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모에 미러 (일반/어두운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4-01-20 16:36:26

익산 심곡사 칠층석탑

파일:익산 심곡사 칠층석탑.jpg

파일:익산 심곡사 칠층석탑 출토 금동불감 및 금동아미타여래칠존좌상2.jpg
파일:익산 심곡사 칠층석탑 출토 금동불감 및 금동아미타여래칠존좌상.jpg

1. 개요2. 내용3. 고려시대 불감 발견4. 외부 링크5.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192호6. 보물 제1890호7. 여담

1. 개요

益山 深谷寺 七層石塔. 조선 세조 재위시기에 왕의 명으로 전북특별자치도 익산시 낭산면 장암길의 심곡사에 건립된 칠층석탑. 현재 석탑이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192호로, 내부에서 발견된 불감 1점, 불상 7구는 대한민국 보물 제1890호로 지정되어 있다.

2. 내용

익산 심곡사의 대웅전 앞마당에 만들어져 있는 7층 석탑으로,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것임에도 불구하고 백제고려의 양식을 잇고 있는 아주 특이한 탑으로 유명하다.

탑에는 옥신(屋身)과 옥개석이 1장의 돌로 이루어져 있는데 옥개석 받침은 3개로 표현되어 있고 경사가 완만한 옥개석의 처마끝은 모서리가 살짝 들어 올려져 있어 백제탑의 양식을 보여준다. 또한 받침 부분과 탑몸 부분은 전형적인 고려탑의 양식을 하고 있다.

백제-고려-조선으로 이어지는 탑의 양식 변화 과정을 자세히 보여주는 유물이다. X-선과 형광분석기를 이용한 탑의 연대조사와 사찰의 기록을 통해 15세기 중엽, 조선 세조 재위시기에 왕실의 명으로 만들어진 탑임이 확인되었다.전북일보 : "익산 심곡사 칠층석탑 조선시대 15세기 중엽 창건"

3. 고려시대 불감 발견

2012년 6월 석탑의 해체 수리 도중 탑 안에서 고려시대의 불감이 발견되었다.

불감은 불교가 중흥하던 고려시대에 집중 제작됐지만 현재 전해지는 것은 국내 10점을 포함해 전 세계적으로 15점에 불과하다. 석탑에서 발견한 불감의 형태를 확인해본 결과 현재 일본에 유출되어 있는 14세기말 고려 여래설법도(如來說法圖) 불감과 양식과 구조가 동일하여 이 시기에 제작된 것임이 확인되었다.일제강점기 대구의 병원장이자 고미술 수장가였던 이치다 지로(市田次郞)가 소장하다 일본으로 반출한 고려 불감, 2016년 보물로 지정된 익산 심곡사 칠층석탑 출토 금동불감과 양식과 구조면에서 유사

이후 사찰문헌 연구를 통해 1450년대에 조선의 7대 왕이었던 세조가 칠층석탑을 건설하면서 탑에 보존한 고려시대의 문화재임이 확인되었다. 극히 희귀한 고려 불감으로 국가지정 문화재로 지정되었다.

4. 외부 링크

5.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192호

신라 무염대사가 처음 지었다는 심곡사의 대웅전 앞마당에 자리한 칠층석탑으로서, 원래는 심곡사에서 200m 정도 떨어진 곳에 있었다가 이곳으로 옮겨진 것이라고 한다.

1층의 받침돌 위에 7층의 지붕돌을 올리고 맨 위에는 작은 연꽃봉우리 모양의 머리장식을 얹은 모습으로 전체적으로 높다란 느낌을 준다. 바닥돌 위에 있는 받침돌에는 엎어 놓은 모습의 연꽃문양과 위를 향한 모습의 연꽃문양이 아래 위로 각각 새겨져 있다. 탑몸돌과 지붕돌이 1매의 돌로 이루어져 있으며 탑몸돌에는 기둥 모양이 생략되었다. 지붕돌 받침은 3개로 표현되어 있고 경사가 완만한 지붕돌의 처마끝은 모서리에 가서 살짝 들어 올려져 백제탑의 전통을 이어오는 면이 보인다.

탑의 일부가 나중에 고쳐진 흔적이 있고 받침 부분과 탑몸 부분이 서로 조화되지 못한 점이 있기는 하나 전체적으로 볼 때 고려시대 말∼조선시대 초기 석탑의 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받침부분에 나타난 고려시대 탑의 양식과 지붕돌 받침에 나타난 조선시대 탑의 양식, 지붕돌의 백제탑 양식을 모두 간직하고 있어 익산 지역에서 석탑 변화과정을 파악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6. 보물 제1890호

「익산 심곡사 칠층석탑 출토 금동불감 및 금동아미타여래칠존좌상」은 2012년 6월 석탑의 해체 수리시, 지대석 윗면에 마련된 사각형의 홈(25.0×24.0cm, 깊이 18.0cm)에서 발견되었다. 불감은 밑판, 좌우측면판, 뒤판, 뚜껑 등이 각각 1판으로 제작되었고 문비만 2판으로 제작되었다. 뚜껑은 지붕의 네 면의 모를 죽인 녹정형(盝頂形)으로 정상에는 2개의 고리가 달려 있다. 감실의 내면 중앙벽면에는 타출기법으로 아미타여래설법도를 나타내었고, 문비에는 역동적인 금강역사를 배치하였다. 7구의 불상은 불감의 앞쪽에서 아미타여래와 관음·대세지보살상이 발견되었고, 뒤쪽에서 2구의 여래와 관음보살과 지장보살이 발견되었다. 이들 불상은 대체로 높은 육계、큼직한 연봉모양의 정상계주, 잘록한 허리와 육감적인 신체표현과 감각적인 세부 표현, 삼각형 모양으로 仰․覆蓮이 맞닿은 연화좌, 원반모양의 귀고리, U자형으로 두껍게 늘어진 목걸이 등을 보이고 있다. 이는 이 시기에 크게 유행했던 元․明代 라마불교의 영향을 받아 제작된 여말선초기 소형 금동불상들과 양식적으로 상통하는 요소이다. 7구의 불상은 2개의 양식군으로 분류되는데, 라마불상양식을 강하게 반영한 아미타여래삼존상과 이들 양식을 수용하여 어느 정도 우리식으로 변모시킨 4구의 불·보살상으로 구분된다. 따라서 이들 불상을 통해 여말선초기 원․명대 외래 양식의 전래와 수용 과정을 살필 수 있어 더할 나위 없이 중요하며, 또한 분명한 출토지에 7구의 불상이 모두 한 불감 내 온전한 형태로 발견되었다는 점에서 지정가치가 크다.

7. 여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