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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오다이 황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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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AFA00><colcolor=#DD1E1F>
응우옌 왕조 제13대 황제
바오다이 황제
保大帝 | Bảo Đại
파일:Emperor_Bảo_Đại_on_his_throne_(cropped).jpg
출생 1913년 10월 22일
프랑스령 안남 보호령 후에 황궁
(現 베트남 후에시)
사망 1997년 11월 6일 (향년 83세)
프랑스 파리
능묘 프랑스 빠씨 묘지
재위기간 응우옌 왕조 황태자
1922년 ~ 1925년 11월 13일
제13대 황제
1925년 11월 13일 ~ 1945년 8월 25일
베트남국 초대 국장(國長)[1]
1949년 6월 13일 ~ 1955년 10월 2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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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AFA00><colcolor=#DD1E1F> 성씨 응우옌(Nguyễn, 阮/완)
푹빈투이(Phúc Vĩnh Thụy, 福永瑞/복영서)
→ 푹티엔(Phúc Thiển, 福晪/복전)
부모 부황 홍종 선황제
모후 단휘황태후
형제자매 외아들
배우자 남프엉 황후 (1934~1963)
모니크 빈 투이 (1972~1997)
자녀 5남 6녀
신장 182cm
종교 가톨릭
묘호 없음
시호 없음
제호 말제(末帝)
연호 바오다이(Bảo Đại, 保大/보대, 1925년 ~ 1945년)
절일 만수절(萬壽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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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3. 가족4. 평가
4.1. 긍정적4.2. 부정적
4.2.1. 빙쑤옌 문제
5. 창작물6. 둘러보기

[clearfix]

1. 개요

바오다이 황제베트남 제국 응우옌 왕조의 마지막 황제이자, 허수아비 군주, 그리고 베트남국의 초대이자 마지막 국장이다. 즉위하기 전에 이름은 완복영서(阮福永瑞)이었으나, 민망 황제가 제정한 법칙에 따라 즉위 후에는 완복전(阮福晪)으로 고쳤다. 계정제의 아들. 황후로는 남프엉 황후가 있는데 미인이다.

마지막 황제였기에 묘호시호는 받지 못했고,[2] 보통 연호를 따서 바오다이(保大, 보대)[3] 황제나 말제로 불린다.

바오다이는 그렇게 무능한 인물이 아니었지만, 식민지 국가의 허수아비 군주로서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고, 몇 차례의 기회가 왔었는데도 허송세월만 하여 암군으로 평가하는 사람도 많다. 응우옌 왕조에 대한 마지막 기대까지 버리게 만든 장본인이기도 하다.

2. 생애

파일:20231210_121547.jpg
아버지 계정제와 프랑스 총독 알베르 사로와 함께 찍은 사진
가운데 어린 아이가 바오다이 황제다.

1913년 10월 22일 부황 계정제와 모후 호앙 티 쿡 사이에서 후에 황궁에서 태어났다. 1922년 4월 28일 8살의 어린 나이에 태자로 책봉된다. 그러나 프랑스 지배 체제에서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전혀 없었다. 태자로 책봉된지 2개월도 되지 않아 프랑스 대사관 부부에게 입양되어 프랑스 유학 및 프랑스 감시 체제에서 살아가면서 모든 걸 포기하고 술과 여자에만 탐닉해 살아가게 된다.
파일:20231210_121605.jpg
이런 가운데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일본이 인도차이나에서 프랑스를 무너뜨린 후 프랑스의 식민지 행정기구가 와해되자 괴뢰국을 세워 일본의 허수아비 황제로 그 지위를 유지했는데, 그야말로 선통제와 똑같은 신세였다.

하지만 그래도 아예 개념은 없지 않았고, 베트남에서 착취하는 일본 제국에 대하여 "짐은 외국군이 짐의 백성을 해하는 것을 보고 싶지 않소."라며 막으려고 나서긴 했다. 물론 일본은 깔끔하게 무시하고 베트남에서 착취하여 수백 만 베트남 민중을 굶어죽게 하였다.

결국 이 모든 것이 일본에게 빌어붙은 그가 벌인 짓이라고 믿은 베트남 민중들에게 증오를 받게 된다. 그래도 호찌민은 그를 일절 죄인으로 대우하지 않고 황제로서 정중하게 우대하며 제위에서 흔쾌히 퇴위하길 권유했고, 그도 순순히 받아들여 베트민 최고 고문 자리에 앉았으나 실권자는 따로 있었으니 여기서도 허수아비였다.

파일:external/fs.chungta.com/Vua-Bao-Dai-1913-1997.jpg

나중에 베트남국 체제의 초대 국장(國長, 국가원수)이 되었지만 여전히 프랑스허수아비였기에 자포자기한 그는 짐의 시대가 이렇게 왔다며 절규 아닌 절규를 하며 술과 탐욕에 찌들어갔다.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프랑스가 패하고 더 이상 프랑스의 힘을 빌려서 체제를 유지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바오다이는 1954년 저명한 민족주의 독립운동가 응오딘지엠을 총리에 임명해서 상황을 타개하려 했지만 프랑스의 꼭두각시인 바오다이를 아주 싫어했던 응오딘지엠은 프랑스 퇴거 운동과 더불어 군부의 친불파들을 대량으로 숙청했고 1955년 국민투표를 실시해 바오다이의 퇴위 여부를 물었다. 여론은 압도적으로 바오다이의 퇴위를 요구했고[4] 바오다이는 마침내 퇴위했다. 하지만 당시 바오다이는 오히려 "이제서야 지겨운 허수아비 생활을 마감하는군. 30년이나 걸렸어."라며 홀가분하게 퇴위 서명을 하고 베트남을 떠났다.

이후 프랑스에서 조용히 살아가던 그는 그동안 2명의 정실부인과 3명의 첩을 두었다. 그는 본래 불교 신자였으나, 80세에 가톨릭으로 개종했다. 1997년, 83세에 파리에서 숨질 때는 6번째 결혼한 프랑스인 아내 모니크 뱅 튀가 곁에서 자리를 지킨 가운데 눈을 감았다. 그래도 애국심은 남아 있어서 베트남 전쟁 때도 남베트남과 북베트남 정부와 미국에게 전쟁을 멈추라고 호소하는 등 나름대로 비참한 상황에 처한 조국을 구하기 위해 노력했다는 점에서 망국의 군주 중에서 그래도 괜찮은 인물로 평가된다.

3. 가족

6명의 여인들에게 모두 5남 6녀 즉, 11명의 자식을 얻었다. 사망 후 남프엉 황후 소생의 장남이자 전 황태자인 응우옌푹바오롱(Nguyễn Phúc Bảo Long, 阮福保隆, 1936~2007)이 명목상 응우옌 왕조의 황실 수장 지위를 이어받았다. 응우옌푹바오롱이 2007년에 사망한 뒤에는 후사가 없었던 관계로 동생인 응우옌푹바오탕(Nguyễn Phúc Bảo Thăng, 阮福保陞, 1943~2017)이 뒤를 이어 수장이 되었으며 2017년에 응우옌푹바오탕이 사망한 현재는 그의 이복동생인 응우옌푹바오안(Nguyễn Phúc Bảo Ân, 阮福保恩, 1951~)이 그 지위를 이어받았다.

응우옌푹바오롱·바오탕 형제는 자손이 없어서 남프엉 황후의 남계 자손은 끊겼다. 이들이 실제로 즉위했다면 명명제가 제정한 법칙에 따라 응우옌푹바오롱은 응우옌푹찌(阮福智)로, 응우옌푹바오탕은 응우옌푹한(阮福暄)으로, 응우옌푹바오안은 응우옌푹지안(阮福暕)으로 개명했을 것이다.

딸 응우옌푹프엉마이(Nguyễn Phúc Phương Mai, 阮福芳梅, 1937~2021)는 이탈리아 왕국 총리이자 1대 아디스아바바 공작인 피에트로 바돌리오의 손자 피에트로 바돌리오 주니어와 결혼했다.

4. 평가

4.1. 긍정적

베트남에서 암군으로서 욕을 먹고 그가 죽은 뒤에도 별다른 관심을 가지지 않고 있으나, 사치 등의 행각과는 별도로 그의 처지 자체에 대해서는 동정하는 이들이 많다. 식민지 치하에서 허수아비로 살아가던 점은 일제강점기영친왕과도 비슷하다. 그가 마지막 군주라는 점에서 대한제국 마지막 황제인 순종에 빗대어지기도 하지만, 일제가 조선을 식민지로 만들면서 황제 지위까지 박탈한 것과 달리 프랑스는 베트남을 식민지로 만들었지만 허울뿐인 황제 지위만 그대로 유지했다. 즉 이 사람이 태어날 때부터, 그리고 즉위한 뒤에도 이미 베트남은 프랑스의 식민지였다. 굳이 한국사와 비교하자면 보대제는 영친왕 혹은 이구(1931)에 해당하는 사람이다. 그리고 한국사의 고종이나 순종에 해당하는, 즉 식민지로 전락하는 시점에 재위하던 베트남의 황제는 7대 끼엔푹 황제나 8대 함응이 황제이다.

실제로 이 점을 바오다이 본인도 잘 알고 있어, 젊은 시절 허수아비로서 인생에 대한 좌절감에 취해서인지 프랑스 망명 이후로도 사치를 부리며 한량같은 모습만 보였다고 한다. 비록 1972년 북베트남에 보내는 메시지로 전쟁 중단을 요구하는 등 몇몇 언행을 보이기도 했지만 그다지 부각되지는 못했다.

4.2. 부정적

그의 사치행각은 확실히 비난받을 점이다. 1952년 미국에서는 바오다이가 1년에 500만 달러 가까이를 홀로 쓰고 있으며, 스위스프랑스 은행에 상당한 돈을 숨기고 있다고 비난하기도 했다. 당시 베트남 국가예산 5%에 달했던 거액이다. 미국 카투니스트 알 허시펠드(Al hirschfeld/1903~2003)는 1947년 바오다이를 홍콩에서 만났는데 그는 자신의 만화에서 바오다이를 "거만한 돼지가 된 황제."라고 풍자했다. #

그의 행적은 비슷한 시기 이웃나라 캄보디아의 노로돔 시아누크 국왕과 대비된다. 바오다이나 시아누크나 무능한 건 마찬가지였지만, 시아누크는 왕조와 상극인 크메르 루주와 제휴하면서까지 권력을 쟁취하려다 크메르 루주에게 배신당하고 자식들이 킬링필드에 살해당하는 등 우여곡절을 겪었다. 그럼에도 캄보디아인들의 왕정 때의 노스탤지어 분위기에 힘입어 1993년 왕정 복고에 성공했던 것과 반대로 바오다이는 적극적인 권력의지 없이 주변의 변화에 무력하게 끌려다니다 결국 망국의 군주로 남았다.

4.2.1. 빙쑤옌 문제

파일:external/i780.photobucket.com/4665478774_6bcc7a8336_o1-1.jpg
빙쑤옌의 보스 '바이비옌(Bảy Viễn)' 레반비옌(Lê Văn Viễn, 黎文園, 여문원).

크게 비판 받는 것 중 하나가 베트남 갱단 기반 군벌 세력인 빙쑤옌(Bình Xuyên, 平川, 평천)을 휘하 부대로 둔 것이다.

캘리포니아 대학교 버클리 캠퍼스의 Nu-Anh Tran 교수의 글에 따르면, 당시 남베트남 지역에는 반베트민 성향을 지녔던 3대 군벌 분파가 존재했는데, 빙쑤옌은 그중 가장 작은 세력이었다. 그러나 호아하오교와 까오다이교의 종교 기반 군벌들과 달리 빙쑤옌은 그 근본이 깡패 조직이었다는 것이 문제였다. 일본의 베트남 침략 당시 반불 성향 때문에 일본에 단순협력한 나머지 두 군벌 분파들과 달리 빙쑤옌은 친일파가 되어서 일본의 잔학행위에까지 협력하는 등 악명을 떨쳤다. 항일 베트남인들을 가혹하게 학살하고, 그 식솔 및 마을 사람까지 팔다리를 잘라버린 일까지 저질렀다. 그런데 정작 일본군이 베트남에서 물러날 기미를 보이자 빙쑤옌은 정반대로 친일파 베트남인들을 돌아다니며 죽여버리고 그 식솔들 팔다리를 자르는 등 기회주의적인 면모를 보였다. 그러나 바오다이가 그 빙쑤옌의 보스이던 바이 비옌[5]을 친위대장으로 임명하고 대장 계급을 수여했다는 점에서 지금도 비난받고 있다. 이를 두고 응오딘지엠 탓이라고 하는 이도 있으나 응오딘지엠은 오히려 반대하는 입장으로 평소 빙쑤옌을 세균덩어리라고 멸시했다.

사실 바오다이가 자기 휘하에 확실히 수족으로 부릴 수 있는 세력이 빙쑤옌 뿐이던 건 사실이다. 일단 베트남국 자체가 프랑스의 괴뢰 정권이라 바오다이가 프랑스에 저항하려는 움직임이라도 보이면 베트남국의 정규군은 바로 바오다이에게 총구를 돌릴 확률이 높다.[6] 베트민의 경우 호치민이 그를 우대해줬다고 하지만, 퇴위를 종용하는 등 완전한 우군은 아니었다. 40~50년대의 베트민은 이미 다른 세력에 손을 잡자고 제안한 뒤 배신하는 일을 수차례 해왔기 때문에 이들과 협력했다가는 자기도 언제 목숨을 위협받을 지 몰랐을 것이다. 그리고 종교 군벌들은 세력도 강대하고 빙쑤옌보다 도덕적으로는 우위에 있었으나, 자신들의 종교 지도자들의 신병이 협력관계를 맺었던 베트민에게 위협받자 베트민과의 연합을 깨고 프랑스에 협력했다. 이런 행적에서 볼 수 있듯이 이들은 자신들의 종교의 입장에 따라 행동하는 면이 강했기에 동맹이면 몰라도 휘하에 둘 수 있는 세력이 아니었다. 물론 프랑스와의 협력에 반발하고 자기만의 강력한 군벌 세력을 순식간에 조직해서 베트민과 프랑스 양쪽과 맞서 싸운 찐민테 같은 독종도 있었지만, 찐민테가 자기 종교 주류와 다른 행보를 보였던 이유를 따져보면 프랑스와 깊은 연관이 있던 그가 과연 찐민테를 설득할 수 있었을지도 의문이다. #

응오딘지엠은 바오다이 황제가 퇴위하자마자 빙쑤옌을 군대를 동원해서 토벌해버렸다. 빙쑤옌은 일개 조직폭력배나 정치깡패의 수준이 아니라 사실상의 군벌 세력이나 다름없었기에 경찰력으로는 뿌리뽑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빙쑤옌 소탕전은 거의 내전세력 진압을 방불케할 정도였다. 기관총과 박격포가 동원되었고, 일부 빙쑤옌 조직원들은 남베트남군에 대포로 응전할 정도였다. 결국 빙쑤옌은 완전히 제압당하고, 간부들은 공개 총살되면서 뿌리가 뽑혔다. 정작 보스인 바이비옌은 프랑스로 도망갔고, 1956년 남베트남 법원은 궐석 재판으로 그에게 사형을 언도했다. 프랑스에 머물던 바이비옌은 파리에서 몇 번이나 암살을 당할 뻔했는데 갱조직 문제로 연루된 것으로 드러났다. 그럼에도 죽지 않고, 1971년까지 천수를 누리다 사망했다.

미국에서도 빙쑤옌을 안 좋게 봤기에 남베트남 정부의 토벌을 격찬하며 지지했다. 반대로 빙쑤옌을 지원한 바오다이는 큰 비판을 피할 수 없었다. 어릴 적부터 허수아비로 자라나서 저렇다는 변명도 있겠지만, 일국의 지도자급 인물이 조폭을 두둔했다는 것 자체가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7]

다만 빙쑤엔은 한 가지 측면으로만 보기는 어려운 점이 있다. 빙쑤엔은 프랑스군과 매우 밀접한 관계[8]에 있었으며, 빙쑤옌과 응오딘지엠의 싸움은 프랑스미국의 대리전이었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 빙쑤엔의 패배로 프랑스는 완전히 베트남에 손을 떼었고, 남베트남은 미국이 책임지게 되었다. 그리고 빙쑤옌이 사라진 후 사이공에 베트콩들이 득세하게 된 것을 보면 그들이 비록 악했지만 그 시절에는 필요악이었을 지도 모른다.

5. 창작물

프랑스의 허수아비였다지만 베트남의 마지막 황제임에도 바오다이의 일대기를 다룬 베트남 사극은 매우 드물다. 2004년에 방영된 《황궁의 양초(Ngọn nến Hoàng cung)》라는 작품이 그나마 유일하다. 일본에 의한 프랑스 총독부 축출과 베트남 제국 건국, 바오다이 황제의 퇴위까지를 다뤘다. 장 드라트르 드타시니에 대해서도 언급이 나오지만 직접 등장하지는 않는다. 왕실이 있었다가 폐지된 다른 공화국들이라면 한번쯤은 있을 법한 입헌군주제 대체역사 시나리오조차 낮은 인지도와 높은 비호감도 때문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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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국의 역대 국장
(초임) 초대 응우옌푹티엔 베트남 공화국으로 전환
베트남국의 역대 총리
응우옌반쑤언(임시) 초대 응우옌푹티엔 2대 응판롱


[1] 베트남국국가원수다. 대통령과 같은 직위였다. 한국사로 치면 영친왕광복 이후 대한민국 임시 국가원수를 역임했을 경우에 가깝다.[2] 정식 시호는 없더라도 선통제영친왕의 사례처럼 종친 차원에서 사시 정도는 올릴 수 있을 텐데, 이상하게도 사시를 받았다는 기록은 없다.[3] 출전은 춘추좌씨전초장왕이 무에 대해 논하는 구절인 "綏萬邦,屢豐年… 夫武,禁暴,戢兵,保大,定功,安民,和衆…"(온 나라 제후들을 편안하게 하시고, 거듭 풍년이 되게 하셨다... 무릇 무(武)라는 것은 폭력을 멈추게 하고, 무력을 거두어들이고, 천명을 보전하고, 나라를 구하는 공을 세우고, 백성을 편안하게 하고, 여러 제후국의 백성들이 두루 화목하게 하며...)에서 따온 것이다.[4] 하지만 투표는 부정투표였다.[5] 1904년~1971년. Bảy Viễn. 본명은 레반비엔(Lê Văn Viễn, 黎文園).[6] 물론 응오딘지엠은 재빨리 수뇌부를 제거해버리고 자기 편으로 만들었으니, 그저 능력의 차이라고 보는 것이 좋을듯.[7] 우리나라에 대입하면 순종이나 영친왕이정재 급의 깡패의 행위를 묵인해주는 상황이다.[8] 실제로 빙쑤옌 두목 바이비옌이 프랑스로 도주할 때 프랑스군의 도움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