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대 류큐 열도 미군정사령관 로버트 S. 바이틀러 Robert S. Beightler | |
본명 | 로버트 스프레이그 바이틀러 Robert Sprague Beightler |
출생 | 1892년 3월 21일 |
미국 오하이오주 메리스빌 | |
사망 | 1978년 2월 12일 (향년 85세) |
미국 오하이오주 워딩턴 | |
복무 | 오하이오 주방위군 미합중국 육군 |
최종 계급 | 소장 |
복무 기간 | 1911~1953 |
학력 | 메리스빌 고등학교 오하이오 주립대학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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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국의 군인.2. 생애
오하이오주 메리스빌에서 태어났으며 로드아일랜드 상원의원이자 주지사까지 역임한 윌리엄 스프레이그 4세가 그의 외삼촌이다. 오하이오 주립대학교에 진학해 2년간 공부하다가 중퇴해 고향인 유니언 카운티에서 아버지의 가업을 이어 엔지니어 생활을 했다.1911년 오하이오 주방위군에 입대해 제4오하이오보병연대에 배치되었다. 1914년 주방위군 소위로 임관했으며 1916년 베라크루스 원정대에 참가한 전적이 있다. 1917년 미국 원정군지만 전쟁부 예하부대인 제166보병연대 3대대에 배치되어 프랑스로 이동해 최전선이 아닌 후방에서 훈련을 담당했다.
전후 주방위군에 속해있었고 평시엔 엔지니어업에 종사했다. 오하이오 주립대학교에 복학해 졸업했으며 지휘참모학교과 전쟁대학을 수료하고 1930년대의 몇 년간은 현역 근무로 워싱턴 D.C의 전쟁부에서 참모장교로 복무했는데 이것은 주방위군 장교들에겐 제한적으로 체험할 수 있는 경력이었다. 1936년 제37보병사단 참모장으로 부임했으며 이후 장성으로 진급해 제74보병여단장으로 복무했다.
1940년 소장으로 진급해 오하이오 주방위군으로 편성된 제37보병사단장[1][2]으로 임명되었고 전쟁을 대비해 훈련을 실시했다. 루이지애나 기동훈련에 참가했고 전쟁이 발발하자 태평양 전선으로 배치되어 부건빌 전역을 시작으로 필리핀 탈환전당시 마닐라 전투에 참가했다. 이후 제33보병사단과 함께 바기오를 탈환했다. 전쟁 기간 사단은 7명의 명예 훈장 수훈자를 배출했다.
종전 후 정규군으로 정식으로 편입했으며 여러 보직을 거쳐 1950년 류큐 열도 미군정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하지만 1952년 심장마비로 인한 건강악화로 다음 해 퇴역했다. 절친인 브리커의 도움으로 정치 경력도 있었으며 1974년 사망했다.
3. 여담
- 1914년 오하이오 주립대학교 시절부터 교제한 애나 포터와 결혼했다. 또한 아들인 로버트 S. 바이틀러 주니어는 1943년에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제11공수사단의 위관장교로 태평양 전쟁에 참전했으며[3] 대령까지 진급했다.
- 오하이오 상원의원, 주지사를 역임했고 1944년 미국 대선에서 공화당 부통령 후보였던 존 W. 브리커와 오랜 절친이다. 바이틀러의 결혼식에 신랑 들러리로 (Best Man) 참석했고 민간 (오하이오주 고속도로 국장 임명) 과 군 경력 (주방위군 소장 진급과 제37사단장 임명)[4] 둘 다에 후원을 해줬다.
[1] 전쟁 중 실질적 임기가 있었던 미군 사단장 중 단 3명뿐이었던 주방위군 장성 중 1명으로 1명은 제43보병사단장이었던 레너드 F. 윙 소장으로 버몬트 주방위군 출신으로 역시 태평양 전쟁에 참전했고 1943년부터 사단을 지휘했으며 바이틀러와는 몇 번의 같은 전장 (뉴조지아 전투, 필리핀 탈환전 - 루손 섬 전역) 에서 전투를 치른 동료였다. 두 장군은 자신의 주를 기반으로 한 부대에서 계속 복무했고 내부승진을 통해 사단장으로 종전까지 활약한 공통점이 있다. 다른 한 명은 레이먼드 S. 매클레인 중장으로 이탈리아 전선, 유럽전선에서 활동하며 제90보병사단, 제19군단을 지휘했으며 수훈십자장도 2번 수여받았다.[2] 개전 직전부터 미군에선 전시체제의 전환 속에 복무유형 별 인사교류가 통합적으로 실시되어 주방위군 부대에 정규군 장교들이 각급 지휘관 및 참모로 보직되었고, (주방위군 장교들도 동일하게 인사이동과 승진을 통해 정규군/예비군 (주로 1차대전에 신설되어 잠시 활약했다가 전후 비활성화되어 전간기에 신설된 부대와 같이 서류상으로 존재했다 2차대전으로 소집됨) /징집군 부대에 (2차대전에서 새로 신설된 신규 부대) 전출됨) 특히 사단장 급에선 기존 주방위군 출신을 밀어내고 정규군 출신 장성으로 대거 교체하면서 (밀려난 이들은 미국 본토나 자신의 주에 남아서 후방 업무로 종사) 정책적으로 배제했는데, 표면상으로는 대다수의 주방위군 지휘관들이 연령이 많고, 건강 문제로 해외 파병이 적합하지 않다고 했으나, 그들의 지휘 능력을 불신한 육군 수뇌부의 속내가 있고, 이것을 정규군 장교의 지휘보직을 늘리기 위한 편법이라는 경멸의 관점도 있다.[3] 1945년 6월 필리핀 현지에서 부자가 상봉하는 모습의 사진, https://m.facebook.com/photo.php?fbid=319306541236451&vanity=ONGHeritageCenter&slug=-through-the-lensjune-26-1945-maj-gen-robert-s-beightler-sr-left-commanding-gene[4] 미국의 개별 주의 주지사들은 평시에 주방위군 통수권을 행사했는데 주방위군에 속한 장병의 인사권도 포함한다. 전간기엔 정규군과는 다른 체계로 상대적으로 진급이 빨랐고 모병광고에서 이를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