군의 손에 있었기 때문에, 그는 이러한 단종의 의사를 씹어버리고 진행시켰으며, 이미 제멋대로 송현수의 을 중전으로 낙점해서 간택을 진행했다. 따지고 보면, 이 또한 형인 문종에 대한 패륜이나 다름이 없었다. 사실 금성대군과 혜빈 양씨 일파도 이런 수양대군을 견제해서 간택령 때 규수 한 명을 천거하지만 이게 오히려 나중에 빌미가 되어 수양대군에게 숙청당한다.[21] 태종과 세종도 일부 측근의 비리를 봐주긴 했지만, 태종은 왕권에 위협이 될 수준이라면 모조리 숙청했다. 세종은 일단 전모부터 밝혀서 잡을 놈은 잡은 후, 유능한 놈은 처벌하지 않는 대신 끝까지 부려먹었다. 반면에 세조는 비리를 제대로 밝히지도 않았고, 대국적인 정치적 고려를 한 것도 아니었다.[22] 물론 세조 입장에서 보면 홍윤성을 숙청할 이유가 없었다.[23] 일단 왕권vs신권이라는 개념 자체가 다분히 도식적인 이분법이다.[24] 세조는 이시애의 난을 토벌하고 개최한 연회에서 대놓고 신공신들을 찬양하고 구공신들을 모욕하는 시를 짓는 등 자신의 의도를 뚜렷이 드러냈다.[25] 제안대군은 나이가 겨우 4살밖에 안 되었고 월산대군은 그나마 당시 15살로써 충분히 즉위할 자격이 됐지만 어릴 때부터 병치레가 잦았던 약골이었다.[26] 권신 한명회의 딸이 바로 성종의 정비 공혜왕후 한씨다.[27] 다만 개국 이후 일어난 수많은 정변들로 인해 누가 잇든 불안할 건 변함없으니 차라리 든든한 후견인을 지닌 인물을 세울 필요가 있었다는 의견도 있다. 그런데 이 역시 원인이 또 계유정난이다.[28] 이들 친위 세력들 중에는 세조 말기에 등용된 신공신들이 많았는데 성종도 친정 이후 신공신들을 자신의 친위 세력으로 두었다. 현석규, 허종, 정난종, 성임, 채수, 허침 등이 그 예시다. 특히 그 중에서도 현석규가 성종의 총애를 가장 많이 받았다. 그 외에 구공신인 임원준의 아들 임사홍과 왕실의 인척 박중선, 무관 출신 어유소, 영남 유학자 출신 홍귀달도 있었다. 다만 이 시기의 신공신들은 세조 말기의 신공신들과는 결이 달랐는데 세조 말기의 신공신들은 남이, 강순, 귀성군 이준 같이 무관이나 종친들이 다수였던 반면에 성종 시기의 신공신들은 대다수가 문관이고 구공신들과도 적대를 하지 않았으며 처신에 신중하였다. 박중선은 구공신 가문들과도 인척이었으며 홍귀달 역시 구공신들과 친하게 지냈다.[29] 이 시절의 사림은 현실적인 정책보다 이상적인 명분론에 집착해 쓸모없는 꼬투리를 잡는 상소와 탄핵만 줄창 올려대서 성종의 뒷목을 잡게 했다.[30] 다만 성종이 친정을 시작하자마자 한명회에게 대놓고 면박을 주고 신경전에서 승리해 그의 권력을 위축시키는데에 성공하는 등 아무 성과도 없지는 않았다. 고려시대의 이자겸처럼 공신들의 권력이 왕의 재위를 위협할 정도로 비대해진 건 아니었던 것.[31] 이는 미국의 대표적인 한국사 학자인 제임스 팔레 교수가 주장하는 조선시대 노비 인구 증가의 핵심 원인이다.[32] "우리 나라의 인민은 무려 1백만 호(戶)나 되는데 그 중에서 활을 잘 쏘는 병졸이 30만 명이고 정예(精銳)한 병졸이 10만 명이며, 용감한 군사가 3만 명입니다." 출처: 《세조실록》 40권, 세조 12년(1466년, 명 성화(成化) 2년) 11월 2일 (경오) 3번째기사. #.[33] 출처: #.[34]세조실록》 46권, 세조 14년(1458년, 명 성화(成化) 4년) 4월 9일 (무술) 1번째기사. #.[35] 봉족호. 조선에서 경제적으로 군인을 지원하는 가구.[36] 다만 이건 조선만의 문제점이 아니라 동시기 명나라도 마찬가지라서 당시 명나라군도 장부상 총병력 300만과 대조적으로 실제로는 그 징집병조차 10만을 버거워하는 모습을 보이며 그 10~20만의 병력조차 대부분질적으로 좋지 못한 병력들이었다.[37] 출처: https://gall.dcinside.com/mgallery/board/view/?id=alternative_history&no=308685&_rk=EYz&exception_mode=recommend&s_type=search_name&s_keyword=ula&search_pos=-304172&page=1[38] 계유정난[39] 봉족호. 경제적으로 군인을 지원하는 가구.[40] 그러나 상술되어 있듯 총통위 폐지 이유는 당시 지방군에도 화기가 널리 퍼지고 이에 따라 민간에서도 염초 개발이 활발히 이루어져 국가에서 관영 수공업으로 개발하는 것 보다 민간에서 사는게 더 나았기 때문이다. 화포 개발은 그와 별개로 이루어져 세조 이후에도 승자총통 같은 우수한 화약 무기들이 많이 나왔다.[41] 세조의 각종 실책들이 재조명되기 전(특히 군사정권)에는 단순히 집현전을 폐지했다고만 가르치거나 아예 집현전 폐지 자체를 훌륭한 업적으로 가르치기도 했다.[42] 집현전이 활성화 된 것은 어디까지나 세종 시절 한정으로 문종 대에 와서 활력이 떨어졌다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집현전을 폐지한 것을 옹호할 거리가 되지 못한다. 성종 대에 사실상 집현전의 부활 개념으로 설치한 홍문관이 세종 때처럼 인재 양성 기관이라기 보단 언론 삼사 중 하나로 머문 것을 봐도 알 수 있지만, 관학파 육성이란 것은 그렇게 쉽지 않은 일이다.[43] 공신들 중에 대표적으로 신숙주, 정인지, 한명회 등을 보면 답 나온다.[44] 앞서 본 한고조, 송태조의 경우엔 한고조 때는 한고조 같은 인물이 널려서 딱히 누가 더 낫다 할 수 없었고 송태조 때는 어차피 송태종 이전에 후당-후진-후한-후주 라인이 송태조 때와 거의 유사해서 별 문제는 아니었다. 즉 시대적 흐름이 그랬기에 자기가 그 자리에 앉은 것 자체가 "넌 왜 명분 없이 앉았냐?"라는 말을 들을 정도는 아니었다. 그저 각축을 벌이던 여러 사람들 중 통일왕조의 국부가 된 사람이 각각 한고조와 송태조였을 뿐이다.[45] 아이러니하게도 세조 역시 조부와 부친처럼 민생 문제 해결에 꽤 관심이 많았지만, 문제는 세조가 공신들의 힘을 너무 키워주면 공신들이 민생 문제 해결에 큰 걸림돌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간과했다는 점이다.[46] 비단 국가 뿐만 아니라 어떤 집단이든 시스템이 잡혀 있는지 유무는 대단히 중요하다. 왜냐면 시스템이 정상적이라는 것은 어떤 인물이 합류해도 집단만큼은 안정적으로 굴러간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집단은 겉보기엔 소수의 천재들로 훌륭한 성과를 내는 것처럼 보여도 그 천재들이 죽거나 은퇴하면 남아 있는 사람들과 새로 들어온 사람들은 생각보다 그들만큼 훌륭하지 못해 집단 전체가 몰락하는 건 한순간이다. 왜냐면 그 찬란한 성과들은 소수의 천재들만 이룰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세조 외의 다른 예를 들자면 정조 본인은 유능한 개혁군주였지만 그의 사후(死後) 조선은 급격히 망국으로 치닫았다. 마찬가지로 중국 당나라이임보가 죽자 당나라는 온갖 난들에 시달리고 어지러워지며 마찬가지로 쇠퇴의 길을 걸었다. 현대에도 창업주 또는 1세대 기업인들의 진두지휘로 탁월한 성과를 낸 기업들이 창업주 또는 1세대 기업인들이 은퇴하자 지지부진하는 예는 수없이 많다. 이는 정치권에서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고 할 수 있고, 관료계, 교육계, 법조계 등 어느 분야에서고 마찬가지로 다 적용된다고 할 수 있다.[47] 심지어 몇몇 지역에선 단종의 제사를 왕에게 올리는 예를 다해 지내기도 했고 산신령으로 숭배하기도 했다. 까딱하다 눈에 띄면 목이 달아날텐데도 말이다.[48] 이 피부병이 정확히 무엇이었는지에 대해 종기, 욕창, 한센병 등 설이 많은데, 특히 한센병의 경우 과거에는 하늘이 내린 천벌이라는 생각이 있었던 것을 생각하면 이 역시 세조를 부정적으로 여기는 민심이 반영된 것일 수도 있다.[49] 사실 이건 사실이 아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그런 소문이 나돌정도로 민심이 흉흉했다고 볼 수 있다.[50] 자유당이 정권을 잡고 있었던 시절에도 군사정권 시절만큼은 아니지만 세조는 약간이나마 미화되었다. 자유당 정권 또한 친위 쿠데타를 통해 독선적인 정치를 했기 때문이다.[51] 일개 종이 황보인, 김종서 등이 단종을 몰아내고 안평대군을 옹위할 계획을 다 알고 있다든가 중앙정계를 꽉 잡은 황보인, 김종서가 함경도에서 무기를 실어와 거사를 일으키려고 했다고 한다. 후자의 경우 당시 함경도 군권을 쥐고있던 이징옥도 김종서와 가까운 사이였기에 엮어서 숙청하기 위함이었기도 하다. 이 두 가지 일에 대해 전자는 어떻게 종이 계획을 다 알았는지는 고사하고 그 이름도 밝히지 못하고 있다고 깠다. 당연하지만 실제로 그랬다면 이건 역모를 고변한 것이나 다름없는 일이다. 물론 진짜 고변은 아닌 만큼 상을 받지는 못했겠지만, 그래도 이것이 사실이라는 것을 밝히기 위해서라도 최소한 이름 정도는 남기는 게 옳다.[52] 막말로 그냥 '황보인의 종'(실록에는 황보인의 종이라고 나와 있다. 관련 내용). 이보다는 '황보인의 종 아무개'가 더 신뢰성이 있어 보일 것이다. 심지어 그 종에게서 정보를 들었다는 종의 이름은 계수라고 버젓이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이 종은 누군지도 모르기에 진위여부가 의심스러운 것이다. 후자는 작가 멘트로 "걍 가까운 한양 무기를 쓰면 되는 거 아님?"이라고 깠다.[53] 반면에 세조는 외치에서 명나라 사절에게 뻗대고 여진족 추장인 이만주를 죽이는 등 인조 따위와는 격을 달리 했다. 다만 내치의 경우 상술한 내용 때문에 마냥 긍정적으로 보기는 힘들다.[54] 정하연 작가가 대표적이다. 세조 미화가 나오는 사극 자체는 현재까지 《장영실》이 마지막이지만, 해당 드라마는 마지막회 후반부에 와서야 세조가 미화되었기 때문에 작품 전반에 걸쳐 세조가 미화된 사극으로는 정하연 작가의 《인수대비》가 마지막이다.[55] 그리고 김영삼은 처음부터 하나회 숙청에 적극적이었던 건 아니었다. 하나회 숙청을 미리 계획해 둔 건 사실이지만, 처음엔 하나회의 핵심인물들만 잘라내려고 했다. 하나회 소속 장성들이 고려 시절 무신정변을 들먹이면서 김영삼을 뒤에서든 공개적이든 협박했기에 하나회를 쿠데타를 일으킬 위험분자로 보게 되어 하나회를 전부 숙청하게 된 것이다. 또한 군사정권 시절에는 비단 세조 뿐만이 아니라 무신정변을 일으킨 무신정권과 그들의 사병집단인 삼별초도 많이 미화된 편이었다. 하지만 어느 정도 업적을 가진 세조하고는 달리 무신정권은 고려를 망가뜨린 사실상 군대 내 마피아 같은 집단이라서 하나회가 무신정변을 언급한 것은 본인들의 자폭행위였다. 하나회도 사실 무신정권과 마찬가지로 군대 내 마피아나 다름없는 집단이었다.[56] 당장 '세조'라는 묘호부터가 그 세종보다도 더욱 뛰어나고 업적이 많은 군주에게 붙이는 묘호인데, 이것부터가 이미 아버지 세종을 욕보이는 묘호라는 평도 많은 편이다. 정확히는 세조의 아들 예종이 그런 묘호를 붙였으므로 예종 본인이 본의 아니게 할아버지 세종을 모욕한 꼴이다. 원래 받을 묘호가 신종, 예종, 성종이었는데, 신종이나 예종이기만 했어도 이 정도로 욕을 얻어먹지는 않았을 것이다.[57] 다만 세조를 비판하는 사극들 역시 세조를 직접적으로 비판하기보다는 주로 세조를 모티브로 한 가상 인물이 빌런이 되는 경우가 많다.[58] 세종~단종 시기 대체역사물도 대부분은 수양대군이 빌런으로 고정되어 있고, 이후 시대를 배경으로 한 작품도 뭐 하나 개혁하려고 하면 세조가 만든 적폐가 발목을 잡는 경우가 많아 '조선에서 이상한 일이 일어나면 십중팔구는 세조가 원인이다'라며 잘근잘근 씹힌다.[59] 세조가 동복동생들을 비롯한 친족들까지 싸그리 죽일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자신의 편에 선 것이 확실한 공신들을 제외하고는 믿을 만한 사람이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다. 정통성 자체에서 한참 밀리는 데다가 본인의 정치력 또한 뛰어난 편이 아니다 보니 태종처럼 친족들을 살려두었다가는 무슨 일이 일어날지 불안했던 것.[60] 사실 역사서에서의 평가 자체가 당대 관료층들의 의식이 반영되어 있기에 백성들의 관점에서 태종은 성군이라 볼 여지도 많은 편. 실제로도 태종은 백성들에게는 의외로 대인배라 말해도 이견이 없을 정도로 정말 너그러운 면모를 보였고 민생에도 여러모로 신경을 쓰던 군주였다.[61] 애시당초 함경도의 일개 무인 가문에 불과했던 전주 이씨를 당대의 명문가로 발돋움하게 만든 것도 사실 태종의 덕이 매우 컸다. 20세도 안 된 나이에 과거시험에서 급제를 했고 이를 바탕으로 수많은 학맥, 인맥을 쌓았기 때문에 이후 조선을 건국할 수 있는 기반이 되었던 것. 사실 이후 덕안대군도 과거에 급제하긴 했지만 요절했다. 비록 세자가 이방석으로 정해지기는 했지만 심지어 정도전조차도 가장 먼저 이방원의 이름을 거론했던 것도 이 때문이었다.[62] 게다가 왕위를 물려 받을 당시에는 형 이방과와 아버지 이성계가 엄연히 살아 있었기에 죽이기도 애매했다.[63] 태종이 정도전에게 씌운 죄명은 반역죄가 아니라 종친모해죄였다. 정도전의 장남 정진은 공조, 형조판서에 관찰사까지 역임하는 등 고관대작의 자리에 올랐다.[64] 세종 - 문종 - 단종 라인은 왕위 계승 서열 순도 100%를 자랑한다. 여기에 단종 본인은 문종의 장남으로서 원손 - 세손 - 세자를 거쳐 국왕이 되었다. 나이가 어렸으며 어린 왕을 지켜줄 세력이나 왕실 웃어른이 없었던 것이 정말 화근이었을 뿐이다.[65] 아무리 왕위 욕심이 있더라도 보통은 3일간 거절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충을 중시하는 유교 사회에서 권좌를 욕심내는 모습을 대놓고 보여준다는 것은 사대부들에게는 심각한 문제였기 때문이다.[66] 다만 이시애의 난은 형태와 정도만 다를 뿐 일어날만한 일일 수도 있다. 그도 그럴게 세조의 중앙집권화로 인해 전통적으로 그 지역의 토호들의 위세가 줄어들었고 이 때문에 토호들이 반발하면서 세조와 토호들의 분쟁은 필연에 가까웠다.[67] 태종도 하륜 같은 공신이 무수한 사고를 쳐도 끝까지 보호해준 적은 있다. 다만 이 경우는 태종 입장에선 공신의 대표격인 인물을 함부로 내칠 수 없기도 하거니와 어차피 20살이나 많은 만큼 왕의 권위에 도전하는 상황만 아니라면 시간이 해결해주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인간성 면에서 하륜은 한명회와는 비교 자체가 실례일 만큼 최소한의 선만큼은 넘지 않은 인물이기도 하다.[68] 본관이 청송인 심온의 숙청은 정치적으로 반드시 필요한 행위였다. 무려 이성계가 꾸준히 정치적 배려와 타협을 할 정도로 강대한 가문이었고, 이방원 조차 셋째 왕자와 혼인을 맺을 정도로 여전히 위세를 자랑하는 가문이 청송 심씨였다.[69]태종실록》 7권, 태종 4년(1404년, 명 영락(永樂) 2년) 2월 8일 (기묘) 4번째기사. #.[70] 물론, 태종이라고 사관을 핍박 안 한 건 아니라서 예를 들면 저 기록을 남긴 사관을 유배 보내기도 했지만 기록을 남긴 것도 유배된 사관이었을 정도로 사관들의 활동은 적극적으로 활발했다.[71] 다만, 유독 하륜만은 예외적으로 실언을 하거나 부정축재를 해도 경고로 그치거나 봐줬다. 아마 자신이 집권하는 데 정말 큰 역할을 해주기도 했고 무엇보다 나이가 많아서 아들 대까지 영향을 미치지 못할 것이라 생각한 듯하다. 물론, 하륜을 세조가 우대한 정난공신들과 비교하는 것부터가 하륜에 대한 모욕이지만 말이다.[72] 태종의 공신들도 이런저런 잘못을 저지르고 또 그걸 태종은 많이 봐주었지만, 최소한 인간말종급 악행은 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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