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삼[1] | 모한다스 카람찬드 간디[2] |
hunger strike[3]
1. 개요
단식으로 하는 시위를 말한다. 보통은 물은 마시되 다른 음식은 일절 입에 대지 않고 특정한 사안에 대해 시위하는 것을 말한다. 조금 더 정확히 말하자면 물과 함께 소금이나 간장을 조금씩 섭취하며 지낸다. 왜냐하면 물은 물론 나트륨이 공급되지 않으면 사람의 몸이 며칠도 버틸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일부 예외를 제외하면 인간은 공기 없이 3분, 온기 없이 3시간, 물 없이 3일, 음식 없이 3주 밖에 살지 못한다고 한다. 그래서 그 이후에도 정상인과 동일하게 행동할 수 있다면 진위성을 의심받기도 한다.정상적인 생활을 지속해 온 사람이라면 단 3일만 음식물을 입에 대지 않아도 건강이 위태로워진다. 사회에서 존경받거나 인지도가 있는 사람일수록 단식투쟁을 하면 여파가 크며 일반 서민이 단식투쟁을 했더라도 그 사람이 요구하는 것이 어느 정도 합리적인 요구라면 국가가 그에 반박조차 없이 무반응으로 대했을 때 '국가가 저 사람 말을 듣지도 않아 저 사람을 죽였다'는 이미지가 생기게 된다.
물론 단식투쟁을 하다가 진짜로 아사한(굶어죽은) 사람도 있고 아사하기 직전 투쟁을 철회하거나 요구가 받아들여짐으로써 겨우겨우 살아난 사람들도 있다. 예에서 알 수 있듯이 매우 극단적인 시위 방법이기 때문에 웬만큼 중대한 사항이 아닌 이상 잘 실행하지는 않는 투쟁이다. 단식 투쟁이라고는 해도 본질적으로는 자해/자살 시위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는 인식이 확산된 영항도 크다. 단식투쟁을 선택하게 된 과정과 요구사항이 대중들에게 설득력 있게 다가오지 않는다면 실패한 투쟁이 될 뿐이다. 즉, 단식투쟁은 그 끝과 한계가 명확한 투쟁 방식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강력한 의지를 나타낼 방법이 별로 없는 약자나 소외된 사람들, 종교적, 정치적 소수자, 어느 이유로든 자유가 구속된 사람들이 행할 수 있는 강력한 투쟁 방식 중 하나이고 실제로 어떠한 사안으로 분쟁이 일어났을 때 누구 한 명이 단식투쟁에 들어가면 바로 언론의 주목을 받게 된다. 단식 기간이 길어질수록 그 효과는 커진다.
이렇게 단식투쟁은 자신의 생명권을 걸고 요구사항을 관철시키기 위한 투쟁행위이기 때문에 죽는 것 자체가 목적이 아닌 이상 중단 조건이 명확한 편이다. 조건이 명확해야 투쟁의 목적도 확실해지거니와 권력자가 조건에 대해 협의할 여지라도 생기기 때문이다.[4] 반대로 단식의 조건이 상식적으로 터무니없거나 두루뭉술한 경우는 단식투쟁으로 받은 주목을 다른 용도로 이용할 목적인 경우가 많다. 아니면 죽는 것 자체가 수단 겸 목적이거나.
이렇듯 단식투쟁엔 목숨을 건 투쟁[5]이란 이미지가 있어, 목숨을 걸 수준이 아니라고 여겨지는 사안에 대한 단식투쟁[6]은 조롱의 대상이 되는 경우도 있다.
2. 역사
전근대에도 간혹 있었지만 그때는 평등사회도 아닐 뿐더러 먹을 게 부족하다보니 평범한 사람이 일부러 단식을 한다는 개념 자체가 없었고 단식투쟁을 한다는 건 그냥 혼자 조용히 굶어죽을 테니 아무도 신경쓰지 말라는 의미와 상통했다. 그러다보니 주로 시전자는 왕이나 성직자 등 단식으로 건강을 해치거나 사망에 이르는 게 사회적 영향력이 컸던 사람들이었다.고대 아일랜드에는 다른 사람과의 분쟁이 있을 때 억울함을 알리기 위해 그 사람 집 앞에서 단식하는 풍습이 있었다. 고대 중국에서는 백이와 숙제가 주나라가 역성혁명을 일으키는 것을 보고는 스스로 곡기를 끊고 죽은 일화가 유명하다.[7] 한국 역사에도 종종 왕의 폐위에 반대해 식음을 전폐하다가 사망했다는 둥 충격을 받아 식음을 전폐하다가 사망했다는 둥의 기록이 많이 나오는데 조선의 왕, 왕비, 대비들이 정치적 싸움의 방법으로 수라와 탕약을 거부하는 단식을 행한 기록이 종종 나온다. 특히 신하들로선 왕/왕비의 건강을 해치게 만드는 건 어마어마한 불충으로 간주되기 때문에 매우 효과적인 방법이었다.
또한 부당한 권력에 구금된 수감자들의 투쟁방식이기도 했다. 재소자들은 신체를 구금당한, 즉 자유를 빼앗긴 몸이기 때문에 최종적으로 남은 자유가 신체 유지를 위한 행동밖에 없기 때문에 이를 인질로 삼아 인질극을 벌이는 것이다. 기본적으로 구금이란 살아서 자유를 박탈하는 것을 전제로 하기 때문에 처벌의 대상이 살아있지 않으면 성립하지 않는다. 즉, 수감자들은 자신의 생존을 포기함으로서, 그리고 그 생존을 포기하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권력의 비인도적 행위[8]라는 타격을 입히기 위해 하는 것이다.
물론 보복도 만만치 않았는데 교도소 측은 이들의 단식투쟁을 저지키 위해 묽은 죽을 담은 호스를 목구멍에 마구잡이로 꽂아 '강제급식'을 실시했다. 대표적인 예로 1909~1913년까지 영국 여성참정권 운동가들이 옥중에서 단식투쟁을 하다 강제급식을 당했고 아일랜드 독립운동가 토마스 애쉬도 더블린 감옥에서 투쟁 도중 강제급식으로 숨졌으며 한국에서도 비전향 장기수 손윤규, 김용성, 변형만 등과 같이 단식투쟁을 하다 강제 급식으로 숨을 거둔 사례도 있다. 이러한 행위는 뉘른베르크 선언 및 헬싱키 선언에서 명시된 인간의 자율성을 침해하는 행위로 규정되어 1975년 '도쿄 선언'에서 금지하고 있다.
1981년 아일랜드 단식투쟁[9]은 위에서 언급한 사례 중 최대규모로 이루어진 사례로, 사망은 59-73일 사이[10]에 나타났기 때문에 대략 60일이 지나면 사람이 죽기 시작한다[11]는 것을 알 수 있었고, 이 사례를 바탕으로 의학계에서는 단식의 정의를 단식 후 공복통이 사라지는 72시간부터 사망에 이를 수 있는 72일(인간이 가장 오래 견딘 기록)까지로 정의하게 되었다. 단식 후 72시간이 단식으로 계산되는 첫날인 이유는 이 시점이 되어야 체내에 저장된 모든 당이 소모되기 때문이다.
현대적인 의미의 단식 투쟁은 녹색혁명으로 인류가 만성 식량 부족으로부터 탈피하고 인권과 평등이라는 권리가 확실하게 자리잡은 이후부터, 즉 국가 입장에서 국민이 한 명이라도 아사하게 되면 곤란하게 된 시점부터 본격적으로 세계 곳곳에서 써먹기 시작한 투쟁 방식이다. 대표적인 사례로 인도의 성웅 마하트마 간디는 75세의 나이로 옥중에서 3주간이나 단식을 한 바 있다.
3. 예외: 수분
단식을 두고 식음(食飮)을 전폐한다는 표현을 자주 쓰지만 실제로는 물은 마시므로 식음에서 음(飮)이 빠진다. 물을 허용하는 이유는 0kcal며 투쟁 목적이 이슈화가 되기도 전에 죽어 버리는 것을 방지하기 위함이다. 물이 없으면 인간의 생존시간은 극단적으로 짧아져 1주일도 버티기 힘들다.같은 이유로 소금도 허용하곤 한다. 단식의 의미를 200kcal 이하 섭취로 느슨하게 규정하며 장기 투쟁을 벌이는 경우 미음(米飮) 같은 걸 마시기도 한다.
4. 기한
보통 단식은 7일을 넘기면 건강에 적신호가 오고 10~14일을 넘기면 정말로 아사할 수 있으므로 매우 신중해야 하는 선택이다. 인체의 한계점이 72일, 기적을 바란다고 해도 75일[12]이 확인된 한계[13]이기 때문에 그 기간은 명확히 72-72법칙에 의해 정해지고 있으며, 후술된 단식에 따른 건강상의 문제가 심각하기 때문에 장기간 단식이 행해지는 상황에서는 여차하면 병원으로 이송할 수 있도록 준비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때문에 일반적인 한계점인 3주 경과 후에는 투쟁자가 쓰러져 병원에 실려가는 것으로 투쟁이 마무리되거나 잠정적으로 일주일 전후를 기한으로 잡고 경과 후에는 중단 후 대안을 모색하는 식으로 전개되곤 한다.혹은 입으로 식사를 하지 않되 물이나 수액 등으로 영양을 공급해가면서 투쟁을 이어가는 경우도 있다. 의학적인 단식의 기준은 체내 포도당을 모두 사용한 72시간 뒤 신체가 기아상태를 인지하고 체내의 케톤기를 분해하려 하는 시점부터가 단식이 되기 때문에 의학적으로는 단식으로 보기 어렵다. 하지만 의학적으로나 신체적으로 기아상태를 인지하지 못해 시행자의 목숨에 지장이 없다고 해도, 배 속이 비어있는 상황은 변하지 않기 때문에 공복통이 계속되고 소화기관이 쇠약해져가며 영양불균형으로 인해 무너지는 건강과 이로 인한 질병 및 후유증 문제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시위방식의 하나로서는 충분히 의미가 있으며 오히려 장기간에 걸쳐 수척해져가는 모습이 실시간으로 중계되기 때문에 초장기 투쟁의 수단으로 쓰이는 경우도 있다. 가장 유명한 사례가 인도의 인권 운동가 차누 샤르밀라로, 코에 낀 영양 튜브로 영양을 공급받으며 무려 16년간 단식 투쟁을 벌였다.
릴레이 단식 이라고 해서 여러명이 돌아가면서 단식하는 경우도 있다. 주로 장기 단식하는 사람에 대한 동조의 의미 혹은 초장기 투쟁의 한 방법으로 사용된다.
5. 건강
의학적으로 보면 오랜 단식은 특히 칼슘 손실을 가중시켜 뼈와 치아에 치명적으로, 실제로 단식투쟁을 '제대로' 한 사람들 중에는 그냥 넘어져도 쉽게 골절상을 입거나 치아가 우수수 빠지는 등 상당한 후유증을 안고 사는 이들이 많다. 꼭 단식투쟁이 아니더라도 강제수용소 등 영양 조건이 매우 불량한 곳에서 오랫동안 생활한 사람들 중에는 출소 후에도 골다공증이나 치주질환 등으로 고생하는 이들이 상당히 많다. 황석영은 무허가 방북으로 인해 수감 생활을 하던 중 처우 개선을 요구하며 단식투쟁을 했다고 하는데 그 결과 성한 치아가 거의 없다고 한다.단식은 굶는 것도 문제지만 굶고 나서도 문제다. 하다못해 비근한 예로 고작 3~4일 단식투쟁을 벌인 김장훈이 콘서트 진행을 위해 단식을 중단하고 치킨 2조각을 먹었다가 탈이 났을 정도이다. 오랜 단식은 체내 신체대사에 문제를 반드시 일으키는데, 신체대사 체계가 오랜 기아상태에 적응하도록 변화되므로 갑자기 과량의 음식을 섭취하게 되면 이러한 신체대사에 이상이 생겨, 심장에 문제가 발생해 죽기 때문이다. 예로부터 오랫동안 굶은 사람에게 식사를 챙겨줄 때에는 묽은 죽부터 시작해서 단계적으로 평범한 식사로 향하는 법이었고, 기아에 시달린 사람에게 진수성찬을 차려주었다가 탈이 나서 죽었다는 기록은 동서고금을 통틀어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조선왕조실록에도 너무 굶은 사람에게 갑자기 밥을 주면 죽으니 죽부터 천천히 주라는 말이 나오며, 원해서 한 단식은 아니긴 하지만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후 수용소의 포로들을 발견한 군인 중 일부는 너무 야윈 포로들이 안쓰러웠는지 빵이나 고기 같은 것들을 마구 제공해서 죽은 사람도 많았다. 이러한 장기간의 단식에 대한 의학/과학적 연구는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 당시에 이르러서였다고 한다.
심지어 교정기관 측도 만에 하나 있을 옥중 단식투쟁으로 인한 불상사를 막기 위해 형집행법 40조 1~2항에 따라 먼저 의무관에게 관찰, 조언, 설득을 하도록 하고 수용자가 이를 거부할 시 의무관이 포도당 링거 등으로 적절한 영양보급 조치를 취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1년 이상을 단식해 건강이 좋아진 사람도 있다며 예를 드는 경우도 있으나 이 경우에는 비만인 등으로 몸에 영양이 충분했거나 의료진의 관리가 있는 등 건강관리 목적으로 행해지기 때문에 가능한 이야기이고, 스스로 사망을 각오하는 단식 투쟁과 비교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6. 사례
6.1. 정치인
- 강기갑: 농민운동가 출신 국회의원으로 농업의 해외 개방 정책을 저지하기 위한 단식투쟁을 수차례 진행했다. 가장 유명한 것은 민주노동당 소속 초선 의원 때인 2005년 쌀 시장 개방 저지를 위해 무려 29일간 단식을 이어간 것인데 민노당 의원단과 농민단체의 만류로 단식을 접었다. 현재까지 기록된 정치인 단식 중 최장기간 단식 사례다. 물론 그의 단식에도 쌀 개방 협상을 위한 국회 비준안은 통과됐다.
- 김대중
- 1977년 진주교도소에서 면회 및 변호사 접견 제한에 항의하며 6일간의 단식 투쟁을 하였다.
- 1990년에는 의원내각제 개헌 반대와 지방자치제 실현을 주장하며 13일간의 단식투쟁을 벌였고, 그 결과 1991년 지방선거가 치러지게 되었다.해당기사
- 김성태: 2018년 5월 3일 조건 없는 드루킹 특검을 요구하며 단식을 선언하였다. 단식 도중 불만을 품은 30대에게 폭행을 당하고 병원을 수차례 들락날락거렸다. 결국 의사의 조언과 당내의견을 받아들여 9일만에 단식을 중단했다. 드루킹 특검은 결국 이뤄지면서 소기의 성과는 달성했지만 본인은 단식을 쉽게 생각했는지 시작한 지 며칠도 안가 힘들다는 투를 보였다고...
- 김영삼: 1983년 5월 전두환에 의해 가택연금 당시 민주화 5개항(언론통제 전면 해제, 정치범 석방, 해직 인사 복직, 정치활동 규제 해제,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요구하며 무려 23일간 단식을 이어가다가 주변의 설득으로 중단하였다. 자세한 내용은 김영삼 단식 농성 사건 문서 참조. 관련기사
- 김진태: 제8회 전국동시지방선거 국민의힘 강원도지사 후보 공천 심사에서 배제[14]되자 이에 반발하여 의사당 앞에서 공개 단식투쟁을 했다. 공천위가 5.18과 불교 관련 막말에 대한 대국민 사과를 하라는 조건으로 황상무와 김진태의 맞경선을 진행하기로 결정하자 대국민 사과 후 4일 만에 단식을 중단했다. 결국 경선에서 승리해 단식의 효과는 보았고 결국 강원도지사에까지 당선[15]되었다.
- 모한다스 카람찬드 간디: 인도의 독립을 영국에 청원하기 위해 단식하였으며 말년에는 힌두교vs이슬람 갈등으로 인도에서 갈등을 빚던 파키스탄의 분리를 반대하며 대립을 막기 위해 단식투쟁을 벌였다. 두번째 단식 투쟁은 진행 도중 힌두교 급진 청년에게 살해당하면서 죽음으로 끝을 맺고 말았다.
- 우상호: 1987년 6월 항쟁 당시 4.13 호헌조치에 항의하는 의미로 단식과 삭발 중 골라야 했는데 같이 투쟁하던 배우 우현이 자신은 못 굶는다고 해서 우현은 삭발을, 자신은 단식을 했다고 하였다.
- 이재명
- 성남시장 재임 시절이던 2016년 6월 중앙정부의 지방재정 개편법에 반대해 단식투쟁을 한 바 있다. 이후 이재명 시장은 "당시 김종인 대표가 당 차원에서 이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명분을 주셨기 때문에 자기가 단식을 중단할 수 있었다"며 "단식투쟁은 출구전략도 중요하다"는 말을 하기도 했다.
- 더불어민주당 대표로 재임하던 2023년 8월 31일 당대표 취임 1주년 기자간담회에서 정부에 전면적 국정 쇄신을 요구하며 단식에 돌입[16]하였다. 처음에는 국회 앞 농성장에서 단식투쟁을 진행했지만 2023년 9월 13일 당대표 집무실로 장소를 옮겨서 단식투쟁을 진행하였다. 단식 19일차에 급격한 혈당저하로 여의도 성모병원으로 긴급후송되었고, 이런 와중에 검찰은 백현동 특혜 및 쌍방울 대북송금 의혹과 관련하여 동일(同日) 오전 9시경에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에게 구속영장을 청구하였다. 그럼에도 단식투쟁을 지속하다 단식투쟁 24일차인 2023년 9월 23일, 건강악화와 영장실질심사 준비를 사유로 단식투쟁을 중단했고 영장은 기각됐다.
- 이정미
- 2018년 정의당 대표로서 연동형 비례대표제 개혁을 위해 9일간 단식했다.
- 2023년 6월 26일부터 7월 16일까지 21일간 일본의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에 반대하며 단식했다.
- 이정현: 2016년 10월 정세균 국회의장의 사퇴를 촉구하며 단식을 진행한 적이 있는데, 재미있는 점은 이때 단식을 한 장소가 국회 당대표실로 문을 걸어 잠그고 누워서 하는 비공개 단식이었다는 점이다. 다만 단식과정은 촬영했다고 한다. 단식 초기부터 최순실 관련해 당시 코너에 몰려있던 박근혜 대통령을 지키기 위해 국정감사를 회피하려는 꼼수용 단식 아니냔 부정적인 시선을 받았고, 비공개 단식 논란으로 더 동력을 잃으면서 단식은 본인의 건강 문제라는 명분으로 7일만에 종료되었다. 이로 인해 1주일간 국정감사는 피했다.
- 이준석 등 원외 소장파: 아이러니하게도 박근혜-최순실 게이트가 터진 2016년 11월, 박근혜 대통령을 싸고 도는 듯한 이정현 새누리당 대표의 태도에 화가 난 이준석 전 비대위원, 김상민 전 국회의원 등 원외 새누리당 당협위원장들이 이정현 대표의 사퇴를 요구하며 국회 당대표실 바로 옆에서 단식농성을 했다. 결국 이정현 대표가 12월 당 대표를 사임하면서 농성은 일단락되었다.
- 자유한국당 의원들: 2019년 1월 25일 조해주 중앙선관위원 임명에 반발하며 '좌파독재 및 초권력형 비리 규탄 릴레이 단식 계획'이라고 명명한 계획을 내놓았는데 놀랍게도 오전조, 오후조를 짜서 5시간 반씩 안먹는 방식이었다. 이것은 굶는것도아니고 그냥 식사 간격이 5시간 반 뿐인것이라 조롱을 당하였다. # 결국 빗발치는 조롱에 이름을 단식에서 릴레이 농성으로 바꾸었고, 그나마도 얼마 못 가 슬며시 그만두면서 끝났다.
- 전두환: 5.18 특별법으로 수감된 것에 항의하는 의미로 감옥에서 단식투쟁을 했는데 23일간 지속되어서 당시 교도소 측은 강제급식까지 생각했다고 한다. 결국 쓰러져 병원에 이송되면서 단식을 중단하게 되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송 후 죽을 먹었는데 식중독에 걸려버려서 한동안 죽과 보리차로 영양 공급을 해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고. 본의 아니게 단식 기간이 연장되었던 셈이다.
- 정태근: 2011년 한미 FTA 합의 비준을 요구하며 단식을 하였다.
- 조원진: 2017년 10월 박근혜 전 대통령의 구속 연장에 반대하며 단식투쟁에 들어갔으나, 결국 구속 연장이 결정되었다. 총 14일 만에 포기했다.
- 천정배: 2007년 문성현 민노당 대표와 함께 2007년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비준을 반대하며 25일간 단식을 하였다.
- 최병렬: 당시 한나라당 대표로 2003년 11월 26일부터 12월 5일, 총 열흘간 단식을 벌였다. 참여정부 인사의 비리 의혹에 대해 특검을 하자고 주장했으나, 대통령이 일부 사항에 대해 거부권을 행사하자 이에 반발해 단식 투쟁을 벌였다. 도중에 곰국이나 죽을 먹었다는 보도도 있었지만 쌀뜨물이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사실, 단식농성을 할 때 물까지 안 마시는 것은 아니다.
- 황교안: 2019년 11월 말 자유한국당의 대표로서 영수회담을 제안하며 지소미아 유지,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 설치 반대, 선거법 개정안 반대 등을 목표로 단식 농성을 벌였다.[17] 지소미아 부분은 단식 3일째 날 한국과 일본이 극적으로 합의하면서 "조건부 종료유예"라는 이름으로 사실상 이루어지게 되었지만 모든 제안이 이루어진 것은 아니기 때문에# 단식을 이어갔으나, 단식 8일차에 건강이 급격히 악화되어 의식을 잃고 병원으로 후송#되면서 투쟁이 끝났다. 황교안 대표는 단식 투쟁에 대해 잘 몰랐는지 본 문서의 다른 사례들의 대부분과는 달리 소금물조차 거부하였는데, 수분 흡수가 부족하면 누구도 일주일을 못 버티고 특히 추위 속에서는 훨씬 더 빨리 한계를 맞기 때문에 지극히 자연스러운 결과였다.
- 우원식: 2023년 6월 26일부터 15일간 일본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에 반대하며 단식농성을 벌였다.
6.2. 비정치인
- 강의석: 사립학교 종교 교육에 반대하여 46일 동안 단식 투쟁을 벌였다. 그에 대한 호불호와는 별개로 진정한 단식 투쟁 사례로서 자주 언급되는 인물인데, 당시 사진을 보면 정말로 뼈와 가죽만 남아서 해골 직전 상태가 된 것을 볼 수 있다.#
- 김건중: 동국대학교 부총학생회장으로 종단 개입을 반대하면서 단식 투쟁을 진행했다. 김건중 부총학생회장은 단식투쟁 50일째 되는 2015년 12월 3일에 병원으로 이송되었다.
- 세월호 참사 유가족들: 세월호 특별법이 지지부진하자, 제정을 위해 단식투쟁을 했다. 특히 이들 중 가장 유명한 김영오는 무려 46일 간이나 단식을 이어갔다. 중단 및 입원했을 때, 의사들도 46일이나 단식한 사람의 데이터가 거의 없어 치료와 회복시키는 데에 애를 먹을 정도였다고. 이 과정에서 초코바나 효소 음료 등 섭취 의혹이 있어 이를 두고 세월호 특별법에 반대하는 이들이 유가족들 근처에서 2014년 광화문 폭식농성을 벌여 조롱하는 사건이 있기도 했다. 뉴데일리 기사에 따르면 '장기단식자에게 예외적으로 보조식품을 제공'할 목적의 식품이라고 하는데, 단식을 하면 반드시 몸이 망가지기 때문에 영양 섭취를 하면 반드시 티가 나므로 눈속임으로 투쟁을 벌인다는 것은 믿기 어려운 주장이다.상술했듯 정상적인 식생활을 해온 일반인은 3일이면 건강에 적신호가 오기 때문에 투쟁에 익숙하지 않은 일반인인 유가족들을 위해 비상 영양 공급 수단을 마련해둔 것이라고 하면 부자연스러운 일은 아니다.
- 신재용: 서울대학교 총학생회장. 비위사실이 확인되었음에도 합당한 징계가 안 내려진, 권력형 성폭력을 저지른 H교수를 파면하라는 요구를 하며 단식 투쟁을 진행했다.
- 양윤모: 제주 강정의 제주 해군기지 건설에 반대하며 투쟁하다 구속된 뒤 옥중에서 단식투쟁을 벌였다.
- 조슈아 웡: 우산혁명 때 5일간 단식했다. 당시 18세의 어린 나이였고(그래서 당시 정치인이 아닌 학생 신분이었다) 안 그래도 마른 몸매였기에 부담이 심해 결국 의료진의 건강 우려로 중단했다.
- 신상옥: 북한에 납치된 뒤 2번째 투옥 때 이자들이 자신을 정말로 죽이려는 것인지 아닌지 시험하기 위해 며칠 간 단식을 했었다고 수기에 적혀 있다. 처음엔 간수들이 "조금 있으면 밥 달라고 빌 것"이라고 비웃다가 신상옥 감독이 쓰러지자 인민무력부 간부가 내려와서 "저 사람 죽으면 너네도 죽는다"고 날뛰어서 대접이 좋아졌다고.
- 안내상: 학생운동으로 구속되었을 때 교도소 내에서 단식투쟁을 했다고 한다.
- 황석영 : 1989년 무단 방북(밀입북), 이후 국가보안법 위반을 피해 해외를 떠돌다 김영삼 정부 출범후 1993년 귀국해 수감됐다. 수감중인 1997년 12월 석방해 달라며 단식 농성을 벌였다. # 이후 1998년 김대중 정부의 특별 사면으로 풀려났다.
- 김장훈 : 영화인들과 함께 세월호 사건 당시 사실관계 확인, 특별법 제정, 박근혜 대통령의 방문 등을 요구하며 단식을 감행했다. 콘서트가 예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3일 째에 단식을 중단하고 치킨을 먹었다가 배탈이 났다며 SNS에 올린 글 때문에 논란이 일기도 했지만, 이후 다시 2차 단식을 시작해 21일간 유가족들과 함께 투쟁하다가 건강 상의 이유로 그만두었다.
- LG 씨름단 선수들: 1990년대 후반부터 이어진 민속씨름의 인기 저조를 보여준 대표적 일화 중 하나. LG투자증권이 우리금융그룹으로 매각될 당시 우리금융그룹이 씨름단 운영을 하지 않겠다고 나서자 장충체육관 내 씨름연맹 사무실에서 2004년 11월 30일부터 12월 1일까지 2일간 단식투쟁을 벌였다. 특히 당시 이 팀의 간판 스타였던 최홍만과 천하장사 출신 김경수도 단식에 참여했다. 씨름선수는 일반인들과 달리 평소 식사량이 엄청난데다 한 끼만 굶어도 선수로서의 역량이 크게 좌우되는 만큼 음식을 끊는다는 것은 엄청난 일이었다. 때문에 짧은 단식이었지만 이들의 외침은 강렬했다. 그러나 이들의 단식투쟁에도 우리금융그룹은 씨름단 인수를 거부했고 결국 씨름단은 해체돼 선수들이 뿔뿔이 흩어졌다는 새드 엔딩.
- 한국게이츠를 포함한 폐업한 공장의 노동자들, 비정규직.
- 케네스 에드워드 킬로렌 신부: 서강대학교 초대 학장(총장). 1964~1965년 한일협정 반대투쟁 당시, 서강대생들과 함께 단식투쟁에 참가했다. 사람들이 단식 참가 이유를 묻자 "내 아들딸과도 같은 사랑하는 학생들이 밥을 굶고 있는데, 어찌 내가 편히 밥을 먹을 수 있겠느냐"는 답을 했다고.
[1] 전두환 정권에 대항하여 민주주의 회복, 정치 복원 등 민주화를 위한 전제조건을 걸고 단식 투쟁을 하였다. 당시 단식은 보도 통제를 통해 철저하게 은폐되었는데 단신보도를 통해 어느 정치인의 식사 문제라는 아주 우회적 어법으로 간신히 보도하는 형국이었으며 이를 행간을 읽는 데 능숙한 당시 신문 독자들이 '아, 누군가가 단식하고 있구나!'라고 알아서 이해하는 식이었다. 이런 관습은 일제강점기부터 전해져 왔는데 군사정권 보도지침의 원류 비슷하게 일제강점기에도 기사 검열이 있어서 일제에 불리한 기사는 지우거나 논조를 일제에 유리하게 하는 식이었다. 가령 사쿠라다몬 의거가 일어났을 때 많은 신문사들이 이봉창을 역적이라고 비난하는 논조로 기사를 실었는데 이건 그 신문사들이 친일이 아니라 기사 검열에 걸려 이봉창에게 우호적인 기사를 실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원로 기자들의 회고에 따르면 오히려 기사 자체가 삭제되지 않고 보도된 것만으로도 다행일 지경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이 시기의 지식인들도 이런 종류의 기사가 나면 그대로 읽지 않고 행간의 속뜻을 파서 읽곤 했다.[2] 파키스탄 분리를 반대하고 이슬람-힌두교 화합과 통일을 위해 단식 투쟁을 하였다.[3] 일본에서는 해당 영어 단어를 차용해 ハンガーストライキ(한가 스토라이키)라 한다.[4] 단식투쟁의 목적 자체가 권력자와 진지하게 대화할 장소나 계기를 만들기 위한 경우도 많다. 단식투쟁이라 해도 결국은 대화와 협의를 위한 과정이다.[5] 단식이 약자의 마지막 무기라 지위 있는 인사가 하면 조롱거리가 된다는 주장을 펼치는 사람도 있으나, 문서 최상단에 서술되어 있듯이 사회에서 존경받거나 인지도가 있는 사람일수록 그 여파가 크기 때문에, 사례를 살펴보면 사회적으로 지위가 있는 인사가 목숨을 걸고 모든 것을 잃을 수도 있는 투쟁에 나서는 것을 통한 사회적 파장을 노리는 경우도 매우 많다.[6] 가령 이정현의 단식은 비공개였던데다 국정감사를 회피하려는 꼼수용 단식으로 여겨졌고 당시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를 덮으려는 행보로도 인식되면서 당내에서도 비난받았다.[7] 현대적인 의미의 투쟁이 아닌 자살의 수단에 가깝긴 하다.[8] 재소자가 아사하는 것은 권력의 도덕성에 영향을 준다.[9] 이 단식 투쟁을 주제로 만든 대표적인 영화가 어느 어머니의 아들과 헝거이다.[10] 최초의 사망은 46일에 발생했으나 이는 급성 영양실조로 인한 수분 흡수 장애 때문에 일어난 것으로 의학자들이 정의한 단식에 부합하지 않아 빠졌다.[11] 이는 다른 사례에서도 교차검증된다.#[12] 아일랜드 단식투쟁을 통해 밝혀진 단식에 대한 의학적 정보#에 따르면, 46일차에 사망한 1명을 제외하면 사망자들은 모두 59일~73일을 단식한 끝에 사망했다.[13] 가령 스코틀랜드인 앵거스 바비에리(Angus Barbieri)가 392일 간 금식을 해서 기네스 기록에 오른 경우가 최장기간 단식 기록이긴 하지만, 이 사람은 금식 시작시에 200kg가 넘는 고도비만 상태였는데다 홍차와 비타민 섭취, 그리고 의료진의 관리하에서 진행되었기 때문에 적절한 비교 대상으로 보기 어렵다.[14] 과거 강성 친박 활동과 5.18 망언 등으로 평판을 깎아먹어 위험하다는 이유였다.[15] 비호감 이미지와는 별개로 김진태가 춘천 지역 재선 의원으로서 춘천 레고랜드를 살리는 등 지역구 관리는 호평을 받았기 때문에 여론조사상으로는 오히려 1위였고 황상무는 정치 신인인 만큼 지역 기반이 약한 편이었다.[16] 2023년 9월 16일자 TV조선 강적들에서 대표적인 친명계로 알려진 정성호가 자신의 입으로 "자신과 우원식, 박홍근, 김영진이 이재명과 대화를 하던 중 이 상황에 뭔가 해야 하지 않냐는 의견이 모여서 기획한 것"임을 밝혔다.[17] 그런데 농성장소가 청와대 앞이었고, 여기서 천막을 치는 건 불법이라 비난을 받았다. 철거 요구를 받았는데도 듣지 않았고 오히려 점점 더 큰 천막을 쳤기 때문. 당직자들이 교대로 지키게 하며 근무표까지 짰고 이 중에 임산부들 3명이 포함되어 있었는데 이것도 '황제단식, 의전단식, 갑질단식'(민주당 논평의 표현)이라며 비판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