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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출처 : 문화유산채널 유형문화재 사진전 - 보물 제581호, 경주 골굴암 마애여래좌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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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慶州 骨窟庵 磨崖如來坐像9세기 중엽, 통일신라 시대에 현 경상북도 경주시 문무대왕면 안동리의 골굴사에서 자연굴을 이용하여 조성한 마애불 1좌. 현재 골굴사(경상북도 경주시 문무대왕면 안동리 산304)에 소재하고, 보물 제581호로 지정되었다.
2. 내용
사진 출처 : 경주문화관광 홈페이지 - 경주 골굴암 마애여래좌상
불상 높이 4 m.
골굴암의 높은 암벽에 있는 자연굴을 이용하여 만든 12개 석굴 중 가장 윗부분에 있는 마애여래좌상으로, 제작 시기는 9세기 중엽이다. 당시 서라벌의 신라인들이 기림사(祇林寺) 골짜기의 가장 높은 암벽에 올라가 불상을 새긴 것이다. 처음 만들 당시에는 몸 전체가 완전했으나, 오랜 세월이 흐르면서 현재는 암벽 석질의 차이 때문에 무릎 아래 부분이 떨어져나갔다.
800년대 중반, 신라인들이 최초로 이 불상을 조성할 당시에는 석굴사원으로 삼고자 불상 주변에 전각을 함께 지어놓았다는 기록이 있다. 18세기 화가 겸재 정선(鄭敾)이 그린 '골굴석굴(骨窟石窟)' 그림에도 이 불상이 아름다운 목조 전실(木造前室) 안에 있으므로, 적어도 조선 후기 때까지는 이 건물이 온전히 남아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이후 언제인지는 모르지만 목조건물이 완전히 파손되어 역사 속으로 사라졌고 지금은 불상만 덩그러니 있다.
당시 신라인들이 기림사 주변 지역에서 가장 높은 암벽으로 기어올라가 조성한 만큼, 꼭대기까지 매우 가파른 길이 이어진다. 이 길을 따라 꽈배기처럼 꼬인 암벽을 올라가려면 매우 힘이 든다. 불상을 보러 올라가는 길에도 중간중간 낭떠러지가 그대로 노출되어 조심해야 한다.
불상 양식은 높다란 육계와 부피감 있는 얼굴, 가는 눈, 작은 입, 좁고 긴 코의 독특한 이목구비와 만면한 미소 등은 형식화가 진행된 9세기 신라 불상의 특징을 잘 나타낸다. 이러한 특징은 건장하지만 평판화된 신체, 얇게 빚은 듯한 평행계단식 옷주름, 무릎의 도식적인 물결 옷주름과 겨드랑이의 꺽쇠주름 등에서도 잘 나타났다. 그러나 얼굴의 표정이나 조각의 기량 면에서 8세기의 이상적 사실 작풍이 남아서 8세기 후반-9세기 통일신라의 석조 공예술을 자세히 연구해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민머리 위에는 상투 모양의 머리(육계)가 높이 솟아있고, 윤곽이 뚜렷한 얼굴은 가늘어진 눈·작은 입·좁고 긴 코 등의 표현에서 이전 보다 형식화가 진전된 모습을 살펴볼 수 있다. 입체감이 두드러진 얼굴에 비해 평면적인 신체는 어깨가 거의 수평을 이루면서 넓게 표현되었는데, 목과 가슴 윗부분은 손상되었다. 옷주름은 규칙적인 평행선이 주류를 이루고 있으며, 겨드랑이 사이에는 팔과 몸의 굴곡을 표시한 V자형 무늬가 있다. 암벽에 그대로 새긴 광배(光背)는 연꽃무늬가 새겨진 머리광배와 불상 둘레의 율동적인 불꽃무늬를 통해 흔적을 살필 수 있다.
이와 비슷한 시기인 867년(신라 경문왕 7년)에 조성된 봉화 축서사 석조비로자나불좌상 및 목조광배(보물 제995호)와 함께 9세기 통일신라 시기의 불상 양식 및 불교문화를 연구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 이에 1974년 12월 30일 대한민국 보물로 지정되었다.
3. 외부 링크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 경주 골굴암 마애여래좌상
- 두산백과 : 경주 골굴암 마애여래좌상
- 한국어 위키백과 : 경주 골굴암 마애여래좌상
- 대한민국 구석구석 : 경주 골굴암 마애여래좌상
- 답사여행의 길잡이 2 - 경주 : 경주 골굴암 마애불좌상
4. 보물 제581호
골굴암의 높은 암벽에 있는 자연굴을 이용하여 만든 12개의 석굴 중 가장 윗부분에 있는 마애여래좌상이다. 조선시대 겸재(謙齋) 정선이 그린 ‘골굴석굴’에는 목조전실이 묘사되었으나 지금은 바위에 흔적만 남아있다.
민머리 위에는 상투 모양의 머리(육계)가 높이 솟아있고, 윤곽이 뚜렷한 얼굴은 가늘어진 눈·작은 입·좁고 긴 코 등의 표현에서 이전 보다 형식화가 진전된 모습을 살펴볼 수 있다. 입체감이 두드러진 얼굴에 비해 평면적인 신체는 어깨가 거의 수평을 이루면서 넓게 표현되었는데, 목과 가슴 윗부분은 손상되었다. 옷주름은 규칙적인 평행선이 주류를 이루고 있으며, 겨드랑이 사이에는 팔과 몸의 굴곡을 표시한 V자형 무늬가 있다. 암벽에 그대로 새긴 광배(光背)는 연꽃무늬가 새겨진 머리광배와 불상 둘레의 율동적인 불꽃무늬를 통해 흔적을 살필 수 있다.
평면적인 신체와 얇게 빚은 듯한 계단식의 옷주름, 겨드랑이 사이의 U자형 옷주름 등이 867년에 조성된 봉화 축서사 석조비로자나불좌상 및 목조광배(보물 제995호)와 유사한 작품으로 통일신라 후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민머리 위에는 상투 모양의 머리(육계)가 높이 솟아있고, 윤곽이 뚜렷한 얼굴은 가늘어진 눈·작은 입·좁고 긴 코 등의 표현에서 이전 보다 형식화가 진전된 모습을 살펴볼 수 있다. 입체감이 두드러진 얼굴에 비해 평면적인 신체는 어깨가 거의 수평을 이루면서 넓게 표현되었는데, 목과 가슴 윗부분은 손상되었다. 옷주름은 규칙적인 평행선이 주류를 이루고 있으며, 겨드랑이 사이에는 팔과 몸의 굴곡을 표시한 V자형 무늬가 있다. 암벽에 그대로 새긴 광배(光背)는 연꽃무늬가 새겨진 머리광배와 불상 둘레의 율동적인 불꽃무늬를 통해 흔적을 살필 수 있다.
평면적인 신체와 얇게 빚은 듯한 계단식의 옷주름, 겨드랑이 사이의 U자형 옷주름 등이 867년에 조성된 봉화 축서사 석조비로자나불좌상 및 목조광배(보물 제995호)와 유사한 작품으로 통일신라 후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