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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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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웅 산 수 치는 헌법 조항 때문에 대통령 출마가 금지되어 측근을 대신 대통령 선거에 내보냈다.
미얀마 최고지도자는 공식적인 직책이 아니라 미얀마의 권력을 장악한 최고 실권자를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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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34b233><colcolor=#fff>
연방혁명위원회 위원장
네 윈
နေဝင်း | Ne Win
파일:general-ne-win-1.jpg
출생 1910년 7월 10일
또는 1911년 5월 14일/24일[1]
인도 제국 슈 마웅[2]
사망 2002년 12월 5일 (향년 91/92세)
미얀마 연방 공화국 양곤
재임기간 버마 총리
1958년 10월 29일 ~ 1960년 4월 4일
연방혁명위원회 위원장
1962년 3월 2일 ~ 1974년 3월 2일
버마 사회주의 계획당 의장
1962년 7월 4일 ~ 1988년 7월 23일
제4대 대통령
1974년 3월 2일 ~ 1981년 11월 9일
서명 파일:Ne_Win_Signature.sv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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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34b233><colcolor=#fff> 학력 랑군 대학교
국적
[[영국|]][[틀:국기|]][[틀:국기|]](
[[인도 제국|]][[틀:국기|]][[틀:국기|]]) (1911 ~ 1937)

[[버마국|]][[틀:국기|]][[틀:국기|]] (1942 ~ 1945)

[[영국|]][[틀:국기|]][[틀:국기|]]() (1937 ~ 1948)[3]

[[버마 연방|]][[틀:국기|]][[틀:국기|]] (1948 ~ 1962)
(1962 ~ 1989)
(1989 ~ 2002)
가족 아내 킨 마이 탄 (결혼년도 미상 ~ 1972)
준 로즈 벨러미[4] (1976 ~ 1977)
딸 산다르 윈(1952~)
직업 독립운동가, 군인, 정치인
소속 정당 [include(틀:글배경br, 배경색=#FF0000, 사이즈=.9em, 글자색=#ffffff, 내용=버마 사회주의 계획당)]
약력 버마 총리(1958~1960)
연방혁명위원회 위원장1962~1974
버마 사회주의 계획당 의장(1962~1988)
미얀마 대통령(1974~19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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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
2.1. 집권 전2.2. 권력을 잡다
2.2.1. 우 탄트 장례식 사태
2.3. 처참한 경제정책2.4. 몰락2.5. 최후
3. 기타
3.1. 딸 산다르 윈

[clearfix]

1. 개요

미얀마독립운동가이자 군인, 독재자다.

1962년 버마 군사반란을 주동해 권력을 잡았고, 26년이란 기나긴 집권 기간 동안 수행한 고립주의 + 사회주의 경제 정책이 실패하며 미얀마를 한동안 세계 최악의 최빈국 중 하나로 전락시켰으며[5] 반정부 시위에 대한 무자비한 진압으로도 국제적인 지탄을 받으며 동남아시아의 악명 높은 독재자로 꼽힌다. 또한 역대 최악의 군사독재자 중 하나로 호르헤 비델라, 이디 아민과 함께 자주 꼽히기도 한다.

2. 생애

2.1. 집권 전

1911년 5월 14일[6]에 미얀마의 수도 양곤에서 북쪽으로 320km 떨어진 빠웅딸레(Paungtale) 지방의 슈 마웅(Shu Maung)에서 고등교육을 받은 중국계 화교 집안 출신으로 태어났다.

1929년 랑군 대학에 입학해서 의사가 되기 위해서 2년간 생물학을 공부하였으나, 1931년 시험에 떨어지고 제적처분을 받았다. 이후 훗날 미얀마의 국부가 되는 아웅 산 그리고 우 누[7]가 활동하던 민족주의단체 버마인협회(Dobama Asiayone)에 가입하였다. 1941년에 버마인협회 내의 사회주의 분파의 일원이 되었고, 이른바 독립운동의 중요 멤버인 30명의 동지로 선발되어 일본에서 군사 훈련을 받은 후에[8] 아웅 산과 함께 버마독립군(BIA)를 결성하였다. 1942년 초 일본군과 버마독립군은 영국군을 몰아내고 버마에 입성하게 되는데, 이때 네 윈은 영국군의 저항선 뒤에서 레지스탕스를 조직하는 일을 맡게 되었다.

1949년 2월 1일부터는 미얀마군최고사령관이 되어서 을 이끌게 된다.

네 윈은 1958년 10월 28일 우 누 총리로부터 내각의 총리로 일하라는 제안을 받게 되었는데, 이때 AFPFL이 두 파당으로 나뉘고, 우 누는 간신히 의회의 불신임 안을 막아낸 어려운 상황이었다. 이에 네 윈은 '네 윈 임시내각'이라고 불린 기간에 정권을 복원시켰고, 1960년 2월 6일에 치러진 총선거에 승리한 우 누에게 1960년 4월 4일에 권력을 이양하게 하게 된다.

2.2. 권력을 잡다

파일:Ne-Win.jpg

그러나 우 누 정부에게 권력을 맡기고 고작 2년도 되지 않은 시점에서 네 윈은 무혈 쿠데타인 1962년 버마 군사반란을 일으켜 미얀마의 권력을 잡게 되었는데, 이 쿠데타는 미얀마 군부가 무려 5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이어어고 있는 군부독재가 펼쳐지게 되는 신호탄이 되었으며,[9] 미얀마를 나락으로 떨어뜨리는 첫 시작이었다.[10] 쿠데타를 성공한 네 윈은 연방혁명위원회(URC)의 최고의장에 취임하고 스스로 총리가 되었다. 또한 네 윈은 "의회민주주의는 버마에 맞지 않는다" "새로운 정부는 헌법을 유예하고 의회를 해산하겠다"고 선언했다.

이에 반발하는 미얀마 국민들의 시위들이 계속해서 일어났다. 랑군 대학에서 군사 쿠데타에 대한 항의로 1962년 7월 7일에 5천 명의 학생들이 참여한 시위가 발생했지만 군대가 출동하며 강경 진압에 나서 진압했으며, 시위를 하는 군중을 곤봉으로 구타하거나 최루탄을 투척하는 것을 넘어 H&K G3 소총[11]으로 실탄을 발포하며 수많은 사람들을 죽인 후[12] 3천~6천 명을 체포한 직후 네 윈은 오후 8시쯤에 전국라디오 방송을 통해 5분 동안 연설을 하기도 했는데 네 윈은 이 시위가 '배신적인 공산주의 학생들의 소행'이라고 주장하며 "만일 이런 시위가 나에 대한 도전이라면, 나는 눈에는 눈, 이에는 이로 답해 주겠다"고 거의 국민에 대한 선전포고를 하기도 했으며, 심지어 그 다음날 오전 6시에 네 윈은 다이너마이트를 설치해 유서 깊은 랑군대학학생회(RUSU) 건물을 파괴하기도 했다.[13]

그러다가 1962년 7월 31일 네 윈은 오스트리아, 스위스, 영국을 돌아다녔는데 왜 돌아다녔는지에 대해서 말이 많았지만 훗날 밝혀진 바에 따르면 네 윈이 자신의 건강상태를 체크하겠다는 이유였다고 한다. 이후 시위가 일어날 수 있다는 이유로 1964년 9월까지 미얀마 전국의 모든 대학이 2년 동안 폐쇄되었다. 참고로 이 학살에 발포 명령을 내린 사람은 불명이지만, 정황상 이 대학에 투입된 군대의 지휘관이던 셩 룬(Sein Lwin, 1924~2004)[14]에 의한 것이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하는데, 실제로 당시 현장에 있던 틴트 조우(Tint Zaw)라는 학생은 "셩 룬이 머리 위로 손을 흔들자 총격이 시작되었다."라고 증언했다.

1964년 3월 23일에 '국가 통합을 보호하는 법률'로 유일한 합법 정당으로 버마 사회주의 계획당(BSPP)[15]만이 존재할 수 있는 일당제를 선포했고, 1974년 3월 2일에 국호를 버마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으로 바꾸고 일당제 사회주의 군사 독재체제를 수립한 네 윈은 점점 쇄국 정책을 펼치기 시작한다. 먼저 그는 반외세주의 이념을 내세워 버마족을 우대하고 소수민족들을 더욱 차별하고 탄압했으며, 친일/친영분자를 색출해내 숙청하고 외국과 교류를 멀리한다고 선언했다.

이런 네 윈의 폭정에 맞서 학생들은 1965, 1969, 1970년에도 반정부 시위를 조직했고 1974년 6월에는 전국 100개 이상 공장의 노동자들이 파업에 참가했으나 네 윈은 1974년 6월 6일에 랑군에서 있던 노동자와 학생들의 시위에 발포하며 약 100명을 죽이며 무자비하게 대응했다.[16]

한편 1983년북한아웅 산 묘소 폭탄 테러 사건를 일으키며 아웅 산의 묘소를 폭파하고 대한민국의 고위 관료들과 기자들 17명과 자국민 4명을 살해하는[17] 만행을 저지르자 네 윈은 북한과의 국교를 끊으며 외교 관계를 단절한 것은 물론이고, 국가승인까지 취소해버렸다. 이후 네 윈은 1985년에 아웅 산의 묘소를 재건했다.

2.2.1. 우 탄트 장례식 사태

1974년 12월 5일에는 동년 11월 25일에 뉴욕에서 사망한 우 탄트UN 사무총장이 일반 공동묘지에 매장될 예정 시간으로부터 몇 시간 전에[18] 학생들이 캬이카산(Kyaikasan) 경마장에 있던 탄트의 관을 훔쳐가고는 학생회관 터에 우 탄트의 임시 영묘를 세우고는 반정부 연설을 했으나, 동년 12월 11일 새벽 2시에 군인들이 대학교 정문을 크레인으로 부수며 탄트의 임시 영묘에 침공하고는 관을 지키던 학생 일부를 잔인하게 구타하며 최루탄을 투척하고는[19] 관을 회수했다.

이에 랑군에 살던 많은 사람들이 항의하며 경찰서를 공격하고 차에 불을 지르며 시장과 정부청사를 파괴하는 폭동을 일으키자 네 윈은 계엄령과 오후 6시~오전 6시에 적용되는 통행금지령을 선포한 후 랑군에 탱크들을 투입하고는 군인들로 하여금 시위대에게 실탄을 발포하게 하고는 공식 수치로만 9명을 죽이고 74명에 부상을 입혔으며[20] 시위 현장에서만 2,887명을 체포했다. 시위는 12월 15일에 진정되었고, 그 동안 가택을 수색하며 정부가 인정한 수치로만 2천 명을 조사했으며[21] 196명이 '폭동과 공공재산 파괴' 혐의로 투옥되어 징역 3~5년형을 선고받고는 100~200명이 '반역죄'로 기소되었다.

2.3. 처참한 경제정책

네 윈은 경제를 국유화시키고 외국자본의 진출을 막아[22] 경제적 자급자족정책을 추구했다. 즉 고립주의적인 수입대체산업화 정책을 시행한 것이다.

문제는 그가 외교적으로 미국이나 소련에게서 원조를 많이 받는 능력도 없는데, 정작 정책의 시행 내용 자체도 비슷하게 고립주의적인 국가들 중 경영이 나름 괜찮게 이루어진 알바니아엔베르 호자는 물론이요 파탄국가의 대명사인 북한김일성의 정책보다도 훨씬 답이 없었다는 것이다.[23] 이에 미얀마는 지하경제와 암시장이 활성화되었고 밀수가 횡행하며 국가경제가 점점 나락에 떨어지기 시작했다. 결국 미얀마 경제는 이러한 암시장이 사실상 미얀마의 실제 경제라는 이야기까지 나왔다.[24] 그리하여 경제적 문제와 폭압정치로 미얀마의 지식인과 기술자, 그리고 막대한 자금력을 지닌 화교 및 인도인 상인들이 인도와 방글라데시, 홍콩,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대만 등으로 빠져나갔고, 인도 및 중국과의 관계도 크게 약화되었다.

특히 네 윈 정부가 추진하던 자립 경제정책 중에는 외국인을 대상으로 한 정책이 막장이었는데 외국인들을 쫓아내고, 외국인들이 3일 이상은 체류하지 못하게 막는 정책까지 있었고, 이 정책 때문에 수많은 외국인들이 망명하는 사태가 벌어지기도 했고 이는 미얀마 경제에 큰 타격을 주었다. 이에 버마 정부는 1972년 이후에는 외국인 체류를 1주일로 완화하는 정책을 폈지만 이미 때는 늦은 상황이었고 전혀 효과를 보지 못하는 정책이였다. 게다가 1970년대에 네 윈은 쿠데타 계획이 발각되거나 정권 간부들을 추방하는 과정에서 정권을 안정화하기 위해 정부 각료나 기업의 경영자를 전문성이 없는 군인 위주로 뽑기까지 했다. 더구나 네 윈 시기에도 독립을 요구하는 소수민족 게릴라들이 미얀마 각지에서 활동하고 이에 정부군들도 게릴라 진압에 소모되면서 미얀마는 혼란 속에 빠져들어가고 경제발전에 집중할 힘이 탕진되며 자연스레 국력을 약화시켰다.

게다가 네 윈은 짐바브웨로버트 무가베를 연상시킬 정도로 화폐정책도 막장이었는데 1985년에는 '50짯과 100짯 지폐가 암시장에 의해 사재기의 대상이 되고 다양한 반란 자금을 조달하는 데도 사용된다'는 이유를 들며 '고액권 25짯과 50짯, 100짯은 더 이상 법정 화폐가 아니다'며 이들의 사용을 금지하도록 한 직후 75짯 지폐를 도입하고는[25], 바로 다음 해인 1986년에는 15짯, 35짯 지폐를 도입하고는 1987년 9월 5일에는 기어이 점성가로부터 9가 행운의 숫자라는 소리를 듣고 45짯, 90짯짜리 지폐를 찍어냈다. 그나마 교환 기간이라도 아주 짧게나마 줬던 1985년 화폐개혁과는 달리[26] 1987년 화폐개혁은 교환 기간이 있기는 커녕 그 어떠한 경고와 유예 기간도 없이 진행되어 수백만 명이 평생 모은 돈들을 잃고 미얀마 전체 화폐의 75%가 완전히 무용지물이 되며 나라의 경제는 곧바로 혼란에 빠졌다. 결국 1987년 버마는 유엔으로부터 '세계 최빈국'으로 지정되었고, 경제난이 극심해졌으며 국민들의 불만도 갈수록 커져 이듬해 8888 항쟁을 불러일으켰다.

네 윈의 경제정책이 참혹한 실패로 끝나며 세계은행이 집계한 네 윈의 집권시기와 그 이후 버마의 1인당 GDP는 과장 안 보태고 아무리 먼 옛날의 통계라는 것과 당시 버마의 폐쇄성을 감안해도 통계의 신뢰성에 의심을 품을 수밖에 없을 정도로 끔찍한 수준이 되었다. 사실 네 윈이 집권하기 전에도 버마는 세계은행의 통계가 잡히기 시작한 1960년 기준으로도 1인당 GDP가 정확히 26.32$[27]에 네 윈이 집권한 1962년 기준으로도 27$[28]로 집계되던 최빈국 중의 최빈국이었으나, 네 윈의 실정으로 경제성장을 이루기는 커녕 그가 집권할 동안 1인당 GDP 수치 최대치가 1986년에 약 42.3$[29]에 네 윈이 완전히 퇴진한 1988년 시점에는 정확히 35.83$[30]로 집계될 정도로 경제가 악화되었고, 심지어 1965~1967년에는 1인당 GDP가 무려 10$대(!!!)라는 참혹하기 그지없는 수치로 나왔다.[31] 게다가 네 윈이 집권한 26년 동안 미얀마의 전체 GDP는 6.125억 달러(1962)에서 13.93억 달러(1988)로 이전의 2.3배도 성장하지 못했고, 평균 경제성장률은 3.3%를 기록했다.[32][33]

그리고 UN의 통계까지 참고하면 따르면 1970년에 미얀마의 1인당 GDP는 99$로 187개국 중 166위를 차지했지만 1979년에는 159$로 수치 자체는 늘어도 순위는 187개국 중 181위로 떨어졌고, 1988년에는 111$로 187개국 중 186위로 떨어졌다.[34]

2.4. 몰락

사실 네 윈은 이미 1981년 11월 9일에 대통령직을 사임한 상황이었지만, 대통령 직위에서만 내려간 것이었지 실제로는 당 의장직을 그대로 유지하며 정계에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러나 국민들의 민주화 시위인 8888 항쟁이 엄청나게 격렬해지자 그는 우 산유 대통령과 함께 1988년 7월 23일 당 의장에서 사임했다, 물론 그는 권력을 포기할 생각이 전혀 없었고 사임하기 직전에 국회에서"만약 시위가 계속된다면 군대를 부를 수도 있으며 나는 확신하는데, 만약 군대가 발포한다면 허공을 향해 쏘지는 않을 것이며, 정확하게 사람을 겨냥하겠다"는 연설을 대놓고 했다. 후임 셩 룬 집권 후 미얀마 군부는 셩 룬 대통령의 발포 명령과 함께 시위대에 총을 쏘아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는데 그 숫자가 무려 3,000명에 달했다.[35][36] 또한 1988년 8월 8일부터 12일까지 미얀마 전국에서 군부에 의해서 미얀마인들이 사살당해서 네 윈의 사임 연설이 단순한 경고가 아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이는 서방 언론에 보도돼 국제사회의 비난을 받았다.

1988년 9월 18일, 국가법질서회복위원회(SLORC) 의장인 소 마웅 장군이 권력을 잡아 계속해서 시위대를 탄압했고 결국 8888 항쟁은 막을 내리게 된다. 그가 물러난 이후 많은 사람들이 네 윈이 실권을 잃고 허무하게 자택에서 사망한 것으로 알고 있으며, 이원복가로세로 세계사 2권에서도 이러한 생각이 나오지만 현재 나오는 주장들을 보면 그가 사퇴를 한 이후에도 상당한 영향력이 있다는 것이 지배적이다. 이렇게 퇴임한 후에도 배후에서 계속 군부와 정치에 간섭해서 네 윈은 미얀마 국민들에 의해 비판을 받았고, 세계에서 가장 질이 나쁜 독재자 순위에 오른 적도 있다.

2.5. 최후

파일:01794D19-E1C5-4E7D-B459-127544E08E86.jpg
말년의 모습. 좌측의 인물은 그의 딸 산다르 윈이다.

그러다가 2002년 3월 4일 네 윈의 사위인 예 자우 윈(Aye Zaw Win)에 의한 계획된 군부의 쿠데타 음모가 있었는데, 이 쿠데타에는 그의 딸인 산다르 윈도 포함되었다는 사실이 밝혀졌고 이로 인해 네 윈과 산다르 윈은 2002년 9월 가택연금에 처해졌다. 사위인 예 자우 윈과 그의 세 자녀들은 국가전복혐의로 사형이 언도되었고, 미얀마 랑군에 있는 인세인 감옥에 감금되어 있다가 2013년에 석방되었다.

가택연금을 당한 네 윈은 2002년 12월 5일 양곤에 있는 자택에서 사망했다. 그의 죽음은 미얀마 언론과 군부에 의해 발표되었지만 언론통제로 인해 부고기사는 일부 버마어로 된 관변언론에서만 볼 수 있었다고 한다. 또한 군부는 네 윈에게 국장을 치르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으며, 이 때문에 네 윈의 장례식은 급조된 상황에서 네 윈의 정권 밑에서 일했던 관료들이나 대학 동료들 30명 정도만이 참석한 채 치러졌다고 한다. 네 윈의 딸인 산드라 윈은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 일시적으로 가택연금이 해제되었고 그녀는 장례식을 마친 후 라잉 강(Hlaing River)에 네 윈의 화장된 재를 뿌렸다.

3. 기타

3.1. 딸 산다르 윈

파일:external/images.farfesh.com/sandra.jpg

딸 산다르 윈(Sandar Win, 1952~)은 미얀마 최고 공립 고등학교 중 하나인 다곤 제1 기초교육고등학교에서 공부한 후 대학 입학 시험에서 전국 1등으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는 의대에 진학하여 의무대에서 산부인과 의사로 일했왔는데, 1988년 항쟁이 일어나 네 윈이 물러날 때까지 약 26년간 권력을 휘둘렀을 때, 산다르는 신군부와 손을 잡고 아웅 산 수 지를 비롯한 민주세력을 탄압했고, 산다르 윈은 지도층 내 네 윈세력의 중심세력으로 활동했다. 특히 집권 말기에는 병이 들고 늙은 네 윈이 정서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산다르 윈에게 의지할 만큼 네 윈의 총애를 받았다고 한다.

그녀의 위세를 보여주는 일화로 버마사회주의계획당의 실력자들이 네 윈을 만날 때는 반드시 그녀를 거쳐야 했으며, 아버지가 퇴임한 뒤 군사정부의 총리를 지낸 킨 니훗을 정보부장으로 앉혀 정보까지 독점했고, 특히 그녀가 영어 실력이 좋지 않아 영국 의대에 입학하지 못하자 여당은 얼마 안 가 중고등학교에 영어 교육을 재도입했을 정도였다. 그리고 산다르 윈은 8888 항쟁 진압에도 중요한 역할을 했는데, 이러한 악행 때문에 산다르 윈은 아버지만큼 악독한 사람으로 평가받으며 '세계 최악의 독재자의 딸'로 불렸다. 기사

그녀는 이러한 막강한 권력을 바탕으로 사업가가 되어 1988년에 아버지가 통치에서 물러난 후에도 미얀마의 호텔 체인과 병원, 통신, 나이트클럽을 운영하는 사업가가 되어 엄청난 돈을 벌며 네 윈 일족을 관장했다. 그러나 네 윈이 물러나고 1990년대 말 남편과 아들 3형제의 쿠데타 모의가 탄로나고,[38] 2002년 네 윈이 사망하면서 산다르 윈은 가택연금 상태로 외부인의 출입이 철저히 봉쇄되었다. 이후 산다르 윈은 아웅산 수치처럼 랑군 시내 호숫가 자택에서 6년간 연금된 뒤 2008년에 풀려났고, 이후 은거생활을 하다가 민 아웅 흘라잉의 쿠데타 후인 2022년 3월 27일에 아들들과 함께 국군의 날 행사에 참여하며 14년 만에 대중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39] 기사


[1] 정확한 출생일 파악이 불가능하다.[2] (現 미얀마 연방 공화국 빠웅데일 슈 마웅)[3] 일본의 패전 후 정권은 다시 영국령 버마로 돌아온다.[4] 꼰바웅 왕조의 공주였던 틴틴 마랏과 호주 출신 난초 수집가 사이에서 태어났다.[5] 다만 후술하듯 미얀마는 네 윈 집권 이전에도 당시 최빈국이었던 대한민국도 가볍게 능가할 정도로 극빈국 중의 극빈국이었다. 네 윈이 진짜로 비판받아야 하는 점은 이러한 상황을 고쳐보겠다며 어설픈 정책을 시행하면서 고국의 경제를 도리어 후퇴시켰다는 것이다. 대한민국이 군사정권이었던 시절 되려 경제가 성장한 것과는 대조적이다.[6] 후술하듯 네 윈의 정확한 생년월일은 알 수 없다.[7] U Nu, 1907~1995. 미얀마의 초대 총리이다.[8] 이 당시에 타가스기 신(高杉 晋)이라는 일본식 이름을 썼다고 한다.[9] 실제로 1962년부터 2023년 현재까지 미얀마에서 군인이 집권하지 않은 시기는 2015년~2021년까지의 단 6년에 불과했다.[10] 이 쿠데타는 세계 언론에서는 피의 혁명이라고 묘사되기도 한다.[11] 참고로 이 총은 당시 미얀마에서는 전장에서도 쓰이지 않은 총이었다고 한다.[12] 공식적으로는 '15명 사망, 27명 부상'으로 축소 발표되었으나, '신뢰할 수 있는' 비공식 소식통에 따르면 100명 이상이 사망했다고 하고, 일각에서는 130명이 사망했다고 추정하기도 한다.[13] 참고로 이 건물은 1930년대 이후의 버마 독립운동의 시작점이자 상징으로 여겨졌고, 한때 자신의 동료이자 오늘날에도 모든 미얀마인들의 존경을 받고 있는 아웅 산과도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었다. 물론 이 일이 결정타로 작용하며 네 윈에 대한 국민들의 지지도는 추락했으며, 미얀마의 엘리트들에게는 "당파를 넘어 국가적 열망을 공유했던 이 민족주의 전통과의 단절의 가시적인 신호"로 여겨졌다. 당시 미얀마의 독립운동가 세력 내에서 비주류파로 분류되던 네 윈은 아웅 산과 사이가 별로 좋지 않았다고 한다.[14] 1943년에 네 윈이 이끄는 제4 라이플 연대에 입대한 후 네 윈의 최측근으로서 출세가도를 달렸고, 1978년에 버마 군대 참모총장에 등극했으며, 1988년 7월 27일부터 8월 12일까지 아주 짧게 여당인 BSPP 의장과 버마의 대통령을 역임했다. 군부에서도 강경파로 분류된 인물이었는데, 1950년에는 카렌 민족해방군을 하위 단체로 둔 카렌 민족연합(KNU)의 초대 지도자이던 소 바 우 지(Saw Ba U Gyi, 1905~1950)을 손수 죽였다고 전해지고[40], 후술할 우 탄트 장례식에서의 폭력 시위 진압에도 관여하거나 1988년의 학생 민주화 시위에서도 보안군 진압 경찰으로서 민주화 시위 진압을 지휘하는 등 반정부 시위 진압에도 앞장섰으며, 후술하듯 8888 항쟁에서 아예 대통령으로서 군대에게 직접 발포 명령을 내리며 '랑군의 도살자'라고 불렸다. 참고로 그는 1981년 7월 15일에 한국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고 한다.[15] 1962년 7월 4일에 창당되었고, 민족주의와 마르크스주의, 불교를 혼합한 시스템이었다.[16] 이 시위 역시 정확한 발포명령자는 불명인데, 네 윈이 호주에 국빈방문하던 시기에 일어났다는 것을 감안하면 정황상 네 윈이 발포명령자일 가능성은 낮다.[17] 북한의 테러리스트들을 검거하는 작전에서 버마 군경 3명이 순직했다.[18] 참고로 네 윈은 탄트를 '국가의 적'으로 여겼기에 공식 개입과 의식 없이 탄트를 매장하라고 명했는데, 사실 네 윈이 탄트를 싫어했던 이유는 탄트가 자신이 전복한 우 누와 밀접한 관계를 맺어 탄트가 누와 함께 음모를 꾸민다고 의심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탄트의 관이 양곤 국제공항에 도착했을 때 공항에는 의장대도 없던 데다가 참석한 고위 관리도 교육부 차관 1명밖에 없었고, 그 교육부 차관도 얼마 안 가 해임되었다. 물론 탄트의 조문을 하러 온 미얀마 국민들은 수만 명에 달했다.[19] 이 진압으로 인한 피해는 사람들마다 다른데, 2,900명이 체포되었지만 사망자는 없었다는 주장도 있고, 학생 측에서는 '죽은 학생들의 피가 캠퍼스에 강처럼 흘렀다'고 증언했으며, 이와 반대로 사망자도 없고 다친 사람도 거의 없었다는 주장도 있다.[20] 반면 현장의 한 장의사는 첫날 거의 50구의 시신을 개인적으로 검사했다고 주장했으며, 학생들은 100명 이상이 시위에서 사망했다고 주장했고, 국민들 사이에서는 군인 주둔지 근처의 표시되지 않은 집단 무덤에 1천 명 이상이 매장되었다는 소문도 돌았다. 하지만 미국 대사관 관리가 '군이 매우 가혹했다'고 증언하며 정부가 발표한 수치가 '너무 적다'고 주장한 것처럼 수십 명이 사망했을 것만큼은 확실하다.[21] 비공식적으로는 7천 명이 조사를 받았다고 한다.[22] 어느 정도였냐면, 외국의 구호 단체도 금지시키며 오직 정부간의 인도적 지원만 허용했을 정도였다. 이쯤이면 사이클론으로 국가의 존립이 위태로워질 정도의 피해를 입은 마당에 구호인력의 입국 차단시킨 후배 탄 쉐가 더 양호해 보일 지경이다.[23] 북한의 경제가 오늘날처럼 파탄국가로 전락한 것은 1990년대부터였고 196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는 북한도 경제 성장에 성공한 나라로 분류되었었고, 소련과 중국에게서도 원조를 많이 받는 스킬도 보유하고 있었기는 했다. 다만 1990년대에 소련 해체등 공산주의 국가들의 몰락과 자연재해까지 겹쳐서 고난의 행군등의 시기가 온 것이다.[24] 당시 버마 경제의 80%를 암시장이 차지했다고 한다.[25] 참고로 75짯 지폐가 발행된 이유도 걸작인 게 네 윈의 75세를 기념해서였다고 한다.[26] 다만 이 화폐개혁에서는 교환량도 매우 적었다고 한다.[27] 이는 2023년 환율로도 267.5$에 불과한데, 참고로 당시에도 빈곤한 나라였던 대한민국의 1인당 GDP가 1960년 환율로 158$로, 이는 2023년 기준으로는 1,600$ 정도다.[28] 2023년 환율로는 269$다.[29] 2023년 환율로는 116.1$다. 실질 가치는 오히려 절반 미만으로 떨어진 셈.[30] 2023년 환율로는 무려 98.35$다. 1962년 수치와 비교하면 26년간 수치상으로도 1.4배도 성장하지 못했고, 실질 가치는 이전의 36.8% 정도로 떨어진 셈.[31] 정확히는 1965년에는 16.6$, 1966년에는 12.8$, 1967년에는 12.9$였다. 이는 2023년 환율로 환산해도 159$(1965년)/120$ 미만(1966~1967년)에 불과하다.[32] 물론 2023년 환율로 환산하면 61.06억 달러(1962)에서 35.42억 달러(1988)로 이전의 58% 정도로 떨어졌다.[33] 참고로 미얀마의 1인당 GDP는 1990년(50.8$)에야 처음으로 50$를 넘겼고, 1995년(113.8$)에는 처음으로 100$를 넘겼으며, 2005년(221.9$)에는 처음으로 200$를 넘겼다. 2005년을 기점으로 빠르게 경제성장을 이어가 2011년에 드디어 1,086.4$를 기록하여 1000$대를 넘기게 되었고, 이후 미얀마의 1인당 GDP는 2015~2016, 2021년을 제외하면 꾸준히 성장을 이어가 2021년 기준으로 미얀마의 1인당 GDP는 1,209.9$다. 그럼에도 미얀마는 지금도 동남아시아 최악의 최빈국 자리를 여전히 유지하고 있다.[34] 참고로 1988년 통계에서 최하위를 차지한 나라는 94$를 기록한 베트남이다.[35] 미얀마 정부는 약 350명이 죽었다고 축소 발표했다.[36] 한편 셩 룬은 1988년 9월 18일에 신군부의 쿠데타가 일어난 후에도 경비원과 연금, 여러 대의 4륜 구동 차량과 함께 월마다 식량을 배급받고 불교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여 네 윈의 집에 매주 방문하며 종교와 명상을 논의하는 등 마지막까지 잘 사는 듯 싶었으나 2002년 3월에 네 윈이 체포되면서 상부의 지원도 중지되며 얼마 안 되는 군인 연금과 친척들의 도움으로 빈곤하게 사는 처지가 되었고, 친구를 만나는 것까지 거부하는 철저한 은둔생활을 하다가 2004년 4월 9일에 위장병으로 사망했다.[37] 실제로, 미얀마 사람들은 9를 가장 좋아하는데 숫자 9는 어떤 수를 곱하더라도 그 결과의 합은 반드시 9가 되기 때문이라고 한다[38] 이들은 사병 조직을 양성해 훈련시켜 왔으며 30여 명의 경호원을 선발 1인당 매월 50,000 챳 이상의 급료를 지급하고, 점성술사 한 명을 자문역 겸 고문으로 추대, 점성술사의 지시대로 행동해 왔다고 한다.[39] 의무대 출신인 만큼 군복을 입고 참석했는데, 실제로 해당 기사의 마지막 사진에서 왼쪽에서 세 번째에 있는 인물이 산다르 윈이다.



[40] 참고로 그의 시신은 '순교자의 무덤이 있으면 안 된다'는 이유로 배에 실려 해안에서 4마일(약 6.4km) 정도 떨어진 바다에 유기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