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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 군수리 석조여래좌상

파일:정부상징.svg 대한민국의 보물
328호 329호 330호
금동약사여래입상 부여 군수리 석조여래좌상 부여 군수리 금동보살입상
파일:정부상징.svg 대한민국 보물 제329호
부여 군수리 석조여래좌상
扶餘 軍守里 石造如來坐像
소재지 서울특별시 용산구 서빙고로 137 (용산동6가) 국립중앙박물관
분류 유물 / 불교조각 / 석조 / 불상
수량/면적 1구
지정연도 1963년 1월 21일
제작시기 삼국시대

파일:kKakaoTalk_20230306_095847812_22.jpg

1. 개요2. 내용3. 외부 링크4. 보물 제329호

1. 개요

파일:부여_군수리_석조여래좌상(扶餘_軍守里_石造如來坐像) 문화재청.jpg

扶餘 軍守里 石造如來坐像. 부여 군수리 석조여래좌상은 삼국시대 백제에서 만들어진, 납석(蠟石=곱돌)제 석조 좌불상으로 석가모니를 표현하고 있는 것으로 본다.

부여 군수리 석조여래좌상은 1936년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군수리에 위치한 부여 군수리 사지에서 조선고적연구회의 일본인 고고학자 이시다 모사쿠(石田茂作 1894-1977)에 의해 발굴조사가 이뤄지던 중에 발견되었으며, 이와 함께 '부여 군수리 금동보살입상'도 출토됐다.

부여 군수리 사지는 문헌기록에 전혀 등장하는 바가 없고, 내역도 전해지는 것이 없으며, 발굴 조사에서도 절에 관한 정보를 유추할 만한 별다른 유물도 나온 것이 없고 본 불상에도 명문 같은 것이 전혀 없어서 정확히 언제쯤 만들어진 불상일지는 알 수 없다. 다만 백제가 수도를 공주에서 부여로 옮기고 불교를 크게 일으키던 성왕 때에 만들어진 사찰일 것으로 보여서, 본 불상 역시 이 시기에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정한다.[1]

부여 군수리 석조여래좌상은 백제 시대에 만들어졌지만, 군수리 사지가 폐사된 이후 계속 땅속에 파묻힌 채 보존되어 있어서인지 불상의 형태가 그대로 남아 있어서 보존 상태가 아주 양호하다.

부여 군수리 석조여래좌상은 1963년에 보물 제329호로 지정되었으며, 2023년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다.

2. 내용

파일:kKakaoTalk_20230306_095847812_23.jpg
국립중앙박물관 부여 군수리 석조여래좌상 설명판
부여 군수리 석조여래좌상은 높이 13.5cm의 작은 납석제 불상으로, 천이 흘러내리고 있는 사각형의 대좌 위에 앉은 부처가 몸 앞으로 양손을 모으고 선정인[2]을 취한 채 가부좌를 틀고 있는 형상인데 전체적으로 둥글고 부드러운 분위기를 풍긴다.

부처의 머리에는 위로는 마치 상투를 튼 것 같은 육계(肉髻)가 솟아 있다.[3] 부처의 얼굴은 통통하게 살이 올라 사각진 형태이며 앞으로 살짝 숙였고, 표정은 양 눈을 감고 만면에 가득히 미소를 띠고 있어서 온화하고 따스한 인상을 주는데, 완숙한 조형 솜씨가 드러난다.

미술사학자 김원용은 '백제의 미소'로 유명한 서산 용현리 마애여래삼존상을 평하면서 본 불상의 인상에 대한 코멘트를 다음과 같이 남긴 바 있다.
백제 불상의 얼굴은 현실적이며 실재하는 사람을 모델로 쓴 것 같은 느낌을 주고 있다. 그 미소 또한 현세적이다. 군수리 출토 여래좌상은 인자한 아버지가 머리를 앞으로 내밀고 어린아이들의 이야기라도 듣고 앉은 것 같은 인간미 흐르는 얼굴과 자세를 하고 있어서 백제 불상의 안락하고 현세적인 특징을 단적으로 표시하고 있다. 그런 중 가장 백제적인 얼굴을 갖고 있는 것은 작년(1959)에 발견된 서산 마애불이다. 거대한 화강암 위에 양각된 이 삼존불은 그 어느 것을 막론하고 말할 수 없는 매력을 가진 인간미 넘치는 미소를 띠고 있다. 본존불의 둥글고 넓은 얼굴의 만족스런 미소는 마음 좋은 친구가 옛 친구를 보고 기뻐하는 것 같고, 그 오른쪽 보살상의 미소도 형용 할 수 없이 인간적이다. 나는 이러한 미소를 '백제의 미소'라고 부르기를 제창한다.
‘세대ʼ 1960년 5월호[4]

부처가 입고 있는 옷인 법의(法衣)는 둥근 어깨에서부터 시작해 부드럽게 쭉 늘어져서 바닥의 대좌도 거의 덮었는데, 이와 같은 모습을 상현좌(裳懸座)라고 한다.[5] 또한 법의로 인해 부처의 몸매가 전혀 드러나지 않는데 이는 초기 불상들에서 많이 보이는 형태라고 한다.[6]

불상의 뒷편은 평평하게 깎아놔서 따로 특별하게 조형이 된 것은 없다. 다만 대좌 밑 부분에 촉이 하나 삐죽 튀어나와 있는데, 이로 미루어보아 본래는 이 촉을 작은 감실 같은 데에 꽂아서 불상을 봉안했을 것으로 추정한다.[7] 따라서 본 불상은 백제에 불교가 전래된지 얼마되지 않은 초창기의 승려들이 참선 수행을 할 때 썼을 것으로 보인다.[8]
파일:kKakaoTalk_20230306_095847812_24.jpg
2023년 현재 국립중앙박물관 전시 모습
본 불상에 대한 기록이나 명문은 남아 있는 것이 전혀 없어서 명확하진 않지만, 형태로 보아 석가모니를 표현한 것이 확실하다고 본다. 왜냐하면 불상이 선정인을 하고 있는데, 이는 석가모니가 참선 중에 깊은 명상에 잠겨 있다가 진리를 깨닫는 순간 취하고 있던 수인으로 전해지기 때문에 석가모니와 밀접한 연관이 있기 때문이다.[9]

부여 군수리 석조여래좌상의 제작 국가나 제작 연대는 불명확하지만, 백제의 강역이었던 부여의 절터에서 출토되었다는 점에서 백제의 불상으로 추정하며,[10] 불상이 취하고 있는 선정인은 주로 5∼6세기 경에 국한되어 만들어졌고,[11] 군수리 사지가 세워졌을 시기가 성왕의 통치기인 6세기 경일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본 불상 역시 이 시기인 6세기 전반 경에 만들어졌을 것으로 본다.

부여 군수리 석조여래좌상은 출토지가 명확하고 불상의 형태가 온전하여 보존 상태가 양호하며, 표현 기법 등으로 제작 시기를 6세기 전반으로 추정할 수 있으며 백제 특유의 부드럽고 온화한 분위기가 잘 남아 있는 불상이라는 점 등의 가치를 인정받아 1963년 1월 21일에 보물 제329호로 지정되었다.

3. 외부 링크

4. 보물 제329호

부여 군수리 석조여래좌상(扶餘 軍守里 石造如來坐像)는 1936년에 충청남도 부여 군수리의 백제 절터를 조사할 때 발견된 불상으로, 곱돌로 만들었으며 4각형의 높은 대좌 위에 앉아 있는 백제 특유의 불상이다.

민머리 위에는 상투 모양의 작은 머리(육계)가 솟아 있다. 네모난 얼굴은 두 볼에 웃음이 가득하고, 지그시 감은 눈·넓은 코·미소띤 입 등에서 부드럽고 온화한 분위기를 물씬 풍긴다. 양 어깨에 걸쳐 입은 옷은 두꺼워 신체의 윤곽이 거의 드러나지 않으며, 어깨에서 무릎 위까지 길게 흘러내린 옷자락은 4각형의 대좌(臺座)를 거의 덮고 있다. 이 옷자락의 표현은 부드러우면서도 탄력적이어서 사실성이 넘쳐난다. 가슴 부근에서는 U자형의 옷주름을 표현하였고, 무릎 밑으로 흘러내린 옷자락은 좌우대칭의 Ω형 주름을 나타내고 있다.

두터운 옷자락에 싸여 몸의 윤곽이 드러나지 않는 점, 좁아진 어깨, 두 손을 배 앞에서 모아 깍지를 낀 단아한 손모양 등에서 옛 수법을 잘 간직하고 있는 작품이다.

이 불상은 형식과 자세로 보아 4, 5세기 중국 불상의 영향을 많이 받고 있으나 얼굴 모습이나 신체의 표현 등 세부모습에서 백제화된 양식을 보여주고 있으며 완숙한 6세기 중엽 백제불상의 특징을 갖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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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출처: 한국 미의 재발견 불교 조각: 군수리 출토 납석제여래좌상[2] 禪定印: 참선하는 모습의 손 자세[3] 육계는 무견정상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부처의 정수리에 있는 뼈가 솟아 저절로 상투 모양이 된 것을 지칭한다. 출처: 네이버 국어사전 - 육계4[4] 출처: 굿모닝 충청 2014년 12월 3일자 기사 - 충남의 옛 숨결 백제의 미소로 불리는 강댕이 인바위 산신령에서 재인용[5]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부여 군수리 석조여래좌상[6] 출처: 한국 미의 재발견 불교 조각 - 군수리 출토 납석제여래좌상[7]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 부여 군수리 석조여래좌상[8]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 부여 군수리 석조여래좌상[9]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 부여 군수리 석조여래좌상, 네이버캐스트 문화유산 알아보기 - 부여 군수리 절터 발견 석조여래좌상, 한국 미의 재발견 불교 조각 - 군수리 출토 납석제여래좌상[10]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 부여 군수리 석조여래좌상[11] 출처: 한국 미의 재발견 불교 조각 - 군수리 출토 납석제여래좌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