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8년부터 1902년까지 중화전이었던 건물에 대한 내용은 덕수궁 즉조당 문서 참고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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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수궁의 중화전 및 중화문[1] 德壽宮의 中和殿 및 中和門 | |
소재지 |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중구 세종대로 99 (정동) |
분류 | 유적건조물 / 정치국방 / 궁궐·관아 / 궁궐 |
수량 | 2동[2] |
지정연도 | 1985년 1월 8일 |
제작시기 | 대한제국, 1902년 창건, 1906년 중건 |
<colbgcolor=#e3ba62> 중화전[3] |
YTN 공식 유튜브의 소개 영상[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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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덕수궁의 정전이다. 중요한 국가 의식을 거행하거나 조회를 열던 곳이다.조선의 5대 궁 정전 중 유일하게 20세기에 창건했으며 처음부터 조선 왕궁의 정전이 아닌 대한제국 황궁의 정전으로 세운 건물이다.
'중화(中和)' 뜻은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는 바른 성정'으로, 《중용(中庸)》에서 유래한 말이다.
2. 역사
원래 임진왜란 당시 임시 행궁이었던 경운궁은 인조 연간 이후 즉조당과 석어당 및 주변 별당만이 존재한 작은 궁이었다. 그러다 건양 1년(1896)) 아관파천으로 러시아공사관에 몸을 의탁했던 고종은 1년 뒤 건양 2년(1897) 환궁(還宮)하면서 기존의 경복궁, 창덕궁이 아닌 근처의 경운궁을 선택했다. 하지만 몇백 년을 버려진 곳을 임금의 거처로 삼으려니 대공사가 필요했다. 따라서 명목상으로는 '중건'이라 했지만 사실상 새 궁궐 하나를 창건하는 것과 다름없었다.그래서 한동안은 기존에 있던 즉조당을 태극전, 중화전으로 부르면서 정전으로 사용했다. 그러나 즉조당은 너무 좁았으므로 규모 있는 정전이 필요했다. 그래서 제국 선포 이후 5년이 지난 (광무 6년(1902))에야 정식 정전으로 지은 건물이 중화전이다.
<colbgcolor=#e3ba62> 중층 중화전 | <colbgcolor=#e3ba62> 즉조당을 중화전으로 사용하던 당시 현판.[5] |
《중화전도》 | 《중화전영건도감의궤 속 중층 중화전》 |
<colbgcolor=#e3ba62> 대화재 이후 경운궁 중건과정을 담은 기록인《경운궁영건도감의궤》에 실린 중화전. 단층이다.[7] | <colbgcolor=#e3ba62> 중화전 복구 공사 |
이 곳에서 일어난 중요 행사는 1907년(광무 11년) 1월에 치러진, 당시 황태자였던 순종 - 순정효황후의 결혼식과 1907년 7월에 열린 고종이 순종에게 양위하는 의식[8] 등이 있다.
일제강점기인 1919년에 고종이 승하한 이후, 일제는 1933년에 덕수궁을 공원화하면서 중화전 뜰의 박석을 걷고 잔디와 꽃을 심는 등 훼손했다. 8.15 광복 이후인 1980년대 말에 문화재관리국에서 복원하여 오늘에 이른다.
3. 정문
자세한 내용은 덕수궁 중화문 문서 참고하십시오.4. 구조
- 정면 5칸(61.4척), 측면 4칸(58척), 총 20칸이다. 2단으로 쌓은 넓은 월대 위에 높직한 주춧돌을 놓고 그 위에 둥근 기둥을 세웠다. 건물 내 · 외부 사이의 기둥 사이에는 분합문을 달아 언제나 여닫을 수 있게 했다.
<colbgcolor=#e3ba62> 중화전 내부[10] |
<colbgcolor=#e3ba62> 중화전 답도에 새겨진 용 | <colbgcolor=#e3ba62> 중화전 천정의 용 |
<colbgcolor=#e3ba62> 중화전 행각 흔적 |
5. 여담
- 광복 이후 6.25 전쟁을 겪으면서 서울 시내에 마땅한 공간이 없었기 때문인지 1950년대와 1960년대에는 중화전 뜰에서 정부행사나 공연 등이 자주 열렸었다. 특히 1961년 5.16 군사정변 당시에는 정변에 동원된 제1공수특전여단이 이 곳에 주둔해서 "반혁명인사"로 분류된 인사들을 이곳에 가두었고 이후에는 전국적으로 잡아들인 깡패들을 이 곳에서 굴렸다.(...)
6. 대중 매체에서
대한제국 시기를 다룬 작품 자체가 별로 없고, 있어도 다른 궁궐에서 촬영을 하기 때문에 사극에 등장한 적은 없었다.2016년에 개봉한 영화 〈덕혜옹주〉에서 단층의 중화전이 나온다.
2018년 7월에 tvN에서 방영하는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의 배경이 20세기 초반의 대한제국이기 때문에 중화전이 나온다. 하지만 실내는 거의 실제 중화전이 아닌 부안에 있는 세트장의 모습으로 나온 것이 함정.
[1] 건물과 문을 포함한 권역의 정식 등재명칭.[2] 중화문 포함. 문화재청의 공식 기준 참조.[3] 두 번째 사진 출처 -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4] 중화전만 개별적으로 소개하는 영상이 없어 부득이 덕수궁 전체를 다룬 영상으로 대체한다.[5] 왜 이 현판이 즉조당에 걸렸는지는 이 포스팅을 참고. 현재 국립고궁박물관에서 소장 중이다. 한 때 인터넷 상에서 중층 당시 중화전에 걸었던 현판으로 잘못 알려져 있었다. 참고로 중층 중화전 현판은 경운궁 대화재 당시 같이 불 타 없어졌다.[6] 지붕이 두 겹으로 밖에서는 2층처럼 보이나 실제 내부는 단층으로 천장이 높은 구조이다. 경복궁 근정전이나 창덕궁 인정전을 연상하면 된다.[7] 사진 출처 - 국립고궁박물관.[8] 단, 이 때는 고종과 순종이 모두 불참했기에 내관들이 대리했다.(...) 결국 정식 즉위식은 동년 8월 27일 돈덕전에서 행했다.[9] 소의 혀란 뜻으로, 한식 목구조 공포에서 보 방향으로 첨차에 직교하여 거는, 끝을 소의 혀 모양으로 장식하여 오려낸 부재를 말한다.[10] 사진 출처 -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11] 唐家. 옥좌 위에 다는 집 모양의 모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