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혐성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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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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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17a74ec44ce50aa71.png
이 밈에 자주 쓰이는 짤방
아프가니스탄 내전을 다룬 게시글에서 인용된 짤이다. 훗날 이 작성자는 프레스 갱 편, 이란 편에서 다시 써먹었다. 이란 편 댓글에 따르면 제작자는 별 생각 없이 썼는데 밈이 되어서 당황스러웠다고 한다.
파일:Er Sorry_British Gov_West Bank.jpg
"어… 미안하게 됐수다."[1]
웨스트 뱅크 한 마을에 있는 이스라엘군이 설치한 분리 장벽에 영국 정부를 상징하는 왕관과 함께 그려진 그래피티
역시 세상에 흉악한 물건은 죄다 영국놈들이 만드는군요.[2]
― 《본격 제2차 세계대전 만화》 2권 중
1. 개요2. 배경3. 못 믿을 알비온4. 사례
4.1. 영국의 과오가 분명한 경우4.2. 논란의 여지가 있는 경우4.3. 개그성 밈인 경우
5. 반례 (긍정적인 사례)
5.1. 정치 외
6. 문제점
6.1. 시대착오적 관점6.2. 반서방 진영의 악용6.3. 서구에 대해서만 비판적인 역사관6.4. 부정확한 정보와 확증편향
7. 기타8.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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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혐성국()은 인터넷 역사 관련 커뮤니티, 포럼 등에 퍼져 있는 밈으로, 2018년부터 사용되기 시작했다. 대역갤, 패독갤 같은 역사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퍼졌다. 주로 19세기 이후에 제국주의 정책을 펴서 식민지를 착취하고, 더 나아가 현대 개발도상국들의 유혈 사태 등 내/외부 갈등의 단초까지 제공한 유럽 강대국들을 비판/풍자/조롱하기 위해 사용되는 말로, 대부분은 당시 제국주의의 선두주자였던 영국, 시기상 대영제국을 가리킨다.

어원을 해석해 보면 혐오스러운 인성 + 나라. 그 이전부터 흔히 인터넷 용어로 사용되는 혐성이라는 단어에 특정 국가를 가리키는 단서가 없듯 영국 외의 다른 제국주의 국가, 이를테면 프랑스[3], 19세기 제국주의를 넘어 중세의 베네치아 공화국이나 구유고 연방의 주자인 세르비아, 소련 붕괴 이후 구소련의 영광을 되찾기 위해 패권주의 외교를 보이는 러시아, 전세계를 상대로 야욕을 드러내는 중국 등 맥락에 따라 다양한 국가를 풍자하는 데도 사용되기 때문에 맥락을 볼 필요가 있다.

비슷한 말로 영국이 뭔가 안 좋은 일을 하면 '럭키 나치', '혐추장국'[4]이나 '별로 위대한 영국이 아니다' 라고 한다.[5]

해당 표현에 대해 대한민국 넷상에서나 쓰는 드립성 용어인 데다 제국주의 시대 국가들을 누가 더 나았네, 나빴네 진지하게 논하는 것부터가 의미없는 병림픽이니 진지하게 받아들일 필요가 없다는 의견도 있다. 하지만 스낵 컬처 형태로 1차원적이고 편향된 역사 이해 및 인식을 촉발하고, 해당 표현이 각종 매체를 통해 무비판적으로 재생산 및 확산되었다는 문제점이 엄연히 존재한다.

2. 배경

대영제국의 전성기인 19세기는 영국의 산업 혁명이 본격화되어 서구가 그 폭발한 국력을 비서구 국가로 돌리고 무력을 동원한 침탈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제국주의 사상이 팽배했던 시절이었다. 무력을 앞세워서 미개척지를 식민지화하고 자원을 수탈하는 건 웬만한 강대국이라면 기본 베이스로 세팅되어 있던 때였다. 사실 제국주의 시절 영국이 벌인 각종 만행은 프랑스, 독일, 벨기에, 네덜란드, 미국, 스페인, 포르투갈, 이탈리아, 러시아 등을 비롯해 식민지를 보유한 전적이 있던 서방권 국가들이나 웬만한 강대국이라면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전부 했던 행동이지만[6] 19세기 패권국으로서의 영국의 영향력과 본토 면적 대비 해외 식민지 영토가 가장 거대했기 때문에 더 주목받는 측면이 있다. 거기에다 영국도 일본과 똑같은 제국주의 섬나라라는 프레임과 현 패권국인 미국도 영국의 식민지였던 13개 식민지로부터 출발한 만큼, "미국의 제국주의도 뿌리를 따져보면 영국"이라며 끌어들이는 논리까지 더해졌다.

다만 역사에 대한 평가는 현대적 도덕적 관점이 아닌 당시의 보편적인 시대상과 배경 등을 고려해야 하며, 정확하지 않은 루머나 공과 중 과만 선택 열거하면 그 어떤 국가도 악으로 묘사할 수 있다는 점 역시도 유의해야 한다. 그러나 이것도 어디까지나 고려하라는 뜻이지, 과거에 벌어진 사건이 현대까지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친다면 현대의 관점을 아예 배제해서는 안 된다.

단적인 예로, 인터넷상에서 퍼지는 혐성국이라는 밈과 별개로, 정작 영국은 영연방을 통하여 구 식민지 국가들과 경제적/문화적/사회적/정치적으로 깊은 교류를 이어나가고 있다. 물론 피지배국들이 민간에서는 민족감정의 일환으로 영국을 비판하는 일은 많지만 영국과의 공식적 수교에서는 그런 감정을 접어두고서 일단은 깊은 교류를 이어나간다. 이것은 타 서유럽 국가들에 비해 그나마 식민지들의 평화로운 독립을 허용했다는[7] 역사적 맥락, 영국과의 교류를 통해 얻을 수 있는 이익 등 많은 요소가 작용하겠지만 하여간 타 식민제국과 비교했을 때 상대적으로 영국이 구 식민지들과 관계가 원활하다는 것은 분명하다. 이는 프랑스와 네덜란드가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도 식민지 독립 운동을 무력으로 탄압하고 전쟁까지 거쳤던 역사와 대비된다.

한국과 일본도 공식적인 외교 관계는 밀접한 편이지만 영연방 국가처럼 서로에게 대놓고 다중국적 취득 우선권이나 취업비자 우선권이나 거주자 투표권 부여 등 상호 특권들을 부여하지는 않아서 한국인들이 영연방의 개념을 쉽게 이해하기 힘들다. 영국과 함께 식민제국 투톱이었던 프랑스도 영국 못지 않는 혐성국으로 손꼽힌다. 실제로 프랑스 식민제국도 스케일은 영국에 밀렸을 뿐 타 열강은 가볍게 압도하며 아이티를 비롯한 아프리카권 식민지에서의 만행 수준은 영국만큼 악랄했다.

게다가 전후 식민지가 해체되고 나서 국제 무대에서 영향력은 크게 약해졌지만 그 이후에 국제 외교에서 식민지에 관해 트러블을 별로 만들지 않은 영국과 달리 프랑스는 끝까지 식민지를 포기하지 않고 옛 식민지 국가와 전쟁까지 불사하다가 끝내는 패전한 역사가 있는데도 현재까지 과거 식민지 국가의 내정에 대놓고 간섭하는 제국주의 시절의 외교를 유지하기 때문에 영국이 제국주의 건으로 비판받을 때 프랑스도 세트로 비판받으며, 영국이 '혐성국'으로 불리는 것처럼 프랑스도 현시대 중화인민공화국 못지않은 패악질로 인해 '유럽 짱깨'로 불리기도 한다.

주로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혐성국' 드립을 꺼낼 때 주 소재는 보통 현 패권국인 미국이 중동, 남미에 저지르는 쿠데타 사주, 통수, 갑질이나 과거 패권국이었던 소련위성국에 저질렀던 패악, 21세기 중국동남아시아와 아프리카에 저지르는 사채놀음 및 아시아 일대에 저지르는 문화침탈 등 유사 제국주의적 정책, 그리고 파룬궁, 위구르, 티벳에서 현재진행형인 인권 탄압보다는 18~19세기 제국주의 시대 영국을 필두로 서구(주로 영국과 프랑스)가 행한 중동, 아시아, 아프리카를 나눠먹은 각종 밀약, 다중계약, 통수들의 역사이다.[8] 상술한 중국은 현대 국제사회에서 세계구급 민폐를 양산하고 있기 때문에 단순한 조롱성 밈을 넘어 깊은 혐오가 동반되어 조리돌림을 당한다. 미국은 민주주의/밈이 혐성국 드립 역할을 맡기도 하지만 종종 좋은 뜻으로 쓰이는 경우도 있다.

요즘은 영국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서 서방권 대부분 국가의 제국주의 시절도 인터넷에서 비난의 대상이다. 때문에 인터넷 커뮤니티를 돌아다니면 "아프리카가 친중/친러인 것과 중동 난민 문제는 100% 서방권의 자업자득"이라는 반응도 존재하며 이슬람권 출신 난민과 이민자들 중 몇몇이 유럽에서 테러, 살인, 성폭력을 일으키면 이슬람을 경계하자는 반응이 나오기도 하지만 유럽 제국주의의 업보라고 조롱하기도 한다.[9]

한국뿐만 아니라 해외에서도 도덕적 감수성과 정치적 올바름의 확산과 함께 과거 제국주의의 대표격 이미지 국가로서 영국에 대한 비판 여론이 증가했다. 이는 영국에서조차 다를 건 없어서 조지 플로이드 사망 사건을 계기로 노예무역상의 동상을 강바닥에 수장시켜버리는가 하면 벵골 대기근과 관련 있는 윈스턴 처칠을 인종차별주의자라고 비난하기도 했다.

엘리자베스 2세가 사망했을 때 옛날에 영국의 식민지였던 나라의 일부 네티즌들이 조롱하기도 했다.# 다만 SNS 등의 현지 일부 누리꾼의 의견을 일반화하는 것은 오류로서 일례로 반영 감정이 심하다고 알려진 아일랜드조차 엘리자베스 2세의 붕어 소식에 총리와 대통령의 공식적인 조의 및 정부청사 역시 아일랜드 국기를 내리며 애도를 표시한 바 있고# 2011년 엘리자베스 2세의 아일랜드 방문 당시엔 아일랜드 국민의 77%가 여왕을 환영한다는 여론조사 결과에서 보듯 생각한 것만큼 일반 대중들에게 이미지가 나쁜 편은 아니었다.# 200년 간 영국의 식민지였던 인도는 9월 11일을 '국가 묵념의 날'로 지정하며 붕어에 애도를 표시한 바 있다.[10]

여담으로 이러한 혐성국 드립과는 정반대로 제국주의를 재평가하는 수정주의적 역사관이 서구에서는 2000년대부터, 한국에서 관련 서적의 번역은 2010년대부터 나타나기 시작했다. 관련 대표 학자는 니얼 퍼거슨인데, 정작 한국 인터넷에서는 그에 맞물리는 시기에 본 항목의 혐성국 드립 등 제국주의 비판이 대두한 관계로 비판의 대상으로 굴러 떨어졌다.

3. 못 믿을 알비온

역외국가(offshore state)로서 이런 장점에 대한 영국의 자유로운 활용은 많은 유럽의 대륙국가들이 배신자 알비온(Perfidious Albion)이라고 비난한 이유이기도 하다. 허풍전략(bluffing strategy)의 매력은 위기나 갈등순간이 역외국가가 철수하기에 가장 호소력 있는 때라는 점에 있다.

엘브리지 콜비, 거부전략, 47P
유럽에는 이와 비슷한 못 믿을 알비온[11](Perfidious Albion)이라는 표현이 있었다.# 섬나라라는 특성을 적극적으로 활용해 유럽에서의 절대적인 강국의 출현을 막는 영국 특유의 외교전략은 자연스럽게 다른 유럽 강대국들에게 눈엣가시와도 같았다. 이에 영국에 대한 적개심을 불러 일으키고자 하는 다른 유럽 국가들에 의해 사용된 표현이다.
Attaquons dans ses eaux la perfide Albion.
(그녀(브리튼)의 바다(Waters)에서 못 믿을 알비온을 무찌르러 갑시다!)
불신의 알비온이라는 표현은 히메네스의 후작인 오귀스탱이 1793년에 쓴 시의 구절로 퍼졌다는 것이 정설이다. 해당 표현은 프랑스 혁명 당시에 등장했다. 프랑스 혁명이 초기에 영국식 자유주의 입헌군주제를 수립하는 것을 목표로 했을 때 많은 영국인들은 혁명에 우호적이었다. 그러나 프랑스의 왕정이 전복되고 1793년 1월에 루이 16세가 처형되면서 혁명의 노선이 공화주의로 전환되자 영국의 여론은 혁명에 부정적으로 변했다. 뒤이어 프랑스 국민공회가 2월에 영국과 네덜란드에 선전포고를 하자 영국은 유럽의 다른 군주제 국가들과 대불동맹을 맺으며 완전히 혁명과 갈라서게 된다. 이 과정에서 많은 프랑스 지식인들이 불만을 가졌고 불신의 알비온이란 표현을 만들게 된 것이었다.

이후 불신의 알비온은 영국과 대립한 여러 국가들이 영국의 이미지를 깎아내리고 자신들에게 여론을 유리하게 만들 목적으로 자주 사용되었다. 이 표현을 사용한 대표적인 국가 및 인물들은 다음과 같다.

4. 사례

4.1. 영국의 과오가 분명한 경우

4.2. 논란의 여지가 있는 경우

(1914년 오스만 제국의 베이루트 빌라예트와 예루살렘 산자크의 범위)}}}

1. Vilayets of Mersina and Adana: we renounce our insistence on the inclusion
(메시나와 아다나 빌라예트에 대해: 우리는 이 영토에 대한 주장을 포기합니다)

1. Two Vilayets of Aleppo and Beirut and their seacoasts: refusing the exclusion since they are purely Arab Vilayets, and there is no difference between a Moslem and a Christian Arab
(알레포와 베이루트 빌라예트 및 그들의 해안가에 대해: 이곳은 순수한 아랍의 빌라예트이며, 무슬림과 기독교계 아랍인 사이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기 때문에 배제를 거부합니다.)
― 1915년 11월15일 후세인이 맥마흔에 보낸 편지
원문을 보면 후세인은 자신이 구상하는 아랍왕국이 기본적으로 빌라예트를 기초로 계획 했음을 알 수 있는데[47] 그는 1) '알레포와 베이루트 빌라예트 및 그들의 해안가 지역'은 아랍의 땅이라며 배제를 완강히 거부한 반면, 2) 팔레스타인(현재 이스라엘)에 해당하는 오스만의 독립적인 특별구역인 '예루살렘 산자크\'(Mutasarrifate of Jerusalem)에 대해선 일말의 요구가 없었는데, 이를통해 그는 자신이 구상하는 아랍왕국의 최남단 끝이 베이루트 빌라예트까지 이며 팔레스타인에 대해선 아랍의 영유권을 처음부터 주장하지 않았음이 비로서 명확해진다.[48][49]

더더욱 확실한 증거는 아랍의 국경을 논의하기 위해 하심가의 아들이 아랍 대표로서 참가한 20세 초 파리평화회담 기록에서도 나타나는데, 국제연맹의 회의록 기록에 따르면 여기서도 하심가는 팔레스타인에 관해 “팔레스타인이 가진 만국적인 성격으로 인해 다양한 이해당사자들을 고려할 때, 이지역은 특별히 제외하고 아랍의 영토를 요구했다” 라고 기록하고 있다.[50] 결국 파리 평화회담 및 후세인의 11월 15일자 편지기록 이라는 객관적이고 부정할 수 없는 역사적 1차 자료가 존재함에도, 이런 역사적 사실을 배제하고 20세기 오스만 지도만을 보고 개인의 단순한 추측을 통해 해당지역을 산자크 (sanjak)라고 말하는 것은 터무니 없는 해석이다. 근래 이스라엘과 주변국의 관계는 수니파의 수장국인 사우디가 이스라엘이 유대인의 영토임을 인정하고 # , '이집트, 요르단, UAE, 바레인' 등과도 평화협정 체결 및 합동 군사훈련을 하는 등 관계는 과거에 비해 크게 개선된 편이지만 팔레스타인과의 관계는 아직도 요원한 상태이다.

4.3. 개그성 밈인 경우

5. 반례 (긍정적인 사례)

반면 영국이 세계사에 긍정적인 기여를 많이 한 것도 사실이다. 세계 최초/외국의 경우 항목을 보기만 해도 고대 이전이라면 이집트, 중세 이전이라면 중국, 근대 이후에 인류 역사에서 가장 필요한 물건의 발명은 영국과 미국, 독일이 대부분 했을 정도. 몇몇 아래의 서술은 혹자에 따라 식민지에 대한 옹호로서 들릴 수도 있다. 그러나 홍콩, 싱가포르, 인도 등 식민지 관계 및 인식은 나라마다 각기 상이하며, 실제로 공과 사를 모두 인정하는 역사관을 가진 나라도 상당하다.[69] 따라서 이를 어떻게 바라보는가는 나라마다 별개의 차원에서 접근해야 하며, 이를 한일관계에 그대로 동치시켜 단지 식민지였다고 하여 모든 것을 부정만 할 수 있는 성격은 아니다.

5.1. 정치 외

파일:600px-Historic_world_GDP_per_capita.svg.png파일:산업혁명.jpg
1,40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 세계 1인당 소득추세 변화 산업혁명 이후 평균 소득변화
* 산업혁명 - 18세기 영국에서 시작된 산업혁명을 기점으로 인류의 인구와 생산량이 폭증하게 되었다. 사실 이전 수천년간 크게 늘지 않던 세계인구는 1650년에서 1850년 사이에 연평균 증가율이 두 배가 되었고, 1920년대에 다시 두 배, 그리고 1970년대에 다시 한 번 두 배가 되었다. 경제적인 관점에서도 수천년 인류사는 크게 두번의 터닝포인트를 뽑을 수 있는데, 하나는 채집 및 수렵 사회에서 농경사회로 진입한 것이며, 다른 하나는 농경사회에서 산업사회로 진입한 것이었다.[80] 초기 빅토리아 시대엔 심한 빈부격차, 아동노동 등 어두운 면모가 있었지만 영국은 노동법, 노동조합, 구빈법, 아동노동보호법, 산업복지 등 사회개혁을 통해 통해 그것들도 해결했다. 그렇게 영국에서 가장 먼저 사회주의 혁명이 일어날 거라던 프리드리히 엥겔스의 예측은 빗나갔다. 영국의 산업혁명 촉진에 대해 식민지가 얼마나 중요했는가 문제에 대해서 논의가 다양하나, 일반적인 인식과는 달리 인도의 면화산업 정도를 제외한 대다수의 식민지는 만성적자 상태였다. 유럽의 산업화에 필요한 동력과 금속자원의 공급이나, GDP에서 식민지의 수출-수입이 차지하는 비율도 매우 낮은 것으로 조사됐다.[81]

만약 산업혁명이 아니었다면 세계는 지금도 농업이 주류 경제 시스템으로서 봉건제를 유지하거나, 유럽과 미국 정도를 제외하면 세계 대다수는 저개발 지역으로서 매우 낮은 부가가치 창출과 함께 왕과 귀족 같은 일부계층을 제외한 대다수의 인구가 극빈층으로서 단순히 생계유지 정도의 생활수준을 유지했을 가능성이 높다.

이 영상을 시청하자. 영국이 침략전쟁을 일으킨 것도 있지만 어떤 식으로 세계사에 도움을 주게 되었는지 요약했다.

6. 문제점

6.1. 시대착오적 관점

20세기 독일이나 일본처럼 하나의 국가, 하나의 민족에만 기초해서 제국을 세우고자 하는 나라들은 실패하였습니다. 반면 몽골, 로마 제국, 영국은 다양한 민족과 종교를 국가 체계의 토대로 삼았으며 성공했습니다.
― 잭 웨더포드 미국 미네소타 주 매칼래스터 대학교 인류학과 교수
영국이 활동한 18~19세기는 제국주의가 기승을 부리던 시절로서 열강의 식민지 확장과 삼국시대처럼 전쟁으로 인한 영토확장과 축소가 보편적이던 시절이었다. 현대와 같은 민족국가는 20세기 초 우드로 윌슨민족자결주의 이후 형성된 개념으로서 그전까지는 세계 대다수는 다민족 제국 및 전제 군주국가 혹은 유목민이나 부족사회 상태였다는 것을 감안해야 하며, 현대의 도덕적 기준으로 보면 전근대 이전엔 세계 대부분의 나라들이 야만적이던 혐오의 시대 시대라는 것을 감안해야 한다는 관점이다.

가령 노예제는 영국을 콕 집어 비난할 수 있겠지만, 19세기 후반까지를 노비제를 유지한 조선을 비롯해 전세계가 보편적으로 이런 사회구조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과 영국이 그나마 노예제 철폐를 위해 선구적으로 노력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얘기는 달라진다. 고대부터 가장 분쟁이 많았던 지역 중 하나인 중동의 문제를 모두 영국 탓으로 귀인하나 역사란 것은 어느 특정시점에만 고정되는 것이 아니며, '종교갈등, 독재, 반인권, 극단주의 세력, 자원분쟁, 미소 대리전' 문제 등이 복잡하게 얽힌 현대까지를 입체적으로 봐야 할 것이다. 미국이 한반도에 삼팔선을 그었으니 한반도 모든 분쟁의 원인은 미국 탓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은 소수이며 급진적으로 평가받듯이 기본적으로 '혐성국' 이니 '만악의 근원'이라는 프레임 자체가 매우 단편적인 넷상의 정보에 의존하는 일반화의 오류이자 비약일 수밖에 없다.

이러한 오류는 굳이 세계사에만 한정된 것도 아니다. 사람들의 가치관이나 시대상은 빠르게 변하기 마련인데 무려 수백년 전 역사를 평가함에 있어서 시대상을 고려해야 한다는 것은 역사의 기본자세이다.
파일:US interventions.png
2차대전 이후 미국이 개입한 세계분쟁 지도

만악의 근원이란 말은 다르게 보면 그만큼 당시 영국의 영향력이 그만큼 막강했다는 뜻인데 영국이 철저히 이익을 위해 행동한 측면 외에도 당시엔 현재 UN 같은 국제기구도 없었기 때문에[85] 초강대국, 패권국이라는 생리상 국제분쟁에 있어 중재자로서 영국의 입김이 클 수밖에 없었다.[86] 이는 현재 미국이 패권국으로서 '중국, 러시아, 북한, 필리핀, 베트남, 아프간, 이란, 베네수엘라, 리비아, 이라크, 시리아, 발칸반도, 쿠바, 남미' 등 사실상 전세계 모든 분쟁에 개입되고 있는 경우와 같다. 따라서 해당국가의 역사적 전후배경과 다양한 이해당사자들을 고려 없이, 중간에 영국이 개입된 부분만을 선택편취하여 모든 것을 귀인하여 비약하는 것이 과연 타당한가에 대해 회의적인 관점이 있다. 이는 근본적으로 미국이 현재 세계 가장 많은 분쟁에 개입한다고 미국을 혐성국이라 칭하며 세계 모든 분쟁의 원흉이라며 악마화하는 것에는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의 비율이 높은 것과 궤가 같다. 물론 미국에게 당한 국가의 국민 입장에서는 다르게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영국의 영향력과는 별개로 현재의 미국처럼 다른 나라가 패권국이 되었을 때보다 영국이 가장 나았다는 관점도 존재한다.[87] 기본적으로 영국의 식민지들 중에 그래도 상대적으로 경제나 민주주의 지수, 세계의 자유에서 발전된 나라들이 많으며 근대문명에 기여한 것도 많다는 것과[88] 20세기 이후 식민지들의 독립도 비교적 깔끔히 해결하였는데 기타 열강들의 사례와 비교하면 다음과 같다.

지금의 영국은 이와 같은 행보를 보이진 않고 있으며[98] 다른 식민지 열강들과 달리 21세기에도 영국의 구식민지들이 주축인 영연방 국가가 인구 약 24억명, 54개국에 의해 자발적으로 운영된다는 점을 고려하면 영국이 그나마 나았다는 관점이다.[99] 때문에 제국주의를 누구보다 혐오하며, 평소 영국의 제국주의를 비난했던 조지 오웰조차 기존 대영제국이 다른 제국주의 열강들보다 나았음을 시인했다. 대영제국이 가장 스케일이 커서 대표적으로 꼽히며 까일 뿐이지, 제국주의 시대 자체가 저러한 폭력이 난무하던 시대였다는 뜼이다.
나는 이미 제국주의는 사악한 것이며, 내가 일을 때려치우는 것이 빠르면 빠를수록 그것에서 더 잘 벗어날 수 있으리라 결심하였다.ˑˑˑ 이론적으로 나는 미얀마인들을 지지했고, 영국인들에 반대했다. ˑˑˑ 내가 하고 있던 일에 관해 나는 내가 표현할 수 있는 것보다 그것을 싫어했다. ˑˑˑ 그러나 나는 아무것도 전망할 수 없었다. ˑˑˑ 나는 영제국이 사멸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채지도 못했고, 영제국을 밀어내려 하는 더 젊은 제국들보다 영제국이 훨씬 낫다는 사실도 알지 못했다.
조지 오웰 - 《코끼리를 쏘다》 中

6.2. 반서방 진영의 악용

대동아 공영권을 주장했던 과거 일본 제국의 갖가지 학살과 범죄 행위 역시 명목상으로는 귀축영미로부터 아시아를 보호한다는 명분 하에 벌어졌다. 즉, 근대 영국의 제국주의를 언급하면서 자신들의 과거사를 덮거나 제3세계 수탈을 정당화하는 것에 악용하는 세력이 나와서 문제가 된다. 당장 라다비노드 팔이 극동국제군사재판에서 이러한 논리로 일본 제국이 저지른 범죄를 옹호하는 악영향을 주었다.

오늘날 유사 사례로 시진핑일대일로 외교 정책 등을 옹호하는 사람들이 과거 아편전쟁을 계속 우려먹는데, 중국은 티베트나 위구르 인권 탄압 관련해서도 "아편전쟁을 일으켰던 서구 제국주의자들은 중국의 정당한 영토권 행사에 참견할 자격이 없다."라는 주장으로 논점일탈성 논리이다. 위구르와 티베트는 아편전쟁과 하나도 관련이 없지만[100], 아편전쟁을 벌였던 영국이나 청불전쟁을 벌였던 프랑스가 중국을 비난할 수 없다는 논점일탈 피해의식이 중국인들을 내부적으로 결집하는데 도움이 되는 것은 사실이다.

게다가 중국의 해당 주장은 시대적인 맥락도 고려하지 않는다. 유럽/미국의 제국주의가 기승을 부렸던 19세기는 인종 차별제국주의, 약육강식 등이 당연스럽게 받아졌던 시대였지만, 지금은 전세계적으로 앞서 언급한 것들의 비인간성에 대해 규탄하고 인권, 평등 등이 주요한 아젠다로서 다루어지고 있는 21세기이다.[101][102] 즉, 중국은 21세기의 주요 국가들 다수가 공식적으로나마 목표로 설정하지 않는 제국주의적인 가치관을 시대착오적으로 들이밀고 있다는 문제가 있다.

러시아도 이와 같은 점을 악용한다. 푸틴의 측근인 구룰로프 장군은 "세계에 대한 위협은 앵글로색슨족으로부터 오는 것이 분명하다"며 세계 대전이 일어난다면 런던을 제일 먼저 타격하겠다고 위협했다.# 자국은 현재 우크라이나침공 중이면서 영국이 우크라이나를 지원한다는 이유로 적반하장적인 태도를 보인다.

6.3. 서구에 대해서만 비판적인 역사관

사실 영국을 비롯한 서구 열강 비판의 원류는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포스트모더니즘 사관 등의 수정주의를 거치며 더욱 강화되었다. 최근 미국을 예로 들자면 조지 워싱턴 등 과거 미국의 위인들을 노예주라고 비난한다든가, 아프리카 노예가 최초 미대륙에 도착한 날을 건국기념일로 지정하려는 극단적인 시도까지 존재한다. 심지어 조지 플로이드 사망 사건 당시 시위자들이 타데우시 코시치우슈코(노예제에 반대했던 폴란드계 미국인 겸 폴란드 독립운동가)의 동상을 막연히 노예주 동상이겠거니 생각해서 반달하는 사례가 발생해서 폴란드 대사관 트위터가 공식적으로 항의했다. 이런 상황에서 과거 제국주의, 인종차별의 논란이 있는 영국인들의 행적이 조명받고 이들의 동상을 세워진 것에 대한 반감이 높아졌다.## #

파일:역사상 사망자.jpg

가령 한국만 보더라도 서양의 아프리카 노예무역은 대중에게 잘 알려져 있으나, 그보다 훨씬 역사와 규모가 컸던 중동의 아프리카 노예무역이나[103] 유럽인들을 대상으로 3백년간 150~200만을 납치해 노예로 삼았던 이슬람의 크림 칸국이나 북아프리카의 무슬림 해적들에 대한 인지도는 터무니없이 낮은 편이다. 당장 바르바리 해적 문서를 보자. 마그레브 지역을 중심으로 하나의 해적국가처럼 굴러가던 북아프리카 지역은 1000년이 넘는 기간 동안 지중해를 떠돌며 수백만에 달하는 유럽인, 유대인, 심지어 지중해를 벗어나서 저 멀 리있는 영국인, 러시아인, 심지어 미국인들까지도 납치해 노예로 삼았다.[104] 21세기보다 세계의 절대적인 인구수가 지금보다도 훨씬 적었던 당시에 수백만이라면 상상을 초월하는 인구들이 납치된셈이다. 1,000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 노략질을 하다가 산업혁명을 통해 압도적으로 우수한 무기들을 보유하게 된 영국, 프랑스, 미국, 네덜란드등 서구 국가들이 1차 바르바리 전쟁 등으로 본격적으로 칼을 빼들기 시작하기 시작했고[105] 마침내 1830년에 프랑스가 저들의 본진이었던 알제리를 완전히 토벌함으로써 이들의 패악질도 막을 내렸다. 그뿐만 아니라 역사상 엄청난 규모의 학살과 잔인성으로 유명한 몽골 제국은 부정적인 면보다 오히려 그 용맹성과 진격전 속도, 그리고 서양을 침공한 동양의 상징성을 더 부각하는 등 한결 다른 태도가 존재하는 것도 분명한 사실이다.[106][107]

현대인들 사이에서 최근에 벌어진 사건이 과거의 사건보다 더욱 관심받고 언급 빈도가 높은 경향성은 있지만, 영국의 논란이 현재까지 언급되고 확산되는 이유는 들쑤시고 다닌 규모도 규모지만 그 시기가 국제화가 진행되는 시기라서 전세계 각국의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혀 있고, 영국이 어떤 일을 벌였는가에 대한 기록이 상세히 남아 있는 데다 밝혀지지 않았던 것들도 지속적인 발굴로 알려지고 공유되고 있으며, 영국의 제국주의적 행보로 인한 문제가 지금까지도 계속 영향을 끼치고 있기 때문이다.

6.4. 부정확한 정보와 확증편향

위의 여러 사례에도 서술되어 있듯이 통설로서 퍼져 있는 상당수의 정보가 부정확하며 실제 만물을 영국의 탓으로 몰아가기도 어려운 경우가 많다. 이는 기본적으로 대다수의 정보가 교차검증 없이 그저 단순히 신뢰성이 없는 한국 인터넷상 몇 줄짜리 짤방을 통한 학습이나 사람들의 확증편향을 통해 점점 확산된 점이 크기 때문이다. 일부는 한국의 네오나치, 일뽕 성향 유저들에게 악용되기도 했다. # 이는 타국의 매우 지엽적인 역사 문제에 대해 한글로 된 정보가 매우 제한적이라는 것과 평소 대중의 관심도도 떨어진다는 점, 그리고 스낵 컬처라고 불리는 단순 일회성의, 자극적인 컨텐츠 소비 성향 등이 원인으로 작용하였다.

전세계인이 참여하는 영어 위키백과만 하더라도 한국보다 훨씬 더 구체적인 정보와 신뢰성 있는 레퍼런스를 얻을 수 있는데, 실제로 같은 주제에 대해서 비교해 보면 한국에서 퍼진 통설과는 사뭇 다른내용으로 기술되어 있거나 한국의 악의적인 주장이 아예 없는 경우도 상당하다.

또 다른 문제는 정보의 확증편향이 있다. 인도양의 노스센티널섬처럼 외부와 아예 고립되어 살아온 섬이 아닌 이상 어느 나라나 현대적 기준으로 흑역사나 과오는 존재하며, 나쁜 것만을 부각시킬 경우 어느 나라나 악마화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는 대한민국의 역사나 위인에 대한 평가도 결코 예외가 아닌데 한국의 부정적인 면모, 예를 들어 보도연맹 학살 사건, 삼청교육대 등 과거 독재정권의 국가폭력이나 갑질, 똥군기, 사회복무요원, 노동권 침해 등의 문제들만을 제시하며 한국은 소수의 사악한 기득권층이 국민을 극심하게 탄압하고 학살하며 착취한 최악의 국가 중 하나라고 주장하거나, 역사 속에서 보자면 카르타고유대인 학살 등에 한정해 로마 제국을 평가하거나, 유고슬라비아 전쟁코소보 전쟁 당시 학살로 세르비아를 평가하거나, 인디언, 라틴아메리카, 베트남, 중동 등의 사례만 가지고 미국을 악마라고 평가하는 것이 부적절하듯이 공과 과가 모두 고려되어야 한다. 결론적으로 보다 객관적인 평가를 위해선 정보에 대한 최소한의 검증과정이 필요하며, 어느 나라나 나쁜 점만 선택 편취하여 열거할 경우 악마화가 가능하다는 점을 유의할 필요가 있다.

영국을 비롯한 현재 대부분의 선진국들, 강대국들이 제국주의 시절 전 세계적인 행패를 부린 건 부정할 수 없지만 유튜브와 인터넷 커뮤니티, 블로그 등에서는 검증되지 않은 출처 불분명의 왜곡된 정보나 당시 상황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단편적인 서술이 상당히 많은 것도 분명한 현실이다. 이 때문에 웹 상에서는 영국이라는 국가 자체가 악역의 캐릭터성을 어느 정도 부여받은 상태이며 많은 인터넷 매체들도 이에 편승한 컨텐츠를 쏟아내기 때문에 비판적이고 균형적인 시각을 구비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7. 기타

8. 관련 문서



[1] 본래 ER 은 Elizabeth Regina, 즉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을 뜻하는 모노그램이다. 이를 영어로 운을 뗄 때 쓰는 "Er…"와 엮은 말장난.[2] 히틀러 암살 미수사건을 다룬 에피소드에서 클라우스 폰 슈타우펜베르크가 가져온 암살용 플라스틱 폭탄이 영국제라는 것을 두고 그의 부관이 하는 작중 대사로, 플라스틱 폭탄 말고도 전쟁사에서 영국이 하도 흉악하고 무식한 물건을 많이 만들었다 보니까 밀덕계에서 널리 인용되고 있다. 지진폭탄뿐만 아니라 강력한 독가스인 VX, 블록버스터, 백린탄, 확산탄(클러스터 폭탄), 산소어뢰, 클레이모어, 전차, 수류탄, 맥심 기관총, 최초의 현대적 화학무기인 시안화카코딜탄도 영국이 처음 만들었고, 포스겐도 영국이 만들었다. 모두 대량살상무기. 또 해전의 판도를 바꾸는 것을 넘어 아예 한번 리셋해버린 드레드노트급 전함도 영국이 먼저 만들었다. 그리고 현대 해전에서 대체불가능한 함종인 항공모함영국이 최초로 만들었다.[3] 이쪽은 유럽의 짱깨라는 다른 멸칭으로도 불린다.[4] 영국 국왕피지피지 대추장직을 겸임한 데서 나온 말이다.[5] 어느 영국 이슬람 이민자 다큐멘터리에서 나온 표현이다. 무슬림들이 늘어난 영국의 한 지역에서 여긴 영국에서 독립된 샤리아 존임을 선포하고 이슬람으로 개종하지 않으면 샤리아 존에서 추방하고 샤리아 자경단들이 지역에서 영국 법을 무시하고 샤리아를 강제하자 한 시민이 "여기는 영국(Great Britain)이다"라고 말했는데 자경단이 "상관없다. 별로 위대한(Great) 영국이 아니다."라고 되받아쳤다. 다른 버전으론 "별로 위대한 논영이 아니다."가 있다.논영.jpg 반대로 6.25 전쟁 파병군 최초 투입 등 가슴이 웅장해지는 일을 하면 여기는 대영제국이라고 말하거나 참으로 위대하다! 등으로 말한다.[6] 심지어 약소국이었던 조선의 고종마저 대한제국을 선포하며 청일전쟁에서 청나라와 일본이 전쟁을 끝내고 청나라가 본국으로 돌아가자 간도를 점령해 영토로 편입하려고 시도했다.[7] 이는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영국의 국력이 추락한 측면이 가장 컸지만 이는 전후에도 식민지 고수에 집착한 타 유럽국가도 비슷한 상황이었고, 영국은 1931년부터 이미 웨스트민스터 헌장을 통해 식민지에 적어도 독립할 역량을 봉쇄할 수 있는 선에서 고도의 자치권을 부여하며 현재의 영연방의 모습을 만들어 나갔다.[8] 그러나 당시의 일이 지금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는 건수가 일을 벌인 건수만큼은 아니어도 상당하기에 마냥 과거의 일만으로 치부할 수는 없다.[9] 특히나 아프리카에서 옛 프랑스 식민지였던 국가들이 러시아를 가까이하고 프랑스를 몰아내려고 하는 움직임은 단순히 드립으로 치부할 수 없는 현실이기도 하다.[10] 다만 어디까지나 인도정부의 공식적, 외교적인 입장이 그렇고, SNS상에선 영국 여왕의 추모에 관해서 부정적인 여론도 비등하다. # 이에 대해 한국 일부에선 일본의 우경화에 앞장서 한국에서 비호감스택을 쌓을 대로 쌓은 아베 신조 피살 사건 당시조차도 한국도 공식적으로는 정부 차원에서 조의를 표했을 정도로 공식/외교적 입장은 국민 정서와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절하할 수 있다. 하지만 아베는 최소 한국인의 긍정적인 평가가 인도처럼 절반이 아니며, 거의 모든 나라가 단순 형식상 표하는 조의와 한 나라가 외국정상의 서거에 대해 아예 "국가 추모의 날"을 지정 하는 것은 전혀 다른 성질의 것으로서 이를 동일선상에서 비교하는 것 자체가 애초에 틀린 비유이다. 더욱이 인도는 콜카타에 있는 여왕을 기리는 거대 기념관인 '빅토리아 메모리얼\'(Victoria Memorial)을 현재까지도 잘 보존하고 있다는 사실을 고려한다면 해당 아베를 통한 비유 주장은 더더욱 넌센스에 가깝다.[11] 영국을 지칭하는 다른 표현이다.[12] 사실 아편 농사에 인도인 지주들도 적극적으로 가담하였는데 쌀농사 내수시장 보다 환금작물로서 아편을 생산하여 수출하는 게 훨씬 수익이 높았기 때문이다. 사실 중국에 대한 아편무역은 영국 뿐만 아니라 인도계 상인, 유대계 상인, 청나라 상인도 적극 가담했다.[13] 이렇게 앞뒤 안 따지고 이익만 추구했던 정책으로 인해 동인도회사는 파산위기를 맞고 제대로 된 통치를 하기 위해서 정치영역을 관장할 총독이 파견되기에 이른다. 장기적으로 동인도회사 해체에 이르는 과정을 거치게 된다.[14] 이 투표가 끝나고 글래드스턴은 "262. 우리 영국의 양심의 무게가 고작 이 정도였단 말인가!"라는 명언이자 한탄을 했다고 전해진다.[15] The Covert Netherworld as Invisible Incubator for Illicit Commerce, Alfred W. McCoy.[16] The Peasant Production of Opium in Nineteenth-Century India, Rolf Bauer, 43-44p[17] 실제 중국에서도 건륭제 시기까진 아편이 오락용으로 사용되었고, 미국에서도 아편 흡입이 금지된 게 1909년이었다.(1909, Opium Exclusion Act)[18] Zheng, Yangwen (2003). "The Social Life of Opium in China, 1483-1999"[19] Chen, Song-Chuan (1 January 2017). Merchants of War and Peace: British Knowledge of China in the Making of the Opium War|#[20]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21세기에 미국 등 서양에서 큰 사회적 문제를 일으키는 마약 펜타닐(Fentanyl)의 주요 원료 수출국이 과거 아편으로 곤욕을 치른 중국이라 서구와 중국 사이의 갈등이 점화되고 있다. 그러나 원료 수출이라 법적으로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이다.[21] 아일랜드 독립운동사의 비극을 다룬 영화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이 영국에서 제작된 것이 대표적인 예시이다.[22] 수용소를 건설한 이유는 게릴라전의 특성 때문으로, 게릴라 세력은 그들을 지원해 줄 민간 및 외부세력과의 연계가 필수적인 특성을 지니고 있다. 따라서 영국은 수용소를 건설하여 게릴라 세력과 민간 세력과의 연계를 단절해 게릴라 세력을 진압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러한 목적으로의 수용소 운영은 1830년에 미국이 인디언을 상대로, 1896년에 스페인이 쿠바인을 상대로 이미 시행한 바 있으며 후대의 한국 전쟁이나 베트남 전쟁에서도 전략촌 건설 등을 통해 민간인을 해당 지역에서 소개시키는 것을 게릴라전 대응책의 기본으로 시행하였다.[23] 앞 각주에서 언급했듯이, 항생제의 기본이라 불리는 페니실린의 첫 발견이 1928년이다. 이전까지의 인류는 전염병에 대해 제대로 된 대응책을 내놓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으며, 불결한 환경이 될 수 밖에 없는 전장에서는 더욱 그러했다.[24] 심지어 동시대에 칠레의 함선을 강제로 압류했었을때는 최소한 대금만큼은 돌려줬다. 이건 대놓고 엿먹어 보라는 행위였다.[25] 사실 영국이 오스만 참전을 유도하기 위한 행위였다는 해석도 존재한다. 영국이 오스만을 가상 적국으로 인지하고 있었다는 말도 있고 최종적으로 오스만의 참전으로 이득을 본 유일한 나라라는 점 등. 자세한 건 애진코트 항목 참고.[26] 순양전함인 SMS 괴벤과 경순양함인 SMS 브레슬라우. 해당 선박들은 여전히 독일인들이 제어했으며 오스만 황궁을 향해 함포를 겨누며 협박하는 등 사실상 독일 지중해 함대의 명령을 받는 독일의 함선들이었다.[27] 아람코. 1980년 사우디 정부에 의해 국유화[28] 당시 미국 국무부에서도 석유 이익을 나누는 데 대한 영국의 비타협적 태도를 비난하면서 모사데크와 협력을 추구해야 한다는 입장이 있었을 정도#로 영국의 이란 석유 이익에 대한 집착은 악랄하기 그지 없었다.[29] 폴란드계 미국인 작가가 쓴 테메레르 시리즈가 해당 위선을 아주 통렬하게 비판한다.[30] 일례로 조선만 하더라도 19세기 말까지 500년이 넘는 기간동안 자국민 대상 노비제를 운영했으며, 성리학자인 이황만 하더라도 부리던 노비만 370명이 넘었다.[31] Laird, Thomas (2006). The Story of Tibet: Conversations with the Dalai Lama, p. 221. Grove Press[32] 그 밖에 나가르제 요새 (Nagartse Dzong)에서 러시아제 베르단과 후장총포가 발견된 것도 의혹을 증폭시켰다.[33] 커즌 라인파시스트오스왈드 모슬리의 장인인 그사람 맞다.[34] Bell, Tibet Past and Present (1924) , p. 66. 참고[35] 당시 영국군 탈영병 상당수는 신분세탁을 통해 미국 선박에서 일했는데, 미국은 이들 모두를 귀화한 미국인으로 보았으나 영국은 미대륙에서 태어난 사람만 미국인으로 인정하여 갈등의 원인이 됐다.[36] 참고로 당시 조선도 남자는 60세까지 군역이 부과되었다.[37] 주데텐란트가 독일에 넘어가면서 300만에 달하던 인구와 함께 오헝제국 시절부터 제국의 경제를 지탱하던 유수의 산업시설들과 독일을 막기위해 건설된 강력한 요새선까지 전부 독일의 손아귀에 들어가게 된다. 독일의 체코 침공 이후 독일의 유명한 전차인 38t헷처는 체코 조병창에서 만들어졌고 오스트리아, 폴란드뿐만 아니라 체코에서도 독일은 금과 시민들의 사유재산 및 노동력을 약탈하여 만기가 도래한 메포어음을 지불하게 된다. 결국 해당 조약 이후에도 결국 독일은 체코를 집어삼키고 그들의 독립을 파괴하면서 속칭 우리 시대의 평화는 두고두고 조롱거리가 된다.[38] 정작 베르사유 조약 당시에는 허락해주었는데 이는 체코가 주데텐란트가 없다면 자립할 수 없다고 봤으며 같은 이유로 폴란드인이 다수인 테센도 체코의 영토가 된다.[39] 다만 당시 거문도는 격오지 취급이라 세금도 안 걷었고, 지방관도 파견되지 않아 지역 유지들에 의해 자치로 운영되었다.[40] 우리는 6.25 전쟁에서 2번째로 많은 파병이 온 나라가 영국이기에 이를 감사해하는 입장이다.[41] 미국 역시 조선과 조미수호통상조약을 맺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과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맺어 조선과 필리핀에 대한 미일 양국의 식민지배를 인정하였다.[42] 다만 고종은 영국과도 좋은 관계를 수립하려고 노력했으나 영일동맹을 우선시한 영국은 어니스트 사토와 존조던등을 이용해 한국과 거리를 둔것도 사실이다. 그리고 광무개혁 역시 친일파 영국 고문 맥 리비 브라운의 트롤링 때문에 고종의 사비로 진행해야 했다.[43] 당시 영국이 한국 독립을 반대했다는 말이 있으나 이는 사실이 아니며, 영국은 조문에 '독립'이라는 단어가 들어가는 걸 반대했을 뿐이다.[44] 추축국과도 다르다.[45] 이탈리아 왕국, 발트 3국, 핀란드, 태국, 오스트리아 등. 하필이면 저 국가들이 추축국이거나 추축국의 전쟁수행에 동조(i.e. 오스트리아 나치당, 발트 3국의 현지 '풀뿌리 부역자' 등) 했다던가 추축국에 호의적이었던 국가들이라(다만 이탈리아 왕국은 파르티잔이 무솔리니정부를 몰아내고, 핀란드는 손 털었고, 태국은 친일행각이 당시 피분 독재정권의 독단적인 행위였던 등 각자의 사정은 있다) 일각에서는 조선을 사실상 추축부역국으로 분류했다는 근거로 들기도 하지만 베트남, 라오스, 캄보디아, 스리랑카처럼 딱히 추축국과 관련이 없었던 지역들도 있다.[46] 비슷한 예로 코소보가 있다. 팔레스타인이 순수한 아랍의 땅이 아닌 것처럼 코소보도 순수한 알바니아인의 땅이 아니다.[47] 심지어 그 조차 '아다나 빌라예트'의 산자크에 불과한 '메시나'를 빌라예트로 표현하는 등 엄격한 구분을 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48] 예루살렘 산자크가 오스만제국 시절에도 다른지역과 달리 독립적인 행정구역으로서 특별취급 받은 것도 결국 오래 전부터 여러 민족과 종교인들이 함께 살던 이 지역의 역사적 특수성 때문이었다.[49] 만약 혹자의 추측대로 '다마스커스, 홈스, 하마, 알레포'를 작은 도시단위인 산자크(sanjak)로 가정해 이곳을 기준점으로 잡는다면 그럼 여기서 맥마흔-후세인이 애초에 아랍의 영토에서 제외하기로 서로 합의한 '서쪽지역'(West of the districts)은 그럼 어디인지가 의문이 남는데 이렇게 되면 이 서쪽지역은 “현재 레바논과 시리아 해안가 전역”이 해당되게 된다. # 따라서 이 주장에 따라 이스라엘을 팔레스타인에서 빼더라도 결국 현재 이스라엘은 레바논과 시리아 해안가에 위치해야야 하며, 시리아 역시 바다가 없는 내륙국 상태가 되어야 한다.
1) 또 이 주장은 후세인이 레바논과 시리아 해안가가 속한 '베이루트 빌라예트' (Vlayet of Beirut)를 순수 아랍인들의 영토라며 완강히 제외를 거부한 11월15일자 편지내용에 완전히 자기모순적이 되며,
2) 시리아에 대해선 후세인은 처음부터 바다가 없는 내륙국가를 구상 했다는 건데 상식적으로도 이해하기 힘들며,
3) 그렇다면 아랍측은 반드시 팔레스타인이 아니더라도 어디든 간에 합의본 바에 따라 '레반트의 서쪽지역'을 포기해 그 땅을 유대인에게 햘양 했어야 했는데, 그런것도 없이 국제연맹 마저 인정한 서부 팔레스타인 30% 마저도 모두 자신들의 땅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결국 어떻게 보든 약속을 지키지 않은 쪽은 아랍측이라는 소리밖에 되지 않는다.
[50] David Hunter Miller: My Diary of the Peace Conference[51] 단 이것은 제프리 에머스트의 명령이 아니었고, 이를 처음 고안해서 독단적으로 실행한 것은 미국인 민병대 용병인 모피상인 윌리엄 트렌트였다. Ranlet 2000, Knollenberg 1954, Mann 2009[52] 애머스트 본인이 편지 원문에 강조 표현을 삽입했다.[53] 버마 대공세로 인도가 공격받고 있으며, 이미 일본의 동맹군으로 투신하여 영국령 인도를 공격하는 인도 국민군이 있는 상황에서 의도적으로 학살을 저질러서 영국에 대한 반감을 키울 필요가 없었다.[54] 원래는 투옥 되었을 때 건강이 악화되어 풀려났을 당시 건강이 너무 안 좋아 다시는 정치활동을 못할 것이라고 진찰을 받았다. 그런데 이후에도 정치활동을 이어나가자 여기에 대해 대충 "건강이 안 좋아서 정치활동 못할 거라고 풀어줬는데 어떻게 된 거냐?"라고 총독 Archibald Wavell 아치볼드 웨이벌에게 전보를 보낸 거 가지고 나중에 총독이 "처칠은 내가 인도 식량 상황에 대해 어쩌냐고 물은 전보에 대해 대답도 않고 간디 왜 안 죽었냐고 물었다!"라고 왜곡한 것이 많이 와전된 것이다. "Winston sent me a peevish telegram to ask why Gandhi hadn't died yet! He has never answered my telegram about food." 처칠이 실제로 보낸 전보는 이렇다: "Surely Mr. Gandhi has made a most remarkable recovery, as he is already able to take an active part in politics. How does this square with the medical reports upon which his release on grounds of ill-health was agreed to by us? In one of these we were told that he would not be able to take any part in politics again."[55] 이전 타이와 버마족 명칭에 따르면 산과 숲에 사는 사람들을 총칭하는 포괄적인 용어로서 사용됐다.[56] 그 수가 구대륙의 전체 토끼수에 필적할 만큼이다.[57] 호주 대륙은 지리적인 고립으로 인해 역사적으로 외래종에 취약했는데 토끼뿐만 아니라 들개(딩고), 야생 고양이, 앵무새, 물소, 들쥐, 잡초 등과도 홍역을 치르고 있다. 또 외래종에 의한 생태계 교란은 현대에도 빈번한 편으로서 최근 북미의 가물치와 칡, 우리나라의 베스, 뉴트리아, 황소개구리 등의 사례가 대표적이다. 반대로 호주의 왈라비가 영국의 생태계를 교란한 바 있다.[58] 지금이야 영해가 기준선에서 12해리(22.2km)까지라는 게 상식이지만 이는 1982년 유엔해양법회의에서 결정된 조항이고, 이전까지는 국제법상 영해에 대한 국제적인 합의가 없었다. 당시 아이슬란드가 일방적으로 12해리를 주장하자 NATO의 모든 회원국 역시 이를 비난하였다.[59] 그리고 여론이 영국에게 우호적이지 않은 건 단순하게 이 때까지 아이슬란드의 주산업은 어업이었기 때문이다. 즉, 영국은 어업이 아니더라도 먹고 살 길이 있던 반면 아이슬란드는 그렇지 않았기 때문에 저렇게까지 나온 것이다. 그러니 타국 입장에서는 아이슬란드 편을 들어줄 수 밖에 없다.[60] 당시 미국은 중화민국의 상임이사국 지위박탈엔 마찬가지로 동의하나, 대신 유엔 회원국 자격을 유지하는 '이중 대표 결의안'을 유엔에 제출했다.[61] 대표적인 사건이 '라리학살'이다. 때문에 당시 대다수의 식민지를 협상을 통해 독립시켰던 영국은 케냐에는 무장개입을 할 수밖에 없었다.[62] 제도권 언론인 연합뉴스는 이를 두고 마치 김정은고사포 처형과 똑같다고 비꼬았다.# 다양한 사진자로가 남아있으며 가장 유명한건 반제국주의자이자 종군화가인바실리 베레샤긴이 남긴 기록화가 유명하다.[63] 참고로 인도에서 대포에 의한 처형방식은 인도인만 해당된 것은 아니었는데 예를 들자면 1798년 마드라스 보병 제1대대 소속 영국군 병사들 사이에서 반란이 일어났고, 한 병사가 대포에 의해 처형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세포이 항쟁 당시 몇몇 영국측 기록에 의하면 영국 민간인들 역시도 인도 우타르프라데시(Uttar Pradesh)주에서 반란군에 의해 대포로 살해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64] 대표적으로 B와 V, C나 K로 시작하는 단어의 발음이 겹치는 경우[65] 영상 참조. 서울고등법원 제6특별부 사건번호 2003누15401 판결은 KE6316편 사고의 조종사 과실설을 부정한다. 해당 사고의 CVR 기록상 1500m를 1500ft로 착각해서 발언하는 등의 착오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1500ft(약 457m)로 잘못 발언한 것은 실제로는 단 1차례뿐이고, 그마저도 "3000ft 홀드." 발언을 한 뒤 기체의 고도가 1310m 지점에 이른 상태에서 나온 발언이라 실제로는 기장과 부기장 모두 1500m로 인식하는 상태에서 말만 1500ft로 실수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는 점, 이륙 전 계기판에 비행계획을 입력할 때는 미터법으로 제대로 입력한 점을 고려할 때 고도 착각설은 신빙성이 낮다고 보았다. 오히려 "빨리 돌려봐, 이거 안 돌아.", "오늘 비행기가 이상해.", "야, 이거 엎어지겠다. 비행기 왜 이러냐?", "Unusual(조종 불능)." 등 승무원들의 의지와 무관한 기계적 결함이나 기타 외적 요인의 존재를 암시하는 대화가 지속적으로 오갔을 뿐 아니라, 사고조사보고서가 반중력에 의한 실속 가능성 등을 섣불리 배제했다는 한계가 있음을 지적한다.[66] 심지어 영국과 미국의 야드파운드법은 단위가 서로 다르다. 당장 휴대폰의 단위 계산기를 켜면 영국 갤런과 미국 갤런이 따로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편차도 상당히 크다.[67] 사략선은 해적이지만 그와 동시에 국가로부터 공인받은 준군사조직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는 존재이다. 정규 해군은 징집 및 지원만으로는 충분한 병력을 모으기 어렵고 국가의 재정을 들여 군대를 훈련시켜야 하는 단점이 있는 반면, 사략선은 국가의 정식 해군이 아니라 해군 육성 및 유지에 드는 국가의 재정을 그만큼 아낄 수 있는데다가 이미 해상 경험과 전투 경험이 모두 충분한 선원들로 구성되어 있다. 이러한 장점으로 인해 각국 해군은 사략선 제도를 금지하는 1856년 파리 조약 이전까지 사략선을 제2의 해군으로서 요긴하게 사용했기에 당시 국제법 체계에서도 사실상 군인으로 간주되어 전시 국제법의 보호를 받았다. 따라서 사략선의 나포 행위를 각국의 전쟁 상황과 무관하다고 보기는 어렵고, 전쟁 중의 사략 행위는 오히려 정당했다.[68] 물론 영연방 소속이 아닌 국가로는 일본, 영연방 국가와 이웃한 일부 국가들 정도가 있으며, 예외적으로 캐나다는 영연방 국가임에도 좌핸들 우측통행을 채택했다.[69] 일례로 인도의 경우 간디는 떠나는 영국을 친구라 표현했으며, 초대 수상인 네루는 영국의 근대화를 인정하는 발언을 하였고, 인도의 전총리 만모한 싱 역시도 공개연설에서 같은 취지의 연설을 하였다. 인도의 여론도 20세기 중반 이전까지만 해도 인도의 많은 젊은이들은 영국이 가지고 온 근대화를 찬양했는데 그 반대 목소리는 오히려 소수파로서 국민 대다수에게도 배격당했던 것이 좋은 예가 된다.#[70] 이에 따라 당시 영국령이었던 캐나다에서도 노예제가 폐지되었고, 미국 노예해방/흑인운동의 시발점인 underground railroad(몰래 캐나다로 탈출하기 위한 경로)가 시작될 수 있었다.[71] 당시 일본 유녀들의 실상에 대해서는 요시와라 유곽 문서 참조. 참고로 이 "인간 취급도 못 받았던 것"의 연장선상으로 해방 포고문에서조차 유녀들을 "생긴 건 인간이지만 일신의 자유를 상실한 소나 말 같은 가축". 즉, 끝까지 법적으론 사람으로 인정하지 않았다.[72] 대양간 뿐만 아니라 유럽 내 이동도 활발히 이루어졌다.[73] 영유아 사망률 감소가 결정적이었다. 무굴 제국은 1년에 유아 100만여 명이 말라리아로 사망하고 200만여 명이 불구가 되었는데 항 말라리아제인 퀴닌이 영국 식민 지배 시절 도입되면서 사망률이 감소하기도 했다.[74] 참고로 국가행정의 기초인 인구조사도 영국령 시절 처음 실시되었다.[75] 다만 미 공군의 일원으로 참전한 형태라 육군에 비해서 인지도가 떨어지는 편이다.[76] 1989년 한국과학기술원 (KAIST)이 인공위성연구센터 연구진을 영국 서리 대학교에 파견하여 위성 제작 기술을 전수받아 우리별 1호를 제작한 것이 대표적인 사례이다.[77] 현 보츠와나에 해당한다.[78] 물론 재산은 가져갈 수 없었다.[79] 런던 리버풀가 역은 이를 기념하기 위해 이제 막 기차역에 도착한 아이들의 모습을 형상화한 동상이 서 있는 것으로 유명하다.[80] 카를 마르크스는 "뉴턴의 발견 이후 100년 동안 창조된 인류의 생산력은 이전 모든 역사가 창조한 전체 생산량보다 많은 것이었다"고 평론했고, 첸청단 북경대 교수 역시 산업혁명이 없었다면 지금의 현대사회는 없었을 것이라 평가했다.[81] 예를 들어 산업화에 필요한 철강, 구리, , 보크사이트, 주석 등 주요 자원의 거의 98% 정도를 유럽에서 자급자족했으며 석유 이전 주력 동력이었던 석탄의 경우 영국과 독일은 최대생산국에 되려 제3세계로까지 수출하는 입장이었다. 1800-1938년 사이 유럽 선진국의 전체수출의 17%만이 유럽 밖 제3세계로 향했고, 그 중 절반 정도가 식민지로 수출 되었는데 결국 유럽 총수출의 9%만이 식민지로 향했다는 결론이 나온다. 그런데 이 기간 동안 선진국들의 총수출은 GDP 중 8-9%를 차지했는데, 결국 식민지로의 수출은 국민 총생산의 불과 0.6-0.9%에 머물렀다는 결론이 나온다. 결론적으로 식민지 지배는 약간의 수익성이 있는 사업이었지만, 서유럽이 산업화를 이룬 원인에는 식민지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건 말이 안되는 주장이다.[82] 19세기 말까지 란제리라는 말은 프랑스어로 리넨으로 제작된 속옷을 의미했을 뿐이다. 그러나 영국에서 페미니즘의 영향으로 여성용 속옷으로 의미가 변화하다가 68 운동 이후로 란제리가 선정성을 대표하게 된 것이다.[83] 군사력이 강한 패권국은 전반적인 문명의 수준이 높은 것이 일반적이긴 하지만, 근대의 영국이 산업화에 힘업어 다른 시기의 패권국에 비해서 유달리 빠른 속도로 과학과 산업의 수준을 발전시킨 점은 부정할 수 없다.[84] 특히 제너는 특허를 포기하고 이 방법을 전세계에 공유하며 수많은 생명을 살려 존경을 받았다. 이에 대한 일례로 당시 영국의 앙숙이던 프랑스 나폴레옹조차 천연두의 공포를 종식시킨 에드워드 제너에 명예훈장을 수여한 것과 그의 편지 한 통으로 영국군 포로를 전원 석방한 것은 유명한 일화이다.[85] UN의 전신이라고 평가받는 LN조차도 1차 세계대전 직후에야 국제 기구의 필요성을 깨닫고 미국의 우드로 윌슨 대통령의 주도 아래에 만들어졌다. 심지어 LN도 탄생 과정에서 나타난 부실함 때문에 전쟁을 막는 것을 실패하여 무너졌다.[86] 영국의 식민지라고 불리는 나라들 중 상당수는 먼저 보호를 자처한 보호령인 것도 좋은 예가 된다.[87] 당장 인도에서 모한다스 카람찬드 간디의 비폭력 운동을 위시한 인도 국민회의의 반영 운동이 벌어지자 이를 무마하기 위해서 골머리를 썩히고 있던 영국에게 히틀러가 저항세력이 일소될 때까지 모두 사살하면 된다는 제안을 했다. 당연히 영국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후일 나치 독일은 국가판무관부를 세운 모든 지역의 저항 운동을 이런 식으로 진압하며 학살을 자행했고 수많은 인명피해를 낳았다.[88] 당장 아프리카 국가 중 독립할 때부터 민주적이고 안정적으로 돌아갔던 유이한 국가들인 보츠와나모리셔스가 영국 식민지 출신이다. 영국의 식민지 중 GDP Top 15 안에 드는 주요 국가만 무려 4개국(미국, 인도, 캐나다, 호주)이나 있으므로 영국 본토까지 합하면 15대 경제대국 중 무려 1/3을 영국&영연방 계열이 독점하는 셈이며, 심지어 미국 역시 세계 현대사의 주인공격이므로 아직도 세계 정세에는 대영제국 시절의 흔적이 지워지지 않은 셈이다.[89] 당연히 미국이 중국, 러시아 등 패권국을 꿈꾸는 경쟁자들보다 더 낫다고 해도 미국의 흑역사들이 정당화되지는 않는다.[90] 그러나 필리핀 민다나오 지역 무슬림 원주민들을 학살하고 미국 반대파들을 탄압하긴 했다.[91] 사실 조지 W. 부시가 한창 깽판을 치고 다니던 2000년대 후반까지는 현재 한국 인터넷에서 영국이 갖는 위치에 미국이 있었다. 그러나 버락 오바마 이후 미국이 주도적인 대외 개입을 자제하고 중국, 러시아 등 신흥 패권국들에 맞서는 히어로 포지션이 부각되면서 이러한 인식이 사라졌고, 근세 서양사 관련 지식이 어설프게 대중적으로 보급되면서 그 자리를 영국이 채운 것.[92] 다만 프랑스가 역사에 관해 영국보다 덜 까인다고 보는 건 무리다. 시대를 막론하고 이어지는 프랑스 특유의 패권주의, 국수주의 성향을 비꼬는 유럽의 짱깨라는 비하 표현이 혐성국보다 훨씬 유서깊기 때문. '세계사에서 이상한 일이 일어난다면 영국이 원인'이라는 말도 거의 항상 뒤에 '영국이 아니라면 십중팔구 프랑스'라는 첨언이 따라온다.[93] 영국에서 레오폴드 2세를 식인종으로 묘사한 캐리커쳐가 그려졌을 정도다.[94] 이쪽은 동맹국들이 개막장의 끝을 달렸기에 상대적으로 온건해 보이는 것도 있는 데다가 식민지를 획득하기도 벅찬 오합지졸들의 나라라는 인식이 워낙 강해 오히려 다른 의미로 조롱당하는 케이스다.[95] 물론 일본은 영국보다 식민지가 적지 않았느냐고 반박할 수 있지만 애초에 일본은 19세기 후반부터 부상한 아시아의 신흥강국으로서 후발주자였다는 본질적인 한계가 있다.[96] 동남아시아에서 일본군에 의해 약 18만에서 25만 명의 동남아 민간인들이 강제노동에 동원되어야 했는데, 그 과정에서 가혹한 노동과 환경으로 인해 약 9만 명이 사망했다.[97] 특히 이 중 독일, 중국, 러시아의 경우 학교 교육 과정(제2차 세계 대전에서의 히틀러, 6.25 전쟁에서의 중공군 개입)이나 현대의 뉴스(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에서 이들의 제국주의적 만행을 쉽게 접할 수 있어 악행에 대한 대중의 인지도가 높은지라 독빠/중뽕/러빠들이 자신들이 추종하는 국가들의 만행을 덮기 위해 역사적으로 해당 국가들과 사이가 나쁜 영국으로 물타기하려고 혐성국 밈을 남용하는 경향이 있다. 반면 남유럽권은 대부분 국가 팬덤 자체가 약해 이런 경향이 거의 없고 한국의 일뽕들은 영일동맹이라는 역사도 있고 애초에 제국주의라는 이데올로기에 대한 문제 의식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일본의 제국주의에 피해를 본 한국에서 일뽕이 되기란 불가능에 가까운지라 철면피를 뒤집어쓰고 영국의 만행까지 대놓고 옹호하는 경향이 강하다. 미빠들은 미영관계의 역사가 워낙 복잡한지라 언급을 피하는 편.[98] 물론 영국도 21세기에 잘못된 정보를 바탕으로 일어난 이라크 전쟁과 같은 과오가 있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미국이 주도한 테러와의 전쟁의 동맹국 일원으로서의 참가로서 주목적이 독재자 사담 후세인정권의 교체였다는 것과 실제 전쟁 후 현지정부에 정권이 자연스럽게 이양됐다는 점에서, 현재도 타국의 영토를 아예 병합하려고 시도하고 있는 러시아, 중국과는 큰 차이가 있다.[99] 대표적으로 인도에서는 '빅토리아 기념관'이 버젓이 있는 것은 물론 만모한 싱 총리가 2005년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대놓고 식민지 근대화론을 설파하는 연설을 했는데도 아주 큰 논란으로 번지지 않았을 정도로 영국에 대한 이미지가 그리 나쁘지는 않은 편이다. 다만 이는 인도에서는 영국 식민지 시절을 'British Raj(영국인 왕조)'로 부르며 무굴 제국, 청나라와 유사한 이민족 왕조로 취급하는 경향이 강하다는 것도 감안해야 하지만, 애초에 혐성국 밈 만큼의 악행을 실제로 영국이 저질렀다면 당연히 단순한 이민족 왕조 정도로 생각했을리가 없다는 것을 보면, 이것까지 따질 이유는 없다.[100] 단 훗날 소련과 영국이 해당지역을 자신의 이권지역으로 만들려고 시도한 적은 있다. 자세한 건 영국의 티베트 침공, 성스차이 문서 참고.[101] 물론 이런 시대상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은 서구 국가들이 자유·인권·평등을 주장하는 것조차 위선이라면서 더 악질적이고 교활하고 영악한 약육강식이라며 깐다.[102] 그러나 그런 논리를 정작 반서방 국가의 수뇌부들이 쓰지 않는 이유는 간단하다. 애초에 자기들이 추구하는 행위들도 결국 과거의 서방에게 처참하게 패배하고 몰락했던 냉전 시대 당시에 자기들을 민주 진영, 서방을 파쇼 진영이라고 부르며 서방의 자유, 인권, 평등의 논리에 대항해 자신들이야말로 진정한 자유, 인권, 평등의 나라라고 주장했다가 그것이 틀렸다는 사실이 밝혀지자 냉전 시절 당시의 제3세계와 똑같은 처지로 굴러떨어졌기 때문이다. 즉, 서방의 입장에서는 자조적인 이야기가 아닌 이상 반서방권이 저지르는 한입으로 두말하는 태도에 콧방귀만 뀌어주어도 충분한 셈이다.[103] 무아마르 카다피가 괜히 아프리카 흑인들에게 아랍의 노예무역에 대해 사죄했던 게 아니다.[104]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동에 있는 흑인 인구는 미국이나 남미에 비하면 매우 적은 편인데 그 이유는 이렇게 데려온 흑인 남자 노예를 자손을 남기지 못하도록 보이는 족족 거세시켰기 때문이다.[105] 산업혁명 이전까지 유럽 국가들은 이들에게 노략질을 자제해 달라며 돈을 주며 달랠수밖에 없었다.[106] 한 추정치에 의하면 13세기 몽골의 침략 도중 혹은 직후 세계인구 11%가 사망했으며 몽골 제국이 직접적으로 죽인 사람의 수는 약 1900만명 전도로 추정되며 이에 부가적인 사망자 수를 합치면 약 3,775만~6,000만 명이 사망한 것으로 보고 있다.#[107] 물론 이는 영국에 비해 훨씬 예전에 존재했던 국가에서 일어난 것도 있고, 당시의 국제정세는 소속 대륙 일부에서나 영향을 미쳤지 현재처럼 지구상의 모든 국가들이 복잡하게 얽힌 것도 아니어서 다른 고대 정복군주들과 같이 한때의 역사로 여겨지는 경향이 짙다. 동슬라브에서야 명군 블라디미르 1세의 무덤을 파괴한 건 때문에 몽골 제국을 부정적으로 보고, 한국에서 원 간섭기를 이유로 몽골 제국을 비판할지언정 현재의 몽골 공화국을 비판하는 여론은 거의 없다. 현재의 몽골은 진작에 붕괴된 몽골 제국과는 별개인 외몽골 일부나 통치하는 약소국에 불과하므로 그때의 몽골과 지금의 몽골은 다르다고 보지만, 영국은 국가 멸망을 아예 겪지 않아 대영제국이나 현재의 영국이나 같은 영국인데다, 현재도 세계에 미치는 영향력이 큰 국가이고, 벌인 일을 아직도 수습하지 못한 것이 남아 있다는 점도 이러한 관점에 영향을 미친다.[108] 대세인 반응이 "왜 그때 태어나지도 않았던 찰스 3세가 사과해야 하냐?"다. 사실 케냐의 독립 당시 찰스 3세는 10대였지만 패전 당시 12세였던 아키히토, 패전 당시 태어나지 않았던 하토야마 유키오도 과거 일본 제국의 만행에 대해 식민지 국가들에 사죄했다.[109] 영국 일은 아니긴 하지만 알제리프랑스에 사과를 요구한 글에 달린 댓글의 논조도 전술한 내용과 똑같다. # 일본인들만 과거 식민지들의 사과 요구에 반발하는 게 아닌 것이다.[110] 재밌게도 과거사 청산을 잘 했다고 평가받는 독일도 1차 대전 당시 식민지배에 대해 비슷한 태도를 보이다가 아프리카 국가들에게 욕을 엄청나게 들어먹었다. 근래에는 사과는 하고 있지만 영국과 프랑스와 마찬가지로 '사과하고 있잖아. 그때 일을 왜 우리가 배상해 줘야 하니?'라며 배상의 책임은 인정하지 않고 있다. 이는 2차 대전에만 집중된 독일의 과거사 청산의 한계점으로 꼽히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