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4년 12월 10일 발생한 1차 화재 당시 사진.[1]
1. 개요
6.25 전쟁 휴전 직후인 1954년 12월 26일 오전 6시 20분경 주민의 실화로 인해 발생한 대화재. 이 사건으로 6.25 전쟁 당시 부산에 대피시켜 두었던 역대 조선 왕들의 어진 등을 포함하여 국보급 문화재 3,500여점이 소실되었다.2. 경위
1953년 7월 27일 전쟁이 끝나고 대한민국의 수도가 부산에서 다시 서울로 바뀌었지만 여전히 부산은 전쟁을 피하려 몰려든 피난민들로 가득 차 있었다. 당연히 주택난도 심각해져서 피난민들은 서로 다닥다닥 붙어 있는 가건물에서 살았다. 이러한 환경은 불에 취약하기 때문에 화재의 위험성이 대단히 컸으나 피난민들은 어쩔 수가 없었다. 이미 지난해 비슷한 이유로 부산역 앞에서 큰 화재가 난 적이 있었지만 근본적인 대책은 세우지 못하고 있었다.1954년 12월 10일 새벽 3시 57분에는 부산시 동광동의 고물상 윤모씨의 집에서 화재가 난 적이 있는데 당연히 다닥다닥 붙어 있는 판자집의 특성상 불이 삽시간에 번졌고 판자집 1000호와 동광국민학교(초등학교)[2]가 전소되는 등 큰 피해가 있었다. 경향신문에서 <불에 타던 장소는 높은 곳에 위치한 지대였으므로 불을 끌 물이 나오지 않아 걷잡을 수 없이 번지는 불길을 막을 수 없었다> 고 보도했고 그야말로 그 당시 이 지대에서는 화재가 발생해도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리고 결국 16일 뒤인 12월 26일에는 비슷한 지대인 광복동과 동광동 일대인 용두산에서 또 다시 화재가 발생해 그나마 남아 있던 판자집들이 다 잿더미로 변해 버렸다. 동아일보에 따르면 1954년 12월 26일 아침 6시 20분, 전기공사청부업자 정수홍(33)의 집 식모였던 안순자(22)라는 여자가 판자집 2층 마룻바닥에 촛불을 켜 둔 채로 잠자고 있을 때 촛불이 마룻바닥으로 떨어져 불길이 일어났다. 하필 그 때는 겨울이었으므로 이때 부는 계절풍인 서북풍이 강하게 불어서 불은 바람을 타고 삽시간에 번졌다. 거칠 것 없이 태우던 불길은 용두산 동남쪽 일대의 피난민촌 298동을 잿더미로 만들었다. 이 화재로 인해 1명이 죽고 1422명의 이재민이 발생했으며 397만 4천환이라는 피해금액이 나왔고 이 화재의 범인인 안순자는 구속되었으나 어떤 처벌을 받았다는 기록은 없다. 그리고 한국 역사학계의 비극도 시작되었다.
3. 관재청 문화재 임시 수장고 소실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하고 북한군에 밀려 부산으로 후퇴했던 대한민국은 인천 상륙 작전으로 서울을 수복하자마자 서울에 있던 궁중유물을 당시 임시수도였던 부산으로 황급히 이송시켰다.대한민국의 궁중유물은 장거리의 부산까지 운반되어 어느 한 창고에 보관되었는데 이 창고가 바로 관재청 창고였다. 해당 창고에 보관됐던 유물들은 총 4,000여점이었고 그 목록은 궁중일기, 조선 국왕들의 어진, 왕실 유물, 역대 재상을 그린 초상화, 어필, 수많은 고서적과 은제기 등의 국보급 유물들이었다. 이 유물들은 전시에 한 번도 폭격당하지 않았고 1950~1954년에 발생했던 크고 작은 화재에도 무사하였다. 그러나 전쟁이 끝나고도 창고 안에 있는 유물들은 즉각 서울로 옮겨지지 않았고 그 안에서 1년을 보냈다. 당시로서는 북한과 전쟁을 잠시 멈추는 휴전 협정을 맺은 직후였기에[3] 언제 다시 전쟁이 날지 예측할 수 없어서 불가피한 선택이었고 대한민국 정부는 대피시킨 문화재를 휴전선과 인접한 서울에 바로 다시 가져다놓기를 망설였다. 그러나 부산에서 유물을 보관하고 있던 창고의 인근에는 화재에 취약한 피난민 판자촌들이 밀집되어 있었기 때문에 당장 문화재를 서울로 옮기지는 않더라도 최소한 부산 안 다른 곳이든 다른 지역이든 안전한 곳으로 유물을 옮기는 조치는 필요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무슨 이유에서인지 1년이 되도록 이러한 조치는 취해지지 않았다.
1954년 10월에 초대 국립중앙박물관장 김재원(金載元, 1909~1990)이 문교부에 공문첩을 보내 유물 보존에 불행을 초래할 수 있으므로 그에 대한 대책을 강구할 것을 요청했지만 무시당했다. 그로부터 두 달이 지나고 12월 26일 아침 6시 20분, 화재가 발생했다.
경향신문은 1954년 12월 31일자 속보에서 해당 화재로 판자집에서 창고까지 불이 번져 "구황실재산사무총국 하에 보관되어 있었던 조선왕조 어진 등과 같은 귀중한 문화재들이 소실되었다"고 전했다. 사건의 진상 조사를 위해 조사단이 부산으로 내려갔고 1955년 1월 6일에 조사 결과를 발표했는데, 유물 4,000여점 중 무려 3,500점이 소실되고 반만 타거나 재활용이 가능한 유물 546점을 겨우 빼내 광복동에 있는 국립박물관 창고에 보관했으며 영조, 철종의 어진과 덧불여 34점의 역대 재상, 왕족 초상화[4], 그리고 어필과 제기만이 남았을 뿐이라는 충격적인 내용이었다. 경향신문은 화재 당시 창고에 평소와 같이 경찰관들이 배치되어 있었다고 밝혔다.
화재 발생 20분만에 창고지붕에 불이 옮겨 붙었는데, 이때 더욱 가관이었던 것은 창고의 열쇠가 없어서 문을 열지 못해 창고가 불타는 것을 그대로 지켜봤다는 것이다. 당시 문교부와 구 황실에서는 서로 상대방이 열쇠를 가지고 있었다고 책임을 떠넘겼고 이러한 추태는 신문에 그대로 기사화되었다. 종합하자면 문화재를 귀중히 여길 줄 몰라 생긴 대참사였다.
4. 결과
이 화재로 4,000여 점의 가치를 매길 수 없는 귀중한 유물들 중 무려 3,500여 점이 소실되어 겨우 546점만이 후세에 전해지게 되었는데[5], 이때 소실된 3,500여 점의 유물들이 무엇이었는지 적어 두었던 서류마저 1960년 6월 6일 창덕궁 청사 방화사건에 휘말려 소실되었기 때문에 영원히 알 길이 없게 되었다.특히 가장 유명한 피해 유물은 조선 역대 왕들의 어진들이었는데, 신선원전에서 보관되었던 48축의 어진 중 무려 30축이 소실되었고[6], 그나마 건져낸 18축의 어진들은 대부분 얼굴 부분이 불타 버렸기 때문에 당시 신선원전에서 보관되던 어진들 중 얼굴이 남아 있는 어진은 단 5축밖에 없다.[7][8] 당시 소실된 어진 중에는 숙종 이후 국왕의 어진이 많았던 것으로 전해지지만[9] 목록도 불에 타 소실되었으므로 정확히 어느 시대의 임금까지 어진으로 존재했을지는 알 수 없다. 다만 1955년 1월 10일 경향신문 기사에서 '12대열성의 진영'이라고 언급한 것을 보면 당대에도 신선원전에 어진이 보존된 왕 12명 외에는 어진이 보존되지 못했을 가능성이 더 높다. #
식민지배와 6.25 전쟁 이후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로 전락했던 당시 대한민국은 문화재를 관리할 인력과 재원이 하나도 없어 사진 촬영 등 기본적인 수준의 보존 작업조차 해 놓지 못했던 최빈국 중의 최빈국이었다.[10] 오늘날처럼 디지털 보존 기술이 아니더라도 충분한 필름 촬영과 속기, 모사 인력만 있었다면 그림이나 문서는 복원하거나 최소한 사진기록으로라도 남길 수 있었을지 모르나 당시 대한민국은 이런 곳에 투자할 돈도 관심도 없었기 때문에 모두 잿더미가 되어 사라지고 말았다. 사실 역대 국왕의 유골은 도굴당한 성종, 중종을 제외하면 모두 조선왕릉에 온전하게 남아 있기 때문에 유골의 골격을 분석하여 재구성하는 방법으로 대강의 모습을 추측할 수는 있다.[11] 하지만 허가 없이 왕릉을 파헤치는 것 역시 전주 이씨 황실 후손, 문중, 종중의 반발을 불러일으킬 수 있기에 조선 임금의 얼굴 복원은 요원한 일이다.
5. 같이 보기
[1] 당시 한국에 주둔한 미군 병사가 촬영한 것으로, 2006년 6월 공개되었다. #[2] 1998년 남일초등학교와 통합되어 광일초등학교가 되었다. 광일초등학교 자리는 현재 공영주차장이 되었다.[3] 이때 성립된 남북의 휴전 상태가 반세기를 넘어 21세기까지 계속되리라고는 당대 그 누구도 예상치 못했다. 당시 발생한 상당수의 이산가족도 가족과 떨어지며 잠시 피난한다는 생각을 가졌을 뿐이었다. 그러나 그러한 당초의 예상은 빗나갔고 남북의 휴전은 기네스북에 등재될 정도로 세계 역사상 전례가 없는 최장기간의 휴전 상태로 유지되는 중이다.[4] 이들도 표제의 대부분이 타 버려서 강세황, 김노진, 이성규 등을 제외하고는 누구인지 분간할 수 없는 상황이다.[5] 다만 다만 이 화재로 조선 왕실 유물이 거의 모두 소멸한 것은 아니다. 국립고궁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왕실 유물만 88,530점에 달한다. #[6] 그 중 숙종과 헌종은 추정 어진만 남아 있고, 세조와 정조는 아예 추정 어진조차 남아 있지 않다. 그나마 세조는 2016년에 어진 초본이라도 재발견되었지만(다만 1969년 5월 14일 경향신문에 어진 사진이 실린 적이 있긴 하다) 정조는 그마저도 존재하지 않아 현재 존재하는 정조 어진들은 모두 화재 사건 이후에 만들어진 상상도뿐이다.[7] 정확히는 원종 사모본 1축, 영조 사모본/익선관본 1축씩, 철종 군복본 1축, 순종 황룡포본 1축. 그것들의 대부분도 얼굴 일부가 불탔기 때문에 얼굴이 100% 멀쩡한 어진은 영조어진 2축밖에 없다. 그나마 순종 황룡포본은 순종황제가 찍었던 사진 자료가 남아 있어 쉽게 복구할 수는 있었다.[8] 물론 세조 어진은 2016년에 발견된 익선관본 초본이 남아있긴 하나, 말 그대로 초본이기 때문에 논외. 그리고 1926년 6월 10일자 동아일보에 실린 태조 어진이 신선원전에 있던 어진이라고 보는 사람들도 있다.[9] 그나마 숙종 이전 왕들은 모두 신선원전에 보관되었던 어진의 모습을 직접적으로든 간접적으로든 확인할 수 있다. 태조는 보관되었던 어진의 원본 1축(경기전본)은 현존하고 2축(함흥본궁본, 미상본)이 사진으로나마 존재하며, 세조는 어진들은 모두 소실되었어도 김은호가 모사한 초본만큼은 현존하고 있고, 원종은 화마에서 어진 2축을 반쪽이 탄 상태로나마 모두 건져냈다. 그러나 화재 속에서 얼굴이 일부만 확인할 수 있게 된 순조, 헌종(추정)은 어찌어찌 넘어가더라도 어진 속 얼굴이 전부 소실된 숙종과 익종, 심지어 어진 조각도 남지 않은 정조는 정확한 얼굴을 영원히 알 수 없게 되었다. 특히 숙종은 선원보감에 초상화조차 없어서 열성어진의 어설픈 모사본이라도 존재하지 않았다면 영영 대략적인 얼굴조차 알 수 없게 될 뻔했다.[10] 당시 한국의 실질 1인당 GDP는 50달러(2024년 가치로는 583달러)를 밑돌았다. 2024년 IMF 통계 기준으로 마다가스카르, 중앙아프리카공화국보다 약간 나은 수준.[11] 단, 정종의 경우 왕릉인 후릉이 북한 개성시 소재이므로 유골이 온전한지를 떠나서 이 방법을 사용하기엔 정치적으로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문제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