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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ff,#000092><colcolor=#000092,#fff> 출생 | 1881년 8월 7일 |
프랑스 로트에가론 네라크 | |
사망 | 1942년 12월 24일 (향년 61세) |
프랑스령 알제리 | |
국적 | [[프랑스| ]][[틀:국기| ]][[틀:국기| ]] |
직업 | 군인, 정치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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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프랑스의 군인이자 정치인이다.2. 출생과 해군 입문
1881년 8월 7일, 남프랑스의 네라크(Nérac)에서 태어났다. 그의 가문은 유서깊은 해군 집안으로, 증조부가 트라팔가르 해전에 참전했으나 전사했다. 그러나 프랑수아의 아버지는 가문의 전통에서 벗어나 정계에서 활동했는데 아버지의 인맥이 나중에 제독으로 승진하고 해군을 재건하려던 다를랑을 지원하게 되었다. 대표적인 인물이 수 차례 해군장관과 총리를 역임한 조르주 레이그[1]와 알베르 사로로서, 두 사람 모두 다를랑 제독의 대부였다.다를랑은 1902년에 프랑스 해군사관학교(École Navale)를 졸업하고 임관하였으나, 아버지가 드레퓌스 사건 당시 알프레트 드레퓌스 육군 포병대위의 무고를 옹호하여 아들의 정치적 성향도 같을 것이라고 생각한 해군상층부에 의해 주류인 해상근무가 아니라 해군 기지의 해안포대 지휘관으로 군 경력을 시작하여 주로 해군 지상부대에서 근무했다. 제1차 세계 대전 때는 해군 육상 포병부대의 지휘관으로 베르됭 전투에 참전하기도 했다. 그의 동기 중 한 명이 바로, 전후 자유 프랑스에 스스로 투신한 유일한 제독이었던 에밀 뮈즐리에였다.
전후 해군의 축소에도 불구하고 지상근무시 터득한 후방지원능력[2]과 정계의 후원에 힘입어 승진을 거듭해 1929년에 소장, 1932년에 중장, 그리고 1936년에 대장이 되었으며, 1937년에는 해군참모총장의 자리에 올랐다. 1939년에는 1차대전 종전 이후 대공황과 해군군축조약 등으로 현상유지-방치상태나 다름없었던 프랑스 해군의 건함계획을 지휘하여 프랑스 해군을 재건한 공로로 원수로 진급, 프랑스 해군에 오랫동안 등장하지 않았던 원수 계급이 그로 인해 재등장했다. 원래 프랑스 의회가 수여하려던 원수 계급은 "아미랄 드 프랑스(프랑스 대제독)"로 격만을 따지면 왕정기 프랑스 육군 총사령관이 수여받는 프랑스 육군 대원수와 비슷한 것이었으나 다를랑이 사양하여 "아미랄 드 라 플로트(해군원수)"로 낙착되었다. 사실 프랑스 해군의 수백년 역사에서 아미랄 드 프랑스를 받은 해군 장교는 고작 일곱 명으로서, 두드러진 해전에서의 무훈이 없는 다를랑에게 이 계급이 주어진 것은 해군 재건에 다를랑이 크게 기여한 것에 대한 의회의 호평과 기대를 보여준 것이고, 이걸 사양한 것에서 다를랑의 정치적 감각을 짐작할 수 있다.
3. 비시 정부에 들어가다
페탱과 함께.
1940년 프랑스의 항복과 더불어 출범한 나치 독일의 위성국인 비시 프랑스에 잔류해 해군 장관으로 취임했고, 그는 전쟁의 와중에도 거의 피해를 입지 않은 프랑스 해군 함정들이 크릭스마리네에게 넘어가지 않도록 노력했다. 다를랑 제독의 노력은 비시 프랑스를 크게 자극하지 않으려는 아돌프 히틀러의 의도와 맞아 떨어져, 프랑스는 자신이 보유한 함대를 일단 보전하는 데 성공했다.[3]
그러나, 윈스턴 처칠 영국 총리는 비시 프랑스를 신뢰하지 못했고, 프랑스 본토가 아닌 해외 및 자국으로 피신한 프랑스 해군 함정 및 인원들에 대해 영국 해군과 함께 계속 독일에 맞서 싸우거나 함정의 무장을 해제하고 제3국에 보관할 것 중 하나를 택할것을 요구하였으며 그렇지 않다면 무력을 동원해서라도 무력화시킬 수밖에 없다고 이야기하였다. 다를랑 제독은 이를 우려해 영국에게 프랑스 해군은 철저히 중립을 지키고 히틀러의 의도에 이용당하지 않을 것임을 보증했으나, 그를 신뢰하지 않은 처칠은 영국 해군에게 해외의 프랑스 해군 함정들과 기지들을 연합군에 다시 합류하거나 무장을 해제시키는, 이른바 캐터펄트 작전을 지시, 1940년 7월 초에 수행되었다. 영국으로 피신하는 등의 이유로 해외에 배치된 프랑스 함대는 일부 작은 저항도 있었으나 순순히 함정들을 넘기고 귀국을 원하는 장병들은 귀국하고 일부가 자유 프랑스의 일원으로 남아서 대체로 문제가 없었으나 장술 제독이 지휘하는 메르 엘 케비르 항구에서 문제가 터졌고 결국 영국 함대의 공격을 받아 다수의 함정이 격침/손상되고 1천명 이상의 사망자가 발생하였고 일부는 용케 포위망을 뚫고 도주해 프랑스 본토나 알제리 등 비시 정부 통제하의 식민지로 도망쳤다. 영국의 이런 행위에 분노한 다를랑 제독은[4] 이후 연합국을 적대국으로 여겼으며, 훗날 횃불 작전에서 연합군이 피를 보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1941년 2월부터 1942년 4월에는 부총리 겸 외무장관을 지냈다.
4. 북아프리카에서의 행적
1942년 11월 7일, 프랑스령 알제리로 그의 아들을 만나기 위해 건너갔다. 그리고 그 다음날 연합군의 프랑스령 북아프리카 침공 작전인 횃불 작전이 발동됐고, 다를랑 제독은 우연찮게 현지 최고 선임자로써 지휘권을 행사했는데, 그를 비롯한 프랑스군 장병들은 2년 전 영국 해군이 자신들에게 했던 행위를 잊지 않고 있었기에 상륙하러 오는 미군과 영국군에 저항했다. 다음 날, 저항을 분쇄하고 진격해 온 연합군에게 다를랑 제독은 포로가 되었다.비록 미약하다 할지라도 프랑스군의 저항은 연합군에게 있어 그닥 좋을 것이 없었고, 다를랑 제독은 연합군이 자신을 고등 판무관으로 임명해 현지의 통수권을 인정해 주는 대가로 프랑스군에게 저항을 멈추도록 해줄 것을 제안했다. 연합군이 이 거래를 수락함으로써 11월 10일 프랑스군의 저항이 멈췄으며, 4일 뒤 연합군은 약속대로 다를랑 제독에게 고등 판무관 자리를 보장해 주었다.
그러나, 이는 비시 정부를 신뢰하지 못하게 된 히틀러가 비시 프랑스를 향해 군대를 파견, 주둔시키고 사실상 직접 통치를 하기 위해 안톤 작전을 개시하는 사태를 야기했다. 그 일환으로 독일군은 프랑스 함대를 접수하기 위하여 프랑스 남부의 군항 도시인 툴롱을 향해 진격했는데(라일라 작전), 툴롱의 프랑스 해군은 이들이 자신의 함정들을 접수하지 못하도록 대부분 자침시켜 버렸다. 이 소식을 들은 다를랑 제독은 처칠에게 "각하, 이제 (2년전에 했던)제 말을 믿으시겠습니까?"라는 전보를 보내 일침을 날렸다.
5. 최후
판무관이 된 지 한 달이 조금 지난 1942년 크리스마스 이브에, 다를랑은 그가 집무실로 쓰던 알제리 여름 궁전에서 언론인의 아들인 20세의 페르낭 부니에 드라샤펠(Fernand Bonnier de La Chapelle)이라는 청년에게 총격을 당했고, 몇 시간 뒤 숨졌다. 왕정 복고주의자였던 그는 현장에서 체포되어 26일 총살되었다.이 사건의 배후에 샤를 드골 장군이 있다는 의혹도 있다. 드골 장군의 입장에서는 군 계급으로나 인망으로나 넘사벽으로 드골 장군을 압도하는 다를랑 제독이 연합군 측으로부터 드골 장군 대신 자유 프랑스의 최고수반으로 인정받을 위험성 때문에 제독이 죽어주기를 바랬을 것이라는 얘기다.
알제리에 남아있는 다를랑 제독의 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