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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경궁 명정문 및 행각 | 창경궁 옥천교 | 양주 회암사지 선각왕사비 |
대한민국 보물 제386호 | |
창경궁 옥천교 昌慶宮 玉川橋 | |
소재지 |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종로구 창경궁로 185 (와룡동) |
분류 | 유적건조물 / 교통통신 / 교통 / 교량 |
수량 | 1동 |
지정연도 | 1963년 1월 21일 |
제작시기 | 조선 시대, 1484년 |
<colbgcolor=#bf1400> 옥천교[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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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창경궁의 금천교이다.금천교는 이름대로 금천을 건너기 위해 세운 돌 다리이며, 금천은 풍수지리적인 이유[2]와 외부와의 경계[3]를 나타내기 위해 궁궐의 정문과 중문 사이에 둔 인공 개천이다. 그러나 창경궁은 중문이 없기에 정문인 홍화문과 정전의 정문인 명정문 사이에 위치하고 있다.
2. 역사
<colbgcolor=#bf1400> 〈동궐도〉에서 묘사한 옥천교 | <colbgcolor=#bf1400> 〈조선고적도보〉에 실린 옥천교 |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 당시 모든 궁궐의 건물이 불탔으나 옥천교는 돌로 지었기에 피해를 입지 않았다. 이후 큰 변화없이 오늘에 이른다. 즉 현존하는 궁궐의 금천교 중 창덕궁 금천교에 이어 두 번째로 오래되었다.
3. 금천
옥천교 밑을 흐르던 창경궁의 금천은 '옥류천(玉流川)'이다. 창덕궁 후원의 옥류천과는 이름만 같은 다른 개울이다. 하지만 창경궁 옥류천의 발원지도 창덕궁 후원이다.연경당 서쪽과 부용정, 관람정 권역에서 발원한 것으로 보이는 세 갈래의 물이 춘당지에서 합류한 뒤# 남쪽으로 흘러 옥천교를 지난다. 원래는 창경궁 동남쪽으로 물이 빠져나온 뒤 계속 남쪽으로 흘러 종로 5, 6가동을 거쳐 지금의 예지동 광장시장 인근에서 청계천과 바로 합류했으나 현재는 창경궁 경내를 제외한 전 구간이 복개되었다.
발원지가 궁 안이고, 또 경희궁과 달리[5] 궁역 자체에 큰 훼손도 없었기 때문에 현재 궁궐의 금천 중 유일하게 자연수가 흐르고 있다.
4. 구조
- 너비 약 6.6m, 길이 약 9.9m로 경복궁 영제교와 창덕궁 금천교보단 규모가 작다. 이는 경복궁, 창덕궁은 평소 왕이 머물 곳으로 지은 것이지만 창경궁은 위에 언급했듯 원래 대비궁으로 지었기 때문이다. 옥천교 뿐 아니라 창경궁의 홍화문(정문), 명정전(정전), 문정전(편전) 등도 다 그렇다.
- 좌우에는 돌 난간을 설치했는데, 연꽃 잎 모양의 하엽동자(荷葉童子) 기둥을 4개씩 세우고, 그 사이에 한 장의 돌로 만든 판석을 끼웠다. 판석에는 도드라지게 새긴 하엽동자기둥을 배치하고 2개씩 구멍을 뚫어내었다. 난간 양 끝에는 법수(法首)라는 돌 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상서로운 짐승들의 조각을 새겼다.#
- 얼핏 봐선 모르지만 아주 자세히 보면 가운데가 약간 솟아올라있는데 비올 때 빗물이 다리에 고이지 않고 자연스럽게 빠지게 하기 위해서이다.
- 다리 아랫 부분에 무지개 모양의 아치(전통 건축에선 홍예라고 표현한다.)를 2개 만들었다. 아치 사이에는 괴수 얼굴, 즉 귀면(鬼面)을 조각한 돌을 끼우고 그 위에 얇은 댓돌을 길게 덮었다.
- 홍예 바깥쪽에는 긴 댓돌을 3단으로 쌓아 하부구조를 마련했으며, 그 위에 긴 댓돌을 깔아 바닥을 만들고 그 위에 귀틀석과 청판석을 배열하면서 3개의 돌길을 놓았다. 왕이 다니는 어도(御道)는 가운데에 있는데 가장자리의 신하들이 다니는 길보다 조금 높고 약간 더 넓게 만들어 서열을 분명히 나타내었다.
<colbgcolor=#bf1400> 홍화문, 옥천교, 명정문, 명정전의 축 |
[1] 첫 번째 사진 출처 - 문화재청
두 번째 사진 출처 - 문화재청 국가유산포털: 보물 창경궁 옥천교
세 번째 사진 출처 - 문화재청 국가유산포털: 보물 창경궁 옥천교[2] 궁궐의 앞쪽에 물을 흐르게 하여 풍수에서 가장 좋다는 배산임수를 구현했다.[3] 물론 실제 궁궐과 외부의 경계는 문과 담이지만, 잡귀를 쫓아내고 또 외부인이 궁에 들어갈 때 마음을 경건하게 한다는 의미로 금천을 상징적인 경계로 두었다.[4] 議政府左贊成. 의정부에 속해 3의정(영의정, 우의정, 좌의정)을 보좌하는 직책. 오늘의 국회부의장 격이다.[5] 경희궁의 금천도 궁 안에서 발원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전부 메워졌다. 지금은 복원한 경희궁 금천교 양 옆에 아주 조금 재현해놓은 것만 볼 수 있다.
두 번째 사진 출처 - 문화재청 국가유산포털: 보물 창경궁 옥천교
세 번째 사진 출처 - 문화재청 국가유산포털: 보물 창경궁 옥천교[2] 궁궐의 앞쪽에 물을 흐르게 하여 풍수에서 가장 좋다는 배산임수를 구현했다.[3] 물론 실제 궁궐과 외부의 경계는 문과 담이지만, 잡귀를 쫓아내고 또 외부인이 궁에 들어갈 때 마음을 경건하게 한다는 의미로 금천을 상징적인 경계로 두었다.[4] 議政府左贊成. 의정부에 속해 3의정(영의정, 우의정, 좌의정)을 보좌하는 직책. 오늘의 국회부의장 격이다.[5] 경희궁의 금천도 궁 안에서 발원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전부 메워졌다. 지금은 복원한 경희궁 금천교 양 옆에 아주 조금 재현해놓은 것만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