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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4-21 13:49:43

고종(대한제국)/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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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독살설3. 평양 천도계획4. 지맥을 끊어서 일본을 풍수로 공격한다?5. 상하이 독일은행 예치금 52만 마르크6. 집옥재7. 고려왕조의 고종과의 비교8. 군밤 야사9. 기타 여담

1. 개요

고종의 여담을 정리한 문서.

2. 독살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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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평양 천도계획

고종은 평양서경(西京)으로 삼아 한양에서 서경으로 천도하려는 구상이 있었던듯 보인다. 실제로 이를 위해 어진을 평양으로 옮기고 수도이전을 위한 자금을 위해 세액을 증대하며 평양에 어느정도 공사도 이루어졌다고 한다. 평양천도는 고종의 미군 20만 원병과 중국대륙 정벌 계획을 밝힌 이하영의 말에서도 고종의 의도로 확인 되는바이다. 풍경궁이 이 계획의 흔적이다. 고려 왕조에 이은 제2의 서경 천도 운동이라 할 수있다. 고려 왕조의 서경천도 역시도 고구려를 계승하여 북벌을 이루려는것과 큰 연관이 있었다.
고종, 왜 평양을 새 수도로 정했을까? 뉴스파워
"고종, 평양 천도 고려했을 수도" 연합뉴스

4. 지맥을 끊어서 일본을 풍수로 공격한다?

조선 말기의 시인이며 관리였던 황현은 1901년의 일로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기록해 남기고 있다. "지리산이 사흘을 우는데 그 소리가 수백 리까지 들렸다. 그 당시 안영중이라는 사람이 운봉 경계에서 지리산 산맥을 끊는 공사를 하고 있었다. 그에 따르면 지리산 산맥은 바다를 건너 왜국을 만들고 있었기 때문에 만약 산맥을 끊어 눌러주면 일본은 자멸할 것이라는 것이다. 임금은 이 말을 듣고 기이하게 생각하며 그를 '양남도시찰'로 임명하여 그 공사를 맡겼다. 그 지역 관찰사가 이를 중단시켜달라고 정부에 청했으니 무시하고 공사를 강행했는데...
한국과학사상사 박성래 292p 中

야사황현매천야록[1]에 따르면 풍수가인 안영중이라는 사람을 시켜 지리산의 맥을 끊어 풍수로 일본을 공격하려한 계획이 있었다고 한다. 다만 공사 도중에 산이 울어서 그만두었다고 하는데 아무래도 산을 파다보니 산사태가 일어나 공사를 그만두게되어 실패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당시 토목기술로는 산맥을 끊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며 고종실록이나 승정원일기에도 기록되어 있지 않다. 광산개발 등의 공사를 하다가 지진이 난 것을 민간에서 각색해 황현이 들었을 가능성이 높으며 매천야록은 아무래도 야사집인 만큼 허무맹랑한 이야기도 많아 신빙성이 떨어진다. 그냥 '당시 사람들 사이에는 이런 소문도 있었다'는 사회상을 보여주는 자료로 보는 것이 좋을 듯하다.

5. 상하이 독일은행 예치금 52만 마르크

조선시대에 국고금과 별개로 운용되어 국가의 회계에도 잡히지 않아서 그 누구도 간섭 할 수 없고 그 누구도 규모를 알 수 없었던 완전한 임금의 사유 재산인 내탕금은 고종의 시기에 내수사[2]가 내장원으로 승격되면서 급격히 증가하여 탁지부에서 관리하는 국고금에 비견될 정도로 어마어마 해졌다. 이렇게 된데는 명성황후와 민씨 척족도 한 몫 했다. 매관매직까지 하면서 긁어 모았다.[3]

이와 관련하여 유명한 사건이 상하이 독일 은행의 예치금 52만 마르크[4] 인데 당시 연금상태였던 고종이 헤이그 특사를 통하여 활동자금으로 사용하려 한 돈이었고 친한파였던 호머 헐버트를 통해 예치금을 찾으려 했으나 일본이 가짜 증서로 털어가 버렸다.

6. 집옥재

경복궁 깊숙한 곳에 있었던 고종의 서재인 집옥재가 2016년 민간에게 개방되었는데 도서관과 찻집 형태로 개조되어 변했다. 보유 서적은 4만권.

7. 고려왕조의 고종과의 비교

고종황제와 고려 고종 두 군주는 묘호고종(高宗)으로 같은데 우연의 일치로 능호까지 홍릉(洪陵)으로 서로 똑같다.

이외에도 암군이였다면 암군이였지, 둘다 명군으로 취급받지 못하고 험난한 생을 살다 갔으며, 실권을 갖지 못한 바지사장이었던 시절이 있었다는 점에서도 서로 비슷하다. 그나마 대한제국의 고종은 성인이 된 후 친정을 할 수 있었지만, 고려 쪽의 고종은 집권기 내내 무신정권의 꼭두각시였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또 우여곡절 끝에 왕위에 오른 것도 똑같은데, 고려 고종은 자신이 유년기이던 시절에 태자이던 아버지 강종이 최충헌에 의해 할아버지 명종이 폐위되었을때 최충헌에 의해 유배되었다가 고종의 5촌 당숙인 희종이 최충헌에 저항하다 폐위당하는 바람에 다시 왕으로 옹립되면서 이미 늙고 병든 아버지의 뒤를 이어 즉위했고, 대한제국의 고종 역시 헌종 이후 방계 왕족에서 왕위를 찾을 수밖에 엇던 조선의 현실 때문에 그에게 차례가 와서 왕위를 이어받은 것이 비슷하다.

그리고 재위 기간 동안 외세에 시달린 것은 비슷하나 고려 고종의 경우는 아예 몽골의 침공으로 나라와 국토가 수십년 동안 전부 초토화되고 다음 대에 원나라의 속령으로 전락하여[5] 약 100년 동안 원의 속령으로서 원나라의 온갖 수탈과 지배를 받게되었는데 고종 황제는 그나마 전쟁으로 온 국토가 수십년 간 초토화되지는 않았지만 똑같이 다음 대에 나라가 외세에 의해서 망하고야 말았다.

심지어 재위기간도 양측이 비슷하다. 조선의 고종은 대한제국까지 합쳐서 44년이고[6] 고려의 고종은 46년이다. 엄밀히는 고려의 고종이 재위기간이 2년 더 길다. 붕어 당시 나이도 세는 나이로는 둘 다 68세이기도 하다.

8. 군밤 야사

어디까지나 야사이다 보니 군밤이 호떡으로 바뀐 경우도 있다.

9. 기타 여담



[1] 광무 5년 신축(1901) '33. 안영중의 방술' 편에 수록[2] 내시들이 관리한다.[3] 참고로 명나라의 말제였던 숭정제내탕금을 지나치게 모아서 비판 받기도 한다. 하지만 숭정제는 이자성이 북경을 점령할 때쯤엔 돈이 안 나와서 약탈을 했다고 하는 만큼 내탕금은 국가를 위해 쓰였다고 보는 시각도 많은 반면 고종의 내탕금은 적재적소에 쓰일 새도 없이 나라가 망해버렸다.[4] 한화 3억 5천만원인데, 현재 가치는 더욱 높을것이다.[5] David O. Morgan(2007), 《The Mongols》; 김호동(2007), 《몽골제국과 고려》; (2016), 《아틀라스 중앙유라시아사》, p. 154~155; 森平雅彦(2008), "事元期高麗における在來王朝體制の保全問題", 《東北アジア硏究》 1; 고명수(2016) "고려 주재 다루가치의 置廢경위와 존재양태 -몽골의 고려정책 일 측면-", 《지역과 역사》 34.[6] 사실 이것도 1907년 일제에 의해 강제 퇴위 당해서 44년이지 사망년도인 1919년까지 자리에 있었다면 56년에 달하는 재위기간을 기록하게 되어 52년을 재위했던 영조의 기록을 넘었을 가능성이 다분하다. 만약 일제의 고종 독살설이 사실이 맞다고 가정한다면 재위 60년을 넘겼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7] 그런데 당시 인심이 박한 것은 사형까지는 아닐지라도 죄로 적용되는 경우가 많았다. 수원 지역에서는 인심이 각박한 자들을 잡아들여 매로 다스렸다는 기록도 있고 농부들끼리 돈이나 쌀을 빌려줄 때 이자를 지나치게 높게 잡으면 관에서 나서서 반강제로 깎는 경우도 있었다.[8] 맹꽁이 서당에서 나온 고종과 군밤 장수 이야기의 출처가 여기다. 그러나 고종실록과 승정원일기에서 일부러 기록하지 않았을 가능성도 있는데 세도정치기를 지나면서 기록 왜곡이 어느 정도 진행된 시기였다. 게다가 애시당초 승정원일기는 시행된 왕명을 기록한 사료이기 때문에 시행도 되지 않은 왕명인 군밤 장수 어명 기록이 당연히 승정원일기에 기록될 리가 없다. 고종실록은 고종이 죽고 난 다음에 조선총독부가 실질적으로 작성했다.[9] 정확히는 황율(黃栗).[10] 창덕궁 후원의 언덕을 동산(東山)이라고 하는데 여기에는 밤나무가 많아서 가을에는 산책 중에 길에 떨어진 밤을 주울 수 있다고 한다.[11] 본문의 한문에도 "투량뎨요뎨시무함"이라고 각 한자마다 당대 기준 한자음 표기를 한글로 써 두었다.[12] 족자를 자세히 보면 '요', '무함' 등의 고유 명사에는 줄이 그여 있다. 원문이 우종서(오른쪽부터의 세로쓰기)라 글자 오른쪽에 그여 있다.[13] 반면에 뒤에 자주 서 있던 순종은 키는 크지만 어리어리하게 생겼다고 좀 디스하고 있다.[14] 고종은 커피를 좋아해서 매일 마셨다. 이를 안 김홍륙이 고종이 마실 커피에 아편을 집어넣어 독살을 시도했으나 고종은 하도 커피를 많이 마셨기 때문에 커피에 익숙해서 맛이 이상한 것을 간파하고 바로 뱉어버렸다. 하지만 나이가 어렸던 황태자 시절의 순종은 이 커피를 마시고 피가 섞인 설사를 하는 등 고생했다. 이후 고종은 김홍륙을 교수형에 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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