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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2395><colcolor=#fff> 제30대 프랑스 육군 참모총장 막심 베이강 Maxime Weygand | |
이름 | Maxime Weygand 막심 베이강 |
출생 | 1867년 1월 21일 |
벨기에 브뤼셀 | |
사망 | 1965년 1월 28일 (향년 98세) |
군사 경력 | |
복무 | 프랑스군 |
(1883~1935, 1939~1942) | |
최종계급 | 대장(Général d'armée) |
참전 | 제1차 세계 대전 소비에트-폴란드 전쟁 제2차 세계 대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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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프랑스의 육군 장성. 제1차, 2차 세계대전 때 프랑스군 장군으로 복무했다. 제1차 세계 대전 시기 페르디낭 포슈 원수의 명참모로서 조국의 승리에 기여했고, 2차 세계대전 때에는 모리스 가믈랭의 뒤를 이어 프랑스군 총사령관이 되었으나 여러 삽질을 저질렀고 결국 조국의 패망을 막지 못했다.[1]이후 아프리카에서 비시 정부의 지시에 따라 반체제 인사들을 탄압하면서도 독일에게 비협조적인 자세를 취해 체포되어 종전까지 이터 성채에 갇혀 지냈다. 종전 후 전범 혐의로 체포되어 재판을 받았으나 무죄를 선고받았다.
2. 생애
2.1. 1차 세계대전 이전
출생기록부에 따르면 베이강은 1867년 1월 21일 벨기에 브뤼셀의 어느 병원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아기일 때 버려졌기에 부모가 누구인지는 현재까지 알려지지 않았다. 베이강은 비르지니 사제(Virginie Saget)라는 한 미망인에게 입양되어 마르세유에서 자랐고, 6살 때 레오폴드 2세의 친구였던 금융가 다비 코헨 드 레옹에게 키워졌다. 이 때문에 사실 베이강은 벨기에 국왕 레오폴드 2세와 폴란드 출신 정부의 사생아이며 레오폴드 2세가 추문을 피하기 위해 아들을 친구에게 보냈다는 소문이 파다했지만, 이를 입증할 증거는 없다.[2]베이강은 벨기에 출신 외국인 생도로서 생 시르 육군 사관학교에 입학하여 1887년에 졸업한 뒤 기병 연대에 배치되었다. 이후 베이강은 다비 코헨에게 고용된 회계사 프랑수아 조셰프 베이강에게 입양되었고, 프랑스 시민권을 수여받은 뒤 소뮈르의 교관이 되었다. 드레퓌스 사건이 터졌을 때, 베이강은 드레퓌스 대위 기소의 증거로 사용된 문서가 위조되었다는 사실이 밝혀지자 자살한 위베르 조셰프 앙리 대령의 미망인을 지지하며 반(反) 드레퓌스 운동을 전개했다.
1896년, 베이강은 기병대 대위로 진급했다. 이후 그는 쉬무르 기병학교의 교관을 맡았고 1910년 조제프 조프르, 페르디낭 포슈와 함께 러시아로 가서 러시아군의 군사 훈련을 관람했다. 1912년 중령으로 진급한 그는 2년 후 세계대전을 맞이한다.
2.2. 1차 세계대전
1914년, 제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베이강은 후사르 기병대의 참모를 맡았다. 그리고 알자스-로렌 진공이 실패로 끝난 직후인 1914년 8월 28일 신편된 제9군의 참모장으로 임명되었다. 제 9군 지휘관을 맡은 페르디낭 포슈는 주변 사람들에게 참모장이 마음에 안 들면 바로 교체하겠다고 밝혔지만 막상 베이강을 만난 후에는 그의 전술적 식견과 애국심을 높게 평가하며 전폭적인 신임을 보냈다. 베이강 역시 포슈를 아버지처럼 여겼고 전쟁 기간 내내 포슈를 따랐다. 후일 마른 전투 당시 포슈가 9군을 이끌고 독일군에게 역습을 감행했을 때 "내 우익이 무너지고, 중앙은 붕괴하는 중이다. 상황은 최고다. 공격한다."라고 말했다는 소문이 돌자 베이강은 포슈가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며 강력하게 부인했다.1917년 11월,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 영국 총리는 최고 전쟁 위원회 설립을 추진했다. 이때 조르주 클레망소 프랑스 총리는 전쟁 위원회 설립을 지지하면서도 위원장으로 프랑스 장성이 임명되기를 희망했다. 그는 페르디낭 포슈가 위원장을 맡기를 바랬지만, 포슈는 사양하면서 베이강이 그 자리에 적합하다고 추천했다. 클레망소는 이에 동의했고, 베이강은 위원회에 발탁되었다. 그는 위원회에 속한 인사들 중 가장 어렸다.
1918년, 베이강은 육군 소장에 임명되었다. 이후 포슈가 연합군 최고 사령관에 임명되었을 때 참모장을 맡아 백일 공세 때 포슈의 오른팔로서 제 역할을 훌륭하게 수행했으며 영국군과 프랑스군 간의 의사 교환을 전담했다. 이후 그는 휴전 협상에 참여했으며, 콩피에뉴의 한 열차에서 독일 대표들에게 휴전 조건을 전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2.3. 전간기
1920년 7월, 소비에트-폴란드 전쟁 초반에 수도 바르샤바마저 위태로워지자 폴란드군의 유제프 피우수트스키 폴란드군 원수는 프랑스 육군성에게 연락해 다음과 같이 요청했다."포슈를 보내달라. 그렇게 하지 않으면 우린 패하며 폴란드는 공산주의자들의 세상이 될 것이다."
이에 포슈는 프랑스 전쟁장관에게 건의했다."베이강을 보내라. 그는 나만큼 잘할 것이다."
베이강은 곧 폴란드에 파견되어 폴란드군의 고문으로 발탁되었다. 일설에 따르면, 베이강은 바르샤바에 도착했을 때 폴란드군의 전략을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폴란드 장군들을 한 방에 모아놓고 자신이 세운 새로운 전략에 대해 강의했다. 이때 그가 명령조로 여러 지시를 내리자 폴란드 장군들은 반발했다. 특히 유제프 피우스트스키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다음과 같이 항의했다."지금 당신은 폴란드 원수에게 말하고 있다는 것을 기억하라. 오직 한 사람에게서 이런 말을 듣고 분개하지 않을 것이다. 그 사람은 바로 포슈 원수다."
그러자 베이강은 이렇게 대답했다."포슈 원수께서는 참모들의 조언을 듣고 짜증낸 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언제나 요청했죠. 이러한 점이 그를 그토록 뛰어난 장군으로 만들었습니다."
피우스트스키는 그 말을 듣고 베이강의 의견을 존중했고, 그 덕분에 러시아군을 바르샤바에서 격퇴할 수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피우수트스키는 병력 대신 참모단 수백 명이 온 것에 대단히 실망했고, 폴란드군 또한 프랑스 장교들의 지휘를 받아들일 의향이 없었다. 베이강은 작전을 여러 차례 입안했지만 폴란드 측은 이를 거부했다. 바르샤바 전투 역시 피우스트스키가 독자적으로 지휘한 것이었고 베이강은 어떤 기여도 한 적이 없었다. 그가 폴란드군의 고문으로서 기여한 것은 단지 기존의 구두 보고 체제를 서면 보고 체제로 대체한 정도에 불과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이강은 조국으로 돌아온 직후 폴란드를 볼셰비키로부터 구원한 전쟁 영웅으로 칭송 받았고 서구 학계에서는 수십 년간 폴란드가 프랑스군의 지원 덕분에 붉은 군대를 격퇴할 수 있다는 이야기를 정설로 받아들였다. 베이강 본인은 자신이 과분한 환영을 받았다고 여겼고 회고록에서도 이를 인정했다."군대는 폴란드의 것이었고 지휘도 폴란드의 것이었으며, 승리 또한 폴란드의 것이었다."
베이강은 프랑스로 돌아온 후 몇 년간 휴식을 취하다가 1923년 레바논과 시리아에 주둔한 프랑스군 사령관이 되었다. 이후 그는 시리아 고등 판무관으로 임명되어 1년간 임무를 수행한 뒤 1925년 프랑스에 돌아왔고 고등 군사연구센터의 소장이 되었다. 1931년, 베이강은 프랑스 육군 참모총장에 임명되어 1935년 68세의 나이로 은퇴할 때까지 프랑스군의 재정비를 맡았다. 그후 군직에서 물려나 여생을 보내던 베이강은 1939년 8월 2차 세계대전이 터지자 에두아르 달라디에 수상에 의해 현역으로 소환되어 중동 지역 작전국장에 임명되었다.2.4. 2차 세계대전
1940년 5월, 프랑스군은 독일군의 프랑스 침공에 맞섰지만 벨기에 영토에서 독일군 B집단군과 격돌하다가 아르덴 전선을 돌파한 독일군 A집단군에게 덜미를 잡혀 포위 섬멸당할 위기에 봉착했다. 이에 프랑스 정부는 총사령관 모리스 가믈랭을 5월 19일에 경질하고 베이강을 총사령관에 임명했다. 사람들은 1차 세계대전 때 페르디낭 포슈 원수의 명참모로서 탁월한 전술, 전략적 식견을 보여준 그라면 암울한 전황을 뒤집을 수 있으리라고 기대했다.[3]총사령관에 임명된 직후 그의 첫번째 결정은 5월 19일에 가믈랭이 해고되기 직전에 세워뒀던 '독일군에 대한 역습 작전'을 취소하는 것이었다. 당시 영국-프랑스 연합군의 배후로 침투해 들어가던 독일군 A집단군은 전차부대가 지나치게 앞으로 나가고 보병대가 뒤처지는 바람에 생긴 공백이 컸다. 만약 프랑스군이 이 틈을 타서 역습을 가했다면 승산이 있었다. 하지만 베이강은 가믈랭의 역습 작전을 취소하고 자신이 직접 현장을 살펴본 후 작전을 세우기로 결정함으로서 시간을 낭비했다.
그후 베이강은 신임 내무장관을 예방하고 벨기에로 가서 벨기에군 사령관과 벨기에 국왕을 예방했다. 그렇게 사흘을 허비한 뒤 5월 22일 발표된 베이강 계획에 대해 윈스턴 처칠은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그의 계획은 특유의 열정적인 어투 외에는 가믈랭의 제 12호 명령과 다른 점이 없었다."
그나마 이렇게 세운 역습 계획도 제대로 집행되지 못했고, 결국 대서양 연안에 고립된 프랑스군 10만 명이 됭케르크 철수작전에서 영국군과 함께 탈출하고 남은 병력은 독일군에 맞서다가 항복했다. 그래도 베이강은 이후엔 솜므 강 일대에 단단한 방어선을 구축하고 독일군에게 큰 피해를 입혔다. 독일군 16기갑군단은 파리 공세에서 거의 20%에 이르는 장갑 차량을 손실했고 다른 군단 역시 프랑스군의 격렬한 저항으로 상당한 피해를 입었다. 하지만 프랑스 단독으로서는 낫질 작전으로 1개 집단군이 통째로 박살난 대참사를 극복할 수 없었는데다가 외국의 지원과 개입도 기대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4] 결국 필사적인 분투에도 프랑스의 패배는 그저 시간문제일 뿐이었다.
독일군은 공군을 동원해 폭격을 퍼부으며 프랑스군을 압박했고 마침내 독일군은 프랑스군의 방어선을 돌파하고 6월 14일 파리를 함락시켰다. 여기에 6월 10일 이탈리아가 프랑스에게 전쟁을 선포하고 국경을 침범했다. 이탈리아군의 침공 자체는 국경 지대에 주둔한 프랑스군이 저지해냈지만, 독일군에 맞서는 것도 어려운 마당에 이탈리아와 전쟁을 벌이는 것은 여러모로 무리였기에, 베이강은 총리 관저를 찾아가 휴전을 제의했다.
6월 15일, 보르도에서 열린 내각 회의에서, 폴 레노 총리는 네덜란드의 사례를 따라 해외에서 전투를 계속하자고 주장했다. 하지만 필리프 페탱은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는 소리라고 비판했고 레노 내각은 곧 전원 사퇴하고 페탱이 6월 16일에 총리가 되었다. 베이강은 새 내각의 국방부 장관으로 임명되었다. 이때 그는 피에르 라발이 외무장관이 되는 것에 거부권을 행사했지만 결국 막지 못했다.
2.5. 비시 프랑스 시기
1940년 7월 비시 정권이 수립되었다. 베이강은 9월까지 국방장관을 역임했고 이후에 북아프리카의 프랑스 식민지 사령관에 임명되었다. 베이강은 그곳에서 비시 정권에 반대하는 자들을 남부 알제리와 모로코의 정치범 수용소에 수감시켰고 드골 지지자, 프리메이슨, 유태인, 공산주의자들을 탄압했다. 특히 그는 유대인에 대한 비시 정부의 법률을 매우 가혹하게 적용했다. 1941년 9월 30일, 그는 5세에서 11세의 어린 아이들을 포함한 대부분의 유대인 학생들을 초등학교, 중고등학교, 대학에서 몰아냈다. 페탱은 그런 지시를 내린 적이 없었지만, 베이강은 자신이 고등교육에 관한 법률을 따랐을 뿐이라고 선언했다.하지만 그는 독일에 대해서도 그다지 우호적이지 않았다. 그는 소장 장교들이 독일에 대항하라는 권유에 솔깃해, 공식적으로는 독일군에 적대하지 않았지만 독일군에게 비협조적인 자세로 일관했다. 1941년 5월 28일 프랑수아 다를랑 프랑스 해군 제독이 서명한 파리 의정서에는 독일 해군이 튀니지, 세네갈, 알레포, 시리아 등 프랑스 해외 식민지에서 광범위한 군사 협력을 받을 수 있으며 군사 기지를 설치해도 좋다는 내용이 기재되어 있었다. 하지만 베이강은 이 조약을 "지나치게 굴욕적"이라며 독일 해군에 대한 협력을 거부했다. 또한 그는 나치 스파이들을 색출했고 그들을 잡는 대로 처벌했다.
히틀러는 이러한 베이강의 태도에 불신을 품었다. 베이강이 트럭 및 군용 차량 1200여 대와 중포 1000여 발을 에르빈 롬멜의 아프리카 군단에게 전달하는 등 협력하는 듯한 자세를 취하긴 했지만, 히틀러는 그를 믿을 수 없는 기회주의자라고 판단하고 비시 정부에게 베이강을 해임하라고 압박했다. 결국 베이강은 1941년 11월에 해고되어 본국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1년 후인 1942년 11월, 그는 독일군에게 체포되어 1945년 5월까지 모리스 가믈랭 장군과 프랑스 제3공화국의 몇몇 정치인들과 함께 티롤 북부에 있는 이터 성채에 갇혀 지냈다. 그러다가 1945년 5월 이터성 전투를 통해 미 육군 제103보병사단에게 구출되어 본국으로 돌아갔다.
2.6. 말년
베이강은 프랑스로 돌아간 뒤 체포되어 전범 재판을 받았지만 무죄로 풀려났다. 이후 그는 회고록을 집필하였는데, 자기 변명과 책임회피로 점철되어 있었다. 특히 유대인, 프리메이슨, 공산주의자에게 패전의 책임을 전가했다.1965년 1월 28일 파리에서 사망했다. 향년 98세.
[1] 다만 삽질을 하지 않았더라도 이미 프랑스군의 사기는 엉망진창 그 자체였기에 패망을 늦추더라도 패망은 막을 수 없던 상황이었고 그나마 방어전을 벌여 독일 제16기갑군단에게 큰 피해를 입혔으니 가믈랭보다는 유능한 인물이었다.[2] 또는 멕시코의 카를로타 황후와 알프레드 반 데르 스미슨 장군의 사생아라는 소문도 있다.[3] 이 결정에 대해 훗날 샤를 드골은 자신의 자서전에서 "국가위기 상황에 평생을 참모로만 보낸 사람을 사령관으로 임명한 것은 명백한 실책이었다"고 비판했다. 실제 베이강의 군 경력은 대부분 작전참모 혹은 전술교관이었고, 중위 이후에 독립적인 부대장으로 재임한 적은 없다.[4] 영국군은 됭케르크 철수작전으로 귀중한 병력 상당수를 온존했지만 무장 대부분을 프랑스에 두고와야 했기 때문에 무력화 돼버려서 재투입은 커녕 영국 본토 방위 문제로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처칠 역시 프랑스 패망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이고 전투기 등의 지원도 영국 본토 방위를 위해 거부했다. 미국 역시 국내 여론 때문에 직접 참전을 기대하기 어려웠고 소련 또한 독일과 불가침조약을 체결한 상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