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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복궁 · 창덕궁 · 창경궁 · 덕수궁 · 경희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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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사적 제124호 덕수궁 | ||
<colbgcolor=#e3ba62> 덕수궁 영성문 德壽宮 永成門 |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중구 세종대로 99 (정동 5-1) | |
건축시기 | 1896년 추정 (창건) / 1912년 (철훼) |
<colbgcolor=#e3ba62> 선원전 영역의 정문이 된 영성문. 순명효황후(당시 황태자비)의 국장 때 촬영한 사진이다. |
1. 개요
덕수궁의 궁문으로 서북쪽 담장에 있었다. 지금은 사라지고 없다. 다만, 현재의 덕수궁 서북쪽 담에 있었던 것은 아니다. 지금의 담은 일제강점기와 현대에 남동쪽으로 물린 것으로, 영성문 자리는 현재 덕수궁길과 새문안로 2길이 만나는곳 남쪽 아래이다.2. 역사
원래 임진왜란 당시 임시 행궁이었던 경운궁(덕수궁의 원래 이름)은 인조 연간 이후 즉조당과 주변 별당 몇 채 빼고는 아무 것도 없던 궁이었다. 그러다 1896년(건양 원년) 아관파천으로 러시아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겼던 고종이 1년 뒤 1897년(건양 2년) 궁으로 돌아갈 때 기존의 경복궁, 창덕궁이 아닌, 근처의 경운궁을 선택했다. 고종은 애초부터 환궁을 경운궁으로 하려고 했는지, 러시아공사관에 머물면서 경운궁 공사를 실시했다.[1]이때 영성문이 지어진지는 불명이나 안쪽의 부지는 일종의 경운궁의 월경지로 포함되어서 빈전인 흥덕전이 세워졌다.
그리고 1900년(광무 4년) 화재로 선원전 건물과 안에 모신 어진이 전부 불탔다.# 1년 뒤 복구했는데 원래 자리인 포덕문 안쪽에 다시 짓지 않고 경운궁 서북쪽에 있는 영성문(永成門) 안쪽의 수어청 자리에 새로 건립했으며 어진은 각 지방에 흩어진 그림을 모사[2]하여 봉안했고 이때 흥덕전 영역이 선원전과 겹쳐서 흥덕전을 약간 이건한 뒤에 어진을 모사하는 곳으로 사용했고 이후 1903년에 명헌태후의 사망으로 문경전 서쪽의 희안전을 경운궁(지금의 덕수궁)으로 옮겨 혼전으로 사용했고 1904년(광무 8년) 당시 황태자였던 순종의 첫 번째 아내 순명효황후 민씨가 사망하자 문경전을 경운궁(지금의 덕수궁) 의효전으로 옮겨 지어 혼전으로 사용하는 등 주로 이 부지는 제례 기능을 담당했고 영성문을 국상 행렬의 주 출입문으로 사용해서 선원전 영역을 속칭 '영성문 대궐(永成門 大闕)'로 불렀다.
일제강점기 이후에도 덕수궁 선원전에서 꾸준히 제사를 지냈다. 그러나 1919년 고종이 승하한 이후 일제가 1921년에 덕수궁(경운궁)의 선원전을 옮겨다 창덕궁 서북쪽 옛 대보단 자리에 짓고 새로운 선원전으로 사용하게 하면서 덕수궁의 선원전 영역은 비었고 영성문은 덕수궁길을 놓으면서 헐리고 만다.
이후 덕수궁 선원전 일대를 복원하면서 덕수궁길을 우회하는 도로를 세운 뒤에 복원할 예정이다.
3. 구조
정면 3칸,측면 2칸의 총 6칸의 문이었다. 현판은 흰색 바탕의 검은 글자이며 지붕은 우진각 지붕이었다.[1] 하지만 몇 백 년을 버려진 곳을 임금이 거처로 삼으려니 대공사가 필요했고, 명목상으로는 중건이라 했지만 사실상 새 궁궐 하나를 새로 짓는 것이나 다름없었다.[2] 摹寫. 베껴 그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