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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40047><colcolor=#FFD700> 타이 왕국 제3대 총리 쁠랙 피분송크람 แปลก พิบูลสงคราม | Plaek Phibunsongkhram | |
본명 | 쁠랙 키따상카(แปลก ขีตตะสังคะ)[1] |
출생 | 1897년 7월 14일 |
시암 논타부리주 | |
사망 | 1964년 7월 30일 (향년 67세) |
일본 가나가와현 사가미하라시 | |
종교 | 불교 |
재임기간 | 제3대 총리 (1기) |
1938년 12월 16일 ~ 1944년 8월 1일 | |
제3대 총리 (2기) | |
1948년 4월 8일 ~ 1957년 9월 16일 | |
군사 경력 | |
임관 | 태국육군사관학교 |
복무 | 태국 육군 |
1917년 ~ 1944년 | |
최종 계급 | 원수 (태국 육군) |
서명 |
[clearfix]
1. 개요
태국의 전 총리대신이자 군사 독재자. 1938년 12월 16일~1944년 8월 1일(3대), 1948년 4월 8일~1957년 9월 16일(11대) 이렇게 2번 총리를 지냈다.줄여서 '피분'이라고 하지만 이원복 교수의 《가로세로 세계사》 2권에서는 서양식으로 '피분 송크람(이하 송크람)'이라고 표기했다.
2. 일생
방콕 인근 논타부리 출생으로 과수원을 경영하던 화교의 아들이다. 이름인 '쁠랙'은 '이상하다'라는 뜻인데 외양이 독특하게 생겨서 주어진 이름이라고 한다.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뒤 태국군 육군 포병소위로 임관했고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프랑스에 군사 연수[2]를 다녀오면서 태국 군부의 유망주 대우를 받았다. 게다가 성씨인 피분 송크람의 송크람은 전쟁이라는 뜻인데 이쯤 되면 태생적으로 타고난 군사 독재자의 이름이다.1932년 인민당(카나 랏사돈)의 일원으로 무혈혁명을 일으켜 정권을 장악하고 왕당파 측의 반격을 분쇄하면서 라마 7세를 퇴위시켰다. 새로운 국왕으로는 라마 8세를 추대했으나 아직 어린 소년인 데다 태국이 아닌 스위스에서 유학 중이었기 때문에 실질적으로는 왕좌가 비어 있는 것이나 다름 없는 상황이었다.
1938년 새로운 총리대신으로 취임했으며 자신의 권력기반을 다지기 위해 태국판 새마을운동을 벌였다. 당시 몇몇 후발주자 국가들이 선호하던 파시즘이나 군국주의의 충실한 신봉자였으며 당연히 피분 정권은 그들의 정책을 충실하게 답습했다. 전국 모든 곳에 사진을 걸고 매일 뉴스 1면을 도배했으며 대형 광고판과 라디오를 통해 자신의 정책을 홍보했다. 이 무렵 피분이 특히 자신의 모델로 삼은 것은 일본 군국주의 정권이었는데 정신력과 도덕 등을 강조하면서 강력한 민족주의 및 서구화 정책을 추진했다. 예를 들면 시암(สยาม, 사얌)으로 부르던 나라 이름을 '타이(ไทย)'라고 바꾸고 태국어의 문법 및 단어를 정립시켰으며 손으로 밥을 먹던 식탁에 포크를 비롯한 서구식 식기들을 도입했다. 문제는 이런 과정에서 태국어를 잘 사용하지 않는 소수민족을 박해하고[3] 남녀 불문 서양식 구두를 신고 모자를 써야 했으며 식탁에서 포크를 안 쓰면 처벌하는 해괴한 상황도 발생했다는 점이다.
제2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고 프랑스 침공에 의해 프랑스가 6주만에 항복하자 비시 프랑스를 상대로 프랑스-태국 전쟁을 벌여 옛 영토 탈환을 시도했지만 프랑스에게 패배했다.[4] 태평양 전쟁 당시 일본군이 태국 영토에 들어오자 몇 시간의 교전 후 일본에게 굴복해 일본군의 태국 영토 주둔을 승인했다. 태국은 이후 일본을 따라 추축국 세력에 가담했으며 상기한 군국주의식 행보들은 더더욱 강화되었는데 자신도 중국계 태국인이면서 모든 중국계들에게 태국식 이름을 가지고 태국어를 사용할 것을 강요했고 더 나아가 굴복하지 않는 중국인들을 독일의 유대인과 비교하면서 탄압하기도 했으며 일본군을 인도차이나 반도에 상륙시키고 인근의 프랑스 식민지들을 점령하면서 해당 지역에서 일본 제국의 대변인 노릇을 하기 시작했다.
1942년에 드디어 영국과 미국에 선전포고를 날렸는데 이 시기 피분의 절대적 라이벌인 쁘리디 파놈용이 등장해 일본군에 대항하는 자유 타이 운동이라는 저항군을 조직했고 라마 2세 계보의 왕족이자 당시 주미 태국대사였던 세니 쁘라못도 귀국해 피분의 행보에 함께 하기를 거부하고 미국에 남아 대사관을 중심으로 미국을 비롯한 해외에 거주 중이던 태국인들을 규합해 이에 동참했다. 일본군이 밀리면서 슬슬 패전 분위기를 띄는 데다 수도를 북부로 옮긴다던가 아니면 초대형 불교의 성도를 짓는다고 발표하는 등 분위기 파악 못하는 행동들을 하면서 군부 및 정부 내에서도 반대파가 생겨나자 결국 전쟁 막바지에 사임했고 전후인 1945년 10월 전범재판에 회부되었고 투옥되었지만 여전히 국민들 사이에서 인기가 나쁘지만은 않았는데 우선 그 동안 잘 포장된 이미지가 있었고 그 다음은 당시 일본이 버마와 말레이시아를 침공하면서 얻어먹은 떡고물들이 꽤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공산주의 세력의 확장을 막기 위해 미국 및 서유럽 국가들은 동남아시아 지역에 든든한 지원군이 필요했기 때문에 태국은 추축국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별 타격 없이 지나갔고 그 분위기 속에서 피분도 1946년 4월 대법원에서 무죄판결을 내렸고 방면되었다. 물론 태국은 파놈용이 일본에게 항거했듯이 저항군을 조직하여 싸운 점도 있었기 때문에 이럴 수 있었다.
1947년 다시 한 번 재기하려고 군사정변을 일으켰다. 이듬해 1948년 1차와는 달리 2차 정변시기에는 파시즘 대신 미국식 민주주의를 모토로 삼았는데 당연히 이는 냉전 시기 미국의 원조를 뜯어내기 위한 기믹이었다.[5] 이를 위해 6.25 전쟁에 파병군을 보내고 냉전의 일원으로서 공산주의자들을 탄압하기 시작했다. 이런 가운데 중국계 태국인들에 대한 탄압이 재개되었는데 중국인들의 이민과 입국이 제한되고 경제활동이 금지되었으며 중국인 학교가 문을 닫았다.
1951년 태국 해군 장교들이 벌인 맨하탄 정변이 실패로 돌아갔다. 미합중국 해군 순양함 USS 맨해튼함에서 벌인 미국과의 수교 기념식에서 해군 장교 몇몇이 그를 납치해 인근의 태국 해군 함정 아유타야 함으로 끌고 갔으며 그 동안 방콕 시내에서 해군과 육군 사이에 시가전이 벌어졌다. 결국 공군이 나섰는데 우습게도 구출이 아니라 그가 억류되어 있던 아유타야 함에 폭격을 가해 버렸다. 배는 침몰했고 노구의 피분은 해안까지 헤엄쳐서 돌아와야 했다.
1957년과 1958년 미군의 후원을 받는 일단의 군부 인사들이 정변을 일으켰으며 그 중 유력인사는 그의 최측근인 사릿 타나랏과 친구 타놈 끼띠카쫀이었다. 싸릿은 왕당파들과 연대했으며 피분은 국외추방되어 일본으로 건너갔지만 일본에서는 친일파인 그를 극진히 우대해서 잘 살다가 1964년 사망했다.
3. 둘러보기
[1] Plaek Khittasangkha. 문헌에 따라 '킷따상카'로도 표기함.[2] 일본도 그랬듯 해외파 출신 장교는 미국·영국 유학파보다 프랑스·독일 유학파를 더 높게 쳐줬다. 프랑스는 당시 1차대전 승전국이자 세계 1위 육군 국가였고 독일은 패전국이긴 하지만 전통적인 군사 강국이었기 때문이다.[3] 태국의 주 민족인 태국인 상당수는 북동부의 이싼 주민들인데 사실 이싼 주민은 라오인에 더 가깝다. 그런데 라오인과 태국인은 입말이 통할 정도로 가깝긴 하다. 그리고 아예 어족이 다른 크메르인, 말레이인도 이 나라에 살고 있다.[4] 코 창 해전에서 대패한 상황에서 휴전된 것이라 패배라고 보기도 하지만 일본에 붙어 프랑스의 땅을 할양받는 전략적 승리(?)를 거두긴 했다.[5] 서방 세계의 눈을 속이기 위해 겉만 민주주의인 대대적인 총선을 실시하였는데 후보가 본인여당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