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fedc89,#670000><colcolor=#670000,#fedc89> 고려의 문신 | 귀주대첩의 영웅 김종현 金宗鉉 | |
출생 | 미상 |
고려 | |
사망 | 미상 |
고려 | |
직업 | 정치가, 군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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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김종현(金宗鉉)은 고려 제8대 현종대의 문신으로 귀주 대첩의 승리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장군이다.2. 생애
본관이나 출생년 및 초기 생애 등은 알 수 없고, 후술할 제3차 여요전쟁에서의 맹활약을 보여주기 전에는 제2차 여요전쟁이 끝난 직후인 1011년에 차후 같이 전쟁에 참전하는 박종검과 더불어 감찰어사로 임명되었다는 기록 밖에 없다.거란 제국의 명장 소배압이 이끈 정예군 100,000명이 고려를 침공했을 당시(제3차 여요전쟁) 강감찬의 고려군은 흥화진(의주) 동쪽 삼교천에서 수공[1]으로 거란군을 크게 격퇴했지만(삼교천 전투) 실전 경험이 풍부했던 소배압은 큰 피해에 아랑곳하지 않고 거란 기병 특유의 우수한 기동력으로 현종을 사로잡기 위해 수도 개경으로 남하했다.[2] 타격을 받아도 과감하게 남하하는 거란군의 소식을 듣고 깜짝 놀란 강감찬은 김종현에게 기병 10,000명을 주며 추격을 명령했고, 고려를 아예 무너뜨리려는 소배압 휘하의 거란군 정예 기병과 고려를 지키려는 김종현 휘하 고려군 기병의 영화같은 추격전이 펼쳐졌다.
개경 근처에 도착한 소배압은 현종의 청야 전술로 유목민족 특유의 현지 조달(타초곡)[3] 보급에 심각한 차질을 빚게 되었고, 현종과 개경 백성들의 결사 항전 및 김종현이 이끄는 고려군 기병의 추격에 위기감을 느끼고 결국 퇴각하게 되었다.
김종현은 현종을 보호하기 위해 개경으로 입성한 후 현종의 명령을 받들어 곧 북진했다. 본국으로 돌아가던 소배압의 거란군 80,000~90,000명 가량이 있는 귀주성 앞 평원에 도달하니 강감찬의 고려군 208,300명이 거란군과 뒤엉켜 대규모의 회전을 진행 중이었는데 마침 김종현 휘하 기병 10,000명은 거란군 등뒤에 포진하게 되었다. 김종현은 주저하지 않고 즉시 거란군에게 기병 돌격하여 팽팽하던 회전의 균형을 깨뜨려 버렸고, 거란의 정예군은 뒤에서 돌진해 오는 기병에 크게 동요하며 분쇄되어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게 되었다.[4]
몇가지 불분명한 부분이 있는데 김종현이 뒤늦게 도착한 것이 개경에서 재출발하여 늦어진 것인지, 아니면 귀주를 찾아 오는 길을 잃어 늦게 온 것인지는 불분명하다. 재정비로 늦어졌을 가능성도 있는데 거란 기병을 추격한다고 지친 말들을 잠시 휴식시키는 바람에 늦어졌을 수도 있다. 과감하게 개경까지 남하하는 소배압도 내려오면서 말들이 죽어나갈 정도였다고 하고, 말들이 지쳐 기동력이 떨어져 패배한 전투들도 역사에 많이 있었을 만큼 기병이 타는 군마의 체력은 전투에서 대단히 중요했다.
김종현이 기병이었다는 기록은 없으나, 숙적인 거란군이 최정예 기병으로 주로 결성되었는데 이를 추격했다는 건 동일한 기동력을 가진 기병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렇게 공을 세운 그는 그 해인 1019년에 예부원외랑으로 임명된다. 그러나 전쟁 전처럼 12년이 지나고서야 덕종이 즉위한 해인 1031년에 우간의대부로 임명된 것에 이어 다음 해인 1032년에는 우산기상시로 임명된 기록이 남았을 뿐, 그 뒤나 사망에 관한 기록은 무슨 이유에선지 남아있지 않다.
고려 서북면 행영 군단 | |
상원수(上元帥) | |
서북면행영도통사(西北面行營都統使) 강감찬 | |
원수(副元帥) | |
대장군(大將軍) 강민첨 | |
판관(判官) | |
내사사인(內史舍人) 박종검 | 병부낭중(兵部郞中) 유참 |
기타 지휘관 | |
병마판관(兵馬判官) 김종현 | 시랑(侍郞) 조원 |
휘하 장병 | |
208,300명 |
3. 대중매체
[1] 수장이 아닌 물길을 빠르게 만들어 거란 병력 이동의 방해로 병목 현상으로 멈출때 맹공격을 해 승리한 전투이다.[2] 직도 전략. 이 전략에 당한 군주들이 발해의 대인선과 조선의 인조였다.[3] 약탈[4] 살아 돌아간 거란군 병사는 수천 명에 불과할 정도였으며, 소배압은 간신히 달아날 수 있었지만 지휘관이 4명이나 전사했을 정도로 참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