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ki style="margin: 0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ㅏ | ㅡ | ㅡ | ㅡ | ㅡ | ㅡ | ㅡ | ㅡ | ㅡ | ㅡ | ㅡ | ㅡ | ㄱ |
ㅣ | 집춘문 | ||||||||||||
← | 대온실 | 관덕정 | ㅣ | ||||||||||
창덕궁 | 춘당지 | 국립어린이과학관 | ㅣ | ||||||||||
성종 태실 | 앙부일구 풍기대 | 관리사무소 | 월근문 | ||||||||||
함양문 | ㅣ | ||||||||||||
ㅣ | |||||||||||||
통명전 | 양화당 | 집복헌 | 영춘헌 | ㅣ | |||||||||
ㄴ | ㄱ | ㅣ | |||||||||||
ㅣ | 경춘전 | 환경전 | ㅣ | ||||||||||
ㅣ | 함인정 | ㅣ | |||||||||||
빈양문 | 명정전 | 명정문 | 옥천교 | 홍화문 | |||||||||
ㄴ | ㅡ | ㅡ | 숭문당 | 문정전 | 문정문 | ㅣ | |||||||
ㅣ | |||||||||||||
| ㅣ | ||||||||||||
| 선인문 | ||||||||||||
ㅣ | |||||||||||||
| + | ↓ | 종묘 | ㅡ | ┛ | ||||||||
※ '●' 표시가 붙은 건물은 현재 창덕궁 영역이다. | |||||||||||||
경복궁 · 창덕궁 · 창경궁 · 덕수궁 · 경희궁 |
대한민국의 국가등록문화재 | ||||
79호[1] | ← | 83호 | → | 84호 |
파주 경의선 장단역 죽음의 다리 | 창경궁 대온실 | 서울 원서동 고희동 가옥 |
<colbgcolor=#bf1400> 대온실[2] | |
대온실 가을 풍광(왼쪽)과[3] 대온실 야경[4] | |
TBS에서 제작한 〈일제 성역을 짓밟다 - 창경궁 대온실〉 영상 | <colbgcolor=#bf1400> KBS 〈뉴스광장〉에서 제작한 〈창경궁 대온실〉 영상 |
{{{#!wiki style="margin: 0 -12px; border-right: 2px solid transparent; border-left: 2px solid transparent" {{{#!wiki style="margin: 0px; margin-top: -12px; margin-bottom: -7px" | <tablewidth=100%><tablebordercolor=#315288> 대한민국 국가등록문화재 제83호 | |
<colbgcolor=#315288> 창경궁 대온실 昌慶宮 大溫室 |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창경궁로 185 (와룡동, 창경궁) | |
수량 / 면적 | 1동 1층 바닥면적(연면적) 582.3㎡, 높이 10.5m | |
분류 | 등록문화재 / 기타 / 문화집회시설 | |
지정연도 | 2004년 2월 6일 | |
건축시기 | 융희 3년(1909년) | |
소유자 (소유단체) | 국(국가유산청) | |
관리자 (관리단체) | 국가유산청 창경궁관리소 | }}}}}} |
[clearfix]
1. 개요
창경궁에 있는 식물원이다. 춘당지의 북쪽, 관덕정의 서쪽에 있다.2. 역사
<colbgcolor=#bf1400> 일제강점기 대온실[5] |
당시 대한제국은 실권을 일제에게 모두 빼앗긴 상태였고, 일제는 대한제국의 모든 내정에 간섭하고 있었다. 1907년(융희 원년)에 순종이 창덕궁으로 거처를 옮긴 후, 일제는 근심이 많은 순종의 마음을 달랜다는 명목으로 창덕궁 옆에 있는 창경궁을 유원지로 개조하여 동물원과 식물원을 세우고 이름도 '창경원(昌慶苑)'으로 바꾸었다. 창경원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해당 문서 참조. 그때 식물원의 대온실로 만든 것이 이 건물이다. 설계는 일본 신주쿠 교엔[6] 담당자였던 일본인 원예학자 후쿠바 하야토(福羽逸人)가 맡았다. 시공은 프랑스 회사에서 맡았지만 어느 회사인지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다.
창경원 대온실은 한국 최초의 서양식 온실로, 당시 동양 최대의 규모였다. 대온실에는 당시로서도 쉽게 보기 힘든 열대 식물을 비롯한 다양한 화초들을 전시해두었다.
일제강점기 이후에는 '이왕직식물원(李王職植物園)'으로 불렸다.# 8.15 광복 이후에도 창경원은 궁으로 돌아가지 못한 채 계속 유원지로 남았고 식물원도 예전과 같이 기능했다. 그러다 1950년 6.25 전쟁으로 창경원은 폐원했고, 대온실은 폭격으로 인해 일부 훼손되었다.
<colbgcolor=#bf1400> 《대한뉴스》 - 1177호, 〈난초 전시회〉 영상에 나온 돔 지붕 형태의 온실 |
1980년대에 창경원을 창경궁으로 복원하자는 여론이 생겨났고, 이에 문화공보부와 서울특별시에서 〈창경궁 복원 계획〉을 발표했다. 그래서 1983년 12월부터 일반인의 출입 및 관람을 중단시킨 후, 일본식 건물 및 놀이시설과 동물원, 식물원 시설 등을 없애고 관련 시설들을 경기도 과천시에 있는 서울대공원으로 옮겼다.
<colbgcolor=#bf1400> KBS 뉴스에서 다룬 창경궁 대온실 보수 · 복원 보도 영상 |
3. 여담
- 2015년 5월 문화재청과 한국문화재재단에서는 궁중문화축전 기간 동안 〈궁궐愛서, 소중한 하루를 선물하세요〉라는 행사를 진행했다. 대한민국 국민 모두를 대상으로 ‘효(孝, 효행)’, ‘우(友, 우정)’, ‘애(愛, 사랑)’를 주제로 한 사연을 공모했으며, 이 중 '애(愛)' 사연을 채택받은 사람에게 대온실 정원을 대여해주었다.#[7]
- 온실 주변에 길고양이 가족이 살고 있으며, 온실 내부를 들락날락하거나 안에서 밥을 먹는 모습이 보인다.
[1] 80호 덕수궁 석조전 동관부터 82호 덕수궁 정관헌까지는 2008년 6월 23일에 해제되었고 사적 제124호 덕수궁으로 통합되었다.[2] 사진 출처 - 국가유산청 국립문화유산포털.[3] 사진 출처 - 국가유산청 국립문화유산포털.[4] 사진 출처 - 국가유산청 국립문화유산포털[5] 사진 출처 - 서울역사아카이브.[6] 新宿御苑. 1906년에 조성한 일본 황실 정원. 에도 시대 신슈타카토 번의 영주였던 나이토 가의 집이 있던 곳에 지은 정원으로,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에는 민간에 개방되었다.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언어의 정원에 나온 것으로 유명하다.[7] '효'는 창덕궁 가정당, '우'는 덕수궁 준명당 앞 정원을 대여해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