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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10 21:01:26

단식투쟁

단식농성에서 넘어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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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삼[1] 모한다스 카람찬드 간디[2]
斷食鬪爭
hunger strike[3]

1. 개요2. 역사3. 예외: 수분4. 기한5. 건강6. 사례
6.1. 정치인6.2. 비정치인

1. 개요

단식으로 하는 시위를 말한다. 보통은 물은 마시되 다른 음식은 일절 입에 대지 않고 특정한 사안에 대해 시위하는 것을 말한다. 조금 더 정확히 말하자면 물과 함께 소금이나 간장을 조금씩 섭취하며 지낸다. 왜냐하면 물은 물론 나트륨이 공급되지 않으면 사람의 몸이 며칠도 버틸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일부 예외를 제외하면 인간은 공기 없이 3분, 온기 없이 3시간, 물 없이 3일, 음식 없이 3주 밖에 살지 못한다고 한다. 그래서 그 이후에도 정상인과 동일하게 행동할 수 있다면 진위성을 의심받기도 한다.

정상적인 생활을 지속해 온 사람이라면 단 3일만 음식물을 입에 대지 않아도 건강이 위태로워진다. 사회에서 존경받거나 인지도가 있는 사람일수록 단식투쟁을 하면 여파가 크며 일반 서민이 단식투쟁을 했더라도 그 사람이 요구하는 것이 어느 정도 합리적인 요구라면 국가가 그에 반박조차 없이 무반응으로 대했을 때 '국가가 저 사람 말을 듣지도 않아 저 사람을 죽였다'는 이미지가 생기게 된다.

물론 단식투쟁을 하다가 진짜로 아사한(굶어죽은) 사람도 있고 아사하기 직전 투쟁을 철회하거나 요구가 받아들여짐으로써 겨우겨우 살아난 사람들도 있다. 예에서 알 수 있듯이 매우 극단적인 시위 방법이기 때문에 웬만큼 중대한 사항이 아닌 이상 잘 실행하지는 않는 투쟁이다. 단식 투쟁이라고는 해도 본질적으로는 자해/자살 시위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는 인식이 확산된 영항도 크다. 단식투쟁을 선택하게 된 과정과 요구사항이 대중들에게 설득력 있게 다가오지 않는다면 실패한 투쟁이 될 뿐이다. 즉, 단식투쟁은 그 끝과 한계가 명확한 투쟁 방식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강력한 의지를 나타낼 방법이 별로 없는 약자나 소외된 사람들, 종교적, 정치적 소수자, 어느 이유로든 자유가 구속된 사람들이 행할 수 있는 강력한 투쟁 방식 중 하나이고 실제로 어떠한 사안으로 분쟁이 일어났을 때 누구 한 명이 단식투쟁에 들어가면 바로 언론의 주목을 받게 된다. 단식 기간이 길어질수록 그 효과는 커진다.

이렇게 단식투쟁은 자신의 생명권을 걸고 요구사항을 관철시키기 위한 투쟁행위이기 때문에 죽는 것 자체가 목적이 아닌 이상 중단 조건이 명확한 편이다. 조건이 명확해야 투쟁의 목적도 확실해지거니와 권력자가 조건에 대해 협의할 여지라도 생기기 때문이다.[4] 반대로 단식의 조건이 상식적으로 터무니없거나 두루뭉술한 경우는 단식투쟁으로 받은 주목을 다른 용도로 이용할 목적인 경우가 많다. 아니면 죽는 것 자체가 수단 겸 목적이거나.

이렇듯 단식투쟁엔 목숨을 건 투쟁[5]이란 이미지가 있어, 목숨을 걸 수준이 아니라고 여겨지는 사안에 대한 단식투쟁[6]은 조롱의 대상이 되는 경우도 있다.

2. 역사

전근대에도 간혹 있었지만 그때는 평등사회도 아닐 뿐더러 먹을 게 부족하다보니 평범한 사람이 일부러 단식을 한다는 개념 자체가 없었고 단식투쟁을 한다는 건 그냥 혼자 조용히 굶어죽을 테니 아무도 신경쓰지 말라는 의미와 상통했다. 그러다보니 주로 시전자는 이나 성직자 등 단식으로 건강을 해치거나 사망에 이르는 게 사회적 영향력이 컸던 사람들이었다.

고대 아일랜드에는 다른 사람과의 분쟁이 있을 때 억울함을 알리기 위해 그 사람 집 앞에서 단식하는 풍습이 있었다. 고대 중국에서는 백이와 숙제가 주나라가 역성혁명을 일으키는 것을 보고는 스스로 곡기를 끊고 죽은 일화가 유명하다.[7] 한국 역사에도 종종 왕의 폐위에 반대해 식음을 전폐하다가 사망했다는 둥 충격을 받아 식음을 전폐하다가 사망했다는 둥의 기록이 많이 나오는데 조선의 왕, 왕비, 대비들이 정치적 싸움의 방법으로 수라와 탕약을 거부하는 단식을 행한 기록이 종종 나온다. 특히 신하들로선 왕/왕비의 건강을 해치게 만드는 건 어마어마한 불충으로 간주되기 때문에 매우 효과적인 방법이었다.

또한 부당한 권력에 구금된 수감자들의 투쟁방식이기도 했다. 재소자들은 신체를 구금당한, 즉 자유를 빼앗긴 몸이기 때문에 최종적으로 남은 자유가 신체 유지를 위한 행동밖에 없기 때문에 이를 인질로 삼아 인질극을 벌이는 것이다. 기본적으로 구금이란 살아서 자유를 박탈하는 것을 전제로 하기 때문에 처벌의 대상이 살아있지 않으면 성립하지 않는다. 즉, 수감자들은 자신의 생존을 포기함으로서, 그리고 그 생존을 포기하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권력의 비인도적 행위[8]라는 타격을 입히기 위해 하는 것이다.

물론 보복도 만만치 않았는데 교도소 측은 이들의 단식투쟁을 저지키 위해 묽은 죽을 담은 호스를 목구멍에 마구잡이로 꽂아 '강제급식'을 실시했다. 대표적인 예로 1909~1913년까지 영국 여성참정권 운동가들이 옥중에서 단식투쟁을 하다 강제급식을 당했고 아일랜드 독립운동가 토마스 애쉬도 더블린 감옥에서 투쟁 도중 강제급식으로 숨졌으며 한국에서도 비전향 장기수 손윤규, 김용성, 변형만 등과 같이 단식투쟁을 하다 강제 급식으로 숨을 거둔 사례도 있다. 이러한 행위는 뉘른베르크 선언 및 헬싱키 선언에서 명시된 인간의 자율성을 침해하는 행위로 규정되어 1975년 '도쿄 선언'에서 금지하고 있다.

1981년 아일랜드 단식투쟁[9]은 위에서 언급한 사례 중 최대규모로 이루어진 사례로, 사망은 59-73일 사이[10]에 나타났기 때문에 대략 60일이 지나면 사람이 죽기 시작한다[11]는 것을 알 수 있었고, 이 사례를 바탕으로 의학계에서는 단식의 정의를 단식 후 공복통이 사라지는 72시간부터 사망에 이를 수 있는 72일(인간이 가장 오래 견딘 기록)까지로 정의하게 되었다. 단식 후 72시간이 단식으로 계산되는 첫날인 이유는 이 시점이 되어야 체내에 저장된 모든 당이 소모되기 때문이다.

현대적인 의미의 단식 투쟁은 녹색혁명으로 인류가 만성 식량 부족으로부터 탈피하고 인권평등이라는 권리가 확실하게 자리잡은 이후부터, 즉 국가 입장에서 국민이 한 명이라도 아사하게 되면 곤란하게 된 시점부터 본격적으로 세계 곳곳에서 써먹기 시작한 투쟁 방식이다. 대표적인 사례로 인도의 성웅 마하트마 간디75세의 나이로 옥중에서 3주간이나 단식을 한 바 있다.

3. 예외: 수분

단식을 두고 식음(食飮)을 전폐한다는 표현을 자주 쓰지만 실제로는 은 마시므로 식음에서 음(飮)이 빠진다. 을 허용하는 이유는 0kcal며 투쟁 목적이 이슈화가 되기도 전에 죽어 버리는 것을 방지하기 위함이다. 물이 없으면 인간의 생존시간은 극단적으로 짧아져 1주일도 버티기 힘들다.

같은 이유로 소금도 허용하곤 한다. 단식의 의미를 200kcal 이하 섭취로 느슨하게 규정하며 장기 투쟁을 벌이는 경우 미음(米飮) 같은 걸 마시기도 한다.

4. 기한

보통 단식은 7일을 넘기면 건강에 적신호가 오고 10~14일을 넘기면 정말로 아사할 수 있으므로 매우 신중해야 하는 선택이다. 인체의 한계점이 72일, 기적을 바란다고 해도 75일[12]이 확인된 한계[13]이기 때문에 그 기간은 명확히 72-72법칙에 의해 정해지고 있으며, 후술된 단식에 따른 건강상의 문제가 심각하기 때문에 장기간 단식이 행해지는 상황에서는 여차하면 병원으로 이송할 수 있도록 준비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때문에 일반적인 한계점인 3주 경과 후에는 투쟁자가 쓰러져 병원에 실려가는 것으로 투쟁이 마무리되거나 잠정적으로 일주일 전후를 기한으로 잡고 경과 후에는 중단 후 대안을 모색하는 식으로 전개되곤 한다.

혹은 입으로 식사를 하지 않되 물이나 수액 등으로 영양을 공급해가면서 투쟁을 이어가는 경우도 있다. 의학적인 단식의 기준은 체내 포도당을 모두 사용한 72시간 뒤 신체가 기아상태를 인지하고 체내의 케톤기를 분해하려 하는 시점부터가 단식이 되기 때문에 의학적으로는 단식으로 보기 어렵다. 하지만 의학적으로나 신체적으로 기아상태를 인지하지 못해 시행자의 목숨에 지장이 없다고 해도, 배 속이 비어있는 상황은 변하지 않기 때문에 공복통이 계속되고 소화기관이 쇠약해져가며 영양불균형으로 인해 무너지는 건강과 이로 인한 질병 및 후유증 문제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시위방식의 하나로서는 충분히 의미가 있으며 오히려 장기간에 걸쳐 수척해져가는 모습이 실시간으로 중계되기 때문에 초장기 투쟁의 수단으로 쓰이는 경우도 있다. 가장 유명한 사례가 인도의 인권 운동가 차누 샤르밀라로, 코에 낀 영양 튜브로 영양을 공급받으며 무려 16년간 단식 투쟁을 벌였다.

릴레이 단식 이라고 해서 여러명이 돌아가면서 단식하는 경우도 있다. 주로 장기 단식하는 사람에 대한 동조의 의미 혹은 초장기 투쟁의 한 방법으로 사용된다.

5. 건강

의학적으로 보면 오랜 단식은 특히 칼슘 손실을 가중시켜 치아에 치명적으로, 실제로 단식투쟁을 '제대로' 한 사람들 중에는 그냥 넘어져도 쉽게 골절상을 입거나 치아가 우수수 빠지는 등 상당한 후유증을 안고 사는 이들이 많다. 꼭 단식투쟁이 아니더라도 강제수용소 등 영양 조건이 매우 불량한 곳에서 오랫동안 생활한 사람들 중에는 출소 후에도 골다공증이나 치주질환 등으로 고생하는 이들이 상당히 많다. 황석영은 무허가 방북으로 인해 수감 생활을 하던 중 처우 개선을 요구하며 단식투쟁을 했다고 하는데 그 결과 성한 치아가 거의 없다고 한다.

단식은 굶는 것도 문제지만 굶고 나서도 문제다. 하다못해 비근한 예로 고작 3~4일 단식투쟁을 벌인 김장훈이 콘서트 진행을 위해 단식을 중단하고 치킨 2조각을 먹었다가 탈이 났을 정도이다. 오랜 단식은 체내 신체대사에 문제를 반드시 일으키는데, 신체대사 체계가 오랜 기아상태에 적응하도록 변화되므로 갑자기 과량의 음식을 섭취하게 되면 이러한 신체대사에 이상이 생겨, 심장에 문제가 발생해 죽기 때문이다. 예로부터 오랫동안 굶은 사람에게 식사를 챙겨줄 때에는 묽은 죽부터 시작해서 단계적으로 평범한 식사로 향하는 법이었고, 기아에 시달린 사람에게 진수성찬을 차려주었다가 탈이 나서 죽었다는 기록은 동서고금을 통틀어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조선왕조실록에도 너무 굶은 사람에게 갑자기 밥을 주면 죽으니 죽부터 천천히 주라는 말이 나오며, 원해서 한 단식은 아니긴 하지만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후 수용소의 포로들을 발견한 군인 중 일부는 너무 야윈 포로들이 안쓰러웠는지 빵이나 고기 같은 것들을 마구 제공해서 죽은 사람도 많았다. 이러한 장기간의 단식에 대한 의학/과학적 연구는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 당시에 이르러서였다고 한다.

심지어 교정기관 측도 만에 하나 있을 옥중 단식투쟁으로 인한 불상사를 막기 위해 형집행법 40조 1~2항에 따라 먼저 의무관에게 관찰, 조언, 설득을 하도록 하고 수용자가 이를 거부할 시 의무관이 포도당 링거 등으로 적절한 영양보급 조치를 취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1년 이상을 단식해 건강이 좋아진 사람도 있다며 예를 드는 경우도 있으나 이 경우에는 비만인 등으로 몸에 영양이 충분했거나 의료진의 관리가 있는 등 건강관리 목적으로 행해지기 때문에 가능한 이야기이고, 스스로 사망을 각오하는 단식 투쟁과 비교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6. 사례

6.1. 정치인

6.2. 비정치인


[1] 전두환 정권에 대항하여 민주주의 회복, 정치 복원 등 민주화를 위한 전제조건을 걸고 단식 투쟁을 하였다. 당시 단식은 보도 통제를 통해 철저하게 은폐되었는데 단신보도를 통해 어느 정치인의 식사 문제라는 아주 우회적 어법으로 간신히 보도하는 형국이었으며 이를 행간을 읽는 데 능숙한 당시 신문 독자들이 '아, 누군가가 단식하고 있구나!'라고 알아서 이해하는 식이었다. 이런 관습은 일제강점기부터 전해져 왔는데 군사정권 보도지침의 원류 비슷하게 일제강점기에도 기사 검열이 있어서 일제에 불리한 기사는 지우거나 논조를 일제에 유리하게 하는 식이었다. 가령 사쿠라다몬 의거가 일어났을 때 많은 신문사들이 이봉창을 역적이라고 비난하는 논조로 기사를 실었는데 이건 그 신문사들이 친일이 아니라 기사 검열에 걸려 이봉창에게 우호적인 기사를 실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원로 기자들의 회고에 따르면 오히려 기사 자체가 삭제되지 않고 보도된 것만으로도 다행일 지경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이 시기의 지식인들도 이런 종류의 기사가 나면 그대로 읽지 않고 행간의 속뜻을 파서 읽곤 했다.[2] 파키스탄 분리를 반대하고 이슬람-힌두교 화합과 통일을 위해 단식 투쟁을 하였다.[3] 일본에서는 해당 영어 단어를 차용해 ハンガーストライキ(한가 스토라이키)라 한다.[4] 단식투쟁의 목적 자체가 권력자와 진지하게 대화할 장소나 계기를 만들기 위한 경우도 많다. 단식투쟁이라 해도 결국은 대화와 협의를 위한 과정이다.[5] 단식이 약자의 마지막 무기라 지위 있는 인사가 하면 조롱거리가 된다는 주장을 펼치는 사람도 있으나, 문서 최상단에 서술되어 있듯이 사회에서 존경받거나 인지도가 있는 사람일수록 그 여파가 크기 때문에, 사례를 살펴보면 사회적으로 지위가 있는 인사가 목숨을 걸고 모든 것을 잃을 수도 있는 투쟁에 나서는 것을 통한 사회적 파장을 노리는 경우도 매우 많다.[6] 가령 이정현의 단식은 비공개였던데다 국정감사를 회피하려는 꼼수용 단식으로 여겨졌고 당시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를 덮으려는 행보로도 인식되면서 당내에서도 비난받았다.[7] 현대적인 의미의 투쟁이 아닌 자살의 수단에 가깝긴 하다.[8] 재소자가 아사하는 것은 권력의 도덕성에 영향을 준다.[9] 이 단식 투쟁을 주제로 만든 대표적인 영화가 어느 어머니의 아들헝거이다.[10] 최초의 사망은 46일에 발생했으나 이는 급성 영양실조로 인한 수분 흡수 장애 때문에 일어난 것으로 의학자들이 정의한 단식에 부합하지 않아 빠졌다.[11] 이는 다른 사례에서도 교차검증된다.#[12] 아일랜드 단식투쟁을 통해 밝혀진 단식에 대한 의학적 정보#에 따르면, 46일차에 사망한 1명을 제외하면 사망자들은 모두 59일~73일을 단식한 끝에 사망했다.[13] 가령 스코틀랜드인 앵거스 바비에리(Angus Barbieri)가 392일 간 금식을 해서 기네스 기록에 오른 경우가 최장기간 단식 기록이긴 하지만, 이 사람은 금식 시작시에 200kg가 넘는 고도비만 상태였는데다 홍차와 비타민 섭취, 그리고 의료진의 관리하에서 진행되었기 때문에 적절한 비교 대상으로 보기 어렵다.[14] 과거 강성 친박 활동과 5.18 망언 등으로 평판을 깎아먹어 위험하다는 이유였다.[15] 비호감 이미지와는 별개로 김진태가 춘천 지역 재선 의원으로서 춘천 레고랜드를 살리는 등 지역구 관리는 호평을 받았기 때문에 여론조사상으로는 오히려 1위였고 황상무는 정치 신인인 만큼 지역 기반이 약한 편이었다.[16] 2023년 9월 16일자 TV조선 강적들에서 대표적인 친명계로 알려진 정성호가 자신의 입으로 "자신과 우원식, 박홍근, 김영진이 이재명과 대화를 하던 중 이 상황에 뭔가 해야 하지 않냐는 의견이 모여서 기획한 것"임을 밝혔다.[17] 그런데 농성장소가 청와대 앞이었고, 여기서 천막을 치는 건 불법이라 비난을 받았다. 철거 요구를 받았는데도 듣지 않았고 오히려 점점 더 큰 천막을 쳤기 때문. 당직자들이 교대로 지키게 하며 근무표까지 짰고 이 중에 임산부들 3명이 포함되어 있었는데 이것도 '황제단식, 의전단식, 갑질단식'(민주당 논평의 표현)이라며 비판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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