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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14 16:38:13

수라상

1. 개요2. 형식
2.1. 양
3.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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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임금의 식사를 일컫는 말. 밥의 높임말인 진지의 왕실 한정 극존칭어다. 고려 말에 몽골어로 음식을 지칭하는 '슐라'에서 넘어왔다고 하며 이게 수라()로 변형되었다. 임금에게 올리는 식사를 올려놓는 상을 수라상이라고 한다.

중국어에서는 어선(御膳)이라고 부른다.

2. 형식

조선 시대 궁중에는 임금의 식사를 담당하는 기미나인과 수라상궁이 있었다. 왕이 수라를 드는 것을 "젓수다"라고 하였으며, 기미나인이나 수라상궁, 혹은 상황에 따라 동석한 환관은 음식에 독이 있는지를 확인하기 위해 항상 임금의 식사 전에 자신이 먼저 한 젓가락씩 먹어본 후, 이상이 없으면 왕에게 "젓수십시오."라고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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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임금은 하루에 총 5번의 수라를 받았는데, 이 중 12첩 정식[1]은 오전 10시와 오후 5시의 두 번이며, 이를 전후로 하여 아침은 초조반상(혹은 일어난 자리에서 바로 먹음을 뜻하는 자릿조반), 점심은 낮것상, 밤에는 야참이라 하여 국수나 미음, 약식 등 간단한 상을 차렸다. 즉, 정찬은 두 번이고 다른 세 번은 군것질의 개념이다. 수라역시 한정식 등과 같이 한 번에 모든 음식을 다 올린 채로 내놓는다(유럽식 예법으로 치면 프랑스식 서빙(service à la française) 방식[2]).

수라상 차림의 기본 이념은 '조선 팔도'에서 올라온 음식을 담는다는 것으로, 이는 왕이 식사중에도 나라를 살핀다는 의미 역시 담고 있다. 무슨 말인가 하면 각 지역의 특산물인 진상품으로, 그것도 재료가 겹치지 않도록 반찬을 만들었는데, 해당 반찬이 양이 줄거나 빠지거나 바뀜으로 해당 특산물이 나는 지역에 뭔가 문제(대표적으로 흉년)가 발생함을 왕에게 알리고 또한 살핀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즉 찬의 가짓 수가 준달지 극단적으로는 이나 미음이 올라와도 이상할 것이 없는 것이 수라상이다.

나라에 큰 흉년이 들거나 자연재해, 전쟁 등으로 나라 살림이 어려울 때는 임금이 자발적으로 수라상의 반찬 가짓수를 줄이는 감선(減膳), 혹은 고기를 올리지 않는 철선(撤膳)을 했다. 극단적일 때는 말 그대로 죽 한 그릇만 올리기도 했다. 이는 신하들에게도 암묵적인 압박이었는데, '나라가 어려워 나도 이렇게 먹으니 너희도 근검절약하며 지내라'라는 메시지를 우회적으로 전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임금이 아예 수라 자체를 거부한다면 이는 단순한 결식 수준이 아니라 단식투쟁이나 다름없는 사태라 궁궐과 조정 전체가 발칵 뒤집히곤 했다. 그래서 조선 임금의 단식은 일종의 파업이자 시위이기도 했다.[3] 비단 임금뿐만 아니라 임금의 어머니인 대비, 할머니인 대왕대비도 아들이나 손자에게 시위할 게 있으면 곡기를 끊고 버텼다. 다른 왕족도 마찬가지.

수라상은 크게 3개의 상을 쓴다. 주된 상인 대원반에는 흰수라(백미밥)와 국, 각종 장류와 김치, 반찬, 토구[4]를 올렸고 곁반에는 팥수라(팥밥과는 다르다. 팥을 넣은 게 아니라 팥을 끓인 물로 밥을 지어 붉은 색을 입힌 것이다.), 곰국, 기타 별식 등을 올렸다. 마지막으로 책상반에는 찜과 조치(찌개나 찜), 전골류를 올렸다. 물론 임금도 사람인지라 세부적인 반찬들의 종류는 임금의 개인적인 취향에 따라 바뀌기도 하였다. 가령 세종의 경우 고기 반찬이 항상 빠지지 않은 반면, 영조정조는 서너 가지의 채소 반찬으로 단촐하게 차린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연산군은 정력에 좋다고 한 민물장어말고기 육회를 즐겨먹었으며, 대한제국고종순종은 서양 요리를 먹기도 했다.

2.1.

그 양은 엄청나게 많아서 왕 혼자서 도저히 먹을 수 없는 양이었다. 조선 왕조 최고의 미식/대식가였던 세종대왕조차 반도 못 먹을 듯한 분량을 자랑한다. 이는 '물림상'이라고 해서 일부만 먹은 뒤 남은 반찬은 왕이 식사를 마친 뒤 밥만 새로 퍼서 왕 밑의 신하들이나 궁중 나인들이 먹었기 때문인데, 이 물림상은 신분의 차가 있는 식사 자리에서 아랫사람은 윗사람을 공경하여 귀한 재료를 아낌없이 차리고, 윗사람은 아랫사람을 배려하여 귀한 음식을 적당히 남겨 모두가 먹을 수 있게 베푸는 상호 배려의 문화로 신분 차와 식단 차가 확실한 노비를 부리는 관아와 상류층 양반가에도 비슷한 풍습을 시행하였고 이에 따라 개화기 근처까지 조선의 평균 식사 시간은 몇 시간을 넘나들곤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현대인의 기준에서 좀 이상한 풍습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윗사람들은 반찬도 아랫사람들을 생각해서 손을 최대한 깨끗하게 댔으며, 흔히 묘사되는 것과 달리 임금도 수라상의 찬을 먹을 때마다 각 접시에 수시로 수저를 넣는 것이 아니라 별도의 수저로 개인용 접시에 일일이 덜고 나서 자신의 수저로 먹었다는 기록이 있다. 지금도 집에서 밥 먹을 땐 락앤락 같은 용기에 반찬을 담고 식사가 끝나면 용기 그대로 냉장고에 보관했다가 도로 꺼 내먹기도 하는데 당대가 세균이란 개념과 존재도 밝혀져 있지 않았던 시대임을 감안하면 꽤나 위생적이었다.

이는 비단 조선만 그랬던 것은 아니라 과거 신라 태종 무열왕의 식사 기록에서도 수라상의 엄청난 양에 대한 기록이 나오고,[5] 아랫사람에게 음식을 남겨주는 것은 유럽에서도 비슷한 풍습이 있어 빵을 요리를 담는 그릇으로 쓰고, 왕이 요리를 먹은 뒤 남은 고깃국물 머금은 일회용 식기는 영주가 가난한 영민들에게 베풀었다.

청나라에서는 대륙 스케일답게 매일같이 수라상에 48가지 요리가 나왔는데, 양이 위낙 푸짐하다보니 황실뿐만 아니라 신하, 환관들과 궁녀, 심지어 시종들까지 먹고도 남는 경우가 종종 있어서 아예 남는 음식을 식당에 재판매하였다. 상태가 좋은 것은 음식점에서 재조리했고, 상태가 별로인 것은 무슨 영양죽이나 꿀꿀이죽 마냥 한솥에 끓여 팔았다.[6] 또한 청나라의 수라상은 한 가지 음식에 세 번까지만 젓가락질하는 것이 예법이었다. 황제의 식사 취향이 알려지면 독살에 악용될 수도 있어서 그랬다는데, 수라상이라는 게 반찬 하나 약간 덜 먹는다고 양이 모자랄 일이 없어서 가능한 일이었다. 물론 청나라도 조선처럼 환관이나 상궁이 기미를 했다. 반대로 황제가 한번도 손에 대지 않았던 음식은 황궁에서 재료값을 아끼기 위해서 상하지 않으면 재가열해서 다음 수라상에 올려놓기도 했다고 한다. 근데 이걸 환관과 조리사들이 몰래 처리한 다음 남는 돈을 착복하는 경우도 있었다나..[7]

현대인에게 반찬 12가지는 "왕이 먹는 반찬치고는 종류가 좀 적은 것 아닌가?"는 생각이 들 수도 있는데, 이건 현대인이 차려먹는 밥상에 원래 들어가는 반찬은 첩수만 늘었지, 질이 떨어지기 때문에 드는 착각이다. 사실 현대인의 식탁에 접시나 그릇 12가지를 올리는 것도 쉽지 않지만, 원래 전통 반상은 첩수가 올라가면 양만 느는게 아니라 질도 하나하나가 서양으로 치면 전채 요리 급으로 돌변하며, 수라상 급까지 오면 반찬 하나하나가 대단한 수준으로 바뀐다.

현대는 기술의 발달로 농업 생산량 자체가 늘어나서 대량생산을 통해 단가가 낮아졌고 정 부족한 식자재는 수입할 수 있어서 단가를 더욱 낮출 수 있지만 조선시대는 최소가 유기농 국산 식자재고 그 때 기술로 양식이 안 되면 자연산으로 때워야 했던 시대다. 현대에서도 저런 좋은 재료로 한상 차리려면 돈 꽤나 드는데, 심지어 식자재의 수급과 관리, 조리과정 모두 현대처럼 기계화, 냉장 보존이 불비했던 당대에는 전 과정이 수작업의 연속이였다. 즉 현대 기준으로도 사치스러운 상차림임은 분명하며, 하물며 평균 소득이 더 낮은 그 당시 기준에선 정말 왕의 품격에 걸맞은 상차림이 아닐 수 없는 셈.

게다가 12첩이란 각기 다른 음식을 놓는 그릇이 12개라서가 아니라 밥, 국, 찌개, 김치, 찜, 전골, 장류는 첩수에 들어가지 않기 때문에 그것들을 제외한 반찬만 12가지라는 뜻이다. 근데 이 반찬 분량과는 별개로 밥의 양은 막걸리를 떠먹을 듯한 국그릇 크기의 밥그릇에 꽉 채웠다. 당시 고기가 부족해서 3첩, 5첩상이 소박해 보이는 것일 뿐, 만약 당시에 고기가 지금처럼 흔했다면 5첩상만 와도 스테이크가 국이나 김치처럼 기본 반찬으로 날아다니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8] 조선시대 왕의 업무량은 정말 무지막지한 수준이었기 때문에 이 정도로 먹지 않으면 버틸 수가 없었다고 한다. 단, 한민족의 식사량 문서에 나와있듯 일반 백성들도 대식하는 습관[9]이 있었으므로 호화로운 것이 맞지만 그리 특별할 건 없었다. 격무에 시달렸다고 해도 업무상의 격무지 운동선수나 군인처럼 몸을 많이 움직여야 하는 일도 아니었고.[10]

3. 여담

100% 궁녀들이 차렸다는 오해는 구한말~일제강점기가 되 면서 남자 숙수들이 점점 궁을 떠나 민간 식당에 취업하거나 직접 식당을 차려 궁에 남아있던 궁녀들이 어쩔 수 없이 수라상을 전담하게 되고 이 궁녀들이 해방 이후 궁중한식을 전수하게 되면서 생긴 오류였다고 하며,[11] 궁녀가 아니라 남자 요리사들이 실제로 음식을 담당했다는 사실은, 드라마 대장금이 방영될 당시에도 많은 전문가들에게 지적되었던 부분들이다. 뿐만아니라 풍속화 '선묘조제재경수연도'에 나오는 한 고관의 잔칫집 풍경을 보면 민가에서도 대부분 남성들이 요리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
또한 여기에 내시부의 수장인 상선(판내시부사)이 수라상을 담당했는데, 이는 수라상을 비롯한 왕실의 음식 준비를 총감독 및 책임지는 구조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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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최근 연구결과에 따르면 12첩 반상은 대한제국 수립 후 곤룡포, 면류관, 곤복 등을 국왕용에서 황제용으로 승격할 때 함께 승격된 것이고, 대한제국 수립 전에는 9첩 반상을 수라상으로 받았다는 연구결과가 나왔다.[2] 반대로 음식이 나오는 족족 서빙하는 것은 러시아식 서빙(service à la russe)이라고 하며, 흔히 생각하는 풀코스 요리나 일본의 가이세키(会席)가 이런 방식으로 나온다.[3] 유명한 왕의 단식 기록으로는 폐비 윤씨의 사연을 들은 연산군이 단식을 한 사례가 있다. 또한 정조도 이복동생 은언군(철종의 할아버지)을 살리기 위해 단식을 한 적이 있다. 이건 고려 시대에도 의종이 신하들에게 단식투쟁을 한 적이 있을 정도로 아주 유서 깊은 전통이다. 다만 의종의 단식투쟁은 뭔가 대단한 일 때문은 아니고, 최측근 환관이자 간신배정함에게 그전까지 문관에게만 내리던 합문지후 벼슬을 내리려 해서 대간들의 반대에 직면하자 이거 강행하겠다고 떼쓴 것...[4] 생선의 가시나 고기의 뼈 등 음식을 먹은 뒤 생긴 이물질을 담는 그릇을 말한다.[5] 하루에 쌀이 여섯 말, 술이 여섯 말, 그리고 꿩이 열 마리 분량이었다고 한다. 인간이 혼자서는 물리적으로 먹을 수 없는 양이고, 애초 전제가 물림상으로 하사하기 위해 일부러 많이 차리는 것이라 남아서 버릴 일이 없었다.[6] 지금 기준으로 보면 위생상으로 영 좋지 않고, 영양죽의 경우에는 식중독 위험도가 높아서 함부로 먹으면 안될 음식이지만, 그래도 수양제가 수행 도중에 자기에게 올려진 음식을 먹고 남은 것들을 그냥 버리기만 한 것보다는 알뜰하기는 했다.[7] 이것은 특히 사치로 유명한 서태후의 경우라서 다른 황제들이 이렇게 먹었는지는 확실치 않다. 물론 반찬 재판매나 영양죽으로 만드는 건 다른 황제들의 경우에도 그랬을 걸로 보인다.[8] 물론 이론적으론 3첩에서도 고기가 포함되는 것은 가능했는데, 국이 고기국이거나, 3첩에서의 반찬중 하나인 구이나 조림이 고기반찬인 경우도 가능했기 때문.[9] 우리가 지금 흔히 쓰는 크기의 공기가 정립된 건 60~70년대 혼분식 장려 운동구자춘 서울특별시장이 공기 규격화 정책을 시행한 후부터다.[10] 수라상이 이렇게 양이 많고 고열량인데다가 왕들이 운동을 할 여유가 적다보니까 조선의 왕들은 성인병이 많았다고 한다. 반대로 영조가 장수한 이유 중 하나가 검소한 수라상도 있었다고 한다.[11] 그래서 궁녀들을 통하여 궁중요리가 전수된 것은 사실이다. 자세한 것은 한희순, 황혜성 문서로.[12] 조선시대때는 우유가 매우 귀했다. 한반도의 토종 소들은 우유를 위해 개량되지 않아 우유도 적게 주는데다, 우유를 짜도 오래 보관할 방법이 없었다. 거기다 송아지가 먹야할 우유를 뺏어 먹는건 옳지 않다는 풍습도 있어서 우유를 먹을 수 있는 기회는 엄청 귀해졌다. 이때문에 우유나 우유로 만든 타락죽은 왕족이나 높은 벼슬을 가진 양반이나 좀 먹어 볼수 있었다.[13] 수박의 품종개량이 이루어진 현대에 와서는 무등산 수박이 크기와 값만 비싸고 다른수박보다 나을것없는 당도를 지닌 실속없는 수박이라는 인식이 생겨났지만, 수박 품종 개량이 안되던 시절에는 무등산 수박이 최고로 시원하고 맛있는 수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