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洛山寺 銅鐘. 조선 세조 때 왕명을 내려 예종 1년(1469)에 낙산사에 조성된 종. 대한민국 보물 제479호였다.소실 이전의 모습
2. 내용
낙산사는 정철의 관동별곡에 소개된 관동팔경에도 들어간 사찰로, 고대로부터 동해 일출경으로 매우 유명한 곳이다. 신라 문무왕 11년(671)에 창건된 유서 깊은 절로 해변에 위치한 입지가 특이하다. 우리나라 불교계에서는 3대 관음기도도량 중에 낙산사를 꼽는다. 고려시대 여몽전쟁 초 고종 18년(1231)에 몽골이 불을 질러 사찰이 모조리 소실되었다. 이때 수백여 년을 이어오던 관음상과 수정염주, 복장 등 보물들을 몽골군이 약탈한 뒤로는 행방을 알 수 없다.이후 200여 년이 넘게 쓸쓸한 폐허로 방치되다가 조선 세조가 세조 14년(1468)에 학열대사(學悅)를 중창주로 삼아 절을 대규모로 새로 중창하도록 명령했다.
낙산사 동종은 높이 158 cm인 대형 범종이었다. 종의 몸통에 양각된 명문에 따르면 세조 때에 중수하여 성화 5년(1469) 을축일에 조성하였다. 그 어떤 종보다도 화려하다. 종에는 보살상 네 좌와 고사리 모양 물결 무늬, 연꽃 36송이와 삼각형으로 큰 꽃 세 송이를 양각했고 종의 정상에는 쌍룡을 장식했다. 종신의 끝부분은 굵게 새겨진 권운문(卷雲文)과 가늘게 새긴 파상문(波狀文)으로 장식되어 있다.
현존하는 우리나라 범종 중 가장 화려하게 꾸며진 것으로 유명하며 특히 양각된 보살입상은 우리나라 조각물 중 최우수작으로 손꼽히고 있다. 무엇보다 수백여 년의 오랜 세월에도 불구하고 보존 상태가 매우 양호하여 현대에도 아침 저녁으로 예불 때에 타종되고 있었다.
3. 소실
그러나 2005년 4월 5일 산불 때문에 완전히 용해, 소실되었다. 이 때 문화재 가치를 상실했다고 하여 보물에서도 지정해제되어 보물 제479호는 결번이 되었다. 종 자체는 1년 6개월 만에 복원해 다시 달아놓았으나, 복원품 내부에 당시 문화재청장이던 유홍준의 이름을 새기는 내용을 포함한 복원기를 추가해 원형을 훼손한 복원품을 만든 점이 큰 비판을 받기도 했다.[1]
4. 보물 제479호
조선 예종 1년(1469)에 그의 아버지인 세조를 위해 낙산사에 보시(布施)한 높이 158㎝, 입지름 98㎝의 종이다.
종 꼭대기에는 사실적이고 기품 있어 보이는 용 2마리가 서로 등지고 있어 종의 고리역할을 하고 있다. 어깨 부분에는 연꽃잎으로 띠를 둘렀다.>몸통에는 가운데 굵은 3줄을 그어 상·하로 나누고, 위로 보살상 4구를 새겼다. 보살상 사이사이에는 가로로 범자를 4자씩 새기고, 보살상 머리 위로는 16자씩을 새겨 넣었다.
몸통 아래로는 만든 시기와 만들 때 참여한 사람들에 대한 기록이 남아있다. 종의 밑 부분에는 너비 9.5㎝의 가로줄이 있어, 그 안에 당시에 유행하던 물결무늬를 새겨 넣었다.
큰 종으로는 조각수법이 뚜렷하고 모양이 아름다우며 보존상태가 좋아, 한국 종을 대표하는 걸작품이었다.
그러나 2005년 4월 5일 낙산사에 발생한 산불로 낙산사 동종이 소실, 용해되어 문화재위원회의 심의를 거쳐 2005년 7월 7일 지정 해제되었다.
종 꼭대기에는 사실적이고 기품 있어 보이는 용 2마리가 서로 등지고 있어 종의 고리역할을 하고 있다. 어깨 부분에는 연꽃잎으로 띠를 둘렀다.>몸통에는 가운데 굵은 3줄을 그어 상·하로 나누고, 위로 보살상 4구를 새겼다. 보살상 사이사이에는 가로로 범자를 4자씩 새기고, 보살상 머리 위로는 16자씩을 새겨 넣었다.
몸통 아래로는 만든 시기와 만들 때 참여한 사람들에 대한 기록이 남아있다. 종의 밑 부분에는 너비 9.5㎝의 가로줄이 있어, 그 안에 당시에 유행하던 물결무늬를 새겨 넣었다.
큰 종으로는 조각수법이 뚜렷하고 모양이 아름다우며 보존상태가 좋아, 한국 종을 대표하는 걸작품이었다.
그러나 2005년 4월 5일 낙산사에 발생한 산불로 낙산사 동종이 소실, 용해되어 문화재위원회의 심의를 거쳐 2005년 7월 7일 지정 해제되었다.
[1] 원형을 훼손하지 않고 별도의 표지 등을 만드는 방법이 얼마든지 있는 데다가, 유홍준은 화재 발생 당시에도 문화재청장이었기에 이 사건의 사고 책임자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