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이콥 룩스 데버스 Jacob Loucks Devers | |
출생 | 1887년 9월 8일 |
미국 펜실베이니아주 요크 | |
사망 | 1979년 10월 15일 (향년 92세) |
미국 워싱턴 D.C. | |
복무 | 미합중국 육군 |
최종 계급 | 미국 육군 대장 |
복무 기간 | 1909~1949 |
학력 | 리하이 대학교중퇴 미국육군사관학교 |
신체 | 178c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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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국의 군인.2. 생애
펜실베이니아주 요크에서 아일랜드, 알자스계 루터교 신자 부부에게서 출생했고 고등학교를 우수한 성적이였으며 미식축구에서 쿼터백을 맡았고 농구, 야구까지 섭렵한 스포츠맨이였다. 졸업 후 리하이 대학교에 진학했으나 중퇴하고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했다. 당시 동기는 조지 S. 패튼, 윌리엄 H. 심슨, 로버트 아이첼버거, 존 C. H. 리이였다. 사관학교의 농구부에서 에이스로 활약했고 성적도 103명 중 39등을 했다.1909년 포병 소위로 임관했다. 초임지는 워싱턴주 밴쿠버에 있는 제4산포대소속 포대장이였고 이후 와이오밍주에 있는 포트 데이비드 A. 러셀에서 복무했다.[1] 1912년 사관학교에서 수학교관으로 복무했으며 생도농구팀을 감독하기도 했다. 1916년 중위로 진급했고 하와이에서 복무했다.
1917년 미국이 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자 대위로 3개월뒤 소령으로 진급했다. 1918년 5월 중령으로 진급했고 서부전선으로 건너갔지만 종전으로 전투는 치르지 못했다. 전후 독일에 진주하다가 귀국해 포병쪽에서 근무했다.
1936년 대공황을 극복하기위해 철도 건설기금을 모금하기도 했으며 2차대전에 미국이 참전하자 기갑부대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당시 전차의 중요성을 깨닫고 전차를 상대하기 위해 전차가 더 많이 있어야한다고 이야기했다.[2] 또한 기갑병과와 보병병과의 충돌을 중재하고 제병협동전술을 제시한 인물중 한 명이다. 이 것을 지휘할 전투사령부를 만들었다.
하지만 북아프리카 전선 카세린 협곡에서 1기갑여단이 첫 실전을 펼쳤는데 훈련, 경험부족으로 예비대가 괴멸하는 등 큰 실패를 겪었다. 하지만 데버스는 보병, 포병대대의 확충을 주장했고 함께 일했던 상관이자 지상구성군 사령관인 맥네어의 반대에 부딪친다. 맥네어는 데버스의 기갑부대를 주력으로 삼는데 회의적으로 바라봤고 기존의 보병지원차량처럼 운영해야한다고 판단했다. 이후 훈련, 조직개편, 중전차인 퍼싱의 도입을 통해 기갑부대를 정예화하는데 성공했고 서부전선에서 확실하게 증명했다.
1944년부터 1945년까지 제6집단군 사령관으로 임명되어 용기병 작전을 총 지휘해 노르망디에서 상륙한 병력과 조우해 프랑스를 해방시켰다. 이후로도 그가 지휘하는 6집단군은 독일에서도 큰 활약을 했다.
종전 후 헬기쪽으로 흥미를 보였으며 1949년 대장으로 퇴역했다. 퇴역 후에도 AR-15를 도입하지는 주장을 하며 신무기를 도입해야하는 발언을 많이 했다. 2차대전 전몰자를 위한 추모연설에도 참여하며 왕성한 활동을 하다가 1979년 사망했으며 알링턴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