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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2-28 14:32:38

진관사

고려의 왕립 사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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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대한불교조계종 상징.svg 대한불교조계종
북한산 진관사
北漢山 津寬寺 | Jinkwansa[1]
파일:external/img.ezmember.co.kr/2_1306210103.jpg
<colbgcolor=#ff8c00><colcolor=#ffffff> 창건 1011년 (고려 현종 2년)
소속국가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대한민국
회주 스님 계호
위치
서울특별시 은평구 진관동 354
외부 링크 파일:홈페이지 아이콘.svg | 파일:유튜브 아이콘.svg

1. 개요2. 연혁3. 기타4. 가는 길5. 대중매체6. 보물 제2142호 서울 진관사 태극기 (서울 津寬寺 太極旗)7.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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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서울특별시 은평구 진관길 73 (진관동 354)에 위치한 사찰이며, 대한불교 조계종 총본산 조계사의 말사이다.

북한산 진관사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

2. 연혁

신라 진덕여왕 때에 처음 지었다는 유래가 있기는 하지만 이 사찰이 거의 창건 수준으로 대대적으로 중창된 것은 고려 초기의 일이었다. 고려 초 이곳은 진관(津寬)이라는 승려가 홀로 수행하던 신혈사(神穴寺)라는 이름의 작은 암자였다고 한다.#

본래는 큰 절이 아니라 진관이 혼자 수행하던 작은 암자였던 이곳이 대규모 거대 사찰로 중창된 계기는 고려 왕실의 유력한 황위계승후보였던 대량원군(大良院君) 왕순(王詢)이 쫓기듯이 승려가 되어 이곳으로 오게 되면서 비롯되었다. 고려 태조의 왕자인 왕욱과 태조의 손녀이자 경종의 왕비였던 황보씨 사이에서 난, 그러니까 숙부와 조카 사이의 근친혼으로 태어났다는 떳떳하지는 못한 출생 내력이 있기는 했지만 엄연히 고려 왕족이고 태조의 피를 직계로 이은 아이였던 왕순의 인생은 아버지에 이어 자신을 보살펴 주던 외숙부[2] 성종이 병사하고 사촌형제 개령군[3]목종으로 즉위하자 더욱 먹구름이 끼었다.

목종이 즉위한 뒤 외척인 김치양과 간통하며 성년이 된 목종을 억누르고 섭정하는 등 나라의 실세 행세를 하던 목종의 모후 천추태후는 김치양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에게 왕위를 잇게 할 생각이었다. 그런 천추태후에게 현종의 존재는 후사를 위협하는, 굉장히 부담스러울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더군다나 그가 영특하다는 소문이 돌자 천추태후는 위협감을 느꼈는지 결국 대량원군 순을 강제로 삼각산에 있는 신혈사라는 승려로 보내버렸다. 액면상으로는 왕위 계승 자격이 있는 적자를 제외한 서자들은 출가해 승려가 되는 전통을 따른 것이라고는 하지만, 출가해 승려가 된 뒤에도 대량원군 순은 몇 번이나 목숨의 위협을 당했다.

신혈사로 출가한 뒤 신혈소군(神穴小君)[4]이라 불리며 반(半) 연금 상태에 빠진 그는 천추태후와 김치양이 보낸 궁녀들에게 독이 든 음식을 먹을 것을 강요받거나 자객들에게 목숨을 위협받는 등 그야말로 비참하고도 처절하게 생명줄을 이어나갔다. 왕순이 채충순에게 편지를 보내어 살려달라고 간청하는 장면은, 보는 사람도 안타까움을 느낄 지경.
간악한 무리들이 사람을 보내어 협박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술과 음식을 보냈는데 은 독약을 넣은 것으로 의심하여 먹지 않고 까마귀와 참새에게 주니 까마귀와 참새가 죽어버렸습니다. 상황이 이렇게 절박하니, 바라옵건대 성상께서 불쌍히 여겨 구원하여 주소서.
《고려사》 권93, 열전6, 채충순

동성애자라 자식을 남기지 못했던 목종이 유일한 후계자인 신혈소군을 지키기 위해 번번히 천추태후의 음모를 눈치채고 훼방을 놓았으며, 신혈사의 주지인 승려 진관도 위험을 무릅쓰고 현종을 보호하였던 덕분에 간신히 목숨을 보전할 수 있었다. 천추태후가 어찌나 집요하게 현종을 암살하려 했는지 진관이 수미단 아래에 굴을 파서 현종을 숨겨놓기까지 했다고 한다.
태후가 여러 차례 사람을 보내 암살하려 했으며, 하루는 나인(內人)을 시켜 독약이 든 술과 떡을 보냈다. 나인이 절에 당도해 소군을 만나 몸소 먹이려 했는데, 절의 어떤 승려가 소군을 땅굴 속에 숨겨 놓고는, “소군이 산에 놀러 나갔으니 간 곳을 알 수 없노라”고 속임수를 썼다. 나인이 돌아간 뒤 떡을 뜰에 버렸더니, 까마귀참새가 주워 먹고 그대로 죽어 버렸다.
《고려사》 권88, 열전1 후비1, 경종 후비, 헌애왕태후

그 후 강조의 정변으로 목종이 시해당하고 천추태후가 실각하는 사태가 일어나자 강조에 의해 왕위에 오르게 된다. 이가 고려 8대 황제 현종으로, 즉위 이후 현종은 자신의 목숨을 구해 주었던 승려 진관에 대한 고마움의 표시로 신혈사를 큰 절로 증축해 주었고 진관의 이름을 따서 절 이름도 진관사라고 붙인 것이다. 그리고 이 일대의 지명도 이 이름을 딴 진관동이다.[5] 그 뒤 진관사는 고려 왕조 내내 임금을 보살핀 은혜로운 곳이어서 여러 임금의 각별한 보호와 지원을 받았다. 선종 7년(1090년)에 왕이 행차하여 오백나한재를 베풀었고, 숙종 4년(1099년)과 예종 5년(1110년)에도 왕이 행차하여 참배하고 시주하였다.

진관사가 이름이 알려지게 된 것은 고려 현종의 목숨을 구한 사찰임과 동시에 사찰에서 6백 년 넘게 이어지고 있는 수륙대재 덕분이기도 한데, 땅 위, 물속의 모든 의지할 곳 없는 영혼[6]들과 아귀(餓鬼)를 위하여 법요를 열고 음식을 공양하는 행사인 수륙재는 진관사의 경우 조선 태조가 몸소 국가행사로 명한 기록이 남아 있는데, 조선 초기의 문신 권근이 태조의 명으로 지은 진관사수륙재조성기(津寬寺水陸社造成記)에 따르면 태조 6년(1397년) 태조가 이 절에 수륙사(水陸社)를 설치하고 여러 번 행차하여 수륙재를 지냈다고 한다. 이를 본받아 태종도 태종 13년(1413년) 이 절에서 아들 성녕대군(誠寧大君)을 위한 수륙재를 열고, 향과 제교서(祭敎書)를 내렸으며, 수륙재위전(水陸齋位田) 100결을 하사하여 재를 계속하게 하였다. 이후부터 진관사에서는 매년 1월 또는 2월 15일에 수륙재를 열게 되었고 오늘날까지도 진관사 수륙대재(국가무형문화재 제126호)라는 이름으로 해마다 음력 9월에 거행되고 있다.##

그 뒤 세조 9년(1463년) 화재로 소실된 것을 성종 1년(1470년) 벽운(碧雲)이 중건하였으며, 철종 5년(1854년)과 철종 7년(1858년)에 중수하였다. 고종 16년(1879년)에 경운(慶雲)이 대방을 중수하였고, 1908년에는 송암(松庵)이 오층석탑을 세우고 1910년에 대웅전의 삼존상을 개금하였으며 명부전을 중수하면서 지장보살상을 개금하였다. 또한 독성전과 칠성각을 새로 지었다.

그러나 6.25 전쟁 때 독성전, 나한전, 칠성각 3동만을 남기고 모두 소실되었다. 1964년부터 최진관 비구니가 당우를 차례로 재건하여, 현재에는 대웅전을 비롯한 명부전 · 나한전 · 독성전(獨聖殿) · 칠성각 · 홍제루(弘濟樓) · 종각(鐘閣) · 일주문 · 선원(禪院) · 대방(大房) 등을 갖추었으며, 비구니 수도도량으로 이용하고 있다.

2009년 칠성각 보수 당시 불단 뒷면에서 3.1운동 당시에 쓰였던 태극기와 신대한 2·3호, 자유신종보, 조선독립신문 32·40호 경고문 등 국외 독립운동과 불교계의 관계를 알려주는 유물들이 새롭게 발굴되기도 했다.#

수륙대재에 오르는 각종 음식들은 한국 산사음식의 정수로 평가받고 있으며, 진관사 경내에 '산사음식 연구소'가 마련되어 있어 외국의 셰프들도 한국의 산사 음식을 연구하고 시식하기 위해서 이곳을 찾고 있다고 한다.#

3. 기타

4. 가는 길

서울 버스 701, 서울 버스 7211, 서울 버스 7723번이 진관사 입구 앞을 경유한다.

5. 대중매체

6. 보물 제2142호 서울 진관사 태극기 (서울 津寬寺 太極旗)

파일:2021102517542300.jpg
본 문화재에 대한 설명은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을 참조하면 된다. #

한편 본 유물은 대한민국의 보물 가운데서 마지막으로 지정번호를 부여받은 문화재다. 2021년 11월 19일부로 문화재 지정번호 제도가 폐지되어 더 이상 문화재에 지정번호를 부여하지 않기 때문이다.

7. 관련 문서


[1] 국어 로마자 표기법에 의거하면 Jingwansa가 맞으나 이와는 다르게 진관사에서 공식적으로 사용하는 영문 표기는 Jinkwansa 이다. 이메일로 이 부분에 대해 문의한 결과 진관사 측에서는 Jinkwansa 표기의 발음이 외국인 입장에서 더 정확하다는 의견이 있어 이를 받아 들여 사용중이라고 한다.[2] 모계 기준이며, 부계로는 사촌 형[3] 모계 기준이며, 부계로는 오히려 왕순이 경종, 성종의 사촌동생이라 목종의 당숙이 된다.[4] 소군은 왕의 서자로서 출가해 승려가 된 자에게 주어졌던 호칭이다.[5] 본래는 진관내동과 진관외동이 따로 있었으나, 이 일대가 은평뉴타운으로 재개발되면서 구파발동과 함께 합쳐져 진관동으로 개편되었다.[6] 후손이 없어서 제사를 받을 수 없는 유령들을 말한다. 전근대 사람들에게 자신의 제사가 끊어진다는 말은 집안이 기울었다(망했다)는 말과 거의 같은 의미로 쓰이곤 했다.[7] '뜻하지 않게'라고밖에 말할 수 없는 것이, 북한에서는 진관사의 존재를 모르고 있었던 것 같다. 김신조가 술회하기를, 진관사에 대해선 북에서 전혀 교육을 못 받았다고. 당연하다면 당연한 것이 진관사는 6.25 전쟁 때에 폭격으로 파괴되어 60년대 중반부터 재건이 진행되고 있었는데, 김신조 부대가 가진 지도는 한국전쟁 당시 상황을 가지고 작성한 것이라 진관사가 표시되어 있지 않았던 것이다.[8] 물론 당시는 조 바이든이 대통령으로 당선되기 전이었다.[9] 1박 2일 일정이었다.[10] 편지에는 대통령 당선을 축하하며 세계평화와 코로나19 극복을 염원하는 내용이 담긴 것으로 전해진다.[11]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의 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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