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드로 델바예 Pedro del Valle | |
본명 | 페드로 아우구스토 델바예 Pedro Augusto del Valle |
출생 | 1893년 8월 28일 |
푸에르토리코 도독령 산후안 | |
사망 | 1978년 4월 28일 (향년 84세) |
메릴랜드주 아나폴리스 | |
복무 | 미국 해병대 |
최종 계급 | 중장 |
복무 기간 | 1915 ~ 1948 |
참전 | 제1차 세계 대전 바나나 전쟁 태평양 전쟁 |
학력 | 미국해군사관학교 |
1. 개요
미국의 군인.2. 생애
푸에르토리코 도독령 산후안에서 태어나 미국-스페인 전쟁의 여파로 인해 미국 메릴랜드주로 이주해 그 곳에서 성장했다. 1911년 당시 상원의원이였던 조지 랫클리프 콜튼의 추천으로 해군사관학교에 입교했다. 1915년 히스페닉 최초로 졸업하고 해병 소위로 임관했다.[1] 1917년 미국 시민권을 받게 되었다.1917년 북대서양함대해병대 소속으로 참가했고 조셉 H. 펜들턴의 부관으로 복무했다. 이후로도 서인도 제도 인근에서 복무하다가 아이티, 니카라과에서 저항군과 전투를 치렀다. 1931년 랜돌프 C. 버클리 준장이 주장하는 상륙전에 영향을 받았다. 1933년 아바나에 정보참모로 복무했고 1935년 이탈리아로 군사유학을 떠나 1937년 제2차 이탈리아-에티오피아 전쟁을 참관했으며 베니토 무솔리니도 만났다. 1939년 육군참모대학을 수료하고 전쟁계획사단 정책참모로 복무했다.
전쟁이 발발하자 제1해병사단 제11해병포병연대장으로 임명되었고 과달카날 전역 테나루 전투 당시 포격지원으로 일본군의 돌격을 무력화시키는데 공을 세웠으며 알렉산더 밴더그리프트는 그의 진급을 추천했고 준장으로 진급했다. 이후에도 전역에서 포격지원을 지속하며 미국 공로훈장을 수여받았다.
1944년 제3상륙군단 예하 포병대장으로 제2차 괌 전투에서 공을 세워 금성훈장을 수여받았다. 1944년 윌리엄 H. 루퍼터스의 후임으로 제1해병사단장으로 임명되어[2] 오키나와 전투에서 공격을 지도해 육군근무훈장을 수여받았다.
종전 후 해병대사령부 감독관을 지내고 1946년 뉴멕시코 상원의원인 데니스 차베스가 그를 푸에르토리코 주지사로 추천했으나 루이스 무뇨스 마르틴 외 여러 푸에르토리코 정치인들이 반발했고 없던일이 되었다. 1948년 예편했다. ITT의 중역으로 일하다가 1978년 사망했다.
[1] 당시 임관 동기로 아서 D. 스트러블, 프랜시스 S. 로, 아서 C. 데이비스, 랄프 W. 크리스피, 드위트 펙, 아치 F. 하워드 등이 있다.[2] 루이스 풀러의 강력한 추천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