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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07 12:12:30

프레스 갱

1. 개요2. 유래3. 방식4. 저항5. 쇠퇴6. 유사 사례7. 대중 매체에서 등장

1. 개요

프레스 갱(Press gang)은 주로 18세기부터 19세기까지 있었던 서양 문화권 해군의 강제 징집이다. 정식 명칭은 "강제 징용"(impressment)이며 국가 폭력에 해당한다.

이러한 행위를 행위 주체를 가리지 않고 크림프(Crimp), 흔히 상하이(Shanghai)[1]라고 칭하는데 해군뿐만 아니라 영국 육군[2]이나 민간 선박에서도 볼 수 있었던 일이다.

사실 당시에는 타 유럽 국가들도 이런 식의 강제 징집을 실행하였으나 영국의 사례가 특히 유명하며 이를 "프레스" 혹은 "프레스 갱"이라고 부른다. 이하에서는 주로 영국 해군의 사례를 중심으로 설명하지만 영국 육군판 프레스 갱인 크림프도 등장배경이 다를 뿐 거의 비슷한 행위다.

2. 유래

프레스 갱은 엘리자베스 1세 여왕 시절에도 이미 존재했다고 언급된다.#

흔히 범선 시대 유럽에서 해군으로 바다에서 근무하는 것은 매우 고된 일이었기 때문에 기피 대상이었으며 이로 인해 강제 징집이 성행했다고 알려져 있지만 이는 반만 맞는 말이다. 의외로 전시가 아닌 평시에는 해군 수병이 오히려 상선 선원보다 인기가 더 높았기 때문이다.

상선은 이윤을 추구하기에 인건비 절감을 위해 선원을 최소한으로 고용하지만, 그에 비해 해군은 인건비를 상대적으로 덜 고려하므로 인력을 넉넉히 준비해 두기에 업무 부담이 적었고, 식량과 술의 공급도 상선은 회사 여건에 따라 들쭉날쭉했지만 해군은 정량 배급을 보장했다.

여기에 더해, 바닷일은 원래 그냥 힘들다. 해군에 있든 상선단에 있든 배라는 물건은 본래 철저한 계급에 따른 지휘 체계에 의해 통제되는 물건이며 그렇게 하지 않으면 바다에 떠있는게 아니라 초고속으로 용궁 여행을 떠난다. 그리고, 상선이나 함선이나 언제든 뭔가 사고가 나서 용궁갈 수 있는 위험천만한 환경인건 동일하며, 되려 군대라는 조직이 관리하고 있는 해군이 괴상한 일이 덜 일어나면 일어났지 상선단보다 더 일어나긴 어려웠다. 물론 함선에 타면 전투로 죽을 수 있지만 상선에서도 해적을 만나 죽을 수 있긴 마찬가지다. 이러니 상선에 있으나 함선에 있으나 뱃사람 입장에선 뭐 다를 게 없는 것이다. 둘 다 싫으면? 해적해야지...

그래서 평시 기준으로 영국 해군은 자원자로 충분히 필요한 인원을 모집할 수 있었다. 전시에도 상황은 그리 나쁘지 않아서 영국 해군사에서 가장 치열한 전투 중 하나였던 트라팔가 해전 당시에도 전체 수병 중 절반이 자원자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레스 갱과 같은 방식이 유행하게 된 것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존재한다.
  1. 수병이 꼭 필요한 전시 상황이 오면 상황이 역전되어 상선이 더 선호된다. 전쟁이 일어나면 물자 수송을 위한 상선단(merchant navy)의 활동이 증가하므로 뱃사람의 수요는 늘어나고, 해군에서 뱃사람들을 고용하는 행위 자체가 뱃사람의 공급을 또 줄여버리므로 결과적으로 뱃사람의 봉급이 당연히 치솟는다.

    반면 영국 해군 수병의 봉급은 기록에 따르면 1653년부터 1797년까지 무려 140년이 넘도록 동결되어 있는 상황이었다. 무엇보다 상선원은 개인이 돈이 될 법한 물건들을 출항 전에 사서 다음 기항지에서 이익금을 붙여 되팔아 이윤을 남겨 돈벌이를 할 수도 있는데 수병은 기항해도 대개 상륙이 금지되어 있었다. 게다가 상선원은 항해 횟수마다 계약 및 하선이 자유로운 데다 계약한 시점 이전의 중간 기항지에서 위약금을 일부 물고 내릴 수도 있어 한 번 입대하면 몇 년은 묶여 있는 수병들보다 입사와 퇴직이 자유로웠다. 그래서 전시에 수병으로 입대하는 건 상선 선원으로 큰 돈을 벌 기회를 놓치는 일이었다.

  2. 전시에 필요한 해군 인력이 늘어나도 너무 많이 늘어났다. 영국과 프랑스, 스페인 등 당시 유럽 강대국들은 제해권을 확보하기 위해 경쟁적으로 해군의 크기를 늘렸고 그 결과 국가 경제가 해군을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지경까지 다다르게 되었다. 그러다보니 유럽 국가들은 부담이 되어 해군은 평시에는 군축을 통해 해군의 규모를 줄인 채 유지하는 방식으로 비용을 절감하였다.

    영국은 평시에는 상선들이 다니는 항로를 타국의 해적사략선(privateers)들로부터 보호하고 적 함대의 동태를 살피기 위해 상시 초계를 하는 프리깃슬루프, 4급 전열함 전 함정을 운용하고, 실제 전투, 즉 함대 결전에서 주로 쓰이는 1급부터 3급 전열함은 훈련함기함 임무 수행, 긴급 시 바로 투입하기 위해 현역함으로 유지하는 소수를 제외하고 전부 육상에 올려 무장과 항해용 장비들을 제거해 보존하고 전시에 재정비해 투입하는 방식으로 운용하였는데 이를 "in ordinary" 상태라고 지칭했다.

    이런 식으로 해군을 운용하면 평시에 요구되는 해군 인력과 전시 요구되는 해군 인력의 수에 엄청난 차이가 생긴다. 예를 들어 미국 독립 전쟁 이전의 영국 해군은 18,000명이었으나 독립전쟁이 시작된 후 그 수요가 70,000명에 다다랐다. 이 말은 전쟁이 시작되지마자 대량의 수병을 어떻게든 모집해야 한다는 말인데[3], 이를 자원자들로 채우기에는 양은 너무 많으며, 시간 여유는 너무 없는 것이다. 전근대의 느려터진 통신, 교통 속도 때문에 제대로 된 방법으로 수병을 동원하려면 걸리는 시간이 어마어마했기에 강제 징집이라는 극단적인 수단을 동원해야 했다.

  3. 심지어 가용 남성 인원을 해군이 전부 독차지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다. 일단 애초에 배를 탄다는 것 자체가 고되고 선호되지 않는 직업인지라[4] 해군보다는 육군이 선호되며[5], 그 적은 뱃사람의 수 중에서도 전쟁이 터진 상황에서 해군으로 가려는 사람의 수는 더욱 적었고, 다 거르고 남은 '뱃사람과 졸병 노릇을 전부 수행할 수 있는 한줌의 인재들'마저도 이들을 두고 사략선 및 해적[6] 세력과 치열한 경쟁을 해야 했다.

    심지어 모병하는 함정들 사이에서도 경쟁이 붙었다. 후술하듯 각 함정의 함장들에게 수병을 자체 충원하도록 하다 보니 지원자들도 함의 상태나 분위기 등을 지켜보고 좋은 쪽에 가려고 하니 몰리는 경우가 많았다. 모병 포스터나 모병관의 연설에서 자랑할만한 화려한 전공이 있거나, 높은 포획 상금 획득 가능성을 어필할 수 있거나, 함장이 부유해 사비를 털어 비싼 페인트 등을 써서 배를 보기 좋게 꾸미거나, 승조원들에게 깔끔한 피복을 지급하고 주류나 부식도 정규 보급에 추가로 지급하는 조건을 내거는 배일수록 모병이 수월했다.

어찌됐건 전쟁은 이미 터졌고, 해군 본부는 충분한 해군들을 요구하는데, 입대자는 미달이고 정상적인 모병으로 짧은 시간 안에 모자란 인원들을 채울 가능성은 전혀 없는 매력 없는 해군 함정의 모병관에게 마지막으로 남는 선택지는 단 하나, 장정들이 모이는 적당한 곳에 몽둥이 들고 다짜고짜 쳐들어가서 위협하거나 죄다 후드려 팬 다음 배로 끌고 가는 '프레스 갱', 즉 강제 징병 뿐인 것이다.

3. 방식

당시 영국에서 수병의 조달 권한은 해군 본부가 아닌 영국 국왕어명에 의거하여 함대 사령관 및 개별 함선의 함장들에게 주어졌고 교육 및 훈련도 함선별로 자체적으로 했다. 해군본부는 제출된 명단에 따라 급여와 보급 물자 현물 및 그 구매 비용 등을 주는 정도만 했다. 따라서 프레스 갱 또한 충분한 숫자의 승조원을 편성하지 못한 함선의 함장들이 자신의 배에서 장교가 인솔하는 징집대를 편성해 내보내는 식이었다.

징집대는 소속함이 정박한 뒤 육상에 상륙했고 정박한 상선이나 어선에 올라타 "국왕 폐하의 해군에서 복무할 지원자를 모집한다. 지원자의 수가 부족하면 강제로 차출해 징집하겠다."는 인솔 장교의 선언으로 시작하여 자원자의 수가 모자라면 선원들 일부를 강제로 끌고갔다. 함장들 입장에선 가장 필요한 자원이 바로 숙련된 선상 경험 근무자였기 때문에 선원 몇 명을 징집하는 걸로 인원이 확충되면 이걸로 끝이다.

하지만 선원의 징집만으론 머릿수가 모자라거나 시간이 없다면 "기술자와 그 조수, 그리고 신사" 중에서 징집을 시작했다. 즉, 에 보이는 모든 성인 남자들이 징집의 대상이 된다는 말이다. 이 과정에서 징집 대상자의 의사는 당연히 무시된다. 이게 바로 프레스 갱이 공포의 대상이 된 이유다.

무차별 징집 시엔 일단 만만한 부랑자[7]나 술집에 박혀 있는 술꾼들이 가장 먼저 끌려갔고 자기 할 일 하다가 갑자기 들이닥친 프레스 갱한테 가족들 눈 앞에서 끌려가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특히 당시 해안가의 술집 고객 대다수는 선원이나 어부들이었으므로 여기를 덮치면 해군에서 원하는 숙련된 인력을 확보하기 쉬운 데다 좁아터진 술집에서 취한 몸으로 도망가기 어려웠기 때문에 술집은 징집대가 수병 모집 장소로 자주 애용하는 곳이었다. 같은 이유로 여인숙도 자주 털렸다. 영국 육군처럼 지방 유치장이나 교도소에 있는 죄수들을 사면해 준다는 걸 전제로 징집하는 일도 있었다.

반면 잘 빼입은 사람들은 알고 보니 높으신 분들이라서 잘못하면 함장이 피를 볼 수도 있었기 때문에 정말 급박하거나 막 나가지 않는 이상 이들까지 끌려가는 일은 드물었지만, 시의원이 난데없이 프레스 갱으로 끌려갔다가 가족들과 지역 유지들의 강력한 항의로 간신히 풀려났다는 기록이 존재한다. 즉, 상황이 절박하면 진짜 아무나 끌고 가는 경우도 있었다.
범선 시대에선 전시에 하급 장교는 수병 못지 않게 부족했고, 상선 사관은 더욱 수가 제한되는 만큼 중상급 장교들도 인원 부족이 속출하곤 했기 때문에 잘 차려입고 잘 배운 신사라 해도 배에 끌려가는 일은 분명히 있을 수 밖에 없었다. 항해사 같은 고급 사관 역을 할 수 있는 인물은 물론, 심지어 함장, 한술 더 떠서 제독(!)마저 부족한 경우가 생기곤 했기 때문에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보통 이런 "신사"들은 잘 설득해서 "모셔" 데려가기 마련이지만, 당장 아무 뱃사람에게 고급 사관을 맡기기 곤란한 특정 상황에 어느정도 위신이 서는 인물이 필요한데 도저히 모셔올 사람이 없다면, 전술한 대로 강제로 끌고 오는 일도 있었다. 원래 군대의 역할(?)중 하나가 가오(...)이기도하다. 전근대에는 더더욱 그랬다. 하물며 귀족 사회가 아직 강성하던 시대라면? 당장 꽤 화려한 신규 함선에 고급 장교가 부족하다면, 아무 상선 사관이나 데려갈 수 없고 좀 신사적인 사람을 찾아야할텐데 그게 쉬울리가 있나... 그리고, 이런 가오 넘치는(?) 함선을 두 척 이상 지휘해야는 고위 장교가 필요하다? 이러면 장교가 배를 알거나 말거나 일단 어느정도 배경이 있는 사람이 필요해진다. 좀 일반적인 함선들이라면 유력가의 자식들을 데려와 체워넣겠지만 간판이 중요한 상황이라면 정치인마저 어거지로 끌고와서라도 "정중하게 모셔와야"하는 것이다. 그래도 이런 경우는 정말 드물었는데, 영국 해군에서 장교는 평시에 임관만 십수년씩 기다리는 사관후보생들과 반액 급여 받으며 놀고 있는 예비역들이 잔득 있었기에, 이들을 임관 및 재소집하고 진급 적체에 시달리던 현역 위관들과 함장들을 임시 계급으로든 정식으로든 진급시켜 함장과 제독 자원을 확보하면 금세 해결됐기 때문이다.

물론 이런 식으로 진짜 막무가내로 끌고 다니는 것은 기본적으로 "지양"하긴 했다. 영국의 경우, 자국 군인공무원, 군인 및 공무원이나 마찬가지 대우를 받던 동인도회사 직원 등은 프레스 갱의 대상에서 제외되었으며[8] 노인이나 어린이, 장애인도 징집하지 않았다.

뱃사람이라 하더라도, 상선 사관 중 고급 장교에 해당하는 신사 계층인 선장이나 상급 항해사들은 징집하지 않았으며, 기술자로써 역시 고급 상선 사관인 직별장들 또한 징집하지 않았다. 보통 이들 해군에 장교가 필요하다면 자원해오는 경우가 많았기에, 보통은 굳이 징집하려 할 이유는 없었다.

원칙적으로 외국인은 프레스 갱의 징집 대상이 아니었으나, "영국 여자와 결혼했거나, 영국 상선에서 2년 이상 근무했을 경우"는 가차없이 징집 대상이 되었다.

전술하였듯 정말 긴급하면 아무나 끌고 가버리는 경우가 분명 있었고, 신사들이라 해도 모셔가 버리는 경우가 왕왕 있었기에, 징집 제외 대상자에게 일종의 면제증(일명 protections)이 주어지기도 했으나 해군본부가 정말 답이 없을 때 꺼내드는 히든카드인 "핫 프레스"(hot press) 명령을 발동하면 면제증은 무용지물이 되어 이역만리 땅에 온 외국인들도 자랑스러운 대영제국의 해군으로 복무하는 영광을 누렸다. 정말 급하면 유력 귀족 출신자라 해도 전술한 시의원 징집처럼 장교 하라고 냅다 끌고 가 버린다.[9] 이땐 오직 영국 의회 및 국왕 명의로 발행된 면제증만 인정됐는데, 이것도 동인도회사 직원 등 소수의 필수 인력에게만 인가됐다.

원래는 해안가 마을이나 항구에 선박을 댄 뒤 내려서 바로 끌고 갔지만 사람이 부족해지자 내륙 지역까지 쳐들어 가서 장정을 끌고가는 일도 있었고 방금 프레스 갱에서 풀려난 사람이 다시 다른 함의 징집대에게 잡혀가는 막장 상황도 심심찮게 일어났다. 잉글랜드부터 아일랜드까지 일명 "대영제국"의 모든 남성들은 강제 징집의 예외가 될 수 없었다. 당연히 민간인들 사이에서 반발은 엄청났으며 미국 독립선언서의 불만 사실(grievances) 제26항에서도 이를 직접 언급하고 있다.

프레스 갱은 육지 위에서만 활동하지 않았다. 특히 지나가는 배를 나포한 뒤 선원들을 강제로 징집하는 "도둑질"도 빈번했다. 나폴레옹 전쟁 당시 대프랑스 전략의 일환으로 영국은 프랑스와 교역하는 모든 선박들에 대한 강제 검열을 실시하였다. 덤으로 프랑스와 교역을 하는 상선이 발견될 경우 높은 세금을 부과하였고 검열이나 납세를 거부하면 발포하여 선박을 나포하였다.

이때 가장 만만하게 당하던 대상이 미국이었다. 왜냐면 당시 미국[10]은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자신들의 식민지였고 같은 언어를 쓰다 보니 영국의 탈영병이 미국 선박으로 도망가서 숨어드는 일이 비일비재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미국 상선은 더욱 집중적인 수색 대상이 되었는데 탈영병들은 이를 대비해서 위조된 미국 신분증을 가지고 있었다. 이를 가려내는 중에 진짜 미국인조차 영국 해군에 강제 징집당하는 일이 드물지 않았다. 이러다 보니 미국인을 납치해 입대시켰다는 증언이 쏟아지며 미국의 민심은 폭발하였고 미국 정부도 분노하여 미국 독립 전쟁으로 싸늘했던 미영관계는 다시금 막장으로 치닫게 되었다. 그러던 중, 1807년 체서피크 만에 있던 영국 함선이 수색을 거부하던 미국 함선에 발포해 사상자가 나온 일명 체서피크 사건으로 인해 양국의 관계는 최악으로 치달았고 미국 정계에서는 영국에 선전포고하자는 여론이 들끓었다. 결국 미국이 영국에 선전포고하면서 영국령 캐나다와 미국이 박터지게 싸운 미영전쟁(1812년 전쟁)의 간접적 원인 중 하나가 되기도 한다.

프레스 갱에게 끌려가면 해군에서 승선 및 해군 복무 경력 등을 따져 신병(Landsman), 이등수병(Ordinary Seaman), 일등수병(Able Seaman) 세 계급 중 하나를 부여했다. 배 한번 타 본 적 없는 이는 신병, 승선 경력이 좀 있는 선원 출신은 이등수병, 승선 기간이 길거나 해군 복무 경험이 있는 자는 일등수병 계급을 줬다. 이들은 징집되어 있는 동안 공을 세우거나 모범 근무를 하여 장교의 눈에 들면 상위 등급의 수병으로 진급도 가능했다.

징집병들은 최소 6개월 간 군함에서 수병 생활을 해야 했다. 무엇보다 당시에는 지금처럼 전문적인 부사관 제도 같은 것이 없어 부사관(Seaman Petty Officer)이란 단일 계급만 있는 데다 이마저도 좀 오래 복무해 장교들 눈에 든 이를 임명하고 퇴임하는 고참 수병 정도의 느낌이라 대부분 정해진 기간만 채우면 복무는 땡이었다. 물론 출항 기간이 6개월을 넘기면 육지와 먼 망망대해에서 갑자기 집으로 돌아갈 수도 없는 노릇이니 입항할 때까지 강제로 연장 복무해야 했다. 부랑 생활 혹은 기존의 일터보다 그래도 해군 복무 환경이 낫다고 생각하거나 복무하다 보니 적성에 맞거나 해군이 체질이다 싶어진 본인이 희망하기만 한다면 정해진 기간이 지나도 계속 복무할 수는 있었고 해군 측에서도 이를 당연히 권장했으며 자원 입대자로 분류되면 입대 시 이등수병의 수 개월치 급여가 장려금으로 지급되었다.

4. 저항

강제 징집에는 당연히 반발이 크며 저항이 있기 마련이었고, 당연히 여러 방법으로 행해졌다.

공식적으로는 강제 징집된 인원이 해군본부에 탄원해 풀려나는 방법이 법적으로 보장되어 있었지만 문제는 이게 법적으로만 보장되어 있지 출항한 함정에서 징집병들이 항의 서한을 보낼 방법 따윈 없었거니와 그런 시도를 해봐야 함선의 군기반장인 갑판장에게 얻어터지지나 않으면 다행이었고 제대로 빠져나가려면 못해도 선상반란은 일으켜야 했으므로[11] 의미는 없었다는 점이다. 애초에 해군 인력이 부족한 것을 안 국회의원들이 강제 징집을 눈 감아 줘서 프레스 갱이 생겨난 것이다. 즉, 짜고치는 고스톱이다.

저항은 징집 시도 단계에서부터 있었는데 징병대가 돈다는 소문이 돌자마자 후딱 배를 출항해 버리거나 징집 대상자들이 대거 일시적으로 내륙으로 피신하고 숨는 것이 일상이었으며 심한 경우 몽둥이, 때로는 으로 무장한 징병된 이들의 가족과 친지, 동료 상선원들이 징집대를 무력으로 제압하고 해방시키는 일도 있었다. 당시 징집대는 보통 곤봉 정도로만 무장했기에 권총이나 커틀러스, 단검, 때로는 머스킷 등으로 무장한 사략선이나 상선원들이 작정하고 너 죽고 나 죽자 식으로 달려들면 답이 없었다. 아예 배에 징집대가 오르기도 전에 무장을 갖추고 딴 데 가서 알아보라며 쫓아내기도 했다.

상선이나 어선들도 지나가는 다른 선박이나 입항한 항구에서 기항지에 징집대가 돈다는 소문을 들으면 거길 피해 입항하는 식으로 징집을 회피하기도 했다. 이 경우 운송중인 화물이 해당 항구에 도착하지 않으면 손해를 보는 선장과 징집을 피하려는 선원들 간에 갈등이 생기기도 했다. 특히 타협을 보지 못하면 기항지에 오기 전에 선원들이 집단으로 계약을 파기해 위약금 물고 배를 내리거나 파업 혹은 선상 반란을 일으켜 선장과 부선장, 항해사를 협박해 항로를 억지로 돌리기도 했다.

저항은 물론 이런 "야만적인" 방식에 대한 반대의 목소리도 적지 않았다. 일례로 영국의 유명 철학자 데이비드 흄은 자신의 에세이에서 이는 영국 헌법의 정신에 어긋난다며 비난하였다.[12]

5. 쇠퇴

영국의 프레스 갱은 나폴레옹의 몰락과 함께 사라졌다. 나폴레옹 전쟁 이후 프랑스 해군은 영국 해군의 요구에 따라 대규모 군축을 실시하였고 이로써 유럽에서 영국 해군의 제해권에 정면으로 도전할 수 있는 세력은 사라졌다. 따라서 영국 해군은 비상시에도 대규모 전력을 동원할 필요가 사라졌다.

해군도 이렇게 강제 징집되어 별 의욕도 없어 사기가 낮고 특히 숙련되는 데 시간이 걸리는 데다 6개월 이상 복무 후 입항하면 전역하는 비선원 출신 징집병을 별로 선호하지 않아 수요가 줄어드니 징집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이후 동결됐던 수병들의 급여가 인상되고 육군 병사들보다 후한 대우를 해주는 데다 1850년대엔 세일러복 형태의 수병용 군복이 제정되어 제복 없는 군인 신세를 벗어나는 등 복지가 향상되어 모병제로도 수요를 충당하고도 남았다. 이 때문에 수병들의 질적 수준도 향상되어서 영국 스스로도 자조할 정도로 거칠고 무식하며 술이나 퍼마신다는 부정적인 이미지도 많이 사라졌다. 도리어 수병들이 군에서 배워 온 기술을 전역 후에도 제법 벌이가 괜찮은 일자리를 구하는 데 쓸 수 있게 되어 해군은 장기간 복무하지 않아도 싸고 질도 그리 나쁘지 않은 직업 훈련소 겸 경력 확보 수단으로 여겨지면서 자연히 수병들도 기술자처럼 대우받았다.

수병들은 해군본부 인사 담당 부서의 체계적인 모병 계획에 따라 모집되고 육상에서 충분한 기초군사훈련후반기교육을 통한 교육훈련 후 각 부대에 배치되는 방식으로 양성 과정이 바뀌어 더 이상 각 함별로 수병을 징집해 알아서 마구잡이로 양성하는 일도 없어졌으며 전시에 대규모 인력이 필요해질 것에 대비해 현역 복무 후 전역 혹은 시작부터 예비역으로 입대하는 자원들을 활용한 해군 예비역(Royal Naval Reserves; RNR)과 해군 자원예비역(Royal Naval Volunteer Reserves; RNVR) 제도를 정비해 뒀기 때문에 더는 강제 징집대를 끌고 다닐 필요가 없어졌다.

나폴레옹 전쟁 이후 영국이 대규모 전력을 동원해야 했던 첫 전쟁은 크림 전쟁이었는데 영국 해군은 고정 계약 제도를 도입하여 모병제만으로 그 전력을 충분히 채울 수 있었으며 이는 제1차 세계 대전 이전까지 이어졌다. 1차대전 때는 특히 참호전의 끔찍함을 피하기 위해 육군에 징집되기 전에 해군에 자원 입대하려는 이들이 늘어 더더욱 인력 걱정을 덜었다.

이렇게 프레스 갱은 악명을 남기고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이후 군대에서 총동원령이 부활한다고 해도 이미 현대적인 징집 및 예비역 소집 관련 행정 체계가 잡혀 있으므로 프레스 갱이 편성될 일은 없다.

6. 유사 사례

영국은 아니지만 러시아 제국에서는 교도소의 죄수들을 해군 수병과 육군 병사로 강제 동원하는 일이 20세기 초반까지 있었지만 이렇게 한 결과 러시아의 전제군주정에 불만을 품은 정치범들을 강제로 해군 수병으로 쓰는 셈이 되었는데 이들은 의도적으로 태업이나 반항을 하여 해군 장교들의 명령에 복종하지 않았다. 오죽하면 러일전쟁 무렵 해군 장교들이 정치범 출신 수병들을 가리켜 "똑같은 명령을 5번이나 계속 반복해서 전달해야 겨우 알아 듣는다."고 탄식했을 정도였다. 그 결과 러시아는 1905년 러일전쟁 와중의 쓰시마 해전에서 일본 해군에게 참패를 당했다. 단, 러일전쟁 때도 수병의 상당수는 저런 범죄자 출신보단, 비록 입대 후 이상과 격차가 큰 현실에 절망했을지언정 지긋지긋하고 급여도 짜거나 없다시피한 농노나 저임금 노동자 신세를 벗어나 크고 멋진 배를 타고 다니며 기술도 배우고 싶어 입대한 농촌 출신 자원입대자들이었다.[13] 비록 대우가 개차반이어도 배를 타는 이상 육군 병사나 농노보단 수병의 대우가 훨씬 좋았으며, 제정 말기 포템킨 반란 이후론 러시아 해군이 반란 예방 차원에서 수병들의 처우를 눈에 띄게 개선해 더욱 복무 여건이 좋아졌다. 되려, 범죄자 출신의 질 낮은 사병들로 인한 문제는 육군이 훨씬 심했다.

6.25 전쟁 시기에도 모병업무를 맡은 청년방위대들이 지나가던 젊은이들을 마구잡이로 잡아들이는 '홀치기'를 행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 중 상당수가 국민방위군 사건으로 떼죽음을 당했다. 당연히 이는 대한민국 육군에 해당하는 이야기고 당시 대한민국 해군은 죽을 확률도 낮고 급여와 대우도 좋고 기술도 배울 수 있다는 인식으로 지원자가 몰려 인적 자원 걱정은 안 했으므로 강제 징집은 해병대 인원 선발에만 적용했다.

7. 대중 매체에서 등장

당시 해군을 배경으로 하는 작품에서는 필수로 등장하는 요소다.

게리 쿠퍼, 폴렛 가더드 주연의 영화 <정복당하지 않는 사람들(Unconquered)>(1947)에서는 1763년 여주인공이 프레스 갱에 의해 강제 징집당할 위기에 처한 남동생을 구하려다가 영국 장교를 살해해 사형 대신 14년 이하의 계약제 하인형을 받는다.

소설 시리즈 혼블로워에서도 등장한다. 밤중에 호각을 신호로 길거리에 나와 있는 장정들을 무차별로 끌고 가는 막장 상황이 등장한다.

오브리-머투린 시리즈의 주인공 잭 오브리 함장이 이걸 골때리게 써먹는 장면이 나온다. 잭이 문제체포될 위기에 처하고 담당 관리 일행이 항구 주변을 돌고 있어 반강제로 자기가 함장으로 있는 함정에서 나오지 못하고 있었는데 부하 장교의 생일 파티를 위해 잠시 상륙했다 관리 일행의 습격을 받는다. 도망치던 잭 일행은 때를 봐서 관리를 급습해 그가 법 집행시 신분증 대용으로 들고 다녀야 하는 지팡이조타장이 빼앗아 바다에 던져 버리고 "너 지팡이 없으니 이제 법의 권위를 잃었음"이라고 일방적으로 선언한 뒤 프레스 갱을 발동해 그 관리를 수병으로 징집해 버린다. 물론 관리가 이 따위 헛짓거리에 동의할 리가 없었고 단검을 빼들고 덤벼 몸싸움이 벌여졌는데, 다른 사람도 아니고 무려 건장한 조타장이 흠씬 패서 기절시킬 때까지 포기하지 않고 몸싸움을 시도하는 관리를 본 잭이 "이색기 쌈닭인 거 보니 교육 잘 시키면 훌륭한 수병이 되겠군."이라고 중얼거린 건 덤이다.

Warhammer 40,000에서 임페리얼 네이비에 대한 묘사는 전근대 서양 해군의 모습을 차용해서 관련 설정 및 소설 상에서 임페리얼 네이비가 제국민을 상대로 프레스 갱을 시전하는 묘사가 비일비재하다. 심지어 임페리얼 네이비에선 징집된 최말단 계층이 노예나 마찬가지인 징집 노동자로, 수병이 되려면 여기서 승진해야 한다. 게임 설정이긴 하지만 로그 트레이더가 사생아 출신으로 오직 자신의 능력만으로 출세한 행성 총독을 조언가로 쓰기 위해 자진입대시킨 사례도 있다. # 헤러틱 아스타르테스도 제국 민간인들을 납치한 다음 자신들 시점에서 유망주에 해당되는 부류는 아스타르테스로 강제개조하거나 충성파 아스타르테스를 생포한 다음 각종 고문을 통해 강제로 타락시켜 신병을 충원하는 식으로 프레스 갱을 행한다.

샤프 시리즈에서 영국 육군판 프레스 갱인 크림프를 묘사한 에피소드가 있다. 샤프의 연대(Sharpe's Regiment)에서 크림프는 적당히 순화되어 묘사되는데 강제성은 줄인 대신 보급품 지급 및 훈련소로 행군하는 비용을 입대 보상금에서 차감한다던지, 훈련소에서 다른 연대로 병사를 팔아 버리는 등의 묘사는 정상적으로 진행했다.[14]

인터넷 밈인 해병문학의 '자발적 입대 환영', 자진입대 등 필수요소가 프레스 갱과 기묘할 정도로 닮았다. 설정상 무모칠톤톤정이 오도봉고를 몰며 성인 남성이라면 직업과 연령, 국적을 불문하고 타군이나 경찰, 소방관, 심지어 외국인까지 납치해[15] 강제로 해병으로 만들고 '자진입대를 환영한다' 며 기합을 가하는 것으로 묘사된다. 아예 봉고에 기계식 갈퀴손이 달려 고물상에서 폐지들을 집는 것마냥 사람들을 무더기로 잡아올리기도 한다. 물론 해병문학 속 자진입대 밈은 본 항목에서 설명한 프레스 갱과 무관하고 해병대의 부조리를 '자진입대 했으니 버텨라'며 가하는 똥군기를 풍자하던 것이 극대화된 결과지만 결과적으로는 프레스 갱과 똑 닮게 수렴하였으며 그 사실이 나중에 알려진 것이다. 이 사실이 알려지면서 프레스 갱을 해병 문학에 빗대 묘사한 작품이 생겨났다.문학, 영상[16] 한편 프로이센(현 독일)에는 또다른 "자진입대"의 전설이 있었다.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의 일화라고 한다. 문피아에서 <기합! 해병왕국: 나는 인간 프로이센이다>라는 웹소설이 연재되었는데 해병대에서 복무했던 주인공이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에 의해 그 시대로 전이되어 근위대로 끌려간다는 내용이다.

유튜버 몰상식도 이에 관한 정보영상을 올렸는데 여기에 해병문학 패러디도 추가되었다.[17]


N요일의 과학꼭지 카리브해의 해적 편에서 실제 배의 비상식량이 쉽비스켓이나 젓갈 수준의 염장고기라는 게 나오자 저래서 해군을 안하려고 하고 해군 입대는 곧 납치였다고 하자 대영제국 해군에 자원입대를 환영한다는 해병문학식의 답글이 달렸다.

[1] 네모바지 스폰지밥의 에피소드 중에서 '도깨비 수업' 편의 원어명이 'Shanghaied(상하이했다)'라고 하는데, 스폰지밥뚱이, 징징이가 호기심 겸 징징이의 집이 닻에 찍혀 부서진 것에 대해 항의하느라고 바다도깨비의 해적선에 올라탔다가, 강제로 그의 선원으로 징집되는 내용이라서 제목이 이런 것이다. 이런 서구권의 해군 관련 속어를 모르는 한국인 시청자들 사이에서, 난데없이 제목에서 상하이라는 말이 나오는 것에 의아해한 경우가 많았다.[2] 얼마나 심했으면 당시 책으로도 출간되었고 후대의 매체인 샤프 시리즈에서도 이를 다루는 에피소드가 있을 정도다. https://www.ebay.com/itm/256279636473[3] 육군 인력 5만명을 소집하는 것도 그리 힘든데 하물며 뱃사람 5만명을 모아야하니 돌아버릴 맛이다.[4] 이는 로빈슨 크루소 소설에서도 알 수 있는데 주인공이 배를 탄다고 하니 부모가 크게 화를 내며 만류하는 장면이 나온다.[5] 육군이야 적당히 범죄 경력이 없고 용기있으며 자기 무기가 있는 장정들을 데려오면 되고, 정말 급하다면 경제사범처럼 밀수범 같이 폭력범이 아닌 범죄자들과 사법거래를 해서 용병마냥 땜빵 인력으로 동원할 수도 있다. 그래서 콜로넬이라 불리는 모병관이 예산 받아서 동네 방네 돌아다니며 모병 활동을 해 연대를 편성하는 식으로 좀 더 여유가 있었다. 다만 이 방식은 비교적 더 옛날에나 통했다. 콜로넬 굴려서 느긋하게 동원하는 방식은 시대가 흐를수록 시간의 촉박함 때문에 효율이 떨어지게 된다. 아니면 유력자가 자기 돈으로 병력을 모집해서 장교직을 받는 매관매직을 하기도 했다. 이 방식은 경제와 행정적 측면에서 보면 세금이 전혀 들어가지 않는 아주 훌륭한 군대 편성 방식이지만 전문성이 없어 부작용이 엄청났다.[6] 많은 수병과 상선 선원들이 자의든 타의든 해적이 되는 일이 많았다.[7] 영국에서 엘리자베스 1세 시절에 제정된 부랑자 법(Vagabonds act, 1597)에 따르면 부랑자는 최우선 징집 대상이었다. 아니, 징집에서 끝나면 다행이고 세 번 이상 부랑자 혐의로 붙잡힐 경우 최대 사형당할 수도 있었다. 즉 특별한 이유 없는 무직, 고정 거주지 부재 자체가 중범죄였다.[8] 당연하자만 군인과 공무원은 이미 국가를 위해 봉사중이므로, 다른 기관에서 인력을 도둑질하는 꼴이기 때문이다. 동인도회사는 영국의 국익과 직결되니 마찬가지다.[9] 오히려 commodore하기 딱 좋은 사람이군! 하고 더 '적극적'으로 '모셔가'버릴 수도 있다(...).[10] 영국 해군에서 프레스 갱이 만연했던 미국은 20세기 이후와 달리 초강대국이 아니었다.[11] 선상 반란은 붙잡히면 거의 무조건 사형이었다.[12] 출처: Hume, David (1758). "Of Some Remarkable Customs". Essays and Treatises on Several Subjects[13] 참고로 이 시절 러시아 제국에서 빽 없는 농노가 육군 병사로 징집되면 25년 동안 시베리아에서 진급도 없이 썩어야 했다. 아트 슈피겔만의 만화 에 보면 주인공의 아버지가 러시아 제국에 살던 시절 군대를 빼기 위해 치아를 모조리 적출한 이야기가 나온다.[14] 당시 모병 방법은 병사들을 지역단위로 모병하여 해당 지역의 연대에서 만든 훈련소에서 훈련을 시키고 자대배치를 받는 식인데 훈련소에서 돈을 받고 인력이 부족한 타 연대에 팔아 버리는 인신매매를 행하기도 했다. 해군 본부에서 인력이 없다고 허가한 프레스 갱과는 달리 허가된 적도 없고 개인의 사익을 위한 행위지만 병력이 급한 연대가 특수 요금을 내고 긴급히 보충병을 마련할 수 있다는 이유로 전투력 보존이 된다며 처벌된 사례가 거의 없다.[15] 공교롭게도 영국 해군도 프레스 갱에서 미국인들을 납치해가기도 했다.[16] 참고로 같은 작가인 '백수묵시록' 작가가 만든 작품이다. 즉, 자신의 문학을 자신이 더빙한 셈이다.[17] 영상에서 장교의 이 더빙 대사 이후 이어진 울상을 지으며 맞으러 가는 수병의 모습은 강제 징병에 항의하다가 기합받는 장면이 아니다. 같은 배 승조원의 물건을 도둑질하는 등 공동체에 해를 끼친 수병을 처벌하는 방식인 당직자를 제외한 전 수병이 상갑판에 2열로 마주보고 도열해 선 뒤 체벌 대상자가 그 사이로 난 길을 동료 수병들이 한 대씩 치는 걸 맞아 가며 끝까지 완주케 하는 형벌의 집행 장면이다. 일명 '줄채찍질 돌리기'라고 부르는 처벌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