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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탈리아 공화국 총리 대수는 이탈리아 왕국 총리 대수를 이어서 가산한다. 이탈리아 왕국 총리 · 파시스트 정권 관련 직위: 이탈리아 대통령 | }}}}}}}}}}}} |
출생 | 1934년 2월 24일 | |
이탈리아 왕국 밀라노 | ||
사망 | 2000년 1월 19일 (향년 65세) | |
튀니지 함마메트 | ||
재임기간 | 제45대 총리 | |
1983년 8월 4일 ~ 1987년 4월 18일 | ||
학력 | 밀라노 대학교 (법학 / 학사) 우르비노 대학교 (정치학 / 학사) | |
직업 | 정치인 | |
약력 | 이탈리아 사회당 서기 유럽의회 의원 하원의원 이탈리아 제45대 총리 | |
소속 정당 | [[이탈리아 사회당(1892년)| 이탈리아 사회당 ]] | |
가족 | 배우자 안나 마리아 몬치니 자식 2명 | |
종교 | 가톨릭 | |
신체 | 키 192cm[1] | |
{{{#d8d8d4 서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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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탈리아의 제48대 총리.이탈리아 사회당 소속으로는 최초로 총리직에 올라 당의 전성기를 이끌고, 라테라노 조약을 수정하여 국교 조항을 제거함으로써 이탈리아를 세속 국가로 만드는 업적을 세웠지만, 마니 풀리테 당시 부패 혐의가 탄로나자 튀니지 함마메트로 망명하여 객사했다.
2. 생애
2.1. 집권 이전
2.2. 베티노 크락시 내각
1983년 총선에서 기독교민주당과 공산당이 이전에 비해 부진한 반면, 크락시가 이끄는 사회당은 오랜만에 10%가 넘는 득표율을 기록하며 약진했다.덕분에 사회당은 원내3당임에도 불구하고 연정 협상에서 주도권을 잡을 수 있었고, 원내1당인 기민당의 양보를 받아 크락시는 사상 최초의 사회당 소속 총리이자 전후 최초의 좌파 총리가 되었다.
집권 1년째인 1984년에는 교황청과 협상하여 라테라노 조약에서 국교 조항을 삭제함으로써 이탈리아를 세속 국가를 만드는 업적을 세웠다. 크락시는 경제적으로 우파적인 정책을 수용해서 임금 물가연동제를 폐지하는 한편,[2] 물가상승률을 10% 아래로 낮추는데 성공했다. 실업률이 크게 낮아진것은 아니었지만 경제성장률은 2차 오일쇼크기때보다는 호조를 기록하였고, 크락시 말기인 1987년에는 이탈리아의 경제력은 세계 5위를 기록한다.[3]
반면에 외교적으로 우파정당인 기민당과 연정했음에도 레이건이 리비아를 폭격하려하자 이를 강력하게 거부했고, 팔레스타인과 우루과이 광역전선, 칠레 야권, 체코슬로바키아 반체제 인사, 폴란드 자유노조를 적극 지원하는 등 외교적으로는 제3세계 지향적인 모습을 보였다.
집권 4년째인 1987년에 치러진 총선에서 사회당은 선전했지만 기대에 비하면 못미쳤고, 총리직을 기민당에 넘겨주기로 합의하여 크락시는 퇴진했다.
2.3. 퇴임 이후 ~ 마니 풀리테 이전
크락시의 퇴임 이후에도 사회당은 기독교민주당의 연정 파트너로서 내각에 참여했고, 크락시 또한 사회당의 지도자로서 꾸준히 존재감을 드러내는 거물급 정치인으로 활동했다.2.4. 마니 풀리테: 몰락
1992년 사회당 간부가 연루된 비리가 드러난 것을 계기로 대규모 반부패 수사인 마니 풀리테가 시작되었고, 크락시 역시 부패 혐의에 연루되어 검찰의 수사망에 오르게 되었고, 1993년에 당내외의 비판 여론을 견디지 못하고 당서기직에 사임했다.이듬해인 1994년에 열린 총선에서 사회당이 제대로 국민의 심판을 받아 군소정당으로 전락하여 자진 해산하자, 크락시는 정계 은퇴를 선언하고는 구속 수사를 피하기 위해 튀니지의 함마메트로 망명했다.
이로써 정치 생명이 완전히 끝장난 크락시는 튀니지의 독재자 지네 엘 아비디네 벤 알리의 보호를 받으며 망명 생활을 하는 한편, 본인의 변호인을 대신 이탈리아 법원에 출석하게 하여 무죄를 입증하도록 했다.
그러나 당사자가 직접 출석하지 않는 재판에서 유리한 판결이 나올리가 만무했기에, 결국 징역 27년형을 선고받았고, 이로써 구속 수사를 피하기 위한 망명은 최악의 자충수가 되고 말았다.
결국 크락시는 고국 이탈리아로 돌아가지 못하고 객지인 튀니지 함마메트에 계속 머물다가 2000년에 현지에서 초라한 죽음을 맞이했다.
3. 여담
- 크락시의 망명을 받아준 절친인 튀니지의 독재자 지네 엘 아비디네 벤 알리는 2011년 튀니지 혁명으로 인해 망명길에 오르게 되었고, 고국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2019년에 객지인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사망하여 크락시와 같은 최후를 맞이했다.
- 크락시가 밀라노 시장으로 재직하던 시절부터 친분을 유지한 기업인 실비오 베를루스코니는 1983년 크락시 내각 출범 이후에 급격하게 부를 축적하여 이탈리아 최대 미디어 재벌로 부상했다. 이 과정에서 크락시 및 사회당과의 정경유착이 있었다는 게 공공연한 비밀이었지만, 마니 풀리테로 인해 크락시와 사회당이 풍비박산날 위기에 몰린 상황에서도 어쩐일인지 베를루스코니는 수사망에 오르지 않았고, 크락시와 사회당이 완전히 몰락한 1994년 총선에서 베를루스코니는 전진 이탈리아라는 신당을 창당하고 기민당 및 사회당 지지층을 흡수하며 약진하여 총리직을 거머쥐었다. 그리고 튀니지로 망명한 옛 후원자 크락시를 철저하게 무시하며 거리를 둔 베를루스코니는 이탈리아 우파 진영의 주도권을 장악하고 네 차례에 걸쳐 총리직을 역임하며 무솔리니 이후 최장수 총리가 되었고, 각종 부패, 망언, 섹스 스캔들에도 불구하고 왕성한 정치 활동을 이어가다가 2023년 이탈리아에서 사망했는데, 장례는 국장으로 치러지고 현직 총리를 비롯한 주요 정치인들이 그의 죽음을 애도하여 크락시와는 여러모로 대조적인 최후를 맞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