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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교도 대군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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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교도 대군세
파일:vikings-drawing-viking-army.png
이교도 대군세 당시 바이킹의 진격로
파일:England_878.png
이교도 대군세 종료 시점인 878년 잉글랜드의 형세
노란색 노섬브리아는 바이킹의 괴뢰 정권이다
865년 ~ 878년
장소 잉글랜드
원인 라그나르 로드브로크의 죽음에 대한 그의 아들들의 복수
교전국 방어국 공격국
파일:노섬브리아 깃발.png 노섬브리아(~874)[1]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545px-Coat_of_arms_of_East_Anglia.svg.png 동앵글리아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545px-Coat_of_arms_of_Mercie.svg.png 머시아
파일:FlagOfWessex.png 웨식스
파일:Hrafnsmerki.svg 바이킹
지휘관 파일:노섬브리아 깃발.png 앨라 2세X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545px-Coat_of_arms_of_East_Anglia.svg.png 에드문드X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545px-Coat_of_arms_of_Mercie.svg.png 부그레드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545px-Coat_of_arms_of_Mercie.svg.png 체올울프 2세
파일:FlagOfWessex.png 애설레드 1세
파일:FlagOfWessex.png 앨프레드 대왕[2]
파일:Hrafnsmerki.svg 약골 이바르
파일:Hrafnsmerki.svg 할프단 라그나르손
파일:Hrafnsmerki.svg 우바[3]
파일:Hrafnsmerki.svg 구트룸[4]
파일:Hrafnsmerki.svg 야를 바그세크
병력 불명 불명[5]
피해 불명 불명
결과 머시아 왕국 및 동앵글리아 왕국의 속국화, 노섬브리아 왕국의 초토화
영향 데인로(Danelaw)[6]의 시작 ②칠왕국 시대의 끝[7] ③웨식스의 잉글랜드 통일 발판 마련[8]
1. 개요2. 배경3. 전개
3.1. 상륙3.2. 진군3.3. 여름의 대군세3.4. 전쟁 후반기
4. 결과5. 관련 매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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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교도 대군세865년 북유럽데인족 전사(소위 바이킹)들이 연합하여 통일된 명령체계 아래 잉글랜드의 앵글로색슨 4왕국[9]을 침공해 휩쓸고 다닌 대사건이다.

'이교도 대군세'라는 단어는 9세기 후반에 작성된 《앵글로색슨 연대기》(Anglo-Saxon Chronicle)에 나온다. 당시 그리스도교를 믿었던 앵글로색슨인들과 달리 바이킹은 그리스도교를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전설에 따르면 라그나르 로드브로크의 아들들이 대군세를 이끌었다고 한다.

2. 배경

한창 바이킹의 전성기였던 851년, 웨식스의 군주였던 애설울프의 군대가 바이킹 침략자들을 격퇴한 후 14년 동안 앵글로색슨과 바이킹 사이에는 지지부진한 소규모 전쟁이 이어졌다.

바이킹들은 8세기부터 수도원 등 부가 집중된 곳을 치고 빠지는 전술을 주로 구사했다. 그러나 이번 침공의 목적은 다소 다른 듯 보였다. 군사의 규모부터 평소의 해적질과는 차원이 달랐고, 약탈이 끝난 도시와 마을에 눌러앉기 시작했다. 이들의 목적은 정복이었다.

당시 바이킹들의 정체는 간단히 말해, 멸망한 서로마 제국의 영토로 떠나지 않고 그대로 고향에 눌러앉아 살던 이들의 후손이었는데, 스칸디나비아 반도와 덴마크 지역에 대부분이 살았으며, 이들은 크게 노르웨이 바이킹, 스웨덴 바이킹 및 덴마크 바이킹 이렇게 크게 세 가지 세력으로 나뉘었다. 다만 스웨덴 바이킹은 스웨덴과 잉글랜드와의 지리적 거리로 인해 수가 그리 많진 않았고, 주력은 '데인인'이라고 불린 덴마크 출신 바이킹이었다.

바이킹들은 8세기 후반부터 9세기 중반까지 약화된 프랑크 왕국과 전쟁으로 혼란스러운 브리튼 섬을 약탈하며 막대한 부를 얻었다. 하지만 늘어난 바이킹 인구를 척박한 땅에서 하는 농사와 무역으로 부양하기는 벅찼고, 약탈로도 인구를 부양하기 힘든 수준이었다.

당연히 여기서 얻을 수 있는 자원으로는 한계가 있었고, 결국 이들은 해외로 나가 약탈이 아닌 아예 정복과 정착을 하기로 결정했으며, 가장 만만한 먹잇감은 여러 국가들로 쪼개져 있고 섬나라라서 해양민족이 배를 타고 여기저기 쑤시고 다니기 딱 좋은 잉글랜드였다.

3. 전개

3.1. 상륙

전설적인 바이킹 라그나르 로드브로크노섬브리아의 땅에서 비참한 죽음을 맞이했다. 그의 죽음은 바이킹들이 살고 있는 북유럽 전체에 알려졌고, 분노한 그의 아들들은 군대를 이끌고 진군했다. 라그나르의 아들 약골 이바르, 할프단 라그나르손, 그리고 우바 등 3명이 주도적으로 이끈 대규모 군대는 865년 후반 잉글랜드 남동부의 켄트 해안에 모습을 드러냈다.

이들은 켄트 지방을 가로질러 북쪽으로 진군하면서 무차별적인 학살과 파괴를 자행했다. 이들의 갑작스러운 출현에 놀란 것은 동앵글리아도 마찬가지였는데 이들은 바이킹들이 약탈과 살인을 저지르지 않는 조건으로 겨울을 날 수 있는 장소와 식량 및 말들을 제공하기로 협의했다.

3.2. 진군

1년 동안 동앵글리아에 머물다가 866년이 끝나갈 즈음에 라그나르의 아들들은 아버지를 죽인 앨라 2세의 노섬브리아로 진군했다. 노섬브리아 군대는 연전연패했고 이에 앨라 2세는 친히 군대를 이끌고, 수도 요크에서 최후의 결전을 준비했다.

하지만 항전에도 불구하고 867년 노섬브리아의 수도는 함락되었고 앨라 2세는 산 채로 붙잡혀 라그나르의 아들들에 의해 복수의 피의 독수리형으로 참혹하게 처형되었다. 바이킹들은 노섬브리아 북부에 더럼을 수도로 삼고, 에크베르흐트 1세를 괴뢰왕으로 세운 왕국을 건설한 뒤 자신들이 점령한 지방에서는 에크베르흐트 1세의 이름으로 '대리 통치'를 하는 형식을 빌려 통치했다.

노섬브리아 정복이 성공적으로 끝나자 바이킹 침략군은 방향을 남쪽으로 돌려 전성기가 끝나고, 계속되는 내전으로 약화된 머시아 왕국을 급습했다. 이들은 국경을 넘어 남하하여 손쉽게 머시아군의 저항을 격퇴하고, 머시아의 수도였던 노팅엄을 점령했다.

웨식스-머시아 연합군은 머시아의 수도를 탈환하기 위해 맹공을 퍼부었지만 실패했다. 결국 수도를 반환하는 조건으로 머시아는 상당한 금액을 지불했는데, 바이킹들은 이를 받아들여 노팅엄을 돌려주고 노섬브리아로 철수했다

성공적으로 약탈을 마무리한 바이킹들은 노섬브리아로 철수했고 그곳에서 겨울을 보냈다. 그리고 괴뢰국 노섬브리아에 일부 정착민들을 남겨 놓은 채 870년 동앵글리아로 돌아가 그해 겨울을 넘기려고 했다.

이때 동앵글리아의 왕 에드문드는 바이킹들이 겨울을 보내는 동안 이들과 체결한 평화협정을 깨고, 이들을 기습했다. 하지만 바이킹에게 역습당해 동앵글리아 군대는 전열이 무너진 채 전멸했고, 심지어 왕이 전사하는 대패를 당하면서 왕국이 멸망했다.

3.3. 여름의 대군세

이듬해 871년 스칸디나비아 반도에서 일명 여름의 대군세라 불리는 지원군이 야를 바그세크[10]와 구트룸[11]의 지휘하에 잉글랜드에 상륙했다.

이들은 동앵글리아 지역을 거쳐서 이번에는 곧장 웨식스 왕국으로 진격했다.

하지만 당시 웨식스는 머시아나 노섬브리아와 달리 강력한 기반을 다져 둔 상태였으며 애설레드 1세가 직접 군대를 이끌고 애쉬다운 평원에서 결전을 벌여 여름의 대군세를 격파하고, 군세를 이끌던 바그세크를 죽이는 대승을 거두었다.

여름의 대군세는 얼 바그세크의 전사와 함께 애쉬다운 평원에서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었고, 남은 군대는 대부분 다른 지휘관인 구트룸의 지휘 하에 규합되어 북쪽으로 퇴각했다. 하지만 그들을 격퇴한 웨식스군도 상당히 많은 사상자를 냈기에 애쉬다운 평원 전투피로스의 승리라고 볼 수 있었다.

하지만 바이킹 지원군이 전멸하자 각지에 정착한 바이킹들과 앵글로색슨족 사이엔 당분간 불편한 평화가 이어졌다. 노섬브리아와 동앵글리아, 그리고 머시아 동부 일대에 바이킹들이 정착했는데 이들은 데인(Dane)인, 즉 '덴마크 사람'으로 불렸다. 이 시기 웨식스의 왕이었던 애설레드 1세가 승하했고, 나중에 앨프레드 대왕이라 불리는 그의 동생이 즉위하는 등 대(對)바이킹 전쟁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3.4. 전쟁 후반기

애쉬다운 평원 전투에서 살아남은 일부 바이킹들은 871년872년 동안 런데위치(현 런던)를 점거했다. 하지만 겨울이 되자 이들은 식량이 떨어졌고, 무엇보다도 노섬브리아에서 반란이 일어나 바이킹의 꼭두각시인 에즈베르흐트 왕과 대주교 울프헤레를 내쫒는 일이 발생하자 바이킹 군대는 머시아군과 웨식스군의 포위망을 뚫고 노섬브리아로 철군, 873년 봄에 반란군을 격파하고 에즈베르흐트와 울프헤레를 복귀시켰다. 그러나 얼마 되지 않아 에즈베르흐트가 사망하자 릭시게(Ricsige)를 왕으로 즉위시켰다.

이후 원래 주둔지인 렙톤으로 돌아온 바이킹들은 머시아의 왕 부르그레드를 정치적으로 압박함과 동시에 머시아 국토를 유린했고, 왕의 무능함에 분노한 이들을 지원하면서 부르그레드의 퇴위를 종용했다. 결국 부르그레드가 퇴위해 로마로 떠나고, 머시아 왕위 주장자 중 한명인 체올울프가 머시아 왕이 되었다.

874년, 머시아 렙톤에 주둔하던 데인족 군대는 2개로 나뉘어져 할프단이 이끄는 군대는 북상해 노섬브리아의 색슨족 거주지와 교회 등을 공격해 초토화시킨 후 요크를 중심으로 남쪽 데이라 지방을 점거하고 자신을 '요르비크의 왕'으로 칭했다. 이 일의 여파로 노섬브리아 왕 릭시게가 충격을 받고 급사했고, 새로 노섬브리아 왕으로 즉위한 에즈베르흐트 2세는 아예 공식적으로 틴 강 북쪽의 밤버러 지방에서만 통치권을 행사할 수 있는 처치가 되었다. 이후 할프단은 더 북상하여 헤브리디스 제도의 바이킹 군세와 합류, 북쪽의 픽트족스코틀랜드, 그리고 지금의 컴브리아 지방에 세워진 브리튼인 왕국인 스트라스클라이드 왕국(Kingdom of strathclyde)를 공격해 초토화했다.[12]

한편 구트룸과 오스켈트, 그리고 언웬드가 이끄는 두 번째 부대는 남하해 웨식스로 향했다. 이들은 캠브리지에 기지를 건설해 그해 겨울을 나고, 이듬해인 876년 월햄을 점령하여 무차별적인 약탈을 저질렀다. 앨프레드는 이들과 협상하여 웨식스를 떠나게 하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불안한 평화가 지속되는 와중에 데인족들은 877년 약화된 머시아를 급습해 스스로의 세력을 다시 한 번 과시했다. 그들은 머시아의 마지막 왕 체올울프 2세를 퇴위시키고, 머시아의 동부를 완전히 자신들의 세력권 안으로 병합했다.

또한 기세를 몰아 878년 1월 데인족 군대가 웨식스 북부에 위치한 치픈헴을 기습공격했다. 이곳에는 크리스마스를 즐기기 위해 877년 12월 앨프레드가 방문한 이래 아직 머물던 참이었는데, 데인족들은 이 지역을 파괴하고 거주민들을 무참하게 학살했다. 하지만 다행히 앨프레드는 그 난리통에서 간신히 살아남는 데 성공했다.

구트룸이 국경을 이렇게 쉽게 돌파한 이유는 과거 머시아의 사례에서 찾아볼 수 있다. 머시아의 버그레드 왕이 데인족들과 손을 잡은 정적들의 정치적 압박에 못이겨 퇴위한 사례가 있듯이 데인족들의 강력한 군사적 원조는 왕위요구자들에게 달콤한 유혹이었다. 결국 일부 웨식스의 지방장관들이 권력을 얻고자 묵인 및 협조한 탓에 구트룸은 국경지대로부터 관문들을 재빠르고 손쉽게 돌파했고, 순식간에 앨프레드를 기습할 수 있었다.

구트룸은 자신이 지원한 인물들을 웨식스의 주요 인사에 배치시키면서 사실상 웨식스를 괴뢰국으로 삼으려고 했다. 하지만 구트룸이 간과한 사실이 있었는데, 웨식스 왕국의 대다수 지역은 데인족과의 오랜 전쟁으로 피폐해진 상태였고, 분노한 지역 주민들은 데인족의 지원으로 권력을 장악한 꼭두각시 정부에 충성하기를 거부했다.

한편 앨프레드는 치픈헴의 참사에서 간신히 탈출한 뒤 오지를 전전하며 데인족들에게 반격할 준비를 했다. 주변의 지지자들을 소집하고, 구트룸과 적대하는 파벌을 불러들이며 새로이 군대를 꾸렸다. 인근 지역의 수비군들과 지역 주민들이 협조했고, 소수 정예로 구성된 부대가 데인족들과 반란군들을 무자비하게 섬멸하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들어와서 치고 빠지는 게릴라 전술은 바이킹들이 무엇보다 애용하는 방식이었고, 이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 반란 세력들은 수도 인근 지역을 제외하곤 통제력을 회복하지 못했다. 앨프레드 대왕은 지방도시들과 마을을 다시 휘하에 복속시킴과 동시에 왕위를 재탈환할 군대를 지방에서 끌어모았다. 그는 바이킹과 꼭두각시 왕, 그리고 반역자들에게 복수하기 위해 진격했고, 에딩턴 평원에서 구트룸의 데인족 군대와 마주쳤다.

에딩턴 전투라고 불리는 이 격렬한 전투에서 앨프레드의 웨식스군은 바이킹의 방패벽을 격파하면서 대군세에 종지부를 찍었다. 이어서 라그나르 로드브로크의 아들 우바 라그나르손의 군대가 사이누프 전투에서 무너짐으로써 이교도 대군세는 완전히 끝나고 말았다.

4. 결과

878년 구트룸과 우바가 패배함으로써 바이킹이 감행한 대대적인 웨식스 침공은 막을 내렸다. 하지만 이미 노섬브리아와 동앵글리아는 정복당했고, 머시아는 동부가 강제로 분할당했다. 878년 이후의 시대를 후대 사람들은 바이킹의 잉글랜드 지배, 즉 데인로(Danelaw)라고 부르게 되었다.

웨식스는 약화된 머시아를 완전히 산하의 종속국으로 두어 대외적으로 머시아-웨식스 vs 바이킹(데인족)의 구도가 본격적으로 잡혔다.

하지만 분열된 데인족의 세력들과 하나로 뭉친 웨식스 왕국 사이의 대결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웨식스의 우세로 이어졌다. 892년에 스칸디나비아로부터 또다시 대규모 군세가 켄트에 상륙해 웨식스 본토를 직공했으나, 이번에는 이전과 달리 별탈없이 방어에 성공, 바이킹 군대는 결국 얼마 가지 않아 해산된다.

동앵글리아의 왕으로 즉위한 구트룸과의 타협을 통해 그를 왕으로 인정하는 대신 기독교로 개종하기로 요구해 그를 구슬리는데 성공한 앨프레드는 약화된 데인족들을 하나둘씩 몰아냈고, 최종적으로 925년 앨프레드 대왕의 손자였던 애설스탠이 일부 노섬브리아 지역을 통일하는 것으로 상황이 마무리되었다.

그러나 바이킹들은 이대로 순순히 복종하지 않았다. 939년 애설스탠이 사망하자 바이킹들은 더블린의 왕으로 재위하던 올라프 구스프리트손[13]을 모셔와 왕으로 즉위시켜 사실상 독립했고, 이후 구 머시아 지역까지 위협했다. 그러나 그후 944년까지 세명의 왕을 거치다 에드먼드 1세가 다시 노섬브리아를 침공해 바이킹 왕조를 무너트리고 잉글랜드를 통일하였다. 그러나 이후로도 노르웨이의 왕 에이리크 1세 블로됙스, 이마르 왕조 바이킹 군주들의 침탈에 시달리며 여러번 주인이 바뀌다가, 954년 에이리크 1세가 암살당하고 이드리드 왕에게 노섬브리아 백작으로 임명된 오스울프 1세가 노섬브리아를 통일하면서 비로소 데인로가 종료된다.

이후 덴마크의 스벤 트베스케그크누트 대왕에게 점령당해 잠시 북해 제국의 통치 하에 있었으나, 북해 제국이 해체된 이후 잉글랜드는 완전히 독립하였다.

5. 관련 매체


[1] 에즈베르흐트 2세 즉위 이후부터는 공식적으로 영토가 밤버러 지역으로 축소되어 요르비크 바이킹들에 대한 명목상의 종주권마저 상실했다.[2] '이교도 대군세'를 비롯한 침략을 막아낸 유일한 사람이다.[3] 프리지아 지방에 정착했던 바이킹 지도자로 추정된다.[4] 이후 동앵글리아에 정착해 기독교로 개종하고 왕으로 재위한다.[5] 수천 명으로 추정된다.[6] 덴마크계 바이킹의 잉글랜드 지배.[7] 웨식스와 노섬브리아의 북방 일부를 제외하고 모조리 멸망했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끝날 수밖에 없었다.[8] 유일하게 침공을 막아낸 웨식스가 주도권을 잡았다.[9] 앵글로색슨 7왕국으로 많이 알려져 있지만 주트족의 왕국인 켄트와 색슨족의 왕국인 서식스에식스는 이 시기에 이미 색슨족의 왕국인 웨식스에 흡수된 상태였기 때문에 남은 건 앵글족의 왕국인 이스트 앵글리아, 노섬브리아, 머시아를 비롯한 네 개의 왕국뿐이었다. 즉 바이킹의 침공 당시 잉글랜드는 7왕국 시대가 아니라 4왕국 시대였다.[10] 전승에 따르면 당시 덴마크 윌란 반도의 통일 군주였다고 한다.[11] 전승에 따르면 바그세크의 전임자인 호뢰크 2세의 조카라고 한다[12] 이때 헤브리디스 제도 바이킹의 지도자인 이마르의 형제 올라프 코눙(백색인 올라프와 동일인물)과 그 아들이 동반 전사한 것으로 추정된다.[13] 헤브리디스 제도의 바이킹 왕국을 통치하던 이마르 왕조(약골 이바르가 이 왕조의 시조 이마르와 동일인물이란 설이 있음)의 구성원이다[14] 라그나르 로드브로크와는 전혀 관계없는 가상의 '라그나르'라는 인물의 양아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