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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9-21 14:18:30

총통위

銃筒衛

1. 개요2. 상세3. 폐지에서 비롯된 화력 약화 논란

1. 개요

조선 시대 초기에 있었던 군사 기구.

2. 상세

1445년(세종 27년) 7월 총통(銃筒: 유통식 화약 병기)을 방사(放射)하는 임무를 목적으로 설치된 특수 병제.

이 병제의 성립 배경은 첫째로 1433년경부터 4군 6진이 개척되면서 야인(野人: 만주족) 정벌을 위한 화기 사용이 급증함에 따른 화기 방사군의 대량 확보와 과거 중앙에서 총통 방사를 맡은 별군(別軍)이 다른 일에 종사하게 되어 본래 임무를 전혀 못하는 데 따른 화기 방사군의 질적 향상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으며, 둘째로는 1445년 3월 과거에 사용하던 천자(天字)·지자(地字)·황자(黃字)·가자(架字)·세화포(細火砲) 등의 화기를 전면적으로 개주(改鑄)하게 되면서 이를 운용할 화기 방사군을 대량 확보하는 데 있었다.

병조(兵曹)에서 아뢰기를,
"총통위(銃筒衛)를 지금 이미 혁파(革罷)하였으니, 그 가운데에서 갑사(甲士)나 별시위(別侍衛)에 속(屬)하고자 하는 자는 그 정원(情願)에 좇아서 취재(取才)하여 입속(入屬)시키되, 전의 벼슬한 날짜를 통틀어 계산하여 서용(敍用)하며, 방패(防牌)·섭육십(攝六十)과 사복시(司僕寺)·사옹방(司饔房)·충호위(忠扈衛)의 제원(諸員)과 외방(外方)의 제색 군사(諸色軍士)에 속(屬)하고자 하는 자도 또한 각각 그 정원에 따라 시행하소서."하니, 그대로 따랐다.
세조 실록 8권, 세조 3년 7월 4일 을축 4번째 기사
신은 듣건대, 사졸(士卒)은 정련(精鍊)을 귀히 여기고, 시위(侍衛)는 고단하고 약하게 해서는 안된다고 합니다. 본조(本朝)의 총통위(銃筒衛)는 보병(步兵) 중에서 가장 정강(精強)하다고 일컬어 왔는데, 이제 갑자기 파하여 보내시니, 신은 그윽이 의혹하고 있습니다. 빌건대, 구제(舊制)를 그대로 하되, 위(衛)를 군(軍)으로 개칭하고, 7품(品)으로 거관(去官)하게 하고, 월봉(月俸) 6두(斗)를 주도록 하소서. 이와 같이 하면, 교만하고 태만하여 제어하기 어려운 데에 이르지도 않을 것이며, 보병으로서 정강하지 않은 자가 없을 것입니다. 만약 이르기를, ‘이미 혁파한 것이므로 다시 세울 수 없다.’고 한다면, 해당 관청[該曹]으로 하여금 그 원하는 바를 취하여, 경외(京外)의 기병(騎兵)·보병(步兵)으로 나누어 붙이게 할 것이며, 다만 수천 명 정병(精兵)의 부적(付籍) 여부를 그 소위에 맡긴다면, 어찌 수령들의 누정(漏丁)을 책하겠습니까? 또 '신이 전일에 대장 막하(大將幕下)에 있으면서, 입직(入直)하는 갑사(甲士)가 70인, 80인에 지나지 않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는 궐내의 파문(把門)에도 오히려 또한 부족하니, 허소(虛疎)한 것이 심합니다. 빌건대, 이제부터 갑사는 매 번상(番上)마다 모름지기 1천 인으로 정하고, 매 입번(入番)마다 2백 인을 내려가지 않도록 하소서. 만약 녹과(祿科) 때문에 어렵다고 한다면, 3삭(三朔)마다 번을 갈아들이고, 간략한 월봉을 주도록 하소서.
세조 실록 9권, 세조 3년 10월 22일 임자 3번째 기사

총통위의 선발 시험은 설치 초기에는 그 규정이 경외무역자(京外無役者)로 거의 대소 구분 없이 나이 30세 이상의 달리는 힘이 있는 자로 정하였다. 그러나 1445년 7월에 실질적인 선발 시험법이 제정되어 한 위(衛)로서의 위치가 확고해졌다. 이 선발 시험법은 일정한 크기의 놋쇠 항아리에 물을 가득 부어 놓고 마개를 빼어 물이 윗구멍까지 다하는 동안에 달리는 힘을 시험하는 것이다.

3. 폐지에서 비롯된 화력 약화 논란

총통위는 설치 초기에는 병조에 소속되어 있었으나 1451년(문종 1년) 5월 문종의 군제 개혁안에 의해 5사(司) 25령(領)에 분속되었으며, 1457년(세조 3년) 3월에 5사가 5위(衛)로 개편되면서 충좌위(忠佐衛)에 속했던 기간 병종이었으나 같은 해 7월, 세종 이래 계속된 흉년·기근으로 인한 총통 주조의 부진으로 없어졌다.

다만 이는 일부에서 말하듯이 중앙에서 화약 무기를 억압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각 부대가 알아서 사용하게 하는 것에 가깝다. 집현전이 없어졌다고 해서 집현전의 기능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고 총통위를 없앴다고 해서 화약무기 사용을 안한 것이 아니다.

또한 세조의 총통위 폐지로 조선군의 화약무기 개발과 능력과 보급이 약화되었다는 인식과 달리, 총통위는 말 그대로 총통만 전문적으로 다루는 병종으로 수가 250명 정도에 불과했고, 부진한 상황 속에서도 세조 때에는 화포가 지방군에까지 보급되었기에 존재 의의가 별달리 없었다.

그런데도 조선군 화력 약화가 총통위 폐지 탓이란 인식이 형성된 것은 세조를 마지막으로 조선초기가 끝나고 임진왜란이 발발했을 때 조선군이 지리멸렬한 탓을 화력차와 세조에 전가한 데 있는데, 국립진주박물관의 화력조선에서 보이듯 당시까지도 조선은 총통을 개조하고 여진에 잘 써먹고 있었고, 해전의 사례에서처럼 지원화기는 일본에 비해 오히려 우세를 유지했다.

명나라나 일본에 비해 조선군의 개인화력이 약화된 것은, 명나라 해금령에 의해 해운업이 약화하며 외래문물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우물안 개구리가 된 것에서 비롯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