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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11-16 15:07:59

피에트로 바돌리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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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왕국 제28대 총리
피에트로 바돌리오
Pietro Badoglio
파일:Fotografia_in_uniforme_del_Duca_Pietro_Badoglio.jpg
출생 1871년 9월 28일
피에몬테 주 그라차노 몬페라토
사망 1956년 11월 1일 (향년 85세)
피에몬테 주 그라차노 바돌리오
재임기간 이탈리아 원로의원
1919년 2월 24일 ~ 1946년 3월 29일
제7대 육군참모총장
1919년 11월 24일 ~ 1921년 2월 3일
초대 국방참모총장
1925년 5월 4일 ~ 1940년 12월 4일
에티오피아 부왕
이탈리아령 아프리카 총독
1936년 5월 9일 ~ 6월 11일
제28대 총리
1943년 7월 25일 ~ 1944년 6월 1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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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309A><colcolor=#d8d8d4> 학력 왕립 모데나 군사 대학 (학사)[1]
정당

배우자 소피아 발라니아
최종 계급 원수 (이탈리아 왕국 육군)
주요 참전 제1차 이탈리아-에티오피아 전쟁
이탈리아-튀르크 전쟁
제1차 세계 대전
제2차 이탈리아-세누시 전쟁
제2차 이탈리아-에티오피아 전쟁
제2차 세계 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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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3. 여담4. 둘러보기

1. 개요

피에트로 바돌리오는 이탈리아 왕국군인이자 정치가이다. 전군참모총장원수, 리비아의 총독, 초대 아디스아바바 공작, 이탈리아 왕국의 수상을 역임하였다.

2. 생애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Pietro_Badoglio_1921.jpg

이탈리아 왕국 북부 그라차노 몬페라토라는 마을[2]에서 태어나 토리노에서 사관학교를 마치고 1892년 장교로 임관하였다. 제1차 세계 대전이 종전된 후 참모차장이 되었다. 1926년 원수로 진급하였으며 제2차 이탈리아-에티오피아 전쟁에서 로돌포 그라치아니와 함께 에티오피아 제국을 점령한 후 부왕(副王)과 아디스아바바 공작 칭호를 얻었다.

2.1. 제2차 이탈리아-에티오피아 전쟁

1935년 10월 3일, 베니토 무솔리니에밀리오 데 보노가 지휘하던 에티오피아 침공 작전이 지나치게 지체되고 있다고 판단했다. 그 무렵 데 보노를 비판하는 편지를 계속 보내며 압박하던 바돌리오는 결국 데 보노를 대신해 작전 지휘권을 넘겨받았다. 그와 동시에 무솔리니에게 곧바로 화학무기 사용 승인을 요청했고, 무솔리니는 이를 허가한다. 바돌리오는 크리스마스 공세 도중 격추된 전투기 조종사 티토 민니티가 에티오피아에게 잔혹하게 살해되었다는 사건을 명분으로

이후 이탈리아군은 북부 전역의 에티오피아군을 궤멸시키기 위해 겨자 가스를 대량 사용했다. 바돌리오는 제1, 2차 템비엔 전투, 암바 아라담 전투, 시레 전투를 지휘하며 북부 전역에서 펼쳐지는 작전을 사실상 주도했다. 1936년 3월 31일, 바돌리오는 마이추 전투에서 하일레 셀라시에 황제가 직접 이끌던 마지막 방어군마저 무너뜨렸다.

4월 말이 되자 에티오피아의 저항은 무력되었고, 바돌리오는 에티오피아의 수도 아디스아바바로 향하는 이른바 철의 의지의 행군(Marcia della ferrea volontà)을 개시했고 5월 2일, 하일레 셀라시에 황제는 결국 영국 런던으로 망명할 수 밖에 없었다.

1936년 5월 5일, 바돌리오가 이끄는 주력군이 아디스아바바에 입성했다. 무솔리니는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 국왕을 에티오피아 황제로 선포하며 이 나라를 이탈리아 제국에 편입시켰다. 바돌리오는 초대 부왕 겸 총독에 임명되었고, 개인에게만 주어지는 아디스아바바 공작 작위도 함께 수여받았다.

하지만 영광은 길지 못했는데 같은 해 6월 11일, 로돌포 그라치아니[3]가 새 부왕 겸 총독으로 임명되었고, 바돌리오는 다시 이탈리아군 총참모장 자리로 복귀했다. 타임지는 바돌리오가 전쟁 직후인 6월초에 국가 파시스트당에도 입당했다고 보도했다. 훗날 영국의 역사학자 이언 커쇼는 이 전쟁에서 나타난 잔혹한 방식의 상당수가 무솔리니보다 군 지휘부가 주도한 것이라고 평가하면서 바돌리오의 행보를 대중에게 고발했다.

2.2. 제2차 세계대전

1940년까지 이탈리아군 참모총장으로 있으면서 군사 교리와 장교 인사, 무기 체계에 이르기까지 군 조직 전반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사실상 군과 관련된 모든 결정이 바도리오의 손을 거쳐 갔고, 그만큼 군의 분위기와 운영 방식도 바돌리오가 주도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거꾸로 말하면 제2차 세계대전에서 펼쳐진 이탈리아군의 졸전 행진에 이 사람도 안좋은 방식으로 크게 기여한 것.

무솔리니와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가 프랑스와 영국에 선전포고하고 전쟁의 서막을 열때도 이를 막으려 하지 않고 기꺼이 총사령관직을 수행했으나 1940년 12월 그리스 침공이 대실패로 끝나자 책임을 지고 참모총장직에서 물러났고, 후임으로 본인과 사이가 좋지 않았던 우고 카발레로가 임명되었다.

2.3. 총리 시절

점점 상황이 추축국에 불리하게 돌아가자 이탈리아 군부 수뇌부 사이에서는 전쟁에서 빠져나오려면 연합국과의 휴전 협정 체결이 불가피하다는 현실 인식이 자리 잡아가고 있었다. 그러나 무솔리니는 정전에 서명할 의지가 전혀 없었고, 연합국도 카사블랑카 회담 결과에 따라 무솔리니와는 어떤 협정도 맺을 생각이 없었다. 결국 이탈리아는 무솔리니를 제거해야 했고, 후임으로 바돌리오 원수와 엔리코 카발리아 원수가 거론되었다.

그런데 카발리아는 당시 군내에 남아있었던 소수의 비(非) 파시스트 성향 지휘관으로 알려져 있었기 때문에,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는 그를 총리로 세울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전쟁 책임을 무솔리니에게 미룬채 군주로서 최소한의 지도력조차 보여주지 못했던 국왕은, 정작 이탈리아를 파국으로 몰아넣은 파시스트 체제를 유지하려는 태도를 고집했다.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는 이탈리아의 구체제 인사나 자유주의 정치인들이 다시 영향력을 얻는 것을 극도로 꺼렸고, 그런 이유로 파시즘에 충성하면서도 개인적 원한 때문에 무솔리니를 싫어하던 바돌리오를 선택했다.

바돌리오는 제2차 이탈리아-에티오피아 전쟁에서 잔혹한 전쟁범죄를 저질렀으며, 권력자에게 아부하고 상황에 따라 태도를 바꾸는 기회주의적 인물이라는 것은 당대에도 널리 알려진 사실이었지만 이점 역시 오히려 당시 국왕으로서는 카발리아보다 바돌리오를 선택하는 한 요인이 되었다.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는 1943년 7월 15일 비밀 회동에서 바돌리오에게 조만간 총리에 임명될 것이라 귀띔하며, 내각에 무솔리니 이전 시대의 정치인들은 단 한 명도 포함시키지 말라고 지시했다.

7월 24일, 연합군의 시칠리아 침공 이후 이탈리아 본토가 위혐받는 가운데 무솔리니는 파시스트 대평의회를 소집했고, 디노 그란디가 제출한 불신임결의안이 압도적으로 통과되었다. 다음 날, 무솔리니는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에 의해 해임되는데 이어 체포된 후 그란사소 산맥 근방의 호텔 캄포 임페라토르 호텔에 구금되었다. 그리고 바로 다음날 바돌리오가 후임 총리로 공식 임명되었다.

9월 3일, 바돌리오 총리를 대표해 주세페 카스텔라노 장군이 연합국과 카시빌레 휴전 협정에 서명했다. 하지만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와 바돌리오가 이끄는 정부는 나치 독일의 즉각적인 보복을 두려워한 나머지 협정 발표를 지연시키기로 연합국과 합의했다. 결과적으로 이는 휴전은커녕 이탈리아 군과 국민을 더 큰 위험에 그대로 노출시키는 결정이었다.

결국 9월 8일, 연합국이 바돌리오 포고문을 통해 휴전 사실을 먼저 공개했을 때, 정작 휴전을 집행해야 할 바돌리오 정부는 이탈리아군에게 단 한 줄의 명확한 지시도 내리지 않았다. 전국의 군부대는 갑작스러운 상황 변화에 대응할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았고, 떡갈나무 작전 수행 등을 위해 남하한 독일 국방군의 무장해제 조치에 속수무책으로 당했다.[4] 연합국도 즉각 독일군과의 교전을 위해 이탈리아 본토 상륙을 서둘러 남부 이탈리아 장악에 돌입하는 등 혼란은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통제력을 잃은 에마누엘레 3세와 바돌리오 총리는 9월 9일 새벽 주요 장관 및 참모들과 함께 남하하는 독일군을 피해 로마를 버리고 페스카라로 도주했다. 이어 코르베트함 바요네타호를 타고 브린디시로 향해 연합군 보호 아래 들어갔다. 이 장면은 이탈리아 군주제 몰락의 상징적 순간이 되었다.

9월 29일에는 사실상 휴지조각이 된 카시빌레 휴전 협정을 대체할, 더 상세하고 구속력 있는 장기 휴전 협정이 몰타에서 바돌리오와 연합군 총사령관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사이에 다시 체결되었다. 이어 10월 13일, 이탈리아 왕국은 휴전 협정의 조건에 따라 나치 독일에 공식 선전포고하며 사실상 연합국 측에 가담했다.

바돌리오는 이후 약 9개월간 총리직을 유지했으나, 브린디시에 기반을 둔 소위 '남부 왕국'은 정치적 정통성과 영향력이 극히 제한적이었고, 바돌리오는 총리로서의 실질적 권한 없이 임기만 이어갔다.[5] 결국 1944년 6월 사임했으며, 6월 18일에는 바돌리오 총리와 국왕이 배제하려 했던 바로 그 “무솔리니 이전 시대의 정치인”인 이바노에 보노미가 후임 총리로 임명되었다. 이는 국왕과 바돌리오가 고집해온 파시스트 체제 유지 시도가 허무하게 종결된 순간이기도 했다.

3. 여담

총리 재임 때인 1944년 4월 여러 정당을 모아 정당내각을 만들었다.

장손 피에트로 바돌리오 주니어(1939~1992)는 베트남 응우옌 왕조 바오다이(保大)황제의 딸 응우옌 푹 프엉마이 공주(Nguyễn Phúc Phương Mai, 阮福芳梅 1937~2021)와 결혼했다.

4.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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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수
Maresciallo d'Italia / Grande Ammiraglio / Maresciallo dell'Aria

육군
Regio Esercito
1926
에마누엘레 필리베르토
1926
피에트로 바돌리오
1935
에밀리오 데 보노
1936
로돌포 그라치아니
1942
에토레 바스티코
1943
조반니 메세
명예
움베르토 2세
해군
Regia Marina
-
공군
Regia Aeronautica
1933
이탈로 발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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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現 모데나 군사 대학[2] Grazzano Monferrato. 1939년에 바돌리오의 공적을 기려 "그라차노 바돌리오"로 이름이 바뀐다.[3] 전쟁 당시 남부 전역에서 이탈리아군을 지휘했다.[4] 결국 무솔리니를 탈출시키는 데 성공한 나치 독일은 이탈리아 사회 공화국이라는 괴뢰국을 세우고 북이탈리아를 장악한 뒤 구스타프 선을 세우고 우주방어에 들어간다.[5] 실질적으로 이 시기 실권은 연합국이 설치한 남부 이탈리아 군정청이 행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