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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리드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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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군정기 지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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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군 준장
마크 클라크 | 돈 프랫

||<tablewidth=100%><tablebgcolor=#eaeaea,#1f2023>※ 문서가 있는 인물만 2차 대전기 당시 계급으로 서술함
※ 윗 첨자 : 전사, 윗 첨자 : 육군 항공대, 윗 첨자 해병: 해병대, 윗 첨자: 전시 계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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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2664> 재조선 미국 육군사령부 군정청 군정사령관
존 리드 하지
John Reed Hodge
파일:attachment/존 리드 하지/johnhodge.jpg
<colcolor=#fff> 출생 1893년 6월 12일
미국 일리노이 주 골콘다
사망 1963년 11월 12일 (향년 70세)
미국 워싱턴 D.C.
재임기간 재조선미국육군사령부군정청 군정사령관
1945년 8월 27일 ~ 1947년 2월 5일[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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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2664><colcolor=#FFFFFF> 학력 일리노이 대학교/어배너-섐페인 캠퍼스
미국 육군포병사관후보생학교
신체 178cm
군사 경력
복무 미합중국 육군
1917년 ~ 1953년
최종 계급 대장
주요 지휘 제43보병사단
제23보병사단
제24군단
제5군단
제3군
육군 지상군 사령관
주요 서훈 미국 육군 3등 공로 훈장
미국 해군 공로 훈장
훈공장
에어 메달
퍼플 하트 훈장
주요 참전 제1차 세계 대전
제2차 세계 대전 (태평양전쟁)
}}}}}}}}}
파일:존 리드 하지.png
1952년 육군 대장 시절의 하지 장군
1. 개요2. 생애
2.1. 전간기 시절2.2. 제2차 세계 대전에서의 행적2.3. 미 군정사령관2.4. 군정 이후 행적
3. 평가4. 진급 내역5. 대중매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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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국군인.

태평양 전쟁에서 활약한 인물로, 한국에서는 미 육군 제24군단장 시절인 1945년~1948년에 미군정 사령관을 역임[2]한 것으로 잘 알려진 인물이다.

그러나 미군정 사령관에 취임한 초기부터 인민위원회건국준비위원회를 일방적으로 해산시키고[3] 편향적인 행보를 보이는 것부터 시작해서, 섣불리 미곡가격자유화를 강행했다가 초인플레이션을 유발하기도 했다. 이에 더해 4.3 사건, 대구 10.1 사건 등 여러 대형 사건들을 수습하지 않고 책임을 회피하는 데만 급급하는 등, 군인으로서의 능력은 몰라도 정치가, 행정가로서는 무능한 인물이었다. 물론 당시 미국의 한국에서의 행태가 뿌리 깊은 인종차별주의에 기반한 측면도 있겠으나 하지의 한국에서의 행실 또한 이와 다를 바가 없었기 때문에 한국에서는 현대사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친 인물로서 박한 평가를 받는다.

본국인 미국에서도 그다지 이름이 알려지지 않았고 인지도 또한 별로 없다. 군인이었던 시절의 전과가 제법 혁혁한 편이라 그 부분만큼은 알음알음 알려져 있는 편이지만, 한국에서의 행보는 미국 입장에서도 워낙 흑역사이며 비판 요소인지라 언급 자체가 되지 않는다.

2. 생애

2.1. 전간기 시절

군인이 되기 전에는 일리노이 남부 사범대학과 일리노이 대학교를 다녔고 졸업 후 육군 장교에 지원하여 OCS 과정을 통해 1917년 10월 소위로 임관했다. 임관 직후 제6사단에 배치되어 사단의 선발대 요원으로 유럽 전구에 파병되었고, 이후 제5사단 제9여단 제61보병연대로 전출되어 휘하의 통신 장교와 중대장으로 전쟁을 치뤘다. 파병 도중 하지는 프랑스가 군사교류의 일환으로 미군에 제공한 프랑스 육군 대학의 교육 과정에 선발되어 교육을 이수하였고, 그 외에 진위가 불분명한 기록이지만 전쟁 말기에 대대장을 지냈다고 한다.

1차 대전이 끝나고, 미국 본토로 귀국한 하지는 1921년 대위로 진급하고 미시시피 주 주립대학의 군사학 교수로 임명되어 4년 동안 근무했다. 정황상 갓 태동한 ROTC의 교관으로 지냈던 것으로 보인다. 교수 보직을 마친 후 육군 보병학교의 고등군사반 과정을 수료하고 1926년~1931년의 기간 동안 하와이에 있는 제27보병연대와 뉴욕에 있는 제18보병연대에 배속되어 연대 장교로 지냈다. 이어서 1936년까지 하지 대위는 육군의 교육기관 4곳[4]에 각각 입교하여 교육 과정을 수료했고 35년에 소령으로 진급한다.

5년 간의 학교 과정을 마친 후 1936년에 대대장이 되어 1년 간의 임기를 지내다가 전쟁부(육군성)[5]의 참모장교가 되어 41년 초반까지 워싱턴에서 근무하면서 중령으로 진급했고, 이후 제7군단으로 전출하여 군단 참모(계획/교육 참모)로 지내다 참모장으로 승진하고 대령으로 진급한다.[6]

당시 군단장은 로버트 리처드슨(Robert Richardson) 소장이었는데, 훗날 중장으로 승진해 43년부터 중부태평양 미 육군 사령관을 지낸 인물이다. 당시의 하지를 좋게 평가했는지 하지는 그의 휘하에서 2계급(대령, 준장)을 진급했고, 훗날 하지 소장을 제24군단장으로 추천해 주기도 하였다.

40~41년 미군의 초기 팽창 시기에 폭증하던 군 규모에 비례해 기존 정규군 장교들도 조기 승진이 많이 이뤄졌지만, 자신을 좋게 평가해 준 상관의 후원도 영향이 컸음이 짐작되는 기록들이다. 42년 여름에 참모장 직을 마치고 하와이로 전출가면서 그의 경력이 고속 발전한다.

2.2. 제2차 세계 대전에서의 행적

태평양 전쟁 초기부터 참전하여 레이테 섬 전투와 오키나와 전투[7]에서 군단장(Corps Commander)으로 대활약하면서 일개 보병 대령(1941년 12월)에서 중장(1945년 6월)까지 3년 반 만에 진급할 정도로 탁월한 능력을 보여주어 뼛속까지 군인으로 인정받았다.

미국 독립 전쟁부터 한국전쟁 직전까지의 미군은 전쟁 때만 군 규모를 늘렸다가 전쟁이 끝나면 다시 군을 최소한으로 감축시켰는데, 이 때문에 1차~2차 세계대전 사이 전간기의 미군은 한 계급에 10년 넘게 근속하는 사람도 흔할 정도로 인사 적체가 심했다. 그래서 군대에 정말 헌신할 게 아니면 보통 대위에서 전역하는 분위기였다. 그러다 2차 대전이 터지자 미군의 규모가 39년 9월 18만명에서 진주만 공습 시점에는 170만명으로 폭발적으로 불어났고, 전간기 군축을 견뎌내고 근속 중이던 정규군 영관급 장교들은 능력만 입증된다면 지휘관/참모로 고속승진했다. 하지도 이런 케이스였던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하지의 이미지는 대개 한국에서의 군정 통치를 했던 인물로 기억되나, 한국에 오기 전 오키나와에서 군단을 지휘할 때만 해도 하지는 태평양 전 구역에서 절대적인 명성을 떨치던 인물로 당시 태평양 전선 최고 책임자였던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과 체스터 니미츠 제독[8]을 제외한 실무 지휘관급에선 크게 알아줬던 지휘관이었다. 한국 통치로 인한 세간의 평가와는 별도로 하지는 이미 미군 내부에서 인정받은 유능한 군인이었던 것이다.[9] 보병 장교임에도 육군 항공기 승무원 자격 휘장을 취득하는 등 군인으로서의 능력은 여러모로 검증된 인물이다. 하지가 전쟁이 끝나기 직전 중장으로 진급한 것과 1952년에 대장으로 진급한 것은[10] 결코 운이 아닌 것이다.

하지는 대령 계급에서 전쟁이 한창인 1942년 6월 준장으로 진급했으며 하와이에 주둔한 제25보병사단의 No.2(부사단장)으로 지내며 과달카날 전투에 참가했다. 과달카날 전투가 끝나고 얼마 안가 하지는 소장으로 진급했으며 아메리칸 사단의 사단장을 맡아 1944년 3월까지 지낸다.

이후 하지는 1943년 남태평양 해역군의 카트휠 작전의 일환이었던 뉴 조지아 섬 지상전과 부갱빌 섬 전투에서 사단장으로 전역에 참가했다. 1944년 4월 하지는 하와이에서 신설된 육군 24군단장[11]으로 임명되어 그가 미국으로 돌아가는 1948년 8월까지 군단장으로 지내게 된다.

제24군단은 사이판과 티니안 전투에서 군단 포병대[12]를 지원했으며 9월에 있을 팔라우 제도 작전에서 본도였던 바벨투아프 섬에 상륙할 예정이었으나 일본군이 섬에 병력을 증원하고 요새화를 대거 진행중이라는 첩보가 입수되어 취소되었고 대신 제도 동쪽에 있는 서부 미크로네시아의 야프 섬과 울리시 환초, 인근 섬들로 목표가 변경되었다. 작전 개시일은 10월 5일이었고 이를 위해 제24군단은 9월 초순부터 승선과 적재를 해서 9월 15일에 하와이를 출항할 예정이었다.

그런데 야프 상륙 작전은 출항하기 직전이었던 9월 13일에 돌연히 뒤바뀐다. 당시에 팔라우 제도 침공의 예비 단계에서 홀시 제독의 제3함대 제38기동부대는 일본군의 배후지였던 필리핀 열도 곳곳을 폭격했는데 일본군의 저항은 미약했고 이에 홀시 제독은 필리핀의 일본군이 약한 전력이라고 판단하고 니미츠 제독을 비롯한 상부에 전문을 보내 건의하여 야프 상륙작전에 쓰일 제24군단과 제3함대의 상륙함대군을 맥아더 장군에게 넘겨서 레이테 섬을 조기에 침공하자고 주장한다. 니미츠 제독은 출항전 자신에게 작별 인사를 하러오는 하지 장군에게 홀시 제독의 전문을 보여줬고 하지 장군이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자 그대로 합동참모본부에 건의를 올렸다.

홀시 제독의 건의는 승인되었고, 제24군단을 태운 수송선단은 하와이를 출항, 마셜 제도의 에니웨톡 섬에서 재급유를 받고 남태평양의 마누스 섬으로 이동하여 맥아더 장군의 전구에 배속되었고 그 과정에서 하와이에서 선단이 출항할 때 하지장군과 그의 참모들은 급히 항공편으로 뉴기니 섬 서부의 홀랜디어로 가서 레이테 섬 전투를 총괄할 제6군 사령부에 신고를 하고, 제6군의 작전수립에 제24군단을 추가하는 기획과정을 거친후 다시 항공편으로 에니웨톡으로 이동, 선단에 합류하여 승선했고, 10월 초에 마누스 섬에 도착한 선단은 2차 급유를 받아, 제7함대의 나머지 선단과 합류해 레이테로 항해한다.

1944년 10월 하지는 24군단을 지휘하여 레이테 섬에 상륙해서 12월 말까지 섬에서 일본군을 섬멸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이후 24군단은 섬에서 몇달간 재정비를 하고 오키나와 침공 작전에 동원되어[13] 1945년 4월 상륙했다. 24군단은 오키나와에서 많은 손실을 입었지만 결국엔 섬을 점령했고 하지는 공로를 인정받아 45년 6월[14]에 중장으로 진급했다.[15] 그 후 하지 중장과 제24군단은 오키나와 섬에서 휴식과 재편을 하며 몰락 작전을 준비하던 도중 곧 일본이 항복하면서 점령군으로 한국에 급파된다.

2.3. 미 군정사령관

1945년 9월 9일, 미군정 사령관으로 임명되어 1947년 2월 5일까지 임기를 수행한다. 이 기간 동안의 행적은 미군정 문서 참고.

2.4. 군정 이후 행적

군정 종료 후 미 본토로 귀국, 당시 다른 장교들과 다르게 강등되지 않고[16] 포트 브래그의 5군단장[17]을 지냈고 한국 전쟁 초기 시점에서 본토의 미 육군 제3군 사령관에 임명되었다. 1952년 대장으로 진급했으며 육군 야전군 사령관[18]을 지내다 한국 전쟁이 끝날 무렵 전역했다.

책으로 나와있는 이승만의 전쟁 비망록에 기술된 내용에 의하면 한국 전쟁이 터진 후 대한민국으로 전개한 미군은 당시 본토에서 근무하던 하지를 한국으로 오게 하려고 애썼다고 한다. 2차 대전 당시 태평양 지역에서 일본군을 상대로 전투 지휘 경험과 수년간 한국을 군정 통치한 경험이 이유였다. 그러나 이승만의 극렬한 반대로 하지가 오지 않았다는 것이다.

1948년 8월 미 군정 종료 이후의 하지의 행적은 한국과는 인연이 끝난 것으로 인식되었으나 최근에 발견한 사실로는 그게 아니었다. 1952년에 미 육군 야전군사령관(Field Forces C.G)에 보임되고 육군 대장이었던 그는 그해 10월경 해외 주둔 미 육군에 대한 시찰의 일환으로 전쟁 중인 한국을 몇 주간 방문한 것이다. 당시 제8군 사령관이었던 밴 플리트와 접견하고 유엔군, 한국군 각급부대, 포로 수용소를 두루 살폈던 그는 백선엽, 유재흥을 위시한 한국군 수뇌부와도 만났는데 미 군정시절(국방경비대)부터 알았던 인연들이다.
1953년 하지의 육성 인터뷰 영상.

전역 후에는 평범하게 만년을 지내다가 1963년 11월에 병으로 사망했다. 유해는 알링턴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

3. 평가

그를 남한의 미군정 사령관으로 선임한 것은 실책이었다. 그는 한국의 역사나 한국인에 대해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고, 행정 경험도 없었기 때문에 정부 조직을 이끄는 일에는 문외한이었다. 결국 한국인들과 우호적인 협력 관계를 이끌 만한 지도자로서의 능력이 그에게는 매우 부족했다.
제임스 매트레이 캘리포니아 주립대 교수

주한미국대사관에서 근무했던 그레고리 헨더슨(Gregory Henderson, 1922년~1988년)은 "하지는 단지 수송 시간이 없다는 이유로 약 2천만 명의 인구를 가진 나라의 정치 권력을 행사하는 자리에 선택된 인물"이라고 평했다. 물론 미군이 정말 별 생각 없이 하지를 군정사령관에 임명한 것은 아니었다. 원래 남한의 군정 사령관 내정자는 육군 대장 조지프 스틸웰이었지만[19] 장제스와의 불화 때문에 불발되었다. 이후 임명된 것은 스틸웰과 다르게 탁월한 식견을 보여주었던 앨버트 웨드마이어 장군이지만, 국공내전 중재 등 중국에 과제가 산적해 있어 임명이 철회되었다. 한 마디로, 하지가 임명된 것은 불가항력적인 불운이라고 밖에는 볼 수 없는 일이었다.

사실 하지가 정치적 감각이 형편없는 인물인 것은 맞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당시 군정 사령관으로 특별히 임명될 만한 미군 장성 중 민생 문제에 유능하고 정치에 노련한 인재가 따로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미군은 당시나 지금이나 해외 파병지의 현지 사정을 사전에 제대로 파악하지 않는 고질병이 있었기 때문에, 누가 들어왔더라도 한국에 대해서는 무지한 채 통치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나름대로 아시아 사정에 밝았던 스틸웰[20]이나 정치적 식견이 뛰어났던 웨드마이어가 부임했다면 뭔가 다른 전개가 일어났을지도 모르지만, 역사에 만약은 없으니 그리 큰 의미는 없는 부분이다.

어쨌든, 하지의 한반도 군정 통치는 정치를 모르는 야전 군인에게 정치를 맡기면 어떤 사단이 나는가를 가장 단적으로 보여 준 일종의 사고라고 할 수 있다. 광복 이후의 한반도는 미국이 이전에 카이로 회담에서 선언했듯, 일본이 점령한 식민지로써 일본의 패전과 함께 독립할 국가였다. 괌이나 오키나와처럼 몇개 군단 정도가 통제가능한 좁고 작은 지역이 아니라, 2천만 인구를 가진 국가라는 것이다. 그런데 GHQ에서는 일본 한 나라도 감당하지 못해 실무를 패전국인 일본 관료에게 다 떠넘긴 상태로 운영하고 있었고, 따라서 그 옆의 한국까지 감당할 처지가 아니었다. 그러나 일본 군정사령관 맥아더는 한반도가 가까이 있었기에 한반도의 관리도 떠맡았고, 사실상 하지를 지사장처럼 한국에 파견한 것이다.

그런 식으로 들어온데다 한국과 따로 접점이 있었던 사람이 아니다 보니 하지는 한반도 정세에 어두웠고, 전형적인 군인이다 보니 정치적 감각이나 재능이 없었으며, 미국이나 한국에 하지가 조언을 구할 만큼 공신력이 있는 유력자도 없었다. 또한 웨스트포인트 출신인 맥아더의 라인을 타고 왔으면서도 본인은 웨스트포인트 출신이 아니라서, GHQ의 하부 조직처럼 굴러가던 한국 군정의 실무 담당자들(하급 장교들)을 통제할 만한 능력이나 카리스마도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믿을 수 있는 한반도의 협력자를 구하기도 어려웠고, 그나마 있던 유력자들은 극한의 권력투쟁과 정치테러를 통해 하나하나 제거되면서 점차 이승만같은 극단주의자들만 남게 되었다.

그래서 하지의 미군정은 총체적 난국이라는 말이 어울리는 상황으로 굴러갔다. 하지는 당시 한반도 정치 세력 중 가장 미국과 입장이 맞는 세력이었던 한국민주당의 영향을 많이 받았는데, 한국민주당 계열은 친일 부역 논란이 있고 지주 중심의 정당이었기에 한국 대중의 지지를 받지 못했다. 그리고 다른 독립운동가 출신 유력자들과의 관계는 좋지 않았다. 좌파 계열은 아예 대놓고 차별해서, 소련과 국내 좌파 세력 간의 갈등을 초래했다. 다른 사람도 아닌 여운형에게 "쪽바리(Jap)로부터 을 얼마나 받아먹었지?"라고 심문하는 웃지 못할 일화도 있었고, 그 이전 한반도에 진입했을 때도 조선인민공화국 측에서 보낸 여운형의 동생 여운홍, 여운형의 비서 조한용, 미국 브라운 대학 출신 백상규를 모두 문전박대했고, 언론들의 환영식도 다 무시했다.

그렇다고 친미 우익 세력들과 관계가 돈독했느냐면 또 그건 아니어서, 반공 성향이 강한 동시에 독립운동 경력 등 정치적 영향력에 있어서도 좌익 인사들을 견제할 수 있을 만큼 강력한 스펙을 가지고 있었던 이승만이나 김구를 독선적이라고 꺼렸다.[21]

처음에는 평생을 독립운동에 헌신했다고 알려진 이승만에게 어느 정도 경의를 표했고, 이승만을 특별대접해 주는 뉘앙스도 있었다고 한다. 예를 들어 최기일 박사[22]의 회고록에 따르면 이승만이 갓 귀국했던 45년 10월에는 미군정이 오로지 이승만에게만 라디오 연설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등 여러모로 이승만을 편애하는 듯한 행보를 보였고, 이승만과 미군정의 사이가 악화되었을 때도 막상 존 하지 본인은 이승만과 만남을 가질 때 다정해 보였다고 서술했다.[23]

아무래도 광복 때 이미 70세로 오늘내일해도 이상하지 않은 노인이 평생 동안 독립 운동을 했다고 하니 존중하는 마음도 없지 않았을테고, 실리적으로 보아도 1900년대 초부터 미국 정계와 대통령에 인맥이 있는 거물이었으니 잘 대접해 줄 수밖에 없었다. 하지가 한반도에 대한 지식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었으니 나름대로 머리를 굴려 쓸모있어 보이는 인사를 대접했다고 볼 수 있는 셈이다.

그러나 나중에는 사이가 틀어져, 자신의 회고록에 "이승만에게 정신과 상담을 권하고 싶다"고 적어놓았을 정도다. 또한 방한한 미 전쟁부 차관 드레이퍼 앞에서 "이승만은 스스로를 위대한 조선의 지도자라고 생각하고 있으며", "그는 권력을 장악하고 단독 정권을 세우기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할 사람으로, 그가 궁극적으로 원하는 것은 독재 정권"이라고 이승만을 신랄하게 까댔는데, 물론 그가 무슨 통찰력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저 감정적으로 욱해서 비난한 것이긴 하지만 불행하게도 그것은 결국 현실이 되고 말았다.

군정 사령관으로 있으면서 그가 남겼던 어록들도 하나같이 가관이기 짝이 없는데, 입만 열었다 하면 "나는 정치를 모른다"라고 동네방네 자랑을 하고 다니는 수준이었다.
"한국인은 일본인처럼 고양이와 같은 민족이다."
"왜놈들을 다루는 것은 쉬운 문제다. 한인들은 일본인들에게 약탈당하고 매를 맞았다고 떠들어 대지만 증거가 거의 없다.이들보다 더한 '멍텅구리들'은 없을 것이다. 그들의 역사를 돌이켜볼 때 한인들은 기회만 있으면 강간하고, 강탈하고, 살인을 했다. 그들은 사람을 때리는 것을 좋아한다."
"주민의 경솔하고 무분별한 행동으로 의미없이 인민이 희생되고 아름다운 국토가 황폐되어 재건이 지연될 것."
"앞으로 몇 달 동안의 당신들의 행동을 통하여, 세계의 민주 국가들과 그들의 대표자인 나에게 당신들의 민족으로서의 도량과 능력, 독립국의 일원으로서 영광스러운 자리를 차지할 준비가 되었음을 보여줄 수 있을 것이다."

그야말로 일본인들을 비롯한 제국주의 시대 서구인들이 아시아 국가들에 대해 심심하면 하던 오만한 발언들과 큰 차이가 없다. 이 때문에 영자신문 "The Seoul Times"는 차라리 미개한 어느 보르네오 섬 추장의 통치를 받는 게 더 낫겠다며 하지를 맹비난했고, 심지어 미국 관영 소식통마저 한인에 대항하여 일본과 미국이 동맹을 맺는 효과를 가진 것 같다고 하지의 군정 통치를 비난할 지경이었다.

정치적으로 부족했더라도 경제나 민생 정책은 잘 했다면 모르겠는데, 그의 미군정 치하에서 실시된 경제정책도 혼란을 부채질하기만 했다. 1945년 작황은 풍작이긴 했지만 건국준비위원회인민위원회를 무리하게 해산시키고 섣불리 미곡 가격자유화 조치를 취하다가 과도한 통화팽창으로 인해 쌀값이 천정부지로 치솟아 결국 가격자유화 조치를 철회했지만 매점매석 단속에 실패해서 쌀값 통제에 실패했다. 거기다 대구/경북 지역에서 콜레라가 돌았을 때 봉쇄 조치를 취했는데, 막상 생필품과 식료품, 의약품의 보급을 소홀히 하여 대구 시민들을 궁지에 몰아넣었고 이는 결국 1946년 10.1 사건의 원인이 되었다. 또한 적산을 불하하는 과정에서 기존 직원들이 조직한 위원회는 좌익 운동의 소굴이 된다는 이유로 취소하고 엉뚱한 자들에게 분배하는 경우도 허다해서 불협화음이 잇따랐고, 토지개혁도 북한의 급진적 조치에 비해 온건해서 여론의 지지를 얻기 힘들다는 이유로 미루는 등 그야말로 미숙하기 그지없는 아마추어였다.[24]

삼팔선이 등장한 과정에서도 그의 책임이 일정 부분 존재한다. 해방과 일본의 돌연한 항복으로 국무성은 3성조정위원회(State-War-Navy Coordinating Committee)[25]는 8월 10에서 15일 사이에 몇 차례 장시간 회의를 열었다. 미 국무성은 미국이 가능한 한 북쪽으로 진주해서 항복받을 것을 건의했다. 군으로서는 즉시 이용할 만한 병력이 부족했고, 또한 시간과 거리상의 조건으로 보아도 소련군이 이 지역에 진입하기 전에 더 북쪽으로 가기는 어려웠다. 군의 견해는 만일 항복 수락 제안이 현재 우리들의 군사 능력을 훨씬 초과한다면, 소련이 이를 수락할 가능성은 적다는 것이다. 맥클로이는 딘 러스크와 찰스 본스틸(Charles H. Bonesteel) 대령에게[26] 대기실에 가서 미군을 가능한 한 북상시켜 항복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정치적 요망과 미군 진주 능력의 명백한 한계를 조화시키는 안을 작성해 오라고 요청했고, 미군은 현실적으로 미군 관할 지역 내에 한국의 수도를 포함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하지 역시 38선 분할에 동의한 것이었다.

이렇다 보니 같은 편이었던 우익 인사들조차도 하지의 무능에 대해서 학을 떼며 질색을 할 지경이었고, 자연히 당대 한국인들 사이에서 하지는 완전히 역적 취급이었다. 거기다가 박헌영남로당이 현역으로 활동하고 있었으니 일정 수준의 혼란이야 어쩔 수 없었다고 쳐도 백색테러를 제어하지 못하거나, 4.3 사건이 일어났을 때 사건 수습은커녕 되려 이를 부추기는 행보를 보이는 등 혼란 수습에 무능하면서 무책임하기까지 했는데, 이처럼 국내 질서를 수습할 수 있었던 영향력 있는 집단, 어쩌면 가장 강력한 집단이었을 미국을 대표하는 인사가 될 인물이라기에는 완전히 부적격자 수준이었다.

물론 하지의 미군정도 마냥 삽질만 한 건 아니다. 소작료를 크게 낮추면서 소작농들의 부담을 덜어 주었고, 대대적인 문맹 퇴치와 교육시설 증대로 78%에 달하던 문맹률을 단 3년 만에 절반 수준인 41%로 크게 낮추는 등 분명히 잘한 일들도 있긴 하다. 하지만 상기된 초인플레이션과 정치적 혼란 유발, 남북 분단 고착화, 4.3 사건 등 온갖 악영향들과 비교하면 그냥 개평이나 겨우겨우 따낸 수준이다.

정리하자면, 하지가 오늘날까지도 한국인들에게 비판받는 이유는 단순히 무능해서가 아니다. 한국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의 미군정 지도자들 또한 정치가 출신이 아닌 군인이었기 때문에 정치적 역량이 형편없는 것은 마찬가지였으므로 그 부분에서는 어느 정도 참작의 여지가 있다. 하지만 하지는 국내 사정에 밝은 정치인들과 협력은커녕 불화만 조장해 정국을 혼란스럽게 만들었고, 한국의 문화와 국민들에 대한 존중과 배려가 없는 등 통치자로서는 불성실하고 몰이해적인 태도 때문에 평가가 좋을 수가 없는 인물이었다.

하지 본인도 군정 사령관 시절을 불명예스럽게 여겼는지, 말년에는 한국에서의 경험을 회고하며 "내가 민간인이었다면 아무리 거액의 보수를 줘도 맡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러나 하지 이후의 미군정들이 미국-아프가니스탄 전쟁, 이라크 전쟁처럼 영 좋지 않게 끝나 버린 경우가 많아서 하지 시기의 미군정이 상대적 고평가를 당하는 웃지 못할 일이 벌어지기도 한다. 물론 존 하지 시절의 한국이 제대로 굴러가는 나라였냐면 그건 아니지만, 최소한 빨치산이 암약한다던가 하는 일 없이 최소한의 행정력을 발휘하게 만드는 데만큼은 성공을 거두었기 때문이다. 하지가 알고 보니 괜찮은 통치자였다는 식으로 재평가를 받는 것이 아니라, 그만큼 미국의 군정이 이후로도 형편없을 뿐 아니라 오히려 퇴보한 측면까지 있다는 것이다.[27] 사실 미국은 이질적 문화를 지닌 타국에 대해 특유의 무지함으로 문제를 많이 일으켰다. 유럽은 그래도 미국과 문화적 동질성이 있으니까 나름대로 굴러갔는데, 문화적 접점이 없는 아프간과 이라크에서는 참담한 실패를 겪었다. 사실 한국에서도 비슷한 삽질이 많이 이루어지긴 했지만, 삽질은 북한이 더 많이 한데다, 6.25 전쟁으로 한반도 전역이 리셋되면서 친북 공산세력이 소멸해 버렸고, 서유럽과 마찬가지로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이 높았기에 결과적으로 성공한 케이스다. 어디까지나 운이 좋았을 뿐이지 미국이 잘 한 덕분에 성공한 것은 아니다.[28]

4. 진급 내역

※ 계급 형식의 차이는 각주글에 자세히 설명되어 있으니 생략.

5. 대중매체에서



[1] 안재홍 민정장관에게 정부를 이양하고 물러났다. (1). 제24군단장 재임기간: 1944년 4월 8일 ~ 1948년 8월 27일[2] 원래 남한의 미군정 사령관은 단독 직책이 아니라 군정장관 또한 겸직하는 입장이기 때문에, 2명의 군정장관(사령관이 겸직하는 군정장관 및 사령관을 보좌하는 군정장관)이 남한의 미군정청을 함께 다스렸다. 하지 혼자서는 남한 전역을 다스릴 수가 없기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시시콜콜한 정무들은 그의 부하들의 몫이었다.[3]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인정하지 않았다고 비난받기도 하지만, 이것만큼은 하지의 잘못이 아니며 그는 그저 미국 정부의 방침을 그대로 따른 것뿐이었다. 미국은 임정을 중국국민당과 관계가 있다고 간주하여 끝내 승인을 거부했고, 미군정이 한반도 이남에 상륙하기 전부터 더글러스 맥아더의 미 극동사령부가 미군정 외의 정부 세력을 불허한다고 선포했다. 하지는 이를 실행에 옮겼을 뿐이고, 맥아더의 방침은 미국 국무부의 1945년 6월 8일자 성명(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주권에 대하여 승인을 거부한다.)에 바탕한 것이다.[4] 육군 화학전 학교, 육군 지휘참모대학, 육군 전쟁대학, 육군 항공대 전술학교[5] 2차 대전 때의 미 육군의 최고 행정 기관으로, 해군부와 함께 전후 국방부 예하로 편입되었다.[6] 오늘날의 미군/한국군의 군단 참모장의 계급은 준장인데, 이 때까지의 미군은 평시의 작은 군대 규모와 그에 따른 인사적체 때문인지 보직 적정계급이 지금의 미군보다 낮았다. 미군이 대전에 참전하면서 광범위하게 팽창된 군 조직을 효과적으로 유지하기 위해 특유의 계급 인플레이션이 생겼고, 현재까지도 이 중 일부는 적정하다고 여겨져서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7] 오키나와 전투의 지상 병력으로 육군 4개 사단과 해병 2개 사단이 동원되었다. 이들은 미 육군 제10군의 사령관인 육군 중장 버크너 장군의 지휘하에 있었으며, 여기서 육군 사단들로 구성된 육군 군단을 지휘한 인물이 바로 하지이다.[8] 니미츠는 태평양 중부 해역군 사령관, 맥아더는 태평양 서남 해역군 사령관이었다.[9] 하지가 군인 중의 군인이라는 평판을 얻은 배경을 설명하면, 그는 간부후보생(학사장교) 출신으로, 단적으로 서술하면 그의 시대였던 전간기의 미군은 규모도 매우 작아서 육사 출신이 아니면 영관급으로조차 진급이 거의 안 됐고(궁극적으로 베트남 전쟁 이후에 인사제도가 개편되었다) 육사 출신도 밑에 후술된 대로 초장기간 근속해야 진급할까 말까의 수준으로 처참했다. 또한 2차대전으로 군 규모가 폭증하고 진급이 수월했어도 중장 이상의 고위장성으로의 승진엔 명백히 유능한 능력과 실적이 검증되어야 했다.[10] 이때의 대장 진급은 공로보다는 중장으로서의 근속 기간(7년)이 충분해서 그런게 아닌가 싶다. 2차 대전 때 급속 진급한 많은 인물들이 밑에서 후술된 내용과 더불어 군축으로 인한 강등(+직책)을 겪고나서 한국 전쟁이 터져서야 2차 대전 당시의 고속 진급한 전시 계급 그 이상으로 진급할 수가 있었다. 그리고 2차대전과 한국전쟁으로 고속승진하고 군축의 영향을 적게 받은 장성들이 많아서 그런건지, 세대 교체가 되는 50년대 후반까지 한직이나 뺑뺑이 돌리기가 많았던 듯하다. 미군정 이후 하지의 행보를 보면 제5군단장 - 제3군 사령관 - 육군 야전군 사령관(Army Field Forces - 맥네어 장군의 직책의 후신) - 전역이다. 군단장을 중임하고 군사령관을 지냈다고는 하지만 당시의 상황을 고려할 때 그 보직들의 주업무는 미국 본토 방어 및 후방 군정 업무였다. 당시 상황에서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보직이 있다면 그건 한국의 미8군사령관과 미국 극동군사령관, 유럽 주둔 미군 사령관 정도. 하지가 맥네어의 직책을 수행하면서 핵무기 체계(Ex : M65 핵 야포)의 발전에 영향을 끼쳤을 듯하지만 그 외의 공로는 아직 불분명하다.[11] 미 육군이 2차대전에서 창설한 사실상의 마지막 정규 군단으로 당시의 미 육군 군단 단대호상으로는 더 존재했으나 전쟁기간 동안 실질적 활동을 펼친 것은 24군단이 마지막이었다. U.S 7th Infantry Division in WW2 책에 의하면 전쟁 중반, 중부 태평양 전구의 미국 육군 사령관이었던 로버트 리처드슨 중장(니미츠 제독의 휘하 육군 구성군 사령관)이 중부태평양 지역에 주둔한 육군 사단들의 숫자가 증가하면서 이들을 통제할 상급 조직의 필요성을 참모총장이었던 조지 마셜 대장에게 설파해서 이뤄진 것이었다. 처음에 군단장으로 내정된 인물은 콰잘린 환초 전투에서 제7사단을 지휘한 찰스 콜렛 소장이었지만 그는 마셜 장군에 의해 유럽 전선의 군단장으로 영전하면서 대신 남태평양에 있던 하지 소장에게 낙점된 것이다. 여담으로 제7사단의 후임 사단장은 기존에 제7사단의 사단포병단장이었던 아치볼드 아놀드 준장이었는데 사단장으로 영전과 동시에 소장으로 진급했고 이후 레이테 섬 전투와 오키나와 전투에서 사단장으로 지휘했고 하지 중장을 따라 남한으로 파병되어 미 군정 초기의 군정장관으로 임명되었다가 미.소 공동회의의 미국측 수석대표가 되어 46년 9월까지 지내다 미 본토로 전출되었다.[12] 현지의 지상군이었던 제5수륙양용군단의 포병대는 티니안 전투 이후에 창설되었고 그때까진 제24군단 포병대가 배속되어 대신 역할을 해줬다. 레이테 섬 전투에선 반대로 제5상륙군단 포병대가 배속해서 활동하다 12월 2주차에 재편을 마친 제24군단 포병대가 레이테 섬에 도착해서 교대하여 괌 섬으로 철수했다.[13] 원래 제24군단은 니미츠 제독 휘하의 육군부대였고 레이테 전투에 참가한 것도 맥아더 장군에게 빌려준 것이었다. 오키나와 전투가 끝난 1945년 7월 무렵에 전쟁 내내 적용되었던 니미츠, 맥아더 2개 합동전구 체제가 종료되었고 각자의 해군과 육군을 지휘하기로 변경하면서 제24군단은 맥아더에게 귀속되었다.[14] 미국 육군이 2차대전에서 중장 진급인사를 마지막으로 실시한 달이었고. 후속 중장 진급인사는 48년이 돼서야 재개한다. - 이외에 6월에 하지 장군과 같이 진급한 다른 미군 장성들(+ 당시 보직,근무지)을 소개한다. 레이몬드 맥레인(제19군단장/독일), 존 헐(육군성 작전참모부장/미국 본토), 어니스 화이트헤드(제5공군 사령관/태평양), 네이단 트위닝(제15공군 사령관/이탈리아), 트로이 미틀턴(제8군단장/독일), 르로이 루츠(육군 근무군 참모장/미국 본토), 매튜 리지웨이(제18공수군단장/독일), 찰스 홀(제11군단장/태평양), 윌리스 크리텐버거(제4군단장/이탈리아), 알반 길램(제13군단장/독일)[15] 이 시점의 미군은 유럽 전선의 종전 영향으로 군축의 초기 단계에 돌입했고 이미 평시계급이 확정되거나(다수의 사례를 접한 결과, 대개의 경우 급여만 그렇고, 전시 계급의 유지는 가능하며 보직도 그에 맞게 준 듯하다) 아예 강등된(Termination of Rank) 장성/장교들(이 경우엔 보직도 강등된 계급에 맞게 준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태평양 전선은 아직 전쟁이 끝나지 않았기 때문에(핵무기의 존재여부는 군 수뇌부만 알고있는 극비사항이었고 일선에선 몰락작전의 시행이 당연히 예정되어 전쟁 지속을 46년까지 염두에 두고 있었다) 적어도 전구에 파병된 장병들에겐 일본이 항복한 8월까지 진급이 활발했다.[16] 2차 대전 종전 후, 전시에 특별 진급으로 계급이 상승했던 인물들은 대부분 원래 위치에서 1~3단계 강등된다. 이유야 물론 전시에 급격하게 확장되었던 미군 규모를 축소하는 과정에서 벌어진 일.[17] 당시 기록을 보면 2차대전 전후 미군의 초고속 군축에 대전 당시 존재한 24개의 군단급 부대는 대다수가 해체된 상태였고 1946 - 1950년 시기동안 남은 몇개는 해외 주둔 미군(독일, 일본)에 잔존했고 미국 본토엔 제5군단만 존재했다.[18] 이 사령부는 수십 년간 명칭이 여러 번 바뀌었지만 미 육군의 상급 군정 업무 기관이인 건 비슷했으며, 현재는 육군 전력 사령부(4성급 자리)이다. 역사를 볼 때 쟁쟁한 인물들이 맡았는데 한국 전쟁 중 지평리 전투의 영웅이었던 프리먼 대령은 4성 장군이 된 후 여러 보직을 지내다 전역하기전 이 직책을 수행했고 콜린 파월 대장도 합참 의장이 되기전 대장 1차 보직으로 지냈다.[19] 2차 대전 당시 중국 / 버마 / 인도 전역 미군 사령관이었고 장제스의 군사 고문이었다. 장제스와의 불화로 인해서 불명예 해임되어 종전시 오키나와 주둔군으로 있었다. 문제는 스틸웰도 무타구치 렌야에 비견되는 최악의 졸장이었던 것.[20] 스틸웰은 맥아더와 함께 하지에게 한국인을 '준 우호적' 또는 '해방된 국민'으로 대우하라는 조언을 남겼는데, 확실히 아시아에 오래 있었던만큼 아시아 사정을 어느 정도 알았던 듯하다.[21] 정치인 테러 사건이 일어날 때마다 근거도 없이 김구를 배후로 지목해 서로 떨떠름한 분위기를 고조시켰다. 이승만과는 특히 관계가 나빠서 그가 미국 방문 중 하지를 하도 지독하게 비난해 댄 탓에, 1947년 2월 미국에 잠시 귀환했을 때 고위층에 자신은 공산당이 아니라고 해명을 해야 할 정도였다고.[22] 장준하, 김준엽의 절친이자 돈암장에서 이승만윤치영의 비서를 역임.[23] 다만 민정당 총재특별보좌역을 지닌 김정원 한국정경연구소장과 인터뷰에서는 최기일은 이승만과 존 하지의 좋아보였던 사이와는 별개로 미군정과의 대립이 심해지자 미군정으로부터 지원금이 일체 끊겨버린 바람에 더글라스 맥아더가 사령부로 있는 GHQ로부터 지원금을 받았다고 진술을 했다.[24] 당시 일본이라고 해도 패망 직후였기에 상황은 한국과 큰 차이가 없는 수준인데다 강제 예금몰수를 실시해서 빚을 갚아야 할 정도로 엉망인 시절이었고, 중국의 경우에는 국공내전이 터져 물가상승률이 3,000%에 달했을 정도였기는 했지만 그럼에도 미군정의 경제적 무능은 이들조차 비웃을 정도였다. 차라리 소군정이 지주들을 족치는 방식이기는 했지만 어쨌든 토지개혁과 뒷수습은 재빠르게 했기에 더 낫다는 평이다.[25] 구성원은 국무성의 제임스 던(James C. Dunn), 육군성의 존 맥클로이(John J. McCloy), 해군성의 랄프 바드(Ralph Bard).[26] 이 두 사람은 이후 1960년대에 미 국무장관, 주한미군 사령관을 각각 역임했다.[27] 엄밀히 따지자면 미국의 정책이 후퇴했다기보다도 그만큼 한국이 독립하여 근대국가를 수립할 수준의 역량을 지닌 지역이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한국은 주변국에 비해 근대적 개혁의 속도가 늦어서 그렇지, 수천년 전에 부족국가 단계를 졸업했고, 식민지 이전 1000년간 안정적인 왕조를 유지했으며, 종교나 민족 갈등 문제도 없었다. 반면 아프간이나 이라크는 20세기 초까지도 부족국가 상태였고, 근래 들어 안정된 통치체제를 겪어 본 적이 없으며, 각각 민족과 종교 갈등 문제가 심각한 상태였다. 이러니 한반도보다 문제가 복잡해질 수밖에 없다.[28] 미국의 경제원조를 받은 나라들은 지금까지 수십개국에 이르렀지만, 수혜국들 가운데 경제발전에 결정적으로 작용한 나라는 대만섬의 중화민국이다. 1949년부터 1979년까지 토지개혁, 과학기술, 화폐개혁, 물가안정, 인문연구, 인재양성에 미국의 국비와 공비를 대대적으로 투자한 덕택에 국민경제의 고속성장이 가능했다. 반면에 한반도의 대한민국은 미국 연방정부와 미국 연방의회가 경제원조 증액에 매우 인색했고, 그마저도 파괴된 철도망의 재건과 삼백산업(밀가루, 설탕, 목화의 가공)에 필요한 현물원조에 치중했기 때문에 경기부양 이상의 큰 효과를 보지 못했다. 좀 더 자세한 내용을 알고 싶은 독자들은 중국근현대사학회의 대만 근현대사 관련 논문들 및 이택선 박사의 베스트셀러 (《취약국가 대한민국의 탄생》)와 이임광 작가가 대필한 송인상 재무장관의 구술회고록(《어둠 속에서도 한 걸음을》)을 읽어 볼 것.[29] 나머지 3명은 제1공화국의 이승만 대통령, 제2공화국의 장면 총리, 제3공화국의 박정희 대통령(혼자서 1부, 2부로 나뉘어 출연했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