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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18 11:00:03

귀주 대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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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고려 의장기 문양.svg 고려의 대외 전쟁·정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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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주 대첩
龜州 大捷
Battle of Gwiju
<colbgcolor=#fedc89,#444444><colcolor=#670000,#FFCECE> 시기 1019년 (현종 10년) 3월 10일
(음력: 1019년 2월 1일)
장소

고려 귀주성 동쪽 평원
(現 평안북도 구성시)
교전 세력 <rowcolor=black> 고려
(수세)

(공세)
주요 인물
지휘관

파일:고려 의장기.svg 강감찬 (상원수/도통사)
지휘관

[[요나라|
]] 소배압[1] (동평왕/도통)
참가자
[2]
파일:고려 의장기.svg 강민첨 (원수/도통부사)
파일:고려 의장기.svg 김종현 (병마판관)
파일:고려 의장기.svg 박종검 (판관/내사사인)
파일:고려 의장기.svg 유참 (판관/병부낭중)
파일:고려 의장기.svg 조원 (시랑)
참가자

[[요나라|
]] 소굴렬 (부도통)
[[요나라|
]] 야율팔가 (동경유수)
[[요나라|
]] 야율호덕 (부상온)
[[요나라|
]] 소한령 (동평왕)
[[요나라|
]] 소요지 (임아)
[[요나라|
]] 야율해리 (천운군상온)
[[요나라|
]] 고청명 (발해상온)
[[요나라|
]] 아과달 (요련장상온)
[[요나라|
]] 작고 †[3] (객성사)
병력 고려군: 208,300명 요군: 80,000 ~ 90,000명[4]
피해 피해 규모 불명[5] 원정군 궤멸[6]
결과 고려의 대승
영향 제3차 여요전쟁여요전쟁 종결
고려의 전성기 시작 및 요의 전성기 종결
고려와 동아시아의 평화기 시작[7]

1. 개요2. 배경3. 전개
3.1. 양 군 모두 배수진을 친 대회전3.2. 기병대와 남풍의 등장3.3. 고려군의 포위 및 추격 섬멸
4. 결과5. 논의6. 여담7. 대중매체
7.1. 소설7.2. 그림7.3. 영상
8. 관련 문서

[clearfix]

1. 개요

제3차 여요전쟁의 마지막 날인 1019년 2월 1일, 강감찬 장군[8]강민첨 장군[9]이 이끄는 고려군이, 귀주성(龜州城) 앞 평원[10]에서 소배압이 이끄는 거란군을 크게 물리친 전투. 약 25년에 걸쳐 이어진 여요전쟁대단원의 막을 내린 전투다.

2. 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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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전개

파일:귀주_전개예시.png
귀주 대첩의 전개 추정도(1)[18]
파일:귀주대첩_전황도v4.png
귀주 대첩의 전개 추정도(2)[19]

3.1. 양 군 모두 배수진을 친 대회전

(거란) 군사들이 다하(茶河), 타하(陀河) 두 강을 건널 즈음에 추격하는 고려의 군사들이 쫓아왔다. 여러 장수들이 모두 고려의 군사들로 하여금 두 강물을 건너게 한 다음 공격하려고 했다. 그런데 야율팔가 혼자서만 안 된다고 하면서 말하기를, “적들이 만약 두 강물을 건너게 되면 반드시 결사적으로 싸울 것인 바, 이는 위태로운 방법입니다. 그러니 두 강물 사이에서 치는 것만 못합니다.”라고 했다. 그러자 소배압이 그 의견에 따라 두 강물 사이에서 싸웠다. {{{#!wiki style="text-align: right"
《요사》, 권 80}}}

3.2. 기병대와 남풍의 등장

거란(契丹)의 병사들이 구주(龜州)를 지나가자 강감찬(姜邯贊) 등이 동쪽 교외에서 마주하여 싸웠으나 양쪽 진영이 서로 대치하며 승패가 나지 않았다. (그러던 중,) 김종현(金宗鉉)이 병사들을 이끌고 도달하였는데, 홀연히 비바람이 남쪽으로부터 불어와 깃발들이 북쪽을 향해 휘날렸다. 아군(고려군)이 그 기세를 타고 분발하여 공격하니, 용맹한 기운이 배가 되었다.
{{{#!wiki style="text-align: right"
《고려사절요》 권3 #}}}

3.3. 고려군의 포위 및 추격 섬멸

이 달에 소배압(蕭排押) 등이 다하(茶河)와 타하(陀河)에서 고려와 전투했는데, 요의 군대가 불리했다. 천운군(天雲軍)과 우피실군(右皮室軍)에서 물에 빠져 죽은 자가 많았으며, 요련장상온(遙輦帳詳穩) 아과달(阿果達), 객성사(客省使) 작고(酌古), 발해상온(渤海詳穩) 고청명(高淸明), 천운군상온(天雲軍詳穩) 해리(海里) 등이 모두 죽었다.
{{{#!wiki style="text-align: right"
《요사》 권 115 <열전>45 #}}}
다하와 타하를 건널 적에 적(고려군)이 협공해서 활을 쏘자, 소배압이 갑옷과 병장을 버리고 달려왔던 바 이로 인하여 파면되었다.
{{{#!wiki style="text-align: right"
《요사》 권 88 <열전>18 <소배압고>}}}
소배압 등이 고려와 다하(茶河)ㆍ타하(陀河)에서 전투했으나 크게 패배했다.
{{{#!wiki style="text-align: right"
《송사》 <요열전>}}}
거란군이 북쪽으로 달아나자 아군이 그 뒤를 쫓아가서 공격하였는데, 석천(石川)을 건너 반령(盤嶺)에 이르기까지 쓰러진 시체가 들을 가득 채우고, 노획한 포로·말·낙타·갑옷·투구·병장기는 이루 다 셀 수가 없었으며, 살아서 돌아간 적군은 겨우 수천 인에 불과하였다. 거란의 병사들이 패배한 것이 이때처럼 심한 적이 없었다.
{{{#!wiki style="text-align: right"
《고려사절요》 권3 #}}}
강민첨(姜民瞻)이 원수(元帥)가 되어 북을 치며 힘써 돌격하여 반령(盤嶺)의 들판에서 크게 패배시켰으니, 거란군이 퇴각하면서 창과 갑옷을 내버려 길거리를 가득 메웠다. 강민첨은 이에 10,000명을 포로로 잡거나 참수하였다.
{{{#!wiki style="text-align: right"
《고려사절요》 권4 #}}}

4. 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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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논의

===# 양측 모두 배수진? #===
===# 김종현의 기병대 등장? #===
승패가 나지 않는 팽팽한 상황에서, 김종현의 정예기병 1만이 등장했다.

===# 바람 방향의 급변화 연구 #===
계절상으로는 북풍이 부는 것이 정상인데 간혹 일시적으로 계절풍이 아닌 역풍이 부는 경우가 있긴 하다.[39] 우연의 일치인지, 강감찬이 예측한 것인지는 알 길이 없다. 그래도 당시 장수들의 필수 요건 중 하나가 기상 관측이었고, 강감찬의 나이(72세)를 생각하면 오랜 경험과 치밀한 사전 정보수집으로 이 현상을 어느 정도 예측했을 가능성도 충분하다. 이러한 기상 이변까지 나타나자 고려군의 사기는 올라간 반면 거란군의 기세는 여지없이 꺾였다. 고려군이 남쪽에, 거란군이 북쪽에 포진한 상태였기 때문에 고려군에는 순풍이, 거란군에는 역풍이 된 상태였기 때문이다.

간혹 바람이 부는 걸로 병사들의 사기에까지 영향을 미칠 수 있나 의문을 갖는 사람들이 있는데, 바람이 아주 심하게 부는 태풍이 올 때 밖에 나가보면 알 수 있다. 그냥 가만히 있어도 바람이 심하면 움직이긴커녕 눈조차 뜨기도 어려운데, 하물며 한시바삐 움직여야 하는 전쟁터에서 이런 바람을 만나면 전열이 제대로 유지될 수 있을까? 게다가 비까지 내리니 시야 확보가 매우 어려웠을 것이다. 전열이 무너지고 통제력을 상실하면 100,000명이 아니라 100만 명이어도 패잔병에 불과하다.[40] 또 거란군의 주력은 역사상의 유목민족 국가들이 그러했듯이 궁기병 위주였을 것인데, 문제는 비바람이 역사에 기록될 정도로 불어닥치니 풍속이 대단했을 것이고, 게다가 비까지 내리니 강력한 역풍을 맞는 거란군의 입장에서는 화살을 쏴봐야 공중에서 흔들거리다가 툭툭 떨어지게 되거나 맞아도 고려군에게 큰 피해를 주기 어려웠을 것이다. 아무리 못해도 순풍을 받는 화살이나 바람이 없는 상황에서의 화살보다 약했으리라는 것은 확실하다. 반면 고려군의 입장에서는 대충 쏴도 바람이 거란군 진영까지 잘 배달해주니 아주 신나는 상황이었을 것이다. 앞은 안 보이는데 화살은 비처럼 쏟아지고, 안 그래도 김종현 부대의 예상 밖의 후방 급습으로 인해 멘탈이 흔들거리던 거란군에게는 결정적인 일격이었다.[41]

2009년 11월 21일 <역사스페셜> 측이 기상청에 문의해본 결과, 2006년 4월 19일에 관측된 활강형 한랭전선과 비슷했을 것으로 추측했다. 최대 20m/s 이상의 남동풍으로 ,성인 여성이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의 바람이었을 것으로 추측했다.
2009년 11월 21일, <역사스페셜> 中
시간이 많이 흘러서, 당시 관측 자료라든지, 예보 자료들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그 당시 상황을 정확히 설명할 순 없지만, 아마 귀주 대첩 당시 강감찬 장군이 수성이 아닌 평지를 택해서 기마군이 주력인 거란과 맞승부를 했다는 것은, 강감찬 장군이 이 전쟁을 준비하면서 많은 연구를 통해 한반도의 겨울철, 남쪽으로 기압골이 통과할 때 북서풍에서 남동풍으로 급격하게 전환한다는 것을 알고 계시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wiki style="text-align: right"
김동진 중령. 공군 기상 예보관. 2009년 11월 21일 <역사스페셜> 中}}}

===# 수적 우세 속 수월한 전투? #===
숫자만 봐서는 다수의 고려군이 소수의 거란군을 격파한 게 뭐가 대단하냐고 오해할 수 있는데 이는 원래 야전 전술의 기본이다. 가장 유리한 조건에서 우세한 전력으로, 최소한의 피해만 입으며 승리하는 것은 지휘관으로서 지향해야 할 바이고, 이는 《손자병법》에도 나와 있는 유서 깊은 전략의 기본 중 기본이다. 소수의 적으로 다수의 적을 이기려 드는 것은 쉽지도 않을뿐더러 역관광당할 확률이 더 높다. 꼭 불리한 여건에서 승리해야 명장이란 생각은 지나친 영웅주의의 발로일 뿐이다. 오히려 소수의 정예부대로 다수의 적을 이기는 것보다, 병력은 많지만 질이 떨어지는 부대를 구성한 뒤 이를 효율적으로 운영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추고, 아군에게는 유리하며 적군에게는 불리한 요건을 적이 피할 수 없도록 만든 뒤 싸워서 이기는 것이 더더욱 어렵다. 당장 한국사 최고의 명장이자 세계 전사에서도 최상위급 명장이라 평가받는 이순신 장군조차 명량 해전이라는 어쩔 수 없는 예외상황을 제외하면 항상 유리한 상황에서 전투했다. 그렇기에 명장인 것이다. 명량 해전조차 13척의 배로 수백척을 상대할 수 있는 최적의 장소에서 싸운 것이다.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조차 지형의 유리함만은 확보한 것이다.[42]

이 분야의 또 다른 대가는 바로 나폴레옹이었다. 부하들은 항상 적어보이는 숫자의 군대로 수십만 명의 대프랑스 동맹군을 쳐부수는 황제를 보고 항상 적은 군대로 많은 군대를 이겼다고 칭송했지만, 나폴레옹은 이에 대해 '너희들이 틀렸다. 나는 항상 많은 군대로 적은 군대를 이겼다.'라고 말했다. 나폴레옹은 항상 지형과 순간순간의 상황을 적재적소에 이용해 당장은 많아 보이는 적의 군대를 효과적으로 분열시키고 그렇게 쪼그라든 군대를 순차적으로 각개격파해나갔다. 적은 군대로 많은 적을 상대해야 할 한 번의 전투를, 적은 군대로 더 적은 군대를 부수는 몇 번의 전투로 쪼갠 것이다.[43] 또한 나폴레옹은 '대군은 병법이 필요 없다.' 라는 말로 수적 우위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

그런데다가 거란 병력이 수가 적다고 해도 고려군보다 약하다고 할 수는 없는 상황이었다. 거란의 80,000명은 거의 대부분이 기마 유목민 출신의 기병로 이루어진, 거기다가 거란의 황제 친위군 5위 중 하나였던 우피실군도 포함된 최정예들이었다.[44] 대제국을 이루던 거란에서 그것도 유목민 출신이란 것은 기마술에 매우 능숙하다는 뜻이다. 당시의 기병이 오늘날의 전차기계화보병의 역할을 하는 상황에서, 어릴 때부터 이미 전차장갑차 조종을 마스터했다는 것이다.[45]

반면 고려군은 있는 거 없는 거 다 쏟아부은 상태였다. 심지어 그 이전 제2차 여요전쟁 과정에서 정예병이 소모된 상태였다. 이런 상황에서 겨우 8년 동안 재건한 군대를 조직해 대회전을 벌여 동북아 최강의 80,000명의 기병을 격멸한 것 자체가 강감찬이 얼마나 대단한 군재를 지녔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통주 전투 같은 칠천량 해전급 대패로 인해 야전군 자체가 박살나버리는 상황까지 있었던 상황에서,[46] 그냥 있는거 없는거 죄다 쥐어짜내 쏟아부었다고 봐야한다. 당연한 말이지만, 침공군은 적국으로 공격을 가는 상황이므로 최정예 부대로 공세를 펼치는 거지만, 방어군은 말 그대로 창만 들 수 있으면 모조리 소집해서 막아내야 한다. 숫자보다는 질적인 면에서 차이가 매우 컸고, 병종 또한 보병과 기병의 차이는 매우 크다. 요즘으로 따지자면 거란군은 정예 기갑 내지는 기계화보병사단 사단 다수, 이에 대항하는 고려군은 소수의 기갑 혹은 기계화보병에 일반 보병, 예비군민방위 사단까지 총동원한 상황이라는 것이다.[47][48] 이런 상황에서 매우 적은 손실로 적을 섬멸한 전투였으므로 큰 공이라 할 수 있다.

임용한은 거란군이 제2차 침공과 다르게 100,000명의 규모인 것은 보급부대가 전혀 없는 전부 기병으로 이뤄진 전원 전투부대였기 때문이라고 추측했다. 수도인 개경으로 직행해서 고려 왕의 항복을 받아내는 것이 목표였으며 시간 단축을 위해 기병으로만 군대를 준비했고, 보급은 현지 약탈로 보충을 할 계획이었으나 알다시피 청야작전으로 실패한 것이라고 말했다.

전쟁사에서 양만 많고 질이 떨어지는 대부대를 제대로 운영하지 못하고, 소수 정예인 적군에게 반격을 당해 부대 전체가 와해된 사례는 차고 넘친다. 《손자병법》에서
"유능한 장수는 먼저 이길 수밖에 없는 싸움을 한다."[49]
라고 말한 것이 바로 이 사례이다.

게다가 거란군의 장수진 또한 거란 측에서 동원할 수 있는 거의 최정예에 가까웠다. 무엇보다 총사령관이었던 소배압의 경우, 귀주에서의 참패로 자신의 명성을 거의 잃어버렸지만, 그 이전까지만 해도 한족의 북송이나 탕구트족의 서하와의 전쟁에서 엄청난 전공을 세운 명장이었다. 애초에 제2차 여요전쟁에서 강조의 부대를 통주 전투에서 섬멸시킨 지휘관이 소배압이었다. 그 외의 지휘관들의 기록은 상대적으로 빈약하지만, 북송과의 전쟁에서 유리한 전과를 거두고 있었던 거란군에서, 전사한 주요 지휘관들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는 것 자체가 당대의 맥락에서는 나름 유명인들이었다고 볼 수 있다. 정말로 별 볼일 없는 그저 그런 지휘관들이었다면 거란에서 명장 취급을 받는 소배압 밑에서 고려로의 원정을 올 수 있었을까?

또한 귀주 전투에서 모든 고려군이 총집결해 거란군과 맞써 싸운 것도 아니다. 알아두어야 할 것은 고려군 200,000명은 전쟁하기 전에 총사령관 강감찬 휘하로 편제된 고려군의 총전력이다. 이 병력이 귀주 대첩때 얼마나 동원되었나에 대한 건 알 수 없지만 이미 거란군을 요격하기 위해 고려 각지로 병력이 분산된 상태였으니 고려군이 200,000명의 전군을 귀주에 전부 동원한 것이 아니다. 귀주 대첩을 기록한 《고려사》 기록을 보면 강감찬이 병력을 이끌고 귀주 동쪽 교외에서 거란군을 요격했다고 되어있지 이 과정에서 거란군을 요격하기 위해 각지에 분산된 고려군 전체를 규합했다는 대목은 없다. 여기서 김종현의 병력이 합세해서 전세가 바뀐 것이지 200,000명 전체가 모였다고는 볼 수 없는 것이다.

또한 고대에는 호왈백만이 일상화되어 있었던 점도 감안해야 한다. 즉 애초에 거란을 상대로 위협을 가하기 위해서 호왈 200,000명을 불렀고, 실제로는 그것보다 병력이 훨씬 적었으리라는 것으로, 고려군은 강조가 이끈 호왈 300,000명의 대군을 비롯해 수많은 전투에서 거란군에게 끊임없이 손실을 입었기에 제3차 여요전쟁 당시엔 그렇게 많은 병력을 동원하기가 힘들었을 거라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거란군 역시 호왈을 했을 가능성이 높고[50][51] 귀주 대첩 이전에 강민첨, 조원, 강감찬, 김종현, 개경 중앙군 등에게 이미 크게 피해를 입었기에 실제로 귀주 전역에서 양측 합쳐 300,000명이나 되는 병사들이 뒤엉켜 싸우지는 않았을 것이다. 애초에 300,000명이나 되는 병력들이 다 들어갈 수 있을지나 의문일 정도로 그렇게 전장터가 넓지도 않다. 실제로 귀주 대첩 당시 200,000명은 커녕 저 당시 고려군이 정말 200,000명이나 한 곳에 끌어모았는지도 회의적으로 보는 학자들도 있으며, 이전 강조가 동원했다는 300,000명도 당연히 뻥튀기라고 보는 학자들도 많다.

===# 수공으로 승리했다? #===
제3차 여요전쟁에서 고려군이 수공을 사용한 전투는 흥화진 전투에서다. 잘못된 역사만화들이 (1) 제3차 여요전쟁 전체를 귀주대첩이라고 잘못 설명하거나 (2) 사람이 수몰될 만큼의 댐 폭발 등으로 묘사하곤 한다. 그런 댐 건설은 현대의 토목공학으로도 어렵다. 수공은 어디까지나 도하하는 군을 더 취약하게 하는 보조적인 장치고, 도하 중인 거란군을 격멸한 것은 고려군의 잘 훈련된 기습 때문이었다.

귀주 대첩에서는 고려사고려사절요에 수공을 사용했다는 기록이 없다. 요사 고려열전에 "개태(開泰) 7년(1018년)에 고려를 정벌할 적에 소배압(蕭排押)이 고려와 다하(茶河) 및 타하(陀河) 두 하천 사이에서 싸웠는데, 우리 군사가 불리하여 익사한 자가 많았다."라는 기록이 있으나, 이는 양측 모두 배수진을 하고 싸웠는데, 불리해진 쪽은 달아나다 물에 빠져 숨진 것을 표현한 것이다.

===# 문관인 강감찬이 총지휘관? #===
강감찬이 문관이기 때문에 베테랑 장군이 이끄는 직업군인들이 행정직 공무원이 이끄는 징집병들에게 대패를 당한 전투라는 농반진반성 이야기가 인터넷에 유머 소재로 알려지기도 하지만, 이는 반은 맞고 반은 틀린 소리로[52], 군과 문이 철저히 분리되어 있는 현대와 달리 전근대 시대에는 고위 행정 공무원이나 정치인과 장군이 오늘날처럼 명확하게 구분되는 자리는 아니었다는 주장도 있다. 게다가 귀주 대첩뿐 아니라 동아시아 전쟁사에서 문무를 겸비한 문관이 총지휘관을 맡는 것은 의외로 흔히 찾아볼 수 있는 사례이므로 강감찬만이 특이한 사례를 맡은 것은 아니었다.

군재가 있다 하더라도[53] 전쟁이 없는 평시에는 정치나 행정을 하다가 전쟁이 나면 사령관으로 부임하는 케이스도 상당했는데, 이는 세계사에서도 유사 사례를 찾아볼 수 있다. 예를 들어 전근대 유럽의 귀족들은 기본적으로 대부분이 사관학교 또는 가문의 독자적인 교육을 통해 군을 배웠지만, 항상 군인 신분인 것은 아니고 평소에는 내치를 하다가 전쟁이 나면 장교가 되어 전쟁터로 떠났다.[54] 그러니 문관이라고 해서 군재가 전혀 없는 것이 아니고, 개중에는 강감찬처럼 문관임에도 뛰어난 군재를 지닌 인물들도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다른 사례를 봐도 조선김종서, 권율, 명나라우겸, 원숭환 등과 같이 문관 출신이 전시에 사령관으로 출전한 사례는 많다. 이들 문신 출신 지휘관 휘하에선 지휘관이 큰 그림을 그리고 전략 목표를 정하면 전문가인 무신이 구체적인 목표와 실행 수단을 준비해서 문신을 보좌하고 실제 전투를 실행하는 역할을 맡았다. 윤관 밑의 척준경, 김종서 밑의 이징옥이 그 예이다.

심지어 고려 무신정권 당시에도 무신 집정자들 대신 대요수국의 난 시기에 일어난 강동성 전투에서 몽골군과 연합작전을 펼친 조충처럼 문신이 총사령관으로 출정하는 것이 관례였다. 단, 이전에 여진 정벌을 실행한 윤관조위총의 난 진압 사령관을 맡은 윤인첨은 조금 예외인 것이 윤관은 지군국중사라는 특별 직위를 받아 별무반을 지휘했다. 윤인첨은 문관 출신이었지만 정3품 상장군 무관직을 받아 형식상 무관이기도 했다.

사실 굳이 저렇게 멀리까지 가서 유사 예시를 찾을 필요도 없다. 불과 몇 년 전 고려를 구원한 구국의 영웅 양규도 문관이다. 심지어 양규는 직접 전장에 나가 용맹하게 싸우는 사령관이긴 했지만 일단 정식으로 무관직을 역임한 적은 한 번도 없다. 즉 직위만 따지면 이 양반도 순수 문관이었다는 소리. 물론 강감찬은 나이도 나이인 만큼 양규처럼 현장에서 용맹하게 싸웠을 가능성은 거의 없지만, 문관이라는 이유만으로 폄하할 수는 없다는 가장 가까운 예시다.

'행정공무원이 직업군인을 이겼다' 식의 이해는 전쟁을 단순히 작전을 짜서 적을 물리치는 것만으로 보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생기는 오해인데, 군대라는 거대집단을 이끌다보면 전술을 계획하는 것보다는 그 집단을 유지하기 위한 행정에 더 신경을 많이 써야하는 경우가 다반사이다. 특히 총지휘관의 경우에는 병참도 신경을 써야하고, 예하 부대들의 상황을 조율해야 되기 때문에 순수 야전군인으로서의 능력보다는 행정가로서의 능력과 정치적인 능력이 더 많이 요구될 때가 많다. 그런데 전근대의 무장들은 학식과 행정능력이 부족한 경우가 많았고, 현대와 같은 행정장교 시스템도 없었기 때문에 문관이 이 역할을 해주어야 했다.

조선시대에는 변경의 수령들을 주로 무관 출신으로 임명하는 것이 방침이었는데, 이때 이들의 행정능력 부족으로 인해 생기는 문제에 대한 지적이 끊임없이 나왔다. 이런 문제는 현대에도 피할 수 없는 것으로, 8.15 광복 직후에 실시된 미군정 당시에 존 하지 중장이 벌인 중대한 실책이나, 미국제2차 세계 대전 직후에 중화민국의 전후 처리를 지원하기 위해 파견한 조지프 스틸웰이 저지른 뻘짓이 이후에 벌어진 국공내전에서 중화인민공화국에게 대륙을 상실하는 원인 중의 하나로 작용한 것을 보면, 군사행정을 군인 출신에게만 맡기는 것은 한계가 분명하다. 현대 민주주의 국가의 대부분이 문민통제를 하는 것은 군대의 정치세력화를 막기위한 목적이 크나, 한편으로는 행정실무에 능한 문민 관료에게 군사행정의 전권을 맡겨서 군인들의 부족한 행정 능력을 보완하는 목적도 있다.[55]

즉, 총사령관인 강감찬 같은 문관의 역할은 목표를 제시하며 자신들이 필요하다 싶은 영역에서 나서는 것이었고, 휘하의 장수들은 그의 지지를 업고 병력을 지휘하여 목표를 완수하는 것이었다. 물론 귀주대첩 당시 지휘관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휘하 장수들도 문관으로 시작(강민첨, 조원)하거나 이전에는 문관인 사람(박종검), 군의 행정 업무에 관련된 관직을 가진 사람(박종검, 유참)이 많았다는게 함정이긴 하다만.[56]

한편, 무관 출신인데도 좋은 행정능력을 보여주는 문무겸비 무장 사례도 찾아볼 수 있다. 예를 들어 최윤덕이나 이순신 등이 있는데 전자는 4군 6진 개척이라는 행정업무가 필요한 업적을 세워 정승의 자리인 좌의정까지 올랐고, 후자는 중앙정부의 보급이 없는 상황에서 수군의 전투력을 유지, 확장할 정도의 행정역량을 보여주었다. 심지어는 귀주 대첩을 포함한 여요전쟁의 주역인 소배압조차도 문무를 겸비한 엘리트 관료였던 인물이다. 이와 연관된 이야기는 소배압 항목을 참고.

6. 여담

7. 대중매체

7.1. 소설

7.2.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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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4년, 낙성대 공원 내 안국사의 벽화
파일:external/www.independence.or.kr/img_018.jpg
1975년, 이용환 교수의 <귀주 대첩 기록화>
파일:external/www.picturebook-illust.com/org_xman1717_2014-07-01.jpg
2014년, 책 <고려전쟁 생중계>의 삽화[61]

7.3. 영상

파일:귀주대첩전황도.png
2017년 9월 18일, <토크멘터리 전쟁사> 67부 中[62]
파일:평화전쟁 1019 2부-김종현의 원군.png
2019년 11월 24일, <평화전쟁 1019> 2부 中
2020년 2월 5일, <역사스페셜> 中
2020년 3월 11일, <역사스페셜> 中

7.3.1. 고려 거란 전쟁[64]

2022년 KBS 연기대상에서 2023년도 방영 예정 드라마를 소개할 때 <고려 거란 전쟁>을 '귀주 대첩을 최초로 영상화한 드라마'[65]로 소개했다. 귀주 대첩 씬의 런닝타임만 30분에 달한다고 소개해, 최종화로 선보일 것이 예상되었다. KBS 수원 드라마세트장 야외공간을 크로마키로 전부 두르고 촬영했으며, KBS 전쟁씬 CG 중 역대 최대 제작비를 들였다.[66]

그러나 KBS 전쟁씬 CG 중 역대 최대 제작비를 들였다고 공언한 것과 달리 결말상 핵심 전투 장면 편집과 연출 실패로 방영 이후 평가는 좋지 않다. 고려 거란 전쟁/평가 항목 참조.
2024년 3월 9~10일, <고려 거란 전쟁> 31~32회[70]
파일:귀주_이정우피셜.png
<고려 거란 전쟁> 제작진이 만든 가상 지형도[71][72]

8. 관련 문서


[1]요사》에서는 소배압이 출전했다고 기록했으나, 《고려사》에서는 그의 동생인 소손녕이 출전한 것으로 되어 있다. 하지만 소손녕은 이미 사망한 시기였기 때문에 《고려사》의 기록이 잘못된 것이다.[2] 1020년 2월 유공자로 지정된 귀주의 군사 시음달(柴音達)도 본 전투의 유공자일 수 있다.[3] 이상 명단은 모두 《요사》에서 발췌.[4] 역사적으로 재구되지 않은 단순 사료상 값으로서, 거란국지 등의 병력 서술과 교차검증되지 않는다. 현대 연구는 거란군의 전체 병력수를 10만여로 추산하며, 이 원정 직후 거란이 서하에 호왈 40만 병력을 동원한 대규모 원정을 실시하기에 이 값이 현실을 반영할 확률은 대단히 낮다.[5] 1019년 3월 173인, 1019년 9472명을 국가유공자로 추증했으나, 이는 여요전쟁 전체를 대상으로, 그 중에서도 유공자를 심사해 추린 것이다.[6] 수천은 도망했고, 1만은 붙잡힌 뒤 투항하거나 참수되었다. 따라서 6만명 이상이 죽었을 것이 추측된다.[7] 이후 고려의 여진 정벌(1104년)까지 동아시아에서 86년간 큰 전쟁이 없었다.[8] 총동원령 된 군사를 이끄는 의미로 상원수(上元帥)/서북면행영도통사(西北面行營都統使)/서경유수(西京留守), 국가의 중추급 장관이란 의미로 문하시랑동내사문하평장사(門下侍郞同內史門下平章事). 현대 대한민국 기준 국무총리국방부장관.[9] 총동원령 된 군사를 다음으로 이끄는 의미로 원수(元帥)/서북면행영도통부사(西北面行營副都統使)/대장군(大將軍), 왕명출납을 다루며 검차와 기병대를 이끄는 의미로 태복경(太僕卿). 현대 대한민국 기준 대통령비서실장합동참모의장.[10] 현재의 평안북도 구성시로, 당시 거란군이 압록강으로 퇴각하려면 반드시 지나야 했던 요충지였다. 이 대첩은 귀주성 공방전은 아니고, 그 앞 평원에서 일어난 것이다.[11] 2018년 2월, EBS 다큐프라임은 "1차 여요전쟁은 방어군 출동에만 2개월이었던 반면, 3차 여요전쟁은 흥화진, 내구산, 마탄 등에서 요격전(게릴라))을 하는 등 신속해진 고려군"으로 고려군의 진화를 설명했다. #[12] 젊은 군주가 조상이자 건국주의 묘까지 뽑으며 수도에서 항전을 결정하자 백성들의 사기는 하늘로 치솟았을 것이 예상된다. 성밖의 모든 식량과 물자, 주민들을 성안으로 옮긴데다가 우물을 메워 식수를 얻지 못하도록 했다. '고려전쟁 생중계'의 저자 정명섭은 "가끔은 소수의 결정이 역사를 바꾼 때라든지, 역사의 방향을 결정할 때가 있는데 저는 현종이 도망치지 않고 거기서 버텼다는 것을 그 순간이라고 생각합니다. 소수가, 역사를 움직인 순간."이라 표현했다.[13] 12월 중순의 요격전과 시간이 한참 있다. 현종이 12월 26일 개경 항전을 선포하며 양측에서 군대를 불러들인 것으로 볼 수 있다.[14] 한반도 북쪽에서 개경으로 가는 길은 금천군의 협곡 외길 뿐이다. 따라서 남하하는 군대는 그 앞 마지막 평원인 신은현에 우선 정지해 이 협곡을 통과해도 되는지 살펴야만 한다.[15] 전설 하나가 내려오는데, 소배압의 거란 군대가 개경을 향해 다가오자 송악산의 산신이 밤새 소나무들로 모습을 바꾸었고, 이 소나무들이 일제히 사람 소리를 내자 거란군이 두려움에 떨어 도망갔다고 한다.[16] 협곡 너머 개경은 결사항전을 각오했고, 후방에선 고려 정예 기병대가 남하해오고 있었고, 청야전술로 일대에 보급품도 없었으며, 후방에 보급선도 만들어두지 않았기 때문.[17] '귀주대첩과 현종의 청야전술'(2021)을 쓴 임지원은 "현종은 세 차례 열병식으로 군을 전체점검했고, 청야전술로 극단적 수비책을 사용", "전방의 강감찬과 긴밀한 연락으로 거란군의 움직임을 공유하여 전장 주도권을 빼앗고, 거란군을 고려군에게 유리한 전장으로 유도", "귀주 대첩은 뛰어난 지휘관의 역량으로 승리한 것이 아니라, 고려 전체의 유기적인 작전 전개" 등으로 평했다.[18] 네모 하나당 1만명을 표현. 검차1진이 도하해 온 거란군의 맹공에 양 옆으로 웅크러들며 후퇴하였으나, 중갑기병대가 등장하자 다시금 용기내어 학익진으로 변했고, 거란군은 석천을 건널 폭이 중갑기병대에 의해 좁아져 힘겹게 건너며 후미를 크게 잃는다는 가정.[19] 거란군이 석천을 동쪽으로 1회, 서쪽으로 1회 건너가며 힘겹게 북쪽으로 도망했으나, 반령(팔영령)이 틀어막혀 있었기에, 벌판에서 추격해 온 고려군에게 궤멸한다는 가정.[20] 연이은 고려의 유격전에 1만명 이상의 타격을 입었고, 청야전술로 약탈보급이 미비했음에도, 거란 최고의 장수이자 재상이었던 소배압의 통솔력으로 인해 전투력이 상대적으로 보존되었을 것이 추측된다.[21] 이 시점까지 거란군의 목적은 '안전한 철군'이었다. 거란군이 전투가 아니라 철군을 결정했다면 후방의 수천명이 죽는 큰 피해를 입더라도 다수는 무사히 철군해 다음 기회를 노릴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고려군이 '잘 하면 전멸시키는 것도 가능한' 모양새를 귀주 평원에서 취하자, '고려를 드디어 굴복시킬 수 있다'는 미끼를 물고 낚여 들어온 것으로 볼 수 있다. 1010년 통주 전투에서도, 1016년 곽주 전투에서도, 고려군은 거란군을 평지에서 이긴 적이 없었기 때문.[22] 이것이 합리적 주장이었는지 여부는 논의 문단 참고.[23] 이로서 망치와 모루 전술이 시작되었다. 출격했던 정예기병대 1만에 더해, 동북면의 3300도 함께 왔을 수 있다. 이것이 지각인지 의도된 대기인지는 논의 문단에서 다룬다. 남쪽 정주방향에서 왔다면 고려군의 뒤에서 등장해, 거란군을 돌파하며 진영을 붕괴하고 전세를 역전하는 역할을 했을 것이다. 동쪽 태천방향에서 왔다면 거란군의 뒤에서 등장해, 북쪽 퇴각로를 봉쇄하는 셈이라 거란군에게 절망감을 주고, 고려군이 거란군을 하천으로 몰아 압살하게 하는 역할을 했을 것이다.[24] 고려군은 남쪽, 거란군은 북쪽에 있었다. 즉 고려에겐 순풍, 거란에겐 역풍이 된다. 더구나 소나기면 갑옷이 젖고 하천이 불어 퇴각 속도도 느려지게 된다. 김종현의 기병대가 태천방향에서 왔다면 동북쪽의 언덕 위에 등장했을 수 있다. 그럼 이들에게도 역시 역풍이었을 수 있다.[25] 병마판관 김종현이 명을 받고 기병대를 이끌고 남하했다 돌아오긴 했으나, 애초에 기병대는 강민첨 대장군의 휘하다. 1017년부터 태복경(太僕卿)으로서 기병대를 직접 만들었고, 앞서 삼교천 전투에서 기병대를 직접 운영하기도 했다. 노량 해전에서 이순신의 대장선처럼, 지휘부가 북을 치며 전진하는 것은 '아군이 북을 치며 전진할 수 있을만큼 충분히 전세가 압도적이니 아군은 힘내고, 적군은 포기하라'는 심리전이다.[26] 배수진이라 진영을 다시 재전열하지 못해 정예기병대가 허망하게 무너진 것으로 추정된다. 겨울이라 말라서 쉽게 건너왔던 때와 달리, 돌아갈 땐 소나기로 인해 수위가 '빠져 죽을만큼' 불어나서 피해가 커진 것으로 추정된다. 게다가 북쪽으로 가는 길은 귀주성에 붙어 있어 봉쇄되었을 것이므로, 거란군은 퇴각을 위해 이 하천을 2번이나 건너야 했을 것이다. 고려 기병대가 북쪽에서 휘저으며 거란의 북상을 틀어막으면서, 남쪽에서 고려군 주력이 검차로 밀어붙이며 압살시켰을 것이다.[27] 직함에서 보듯 발해인 출신 부대 대장이었다. 발해인이 그래도 고려에 동족 의식을 느끼고 있었던 것을 생각하면 만감이 교차하는 부분이다. 심지어 고려군에도 발해 유민 출신의 병사들이 대도수 장군을 비롯해 적지 않았던 것을 생각하면, 망국의 비애를 보여주는 동족상잔이었던 셈이다. 고청명이 전사한 후, 그의 가족들은 거란의 국가유공자로 보상을 받았다.[28] 거란 성종의 사위다.[29] 운림진을 지키던 군사들이 내려와 팔영령(반령)을, 안의진을 지키던 군사들이 내려와 청룡령을 틀어막았을 것이 추정된다. 즉 귀주성 북쪽의 분지에 거란군은 꼼짝없이 갇힌 것이며, 소수의 귀환자들은 '길이 아닌' 산을 넘어 도주에 성공한 것이다.[30] 거란도 고려도 당시 최대 자원은 '사람'이다. 따라서 모든 걸 버리고 살아 돌아가자고 명을 내린 것.[31] 거란군이 8~9만 가량인데 1만명이나 붙잡힌 것이다. 이는 8~9만 병사 중 5~7만 가량이나 학살당하는 지경에 이르자, 전의를 상실하고 항복했음을 추측할 수 있다. 이 중 투항-귀부 의사가 없는 이들은 추려 참수했을 것이다.[32] 함경남도, 함경북도, 양강도 위치 추정.[33] 자강도, 퉁화시 일대 추정.[34] 블라디보스토크, 한카호 일대 추정.[35] 하얼빈시 일대 추정.[36] 하바롭스크 일대 추정.[37] 장족(귀족)과 병졸, 수레도 돌아간 것이 드물었으며, 관속들 태반이 전몰하면서 조금이라도 글을 아는 자를 뽑아 결원을 보충해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38] 무질서하게 후퇴하는 보병은 그 수가 몇이든 간에 기병들에게는 손쉬운 학살의 대상이다.[39] 적벽대전이 이런 역계절풍의 사례다. 마침 적벽은 장강 강안인데다 지역도 화남 지방에 속하는 형주인지라 동짓날이라고 할지라도 충분히 역풍이 불 수 있다. 즉 영상의 기온에서는 장강보다 장강 북안 오림의 기온이 더 높기에 동남풍이 분 것.[40] 조선시대 중반 이괄의 난 때는 반란군이 수도 한양까지 점령하는 절망적인 상황에서 전투 중 반란군 쪽으로 돌풍이 불어 반란군이 시야 확보에 애를 먹게 되었고 이로 인해 사기가 저하되었다. 여기에 한명련이 죽고 이괄이 도망친다는 거짓 소문까지 퍼뜨린 끝에 기적적으로 관군이 승리했다.[41] 또한, 갑작스러운 돌풍에 말들도 놀라서 궁기병뿐만 아니라 다른 기병들도 힘을 못 썼을 가능성이 높다.[42] 사실 엄밀히 얘기하면 명량 해전의 경우 이순신의 좌선 혼자서 왜선 수십척을 상대하는 동안 올돌목의 조류는 결코 이순신에게 유리하게 흘러가지 않았다. 이순신이 눈 앞에 있는 왜선들을 정리하고 초요기를 올려 겁을 먹은 조선 수군 판옥선들을 소집하는 정오가 되어서야 올돌목의 조류는 조선 수군→왜군쪽으로 유리하게 흐르기 시작했다. 즉, 이순신은 지형조차 유리하다고 할 수 없는 상황에서 필사의 분전으로 명량 해전을 이긴 셈이다.[43] 전쟁은 총 가용병력으로 하는 것이지만, 전투는 해당 전투지에 집결한 병력으로 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나폴레옹 군이 10만, 프로이센군이 30만이더라도 프로이센 군을 6만 씩 5부대로 분산시키고 프랑스군 10만이 한부대씩 격파하면, 전쟁은 10만 vs 30만인데, 전투는 10만 vs 6만이 된다. 상대를 어떻게 분산시키고 나의 주력은 어떻게 순간적으로 집결시키는 지에 대해 나폴레옹이 대가였던 것이다.[44] 기록에서도 고려가 아닌 거란군 100,000명에 대해 대군으로 기록했다.[45] 화기가 발달하기 이전까지는 기병이 보병 10명을 족히 상대한다고 평가되었다. 냉병기를 사용하던 시절은 기병의 역할이 중요하던 시기였다.[46] 이때가 얼마나 절망적이었냐면 우선 강조가 참패함으로써 수도 개경까지의 길이 사실상 활짝 열렸다. 즉 상주 전투탄금대 전투에서 패배한 조선과 마찬가지였다는 것이다. 더욱이 몽진 과정에서의 현종의 고초를 생각해보면 답이 없다.[47] 1개 기계화보병 사단은 약 3개 일반 보병 사단에 맞먹는 전투력을 가졌다고 오늘날의 국방 전문가들은 평가한다. 대한민국 육군의 8개 군단 중 기계화보병사단 위주로 구성된 제7기동군단이 괜히 육군 최강의 부대 소리를 듣는 게 아니다.[48] 비근한 예로 2020년대 벌어지고 있는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우크라이나군은 약 700,000명 이상, 러시아군 및 동맹 세력은 약 230,000명의 병력을 투입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걸 가지고 다수의 우크라이나군이 소수의 러시아군을 몰아내는 수월한 전쟁이라고 말 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49] 정확히는 승병선승이후구전(勝兵先勝而後求戰), 풀이하면 '이겨놓고 싸운다.'[50] 위에 나온 《고려사》의 기사에서 '군사를 100,000명이라 했다(兵號十萬)'라는 하는 대목이 호왈을 언급한 대목이다.[51] 시기는 다르지만 몽골의 칭기즈칸이 이끈 십만대군도 명목상 천명의 병력을 다스리는 천호장이 95명이었기 때문에 95,000 병력을 보유했다고 할 수 있지만, 이것은 명목상일 뿐 기록에 따르면 10명이 있어야 할 부대에 5~6명이 있던 경우도 흔해서 실병력은 명목상의 병력에서 몇할은 빼야 한다고 한다.[52] 사실 군재는 약간 타고나는 것도 있다. 직업군인도 덕후한텐 못당한다. 한신만 보더라도 딱히 군 경험이 많던 사람도 아니었지만 중국사 최고의 명장 반열에 오른다. 당나라판 강감찬인 곽자의 역시 마찬가지.[53] 애초에 강감찬은 2차 여요전쟁 이후 3차 여요전쟁까지 약 8년의 기간이 있었고, 그 사이에도 양국간 국지전은 계속 진행되어 또다시 전면전이 발발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은 누구나 예상할 수 있었기 때문에 본인이 맘만 먹는다면 군재를 쌓고 대비할 시간은 나름 충분했다.[54] 물론 교육만 받았을 뿐 실전 경험이 없거나 그다지 군재가 없으면 똥별화되는 경우도 많았다. 이는 영국 동인도 회사가 서양 최초의 채용 시험을 도입하기 전까지는 유럽에서 매관매직이 가장 일반적인 관리 등용 제도였기 때문도 있다.[55] 민간인 출신 정치인이나 관료가 군사행정에 무지할 것이라는 건 편견에 가깝다. 미국은 철저하게 문민통제 원칙을 지키고 있으며, 제복군인의 최선임인 각군 참모총장도 문민인 '직속부 장관'의 부하라고 못박고 있다. 이 때문에 신성모의 병크로 인해 문민통제 원칙은 갖다버린지 오래인 대한민국 국방부도 차관직은 문민 관료가 수행하고 있으며, 부처 내 근무자의 절반 이상이 군무원 출신의 민간인인 것도 이 때문이다.[56] 이런거 보면 강조의 정변이나 김훈·최질의 난 등에서 보이듯 무신 세력에 불안감이 있던 현종이, 일부러 당시 문관 세력에게 힘을 밀어준 측면도 있어보인다.[57] 이 전투에서는 망치가 두 차례나 등장한다. 첫번째는 밤새 두들겨 맞으며 수성전을 벌이던 곤도르에게 빛이 되어준 로한 기병대로, 해가 뜨는 아침에 평원 북쪽에 등장하여 적을 성문에서 밀어내고 평원 북쪽을 장악한다. 두번째는 이제 평원에서 접전중인 곤도르-로한 연합군에 쐐기가 되어준 아라고른의 죽은 자들의 군대와 곤도르 남부 영지의 곤도르군으로 평원 남쪽에 상륙하여 역으로 모르도르군을 3면 포위해버렸다.[58] 고려 주력군의 왼쪽(북쪽) 귀주성이 있음이 잘 고증되었다. 좌측하단엔 검차가 있고, 우측상단 거란군이 소나기에 불어난 하천 방향으로 힘겹게 후퇴하는 것을 묘사했다.[59] 김종현이 이끄는 기병대가 구릉지대를 내려가 거란 군대에 들이받는 장면을 묘사했다.[60] 방진을 짠 고려 육군의 우측으로 고려 기병대가 나아가는 모습을 그렸다. 거란군의 묘사는 잘 되지 않았다.[61] 일러스트레이터 '불나방'의 일러스트 출처 블로그[62] 오해가 있을까 첨부하면, 붉은 원형 모두가 귀주성을 나타내는 것이 아닌 대략적인 위치 묘사다. 3개 군대의 위치도 대략적인 추정이다. '태천 방향' 큰 길은 거란군의 동북쪽이며, 동남쪽에는 큰 길이 없어 기병대가 오기 부적절하므로 김종현군의 등장위치는 확실히 틀리다.[63] 실제로 거란족은 귀주 대첩으로부터 약 100년 후, 중앙아시아로 진출하여 이슬람 세계의 맹주인 셀주크 투르크 제국의 대군 100,000명[73]카트완 전투에서 불과 10,000여 명의 병력으로 무찔렀을 만큼 강력한 군사력을 지니고 있었다. 또한 귀주 대첩보다 약 250년 전, 아직 국가 체제를 제대로 갖추지 못했던 상태의 거란족들조차 당시 세계 최강대국이었던 중국 당나라의 대군 170,000명을 황장석 전투에서 박살냈을 만큼 용맹한 민족이었다. 고려군 외에 실제로 그들을 이긴 민족은 약 100년 뒤 완안부의 여진과 약 200년 뒤 칭기즈칸 휘하의 몽골 뿐이었다. 심지어 그들은 같은 유목민족[74]이다.[64] 평화전쟁 1019의 자문을 맡았던 길승수 작가의 소설 고려거란전쟁: 고려의 영웅들을 바탕으로 영상화한 작품이지만, 해당 소설은 제2차 여요전쟁만 다루며, 드라마와 비교하였을 때에 전개나 인물 묘사가 많이 다르다. 원작 계약 중 제3차 여요전쟁을 다룬 후속 소설도 있었다고 하며, 차후 출간할 예정이라고 한다.[65] 상기되어 있듯이 엄밀히 따지면 <천추태후>의 결말에서 약간 귀주 대첩이 지나가서 최초는 아니었고, 제대로 다루는 대하드라마 중에선 최초라는 의미인 듯하다.[66] 넷플릭스와 동시상영하긴 하지만, 넷플릭스의 자금력이 아닌 KBS의 순수 자본을 이용했다.[67] 최종화로, 귀주 대첩이 일어난 날짜(음, 양력 모두 동일)에 상영된다.[68] 사료에선 이 언덕이 고려군 뒤쪽인지, 거란군 뒤쪽인지 안 밝히나, 본 영상은 '거란군 뒤쪽'에서 나타난 것으로 해석했다. 하천 건너에서 평원으로 건너오는 길은 좁으므로, 좁은 길로 기병대가 신속히 이동하려는 모습을 잘 고증했다.[69] 고려군이 거란군을 압살하는 장면이 서자들의 전투를 연상케 한다.[70] 참고로 영상 후반부에 고려사 등의 기록이 나오는 자막은 방영분에는 없던 부분이다. 아마 본편 최종화를 본 시청자들의 비판을 의식해서 추가한 듯하다.[71] 동서방향과 가로세로길이가 반대인데다가 고려/거란 군세가 반대라는 치명적인 오류가 있다.[72] 첫번째 사진은 전방 고려 검차진이 고립되어 사각방진을 하고 있고 오른쪽 후방 검차진은 거란군의 공격을 일자로 막고 있는 상황이며 왼쪽 거란군 뒤에 도착한 고려기병(붉은색)들이 밀고 들어가는 상황이다. 두번째 사진은 전방 후방 고려 검차진이 합류해 학익진을 펼쳐 거란군을 포위시키고 거란군 뒤(왼쪽)에서 고려기병(붉은색)들이 돌격하며 포위 섬멸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