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가리아 차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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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9b75><colcolor=#fff> 불가리아 차르국 제3대 차르 시메온 2세 Симеон II | |||
출생 | 1937년 6월 16일 ([age(1937-06-16)]세) | ||
불가리아 왕국 소피아 | |||
재위기간 | 불가리아 차르 | ||
1943년 8월 28일 ~ 1946년 9월 15일 | |||
재임기간 | 제48대 총리 | ||
2001년 7월 24일 ~ 2005년 8월 17일 | |||
서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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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시메온 보리소프 삭스코부르고츠키 (Симеон Борисов Сакскобургготски) | ||
아버지 | 보리스 3세 | ||
어머니 | 이탈리아의 조반나[1] | ||
형제자매 | 마리야 루이자[2] | ||
배우자 | 마르가리타 고메스아세보 (1962년 결혼) | ||
자녀 | 카르담[3], 키릴, 쿠브라트, 콘스탄틴아센, 카리나 | ||
종교 | 불가리아 정교회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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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불가리아 왕국의 마지막 차르이자 불가리아 공화국의 제48대 총리.제대로 꼬인 불가리아의 현대사를 지나 오면서 특이한 이력을 많이 남긴 인물이기도 한데 세계 역사상 차르 칭호를 사용한 마지막 군주이다. 공교롭게도 최초로 차르 칭호를 사용한 군주는 그와 이름이 같은 불가리아 제1제국의 시메온 1세다. 그리고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참전국들의 국가원수 중 현재까지 살아 있는 유일한 인물이다. 2차 대전 당시의 국가원수 중 시메온 2세 다음으로 가장 오래 살았던 인물은 루마니아의 미하이 1세로, 2017년에 사망했다.
세계 역사상 유일무이한 경력을 가지고 있는데, 혁명으로 인해 퇴위한 군주가 공화제로 바뀐 조국의 정부수반이 된 케이스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군주가 아닌 왕족이 공화정의 정부수반이 된 사례로 따지면 아프가니스탄 왕국의 왕자인 모하마드 다우드 칸과 라오스 왕국의 왕자 쑤파누웡이 1970년대에 왕정이 무너진 후에 공산당 1당 사회주의 공화제가 수립된 라오스와 공화국이 된 아프가니스탄의 초대 국가주석, 대통령이 된 사례가 있다. 다만 다우드 칸은 대통령이 된 지 5년 뒤인 1978년 군부의 쿠데타로 정권이 전복되어 쿠데타를 일으킨 군부 세력들에 의해 피살, 암매장당하는 등 그 끝이 좋지 못했으며 쑤파누웡은 왕위 계승권자가 아닌 서자였기 때문에 어릴 때부터 사회주의 사상과 공화제를 받아들인 케이스다. 또 왕족으로서 일본 내각총리대신을 지낸 히가시쿠니 나루히코도 있지만, 이는 일본의 제2차 세계 대전 패전 후 임시로 맡은 것이었고 50여 일 만에 최단명으로 끝난데다 이 시기 일본은 일본국 헌법이 제정되기 전이었기에 끼기엔 애매하다. 국가수반이나 정부수반급이 아닌 정치인으로 폭을 넓히면 오토 폰 합스부르크가 바이에른 기독교사회연합 소속으로 유럽의회 의원을 지낸 사례가 있다.
2. 생애
부왕 보리스 3세가 1943년 히틀러와의 회담을 치르고 귀국한 후 의문사 하게된다. 보리스 3세의 사망원인에 대해서는 히틀러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자 독일이 암살했다는 설, NKVD의 암살 설, 영국의 암살 설이 있다. 부왕이 죽자 그는 1943년에 6세라는 어린 나이에 아버지의 뒤를 이어 불가리아의 차르로 즉위한다. 그러나 재위 3년째인 1946년에 공산혁명이 일어나 불가리아 인민공화국이 건국되고 왕위에서 쫓겨났다. (만약 시메온 2세가 계속 재위했다면 2023년에 재위 80주년을 맞이했을 수도 있다.)왕의 나이가 어리다 보니 왕국의 실권은 섭정이었던 숙부 키릴 프레슬라프스키 왕자, 보그단 필로프 전 수상, 니콜라 미호프 장군 등 섭정단에게 있었는데 1944년부터 불가리아의 공산화가 진행되면서 키릴 왕자를 포함한 섭정단이 국회의원 67명과 함께 처형당했다. 키릴 왕자는 나치의 손아귀에서 벗어나 소련 등 연합국 측과 접선하려고 했다.
한편 어린 탓에 아무런 실권이 없었던 그는 모후 조반나와 함께 망명이 허락됐는데 이집트 알렉산드리아로 망명한다. 시메온 2세의 모후 조반나는 이탈리아 왕국의 공주로서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의 셋째딸이다. 아버지가 망명해 있던 알렉산드리아로 갔다. 이어서 1951년 스페인으로 망명하고 1962년 마르가리타와 결혼해 4남 1녀를 뒀다. 스페인과 미국 군사학교에서 대학을 졸업했으며 스페인에서 경영 컨설턴트라는 직업을 갖고 일하고 있었으며, 프랑스의 다국적 기업 톰슨(現 반티바) 사의 스페인 지사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2.1. 귀국과 정치활동
1990년 불가리아 인민공화국이 무너지고 불가리아가 민주화된 지 6년 뒤인 1996년 젤류 젤레프 전 불가리아 대통령은 공산화 직후 국외로 추방된 시메온 전 국왕 등 불가리아 구 왕가 사람들에게 내려졌던 구 왕가의 입국 금지 조치를 해제하고 불가리아 귀국을 허용했다. 그래서인지 시메온 본인도 자신의 귀국을 허용해 준 젤레프 전 대통령에게 고마움을 표했는데 젤레프 전 대통령이 퇴임 후인 2015년 노환으로 사망했을 때도 애도를 표했을 정도다.불가리아의 민주 신정권은 그의 귀국을 허용하되 과거 군주제의 상징인 그에게 정치적 관심이 쏠리는 것을 막으려고 시도했으나 망명 50년 만에 귀국한 차르에 불가리아 국민들은 환호했다. 귀국 후 그는 결국 정치에 뛰어들어 '시메온 2세 국민운동연합' 창당에 참여하고 선거에서 승리해 2001년 불가리아 총리가 되었다. #
총리 재임 시절에는 외교 활동으로 2004년 NATO 가입 및 2005년 유럽연합 가입 동의 를 얻어내는 성과를 이뤘고 2007년에 가입하게된다. 경제적으로는 높은 성장률을 기록했지만 국유재산 민영화 과정 문제 및 대외무역수지 적자로 비판을 받았다. 4년의 임기를 마친 후 국민운동연합은 차르의 귀환이라는 기대치가 너무 높았던 반동으로 2005년 총선에는 연립정부에 참여하는 대신 다시 여당 자리를 내주어야 했으며 2009년 총선에는 아예 원외정당이 되어 버렸으며 본인도 당수 자리를 사임하면서 뚜렷한 정치 활동은 보이지 않는다.
망명 시절에는 꾸준히 불가리아의 차르라는 서명을 남겼지만 귀국 후엔 왕정복고에 관해서는 뚜렷한 입장을 보이진 않았다. 전 차르라는 경력을 정치 활동에 적극적으로 이용해서 인기를 얻긴 했지만 결국 다음 총선에서 패배해 버려서 발언할 기회 자체가 없는 것일 수도 있다.
3. 가족관계
본인 | 부모 | 조부모 | 증조부모 |
시메온 2세 (Simeon II) | 보리스 3세 (Boris III) | 페르디난트 1세 (Ferdinand I) | |
작센코부르크고타의 아우구스트 공자[4] (Prince August of Saxe-Coburg and Gotha) | |||
오를레앙의 클레망틴[5] (Princess Clémentine of Orléans) | |||
부르봉파르마의 마리아 루이사 공녀 (Princess Marie Louise of Bourbon-Parma) | |||
파르마 공작 로베르토 1세 (Robert I, Duke of Parma) | |||
부르봉양시칠리아의 마리아 피아 공주[6] (Princess Maria Pia of Bourbon-Two Sicilies) | |||
사보이아의 조반나 공주 (Princess Giovanna of Savoy) | |||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 (Vittorio Emanuele III) | |||
움베르토 1세 (Umberto I) | |||
사보이아의 마르게리타[7] (Princess Margherita of Savoy) | |||
몬테네그로의 옐레나 공주 (Princess Elena of Montenegro) | |||
니콜라 1세 (Nicholas I) | |||
밀레나 부코티치 (Milena Vukotić) |
1962년 스페인의 귀족인 제4대 코르티나 후작(Marquess of Cortina)의 손녀 마르가리타 고메스아세보(Margarita Gómez-Acebo y Cejuela, 1935-)와 결혼해 4남 1녀를 두었지만 장남 카르담이 2008년 교통사고로 혼수상태에 빠져 2015년에 먼저 사망하는 아픔을 겪기도 했다. 이 때문에 그의 사후에는 카르담의 장남이자 시메온 2세의 장손인 보리스가 명목상의 차르 '보리스 4세' 가 될 예정이다.
차남인 프레슬라브 공 키릴의 장녀 마팔다(1994년생)는 현재 영국에서 가수로 활동하고 있다.
그의 재위 기간 중에는 왕위 계승권자가 공산당에게 총살당한 삼촌 키릴(자녀 없음)뿐이었지만 그가 아들을 넷이나 두었고 그 아들들이 낳은 손자가 7명, 손녀가 3명이나 되어 가문이 번성했다.
룩셈부르크 대공 앙리, 유고슬라비아 왕국의 마지막 왕 페타르 2세와 6촌간이다. 친할머니인 부르봉파르마의 마리아 루이사가 앙리 대공의 할아버지 펠릭스 공자의 이복누나고 외할머니인 옐레나는 페타르 2세의 할머니 류비카의 여동생이다.
원래 조부 페르디난트 1세의 형인 루트비히 아우구스트의 후손들이 작센코부르크고타코하리 가문의 수장 지위를 잇고 있었다. 작센코부르크고타 가문의 한 분파로, 초대 작센코부르크고타 공작 에른스트 1세의 동생이자 시메온 2세의 고조부인 페르디난트 공자가 헝가리 귀족 가문인 코하리 가문의 상속녀와 결혼하면서 창설된 가문이다. 그런데 루트비히 아우구스트의 증손자이자 시메온 2세의 7촌 조카인 요하네스 하인리히가 2010년에 후사 없이 죽게된다. 아들 요하네스가 있었지만 1987년에 18살 나이로 등산하다가 요절했다. 요하네스는 어머니의 가문인 작센 왕가의 잠재적 후계자이기도 했다. 그런 사정으로 시메온 2세가 작센코부르크고타코하리 가문의 수장을 맡았다가 2015년에 수장 작위를 누나 마리야 루이자에게 넘겼다. 재혼한 평민 남편의 소생들은 작위가 없는 것이 안타까웠는지 코하리 가문의 작위는 이들에게 돌아갈 것이라고 한다.#
4. 둘러보기
[1] 1907~2000[2] 1933년생으로 1957년에 6대 라이닝겐 후작의 차남 카를(1928~1990)과 결혼했다가 1968년 이혼하고 이듬해에 폴란드인 평민 브로니스와프 흐로보크(Bronisław Chrobok, 1934~)와 재혼해 남편과 함께 미국에서 살고 있다. 전 남편과의 사이에서는 2남을, 현 남편과의 사이에서는 1남 1녀를 두고 있으며 전부 포함하여 3남 1녀다.[3] 2008년 교통사고로 혼수상태에 있다가 2015년에 사망했다.[4] 에른스트 1세의 남동생이자 레오폴드 1세의 형인 페르디난트 공자의 차남. 빅토리아 여왕의 외사촌이자 앨버트 공의 친사촌이다.[5] 루이필리프의 4녀이다.[6] 페르디난도 2세의 3녀,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의 이모다.[7] 카를로 알베르토의 손녀이자 요한의 외손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