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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1-10 23:04:55

이성계 여진족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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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상세3. 교차검증
3.1. 조선왕조실록3.2. 이안사 관련3.3. 태조실록3.4. 이지란 관련3.5. 이안사의 고위직 관련3.6. 막내 양위는 몽골의 풍습?
4. 총론
4.1. 문헌 근거의 부재4.2. 지역적 특성 관련4.3. 여진의 상황4.4. 여진족의 관점4.5. 여진족의 범위4.6. 족보의 신뢰성 관련
4.6.1. 반론: 고려의 폐쇄적인 특징4.6.2. 반론: 고려의 무시할 수 없는 민족의식4.6.3. 반론: 귀족 계급과의 혼인
4.7. 조선의 여진계 풍습 부재4.8. 논제의 핵심
5. 결론

1. 개요

이성계조선의 건국군주이므로 조선까들은 그 뿌리를 흔들기 위해서인지 이성계 출신에 대해 여진족설, 달단(몽골)족설, 화교설 등 갖가지 설을 만들어 주장하고 있다. 이성계 여진족설은 그러한 사이비 역사학 중의 하나다.

2. 상세

이성계 여진족설은 가장 많이 알려져서 한국의 조선까 뿐 아니라 외국의 혐한들, 그리고 이들에게 편승한 한국의 국까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단골 소재(?)다. 심지어 미디어에 자주 회자되는 역사 강사인 설민석이 방송 중에 주장했을 정도로 널리 퍼진 오류다.

뿌리를 거슬러 올라가면 일제의 식민사관인 만선사관이 그 기원인데 만선사관은 한반도 및 한국계가 만주 세력에게 지배+종속되어 있다고 주장하는 식민사관이다. 이 식민사관에 따르면 한반도계인 태조 이성계가 만주 세력인 여진족들을 지배한 것이 말이 안 되기 때문이다. 이런 주장을 펼치는 대표적인 일본 역사학자로는 미야와키 준코(宮脇淳子)가 있다.

하지만 태조 이성계 이후에도 광해군 이전까지 여진족들은 조선에게 조공을 바치고 조상의 나라라고 칭하는 등 청나라를 건국하기 전까지 조선을 숭상하는 모습을 보였다. 조선이 타 민족에게 상국 대우를 받았던 것은 애써 무시하고 조선이 타민족에게 상국 대우를 해준 것만 보고서 한민족은 열등한 민족으로 판단하는 편향된 역사관이라고 볼 수 있다.

이성계 여진족설 가운데에는 이성계의 어머니인 의혜왕후 최씨의 친정이 중국 등주 출신으로 현재 중국 산둥성 펑라이시에서 함경도로 이주한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그렇지만 여기서 등주란 산둥성이 아닌 원나라 쌍성총관부 관할 안변군(案邊郡) 즉 등주(登州)를 말한다. 등주(登州)는 산둥성 등주와 쌍성총관부 등주 2곳이 있지만 안변군(案邊郡)은 이곳 밖에 없다. 즉 안변군의 이칭(異㛵)이 바로 등주(登州)이다. 안변군은 삭방도에 속했는데, 삭방도는 지금의 함경도와 강원도 일대이다. 안변군은 위치가 함경도와 강원도 경계에 있다보니, 1946년 9월 함경남도에서 강원도로 행정구역이 개편되었다.

의혜왕후 최씨의 부친의 원래 성씨는 조씨(趙氏)로 천수천호(宣授千戶) 조조(趙祚)이다. 이자춘이 조조의 집에 들렀는데 그 딸이 용꿈을 꾸자 이자춘에게 시집보내고, 그 복을 전부 받고자 자신도 조씨(趙氏)에서 외가의 성인 최씨(崔氏)로 바꾸고, 이름도 이자춘의 자(字)인 한기(閑奇)로 개명하였다.

고대 혈통 문제는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면 과학적으로 알아내기가 힘든 편이라 해결이 안 된 문제가 많으며, 역사와 소설을 구분 못하는 사이비들이나 제멋대로 역사를 왜곡날조 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기본적으로 역사는 사실이고 사료나 과학, 논리 등을 이용하여 사실을 알아내거나 그에 가깝게 접근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학자들은 명확한 근거가 나올 때까지는 확정을 내리지 않는 것이 기본이다. 승자가 사서를 날조할 수 있을지언정 이미 발생한 과거의 역사를 바꿀 수는 없는 것이며, 또한 오늘날의 역사학은 학문이고 과학적 방법론으로 추구되어야 하는 것이지 감정적으로 맘대로 날조해도 되는게 아니다.

일본 위키에 나오는 것처럼 혐한들이 대놓고 왜곡을 벌이기도 하지만 저런 걸 볼 때는 명확한 근거가 무엇인지 확인하는 편이 좋다. 물론 저런 이상한 학자들이 일본에만 있는 것은 아니지만 명확한 근거가 없는 이상 확정적 정설이니 세계에서도 그렇게 생각하니 이런 것들은 다 헛소리에 불과하다. 일본에서도 제대로 된 학자나 학계에서는 당연히 이러한 소리들을 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자신의 학설에 반대하는 의견이 나와야 다른 사람들의 관심도 받을 수 있고 자신도 관련된 연구를 더 할 수가 있기 때문.

이성계가 여진족이라는 근거라며 들이대는 주장들도 보면 다 반박이 가능한 수준이라 신빙성이 꽤나 떨어진다.

3. 교차검증

3.1. 조선왕조실록

3.2. 이안사 관련

3.3. 태조실록

3.4. 이지란 관련

3.5. 이안사의 고위직 관련

3.6. 막내 양위는 몽골의 풍습?

4. 총론

이런 점만 봐도 이성계 여진족설에 대해서는 그닥 신뢰성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4.1. 문헌 근거의 부재

이성계의 혈통이 여진족이라는 주장에는 문헌 근거가 전혀 없다. 이성계의 혈통은 조선왕조실록 태조실록의 서두에 상당히 명확하게 기록되어 있는데, 여기에서 이안사에서 이성계로 이어지는 혈통은 심지어 외가의 외가까지 모두 기록되어 있다. 기록상 이성계의 혈통은 고려인 혈통으로만 이어졌다.

역으로 이성계 이전에도 금사, 송막기문 등에는 금나라 태조 완안아골타의 6대조는 완안함보라는 신라-고려 교체기 시절의 인물로 그 계보가 기록되어있는데, 이를 보면 한반도에서 북쪽으로 이주하여 세력을 일으킨 사람이 적지 않았던 것 같다. 물론 한반도에서 북쪽으로 이주한 세력이 있다고 해서 북방 세력이 전부 한반도 역사에 귀속되는 것은 아니다.

여진족들은 이성계 일족을 다른 족속으로 여기고 공격하기도 했다. 물론 통두란의 예에서 보듯이 우호적인 교류도 했겠지만, 고려인과 여진족이 서로를 다르게 보았다는 문헌적 근거가 있다.

이성계가 정말 여진족 출신이라면 흔적 남길 곳은 고려 국내 말고도 많다. 명나라에서도 이성계를 이인임의 자손으로 기록했을지언정 여진족이라고 보지는 않았다. 애초에 여진족이라고 봤으면 명백한 고려인인 이인임의 아들이라는 소리를 그대로 받아 적지는 않았을 것이며, 그 이전에 이성계를 무고한 윤이, 이초 일당 역시 이인임 자손 운운이 아니라 그보다 몇배는 치욕스러운 여진족 출신 운운하며 요동침공설을 부추겼을 것이다. 이성계가 여진족이라고 주장하면 그 연장선상에서 동만주 여진족들을 규합해 요동침공에 동원한다는 식으로 좀 더 그럴싸하게 말을 꾸며낼 수 있지만 안했다.

게다가 기록에 따르면 이성계 일족의 이주는 달랑 한 가족이 혼자 이주한 것은 아니었다. 이안사를 따라간 사람들만 천호이며, 이안사 휘하에 있던 고려인은 거의 수천호가 된다고 한다. 전근대에서 집성촌을 이루고 살면 중앙보다는 민족색이 얕아질지 몰라도 고려인으로서의 정체성은 충분히 간직할 수 있다. 기록에 남은 전주이씨의 가계는 철저하게 함흥, 안변 일대 고려계 집안끼리의 통혼을 통해 이어져왔는데 당장 재외 한인커뮤니티만 봐도 줄기차게 한인집안끼리 결혼하며 버티는 경우가 한둘이 아니다.

게다가 그들의 고향인 고려는 바로 이웃에 있었으며, 비록 주권이 많이 훼손되기는 했으나 국가를 유지하고 있었다. 심지어 이춘의 동복형 이송이나 이성계의 이복형 이원계는 쌍성이 원나라 땅이던 시절에 고려 조정에 출사하기까지 했다.(고선지와는 이래서 다르다.) 고구려가 망하고 왕족 약광과 함께 일본으로 건너간 고구려 유민들은 무려 500년간(!) 자기들끼리만 통혼하며 버텨왔으며 발해 멸망 이후 발해계 주민들도 금 조정이 적극적으로 한족화시키기 전까지 근 200년간 발해계의 정체성을 유지했다. 고작 조국과의 접경지대에서 4세대쯤 정체성을 고수하는 것 정도는 크게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이런 이주는 당대 상황에서 이성계 일족만의 특수한 경우가 아니었다. 고려사를 비롯한 각종 기록들을 보면, 무신 정권을 전후로 해서 고려 사회의 막장화가 가속화하면서 백성들이 유망이 심해지고 있었다. 이성계의 선조처럼, 자기 동네 향리나 지방관과의 마찰이 이주의 원인인 경우도 심심찮게 존재한다. 고려 시대 자체가 주현이 따로 있고, 속현이 따로 있는 시대로 중앙 정부의 지방에 대한 영향력이 그렇게 강한 시절이 아니었다.

현대로 따지자면, 이성계 일족은 조선 말에 간도 이주, 개척 시기에 그쪽으로 흘러가 현재 중국의 중국조선족이 된 사람들과 비슷한 경우였다. 이들은 해방 후 60년이 지났지만 자치주를 유지하고 있으며, 장기간에 걸쳐 자신을 민족적으로 여전히 '조선계'인 중국인이라 생각하고 동화되는 중이다. 즉 국가귀속 의식은 중국이지만 민족귀속의식은 여전히 조선(Korea)민족이다. 의무교육을 비롯해 각종 정책으로 하나의 중국을 강조하는 현대 중국에서도 이런데, 전근대의 문화적으로 차이가 있는 여진 - 고려 관계에서는 그 속도가 더 느리고 영향력도 적을 수밖에 없다.

4.2. 지역적 특성 관련

여진족이라는 일방적인 주장의 근거는 고작 당시 정황상 이성계의 선조가 이주한 동북방에 여진족이 많이 살았다는 것 뿐이다. 쌍성총관부가 있는 동북 지역은 중부 지방과는 달리 여진족 역시 꽤 많이 살기는 했다. 사실 이 지역 함흥은 험한 산과 바다로 막혀 지리적 접근성은 떨어지는데, 그 지역 자체는 사람이 거주하기에 적당한 자연환경, 함흥 평야 지역이다. 이 때문에 고대부터 여러 민족이 거쳐간 지역으로(옥저가 있었던 곳이 여기) 시대에 따라 옥저, 고구려, 여진, 고려 등이 경합하는 지역이었다.

하지만 고려는 처음부터 고구려 승계의식을 표방하며 일어섰다. 고려가 한반도 중남부에 위치해 있다는 이유로 고려의 고구려 승계의식을 별 의미 없는 것으로 치부하는 현대인들이 많지만, 고려의 중심지인 패서 일대는 광개토대왕 이래 확고한 고구려의 영토였을뿐더러 평양 천도 이후에는 황해도 재령 지역에 고구려 3경인 한성을 두었을 정도로 군사적, 경제적으로 중시되던 곳이다. 수도 평양이 고구려 멸망 이후 강제이주로 황폐화되고 (아마도 고구려화된 말갈계가 주도했을) 후계국인 발해는 고구려의 중심지에서 멀리, 옛 동부여에 가까운 동만주로 밀려난 상황에서 옛 고구려의 인적자원이 거의 유일하게 남아있던 지역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 때문에 안승과 검모잠의 고구려 부흥운동도 요동 지역과의 연계는 있었으나 중심 거점은 한성이었다. 아예 발해조차 제대로 손대지 못한 평양을 부흥시켰음은 말 할 것도 없다.

고려의 국조인 태조 왕건이 강력하게 북진정책을 펼쳤기 때문에, 과거부터 이 지역의 여진족들을 회유하고 귀화시키거나, 다른 지역의 고려인들을 이주시킨다거나, 정 안되면 물리적으로 본때를 보이거나 하는 식으로 중요하게 여겨왔다. 공민왕이 함흥 지방의 쌍성총관부를 수복하면서, "본래 고려 영토"임을 확실하게 선언한 것도 이런 상황탓이다.

이는 조선에 들어와서 마찬가지였는데, 조선 초기에 함경도에서 여진족의 귀화를 받아들이고 조선인과 결혼시켜주는 등의 정책이 바로 그것이다. 이안사가 인망을 얻고 무리를 이끌어 고려 조정으로부터 병마사 직함을 받았다는 대목을 보면 알 수 있듯이 북방으로의 고려인 이주는 정책적, 사회적으로 자연스럽게 일어난 결과로 전혀 특수한 일이 아니다.

4.3. 여진의 상황

당시 여진족은 금나라의 멸망으로 완전히 몰락한 상태라 고려 이상으로 사정이 나빴다. 나라가 없고 여러 부족으로 분열되어 통일된 정치 체제를 가진 민족도 아니고, 문화적인 헤게모니도 상실했다. 그저 몽골의 지배 아래 있는 여러 소수 민족 가운데 하나였을 뿐이며, 심지어 고려 북방 지역에서도 야인(野人)이라 불리는 여러 종족 가운데 한 부족으로 전락한 상태였다. 여말선초의 문헌에서 이 지역의 부족들은 '여진'보다는 '야인'으로 통칭하는 경우가 많은데, 자신의 부족 이름을 '여진족'으로 삼는 종족만 있던 게 아니기 때문이다.

금나라 같은 대제국을 세운 민족이니 역량은 어마어마했으리라는 환상 섞인 추측을 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정작 금나라는 파탄국가 수준의 시스템으로 운좋게 화북을 먹었을 뿐이다. 송나라 이전 오대십국 시절 석경당이 중원을 지키는 요충지인 연운 16주를 요나라에게 갖다 바치는 바람에 송나라는 군사적으로 약해졌고 이후 요나라를 멸망시킨 금나라가 이 땅을 물려받아 다시 송나라를 압박했다. 참고로 연운 16주는 만리장성 남쪽이라 이곳을 빼앗긴 이후의 중국 왕조에게는 그야말로 재앙이나 다름없었다. 사실 금나라도 처음부터 화북 전역을 직접 통치할 생각은 아니었고 요나라후진을 세웠듯 장방창이나 유예(남송) 등을 이용해 괴뢰정권을 세우고 간접통치를 시도했으나 장방창은 도망쳐서 남송에 항복해버리고 유예는 막장짓을 일삼은 끝에 남송군에게도 쳐발리는 신세가 되면서 울며 겨자먹기로 화북 통치를 떠안은 쪽에 가까웠다.[4] 이처럼 운좋게, 그러나 무리하게 화북을 쳐묵한 탓에 제대로 된 국가 체계가 전무하다보니 남송에서 들어오는 막대한 세폐 없이는 국정 운영이 안 될 지경이었고 초원지역의 통제에도 실패해 대재앙에 직면하게 되었다.

금나라는 화북평원과 만주를 이어주는 연결고리 격인 오늘날의 북경을 빼앗기고, 이어 금 정부의 통제력이 사라진 만주를 먼저 몽골에게 빼앗긴다. 이후 개봉으로 천도하여 중원 내지 영토로 버티다가 개봉 근처의 채주를 마지막으로 멸망했기 때문에 금나라 시절의 그 막강한 역량은 이 시기 동만주 여진족들에게는 거의 계승된 것이 없었다. 그 결과 원말명초의 격변기에도 만주의 여진족은 나하추 등의 지도 아래 북원의 부용세력으로 동원되거나 부족별로 각자도생의 길을 걸었지 자체적으로 어떠한 통합적인 정치체 구축을 시도해본 바가 관찰되지 않는다. 북방 야인들이 '여진' - '만주'라는 정체성으로 통합하는 건 250년쯤 뒤 후금의 건국 때까지 기다려야 했고, 그나마도 서만주 건주위 중심의 통합이라 동만주 지역은 변방 신세를 면치 못했다.

애초에 만주 국가의 진출방향은 언제나 일관되게 서쪽 방향이었으며 동만주는 동부여발해 정도를 제외하면 역사적으로 변방을 면해본 바가 손에 꼽을 수준이다. 발해 역시 중심지는 동부여 지역에 자리잡았지만 이후 꾸준히 서진하여 건국 초기부터 하북성 일대에서 당과 격전을 치르고 해로를 이용해 산동반도를 공격할 정도였다. 결과적으로 조선 건국 직전 당시 동만주-동북면 지역에서 중심이 되는 문화는 원 제국으로서 패권을 잡고 있던 몽골 문화였다. 여진족도 몽골 문화의 영향을 많이 받아서 청나라 시대까지 몽골어가 널리 쓰였고, 만주문자도 몽골문자를 개량해서 만들었을 정도다.

이런 면에서 차라리 원 제국의 일부로써 원나라 사람이라는 정체성이 생기지 문화적, 민족적 역량이나 색채가 약한 여진 민족이라는 정체성을 가질 가능성은 낮았다. 물론 이성계는 여진족과 긴밀한 교류를 가졌고, 그들을 통솔할 수 있는 배경에는 여진족과 문화, 민족 등에서 정체성의 공감&공유가 있겠지만, 그 정체성은 혈통적 정체성이 아니라 동북면 지역에 사는 사람이라는 지역적 성격이었다.

만약 이성계 집안이 여진족이라는 혈통적 정체성을 가졌다면 여진족 통합에 나서는 게 이치에 맞다. 하지만 이자춘은 원과 고려 사이에서 고려에 귀순하고 지배층의 일원이 된다. 그리고 이성계 가문이 가졌던 여진족의 문화적 정체성에 대한 공감&공유과 교류는 지역 기반을 동북면에서 한반도 중심인 개성 - 한양으로 옮기자 단 1세대만에 사라졌다. 동북면 출신 어머니를 둔 정종, 태종조차 태조와 같은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했고 본인들도 동북면 여진족과 연결을 강화하거나 과거 영향력을 복원하려고 하지 않았다. 여진족 역시 자신들의 윗사람이었던 태조 이성계의 혈족에 전과 같은 충성을 바치지 않았다. 게다가 이 여진족 부하라는 이들도 몇번째 얘기하지만 퉁두란 말고는 다들 참교육해서 무릎꿇리고 복종시킨 것이지 무슨 동족의 유대감으로 복속시킨 게 아니다.퉁두란도 쳐맞지만 않았지 사실상 참교육당한 수준 심지어 이원경 같은 경우는 항복할 때 아예 자신의 조상이 고려사람이라며 투항했지 여진족의 ㅇ자도 꺼내지 않았다.

이 점은 고구려-말갈 관계와도 비슷하다. 원래 말갈족은 숙신계열로, 예맥계열의 고구려와 문화도 언어도 달랐지만 고구려가 말갈족들을 무력으로 복속함으로서 말갈족들 중 일부가 고구려에 융화되며 "말갈계 고구려인"같은 정체성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그 중 하나인 대조영이 발해를 세웠지만 흑수말갈을 중심으로 한 다른 말갈족은 고구려의 영향이 적었고 정체성이 옅었다. 대조영 같은 경우가 전자고 여진족들은 후자에 속한다.

4.4. 여진족의 관점

만약 여진족 출신이 고려에 귀부해 왕이 될 수 있을 정도였다면 이성계 외에도 고려 중앙조정에서 한자리 차지한 여진족 출신 유력인사가 존재하고, 이성계의 세력형성 과정에서도 동족(?)인 여진족들이 힘을 보태줬어야 합당할 것이다. 그러나 이성계가 여진족이라는 쪽에서는 정작 퉁두란 외에 딱히 쌍성에서부터 이성계를 따라왔거나, 혹은 이성계와 비슷한 케이스로 중앙에서까지 활동한 여진족을 전혀 제시하지 못한다.

여진족들 역시 이성계 일족을 자신과 같은 여진족으로 여기지 않았다. 오히려 여진족들은 이성계의 조상 이행리가 고려인이었기에 죽이려 습격했고, 여진족들의 추격으로부터 탈출한 이행리는 이안사가 정착한 두만강 알동에서 쫓겨나 의주(현 원산)에 재정착했다. 퉁두란을 제외한 여진족들은 쌍성 수복 이후에도 줄기차게 고려를 건드렸고, 이성계에게 진압된 이후로는 고려라는 국가가 아닌 이성계라는 개인에게 충성을 바쳤을 뿐이다.

만약 조선왕조가 이성계가 여진족임을 숨기려 했다면 그와 평생을 함께한 퉁두란도 세트로 날조하는 것이 가장 안전했을 것이다. 이성계가 개경에 내려온지 얼마 안되는 여진족임에도 전주 이씨 족보를 구해서 날조할 수 있었다면, 한국사 사상 최강의 권신이 된 뒤엔 의형제인 이지란에게도 적당한 족보 하나 못 구해줬을 리 없다. 이성계를 적장자로 만들기 위해 어엿한 정실 소생의 이원계를 졸지에 서장자로 만든 것이 조선왕조인데 퉁두란을 고려인으로 윤색하는 것이 어렵지는 않은 일. 하지만 정작 조선왕조는 퉁두란의 여진족 집안 내력을 세세히 밝히고 있으며, 청해 이씨 집안도 자기 집안이 악비 후손이네 하면서 덧칠은 했을지언정 여진족 출신이라는 사실을 감추지는 못했다.

이성계가 여진족이었다면 또한 동만주 여진족들 사이에서 이성계와 관련한 구전이 남았을 것이며, 그렇다면 조선왕조에게 왕가를 배출한 부족으로싀의 지분을 요구했을 것이다. 여진족 시절에야 조선에 비해 약소했으니 요구가 씹혔다 쳐도, 여진족 출신 만주족 왕조인 청나라에서 이걸 이용해먹었을 것이다. 대번에 "느그 왕 여진족이니까 이제 큰집인 우리한테 들어오는 건 당연 ㄳ" 하는 식으로 써먹고 오늘날 중국 측에서도 닳아서 가루가 되도록 우려먹고 있을 일이다.

심지어 이지란은 건주여진 출신으로 누르하치가 바로 그의 친척 아이신기오로 먼터무의 후손이다. 그렇다면 누르하치나 그 후손들이 자기네 친척어르신의 의형제라는 이성계에 대해서 알아봤을 것이며, 집안에서 이성계에 관한 이야기가 전해져왔을 것이다.

심지어 청나라는 대청회전을 편찬하면서 대명회전 원본을 따를지(이인임 자손설) 수정본을 따를지(이인임 무관설)를 고민했을 뿐이다. 여진족의 후예인 만주족 본인들조차 이성계가 여진족이라는 생각 자체를 안 했던 것이다.

한 마디로 이 지역의 고려인들과 여진인들은 서로를 혼동하지 않았고 그럴 이유도 없었다.

4.5. 여진족의 범위

색이 옅다는 것으로 따진다면 타국인과 교류하며 지냈던 국경 지방이나 외따로 떨어진 제주도는 우리 땅이 아니라고 하는 것, 경상도 해안지방에 왜관이 있었다고 일본인이라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성계 여진족설과 같은 논리로 보면 앞서 언급했듯이 쌍성총관부에서 99년이나 살았던 한양 조씨들도 여진족이라는 말이 된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렇게 이성계 여진족설을 밀며 조선을 부정하는 사람들이 숭상하는 고구려발해는 아예 백성 대다수가 여진족의 전신인 말갈인들로, 그들의 기준으로 따지자면 가장 한민족 계열의 색이 옅은 나라 중 하나다. 설마 이 시대에 예맥인과 말갈인의 통혼이 없었을거라고 하는건 지나친 희망사항이다. 고구려 인구 300~500만설을 미는 사람들조차도 그 인구가 전부 예맥 계열 한민족이라는 가정은 안할뿐더러, 할 수도 없다. 발해는 더더욱 말할것도 없고.

정확히는, 쌍성총관부를 몽골에 넘긴 반란세력도 조씨에서 주도했고 다시 고려에 귀화시킨 세력도 조씨에서 주도했다. 이성계의 아버지 이자춘이 고려에 귀화할 때 도움을 줌으로써 고려 정부에 출사하게 된다. 조씨 가문이 저렇게 상반된 행동을 하게 된 이유는 세대가 흐르면서 쌍성총관부의 관직세습 때문에 가문이 분열하여 서로 다른 이해관계를 갖게 되었기 때문이다.

4.6. 족보의 신뢰성 관련

균형을 맞추기 위해 조선까의 주장을 대충 소개하자면 여진족이 만주 지역만이 아니라 한반도 북방에도 꽤 살았다는 것과 으레 나오는 과거 족보의 신뢰성을 걸고 넘어진다.

태조 총서의 기록에 태조의 6대조 이린의 한자가 李璘, 李隣 등으로 다르게 기록되는 혼선이 있다. 이린이 이의방의 친동생이기 때문에 이의방 존재를 숨기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다르게 기록한 걸로 보인다. 족보의 가문도 전라도 전주(全州)에 있었는데, 갑자기 동북면 쪽이 근거지가 되는 행적을 증명하는 증거의 신뢰성이 약하기 때문에 이씨 족보를 구매했을 거라는 주장을 한다. 당시 성씨는 그 가문의 봉토와 귀족의 증거라 성씨를 가진 고려인이 몽골에 귀화하면 반드시 자신의 성씨는 남겨 놓았다.

하지만 고려에서 여진족이 하루 아침에 족보를 사서 고려인 귀족 행세를 할 수 있다는 상상 자체가 역사적 무지를 그대로 드러내는 억지일 뿐이다.

4.6.1. 반론: 고려의 폐쇄적인 특징

4.6.2. 반론: 고려의 무시할 수 없는 민족의식

4.6.3. 반론: 귀족 계급과의 혼인

4.7. 조선의 여진계 풍습 부재

이성계의 가문이 여진족이었으며, 여진족이 자기들과 이질적인 고려를 뒤엎고 조선이라는 나라를 만들었다면 '나라의 상부층에 침투한 이민족'을 통해 이민족의 풍습이 한반도에 전해졌어야 마땅하다. 가령 만주족이 중원을 지배하는 청나라를 세우자 여진족의 변발 풍습이 보편화되었고, 원 간섭기 시기에는 고려의 상류층들이 몽골식 복색을 하고 다녔다. 변발의 경우 만주족 정권이 한족들에게까지 강요한 것이지만 원 간섭기 시기 몽골 정권은 고려의 토착 풍습을 존중하며 건드리지 않겠다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일부러 상류층들이 몽골 양식을 흉내내고 다닌 것이다. 반대로 중원에서는 고려양이 유행하기도 하였다.

이렇듯 고려인과 구별되는 여진족이 조선 왕이 되었다면 여진족의 풍습이라 할 만한 것이 조선에 유입되었어야 마땅하다, 하지만 그러한 사례를 찾아볼 수 없다. 이는 이성계가 여진인이 아니며 고려인의 풍습을 따르는 고려인이었다는 것을 방증한다.

4.8. 논제의 핵심

특히 가장 중요한 점은, 이성계 일족은 자기들 스스로를 고려인이라고 말하고 있었다는 점. 오히려 이성계가 무너뜨린 고려왕실은 본인들 조상이 당 숙종과 관련있다고 사기치고 다녔다는 점인데 조선까들은 이걸 갖고 아무도 고려 왕실이 혐오스러운 중국계 종자라는 것을 떠들고 다니지않는다. 일부의 편견과 달리 여진족과 한반도의 사람들은 고대부터 그 정체성이나 언어가 확실히 구분되는 별개의 민족이었다. 과거에야 만주어 자료를 일반인이 찾기 어려우니 단어 몇 개 가져다가 혹세무민하는 이들이 판을 쳤지만, 이제는 유투브나 구글에서 조금만 검색해보면 만주어 자료가 여럿 나오는 시대다.

이런 상황에서 이성계 가족이 실제로는 여진족이라고 스스로 정체성을 가지고 있으면서 고려인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다. 또, 그럴만한 이유도 없다. 애초에 이들이 여진족으로써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었다면 공민왕을 편들어 쌍성총관부를 고려에 바치느니 차라리 쌍성지역의 여진족을 규합하여 동만주를 제패해 아쿠타의 영광을 재현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또, 이성계의 의형제인 이지란의 경우 멀쩡히 여진족이라고 기록하고 그의 여진족 가계도도 충실히 기록하고 있기 때문에, 이성계 가계도만 지어냈을 거라는 주장은 더더욱 신빙성이 떨어진다.

물증도 없고, 심증도 없지만 그럼에도 모든게 조선왕조의 역사왜곡 조작이고, 유전적으로 이성계의 혈통에 정말 여진족의 피가 흐르고 있다고 해도[8], 더 중요한건 기록에 남아있는 이성계는 스스로도 항상 고려인이라 주장했을뿐 아니라 배극렴, 정도전, 조준, 남은 등등 고려인이 100% 확실한 사람들에게 고려인으로 인정받고 추대받아서 왕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스스로 고려인이라 주장하고, 고려인으로써 행동하고, 주변에서 모두가 고려인으로 인정한다면 그것은 그냥 고려인이다.

게다가 유전자의 개념을 잘 이해하지 못한 사람들이 이성계처럼 가문의 유명인의 혈통에만 집착하는 경향이 있는데, 조선 왕조가 개창된 후로 이씨왕조는 근친상간을 한것도 아니고 조선의 명문 가문들과 두루두루 통혼을 했다. 설령 이성계가 여진족 아버지와 여진족 어머니 밑에서 태어난 순도 100% 여진족이었다고 가정해도[9] 더이상 여진족과의 통혼을 멈추고 조선인 가문들하고만 통혼할 경우 겨우 몇대만 흘러도 여진족의 유전자는 금방 희석되어서 없어지는거나 마찬가지다.[10] 이성계의 혈통을 음해한 후에 '그러므로 조선은 사실 여진족이 조선인들을 다스리는 왕조였다' 따위로 이어지는 무식한 음모론자들의 주장은 이성계를 100% 여진족이라고 가정한 상황에서조차 무의미한 말이다. 몇대만 지나면 유전적으로 완전히 조선인이 지배하는 나라가 되니까.

그리고 이 이성계 여진족설을 미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금나라 황실이 한국계라는 명백한 공식 기록이 남아있는 것(금사, 완안함보는 고려인이다)은 이를 악물고 무시한다. 더구나 고려황실 어인족설같이 술작이 지극히 뻔하여 생물학적 신뢰성이 없다는 것과 달리 금사는 국가에서 편찬한 공식 정사이다. 즉 이성계 여진족 운운하는 이들은 이런 실제 기록에 집착하여 중세 북중국 유목사를 한국의 소유로 편입시키려는 소위 '환빠'들보다도 질이 떨어지는 역사왜곡세력인 셈이다.

5. 결론

따라서 여진족 설은 조선 왕조에 대한 어떤 감정적인 해석, 혹은 만주 지역에 대한 민족주의적 감상에 따른 해석에서 비롯된 낭설로 봐야 될 것이다. 사실은 고려의 역사에 대해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내리는 상상에 불과하다.



[1] 이전 문서에는 이의방이 직접 의종을 시해했다고 나왔지만 시해를 한 건 이의민이고 시해 명령을 이의방이 한 것이다.[2] 이것도 강가보다는 산지가 먼저다. 전근대의 기술력으로는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자연식 수로를 구성하는 쪽이 훨씬 난이도가 낮았고, 여기에 한반도의 극악한 하상계수 특성상 강가를 개간하려면 엄청난 제방 축조 및 배수시설 공사가 수반되어야 하며 그러고도 각종 수해 문제는 현대에도 완전히 해결되지 않고 있다. 현대인들의 편견과 달리 강변지역들 중에 현대 양수기의 도입 이전까지 쌀밥 먹기 힘들었던 곳들이 부지기수다.[3] 일부 부족들은 반유목을 하기도 했지만 여진족 전체가 유목민은 아니었다.[4] 요 역시 태종(요) 시기 후진이 말 안들으며 엇나가자 카이펑을 점령하고 후진을 멸망시키며 중원을 통치할 뻔 했으나, 결국 한인들의 결사적인 저항에 연운 16주 이북으로 물러난 전력이 있었다. 나름 정주민 국가인 발해를 흡수하고 거의 반세기 가량 국력을 키웠던 요가 이랬는데, 금은 여진 통합 이후 정강의 변까지 고작 13년 걸렸다.[5] 이린의 아내[6] 다만 저기서 묶였다는게 실제로 죄인처럼 포박당해서 올려보내진게 아니라 정중부 본인은 원하지 않았던 개경으로의 징병을 당했다는 의미의 관용어일거라는 의견도 있다. 하여간 적어도 강제징병을 당할 정도의 흙수저인 건 맞다.[7] 의성 김씨에서 문종조에 분적한 집안. 의성 김씨는 경순왕의 후손들.[8] 만약 역사왜곡을 동원했다고 가정해도 대대손손 여진족이던 사람이 갑자기 고려인을 참칭했다고 보기에는 근거가 너무나도 빈약하고, 어쩌다 이성계 가문에 여진족이 한두명 통혼으로 섞여 들어왔는데 나중에 은폐당한 정도라면 가능할 수도 있다.[9] 가정을 위해서 한 말일뿐 당연히 가능성이 거의 없는 말이다.[10] 이성계를 100% 여진족으로 간주해도 겨우 100년후의 6대손인 연산군과 중종이 이미 1%대고 그후로는 0%대로 진입한다. 조선왕조는 이후로 400년을 더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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