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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사적 제124호 덕수궁 | ||
<colbgcolor=#e3ba62> 덕수궁 덕홍전 德壽宮 德弘殿 |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중구 세종대로 99 (정동 5-1) | |
건축시기 | 1896년 (창건) 1904년 (중건) 1911년 (덕홍전 개조) |
<colbgcolor=#e3ba62> 덕홍전[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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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덕수궁의 전각이다. 함녕전 서쪽에 있다. 덕수궁의 건물들 중 (현대에 세운 시설물을 제외하고) 가장 나중에 지었다.'덕홍(德弘)' 뜻은 '덕(德)이 넓고(弘) 크다'이다.
2. 역사
덕홍전은 일제강점기인 1912년에 처음 지었다. 즉, 조선왕조 시절에는 없었다.<colbgcolor=#e3ba62> 덕홍전 자리에 있던 경효전[2] |
<colbgcolor=#e3ba62> 《경운궁중건도감의궤》의 경효전 모습[4] |
이렇게 제례와 인연이 멀어지고, 또한 고종이 살던 함녕전과 가까워서인지 일제강점기인 1912년에 경소전을 알현실로 고쳐 짓고 이름을 덕홍전으로 바꾸었다. 이 때, 창덕궁의 알현실로 개조되었던 인정전을 참고했다고 한다.
주변도 크게 달라졌다. 우선 함녕전과 영역을 구분하던 담과 문을 헐고 같은 영역으로 만들었다. 혼전 관련 시설들을 전부 없애고, 대신 덕수궁 내 이왕직 청사[7] 및 귀빈실과 찬시실 등을 새로 만들었다. 그리고 귀빈실 및 함녕전과 통하는 복도를 설치했다. 함녕전에 거주하던 고종이 편하게 덕홍전을 오갈 수 있게 하기 위함이었다.
<colbgcolor=#e3ba62> 1925년 12월 호 《조선과 건축》[8]에 실린 일제강점기 덕홍전 실내[9] |
3. 구조
- 장대석을 네 벌을 쌓아 기단을 만들었으며 기단 앞에 장대석 세 벌을 쌓은 대를 추가로 설치했다. 기단 상판은 전돌로 마감했고, 대 위는 박석을 깔았다. 그 앞에 소맷돌이 있는 계단을 두었고 측면에는 대 자체를 계단식으로 쌓았다. 그리고 건물의 서북쪽에 소맷돌 없는 3단의 계단을 놓았다.
- 정면 3칸, 측면 4칸의 총 12칸이다. 출입문은 정면 가운데 칸과 동쪽 측면의 남쪽에서 3번째 칸, 그리고 서쪽의 남쪽에서 2번째 칸에 달려있다. 나머지는 전부 중방 위에 교창을 둔 창문이며 교창의 창호는 빗살로, 창의 창호는 띠살로 꾸몄다.
<colbgcolor=#e3ba62> 파일:덕홍전 정면 출입문 | <colbgcolor=#e3ba62> 파일:덕홍전 측면 출입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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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e3ba62> 덕홍전 내부[10] |
<colbgcolor=#e3ba62> 덕홍전 샹들리에 |
덕홍전 커튼박스 |
4. 여담
<colbgcolor=#e3ba62> 덕홍전에서 열린 덕수궁 션샤인 프로젝트[11] |
[1] 첫 번째 사진 출처 - 덕수궁 트위터.
두 번째 사진 출처 -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2] 사진 출처.[3] 당시 아관파천으로 고종이 경복궁을 떠나고 경운궁을 환궁(궁으로 돌아가다)할 곳으로 정하면서 경복궁의 건물 일부를 경운궁으로 옮겨지었다.[4] 사진 출처 - 국립고궁박물관.[5] 수풍당에 계속 있다가 1919년 1월 고종 승하 후 1921년 3월에 종묘에 같이 모셔졌다.[6] 임금의 생전에 황후, 왕비가 죽은 경우에는 신주를 혼전에 계속 두고 있다가 임금이 죽은 다음에야 같이 종묘에 봉안할 수 있었다.[7] 일제강점기 이왕가(옛 대한제국 황실)을 담당하던 기구.[8] 일제강점기에 있었던 건축 단체 조선건축회가 1922년 6월부터 1945년 2월까지 펴낸 기관지.[9] 사진 출처 - 국립고궁박물관. 사진 아래 설명에는 석조전(石造殿)으로 적어두었으나 잘못 쓴 것이다.[10] 사진 출처 - 카카오맵.[11] 사진 출처 - 문화재청 트위터##.[12] 총괄 디렉터는 서영희.
두 번째 사진 출처 -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2] 사진 출처.[3] 당시 아관파천으로 고종이 경복궁을 떠나고 경운궁을 환궁(궁으로 돌아가다)할 곳으로 정하면서 경복궁의 건물 일부를 경운궁으로 옮겨지었다.[4] 사진 출처 - 국립고궁박물관.[5] 수풍당에 계속 있다가 1919년 1월 고종 승하 후 1921년 3월에 종묘에 같이 모셔졌다.[6] 임금의 생전에 황후, 왕비가 죽은 경우에는 신주를 혼전에 계속 두고 있다가 임금이 죽은 다음에야 같이 종묘에 봉안할 수 있었다.[7] 일제강점기 이왕가(옛 대한제국 황실)을 담당하던 기구.[8] 일제강점기에 있었던 건축 단체 조선건축회가 1922년 6월부터 1945년 2월까지 펴낸 기관지.[9] 사진 출처 - 국립고궁박물관. 사진 아래 설명에는 석조전(石造殿)으로 적어두었으나 잘못 쓴 것이다.[10] 사진 출처 - 카카오맵.[11] 사진 출처 - 문화재청 트위터##.[12] 총괄 디렉터는 서영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