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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주성 전투 忠州城 戰鬪 | ||
<colbgcolor=#fedc89,#444444><colcolor=#670000,#FFCECE> 시기 | 1253년 (고종 40년) | |
장소 | 충주성 | |
교전국 | <rowcolor=black> 고려 (수세) 승 | 원 (공세) 패 |
주요 인물 | 지휘관 김윤후 (낭장) | 지휘관 야굴 |
병력 | 병력 규모 불명 | 병력 규모 불명 |
피해 | 피해 규모 불명 | 피해 규모 불명 |
결과 | 고려의 승리 | |
영향 | * 원 지휘관 야굴 해임 및 원군 후퇴 * 원의 5차 침공 종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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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충주(忠州)에서 몽고병이 포위를 풀었다고 보고하였다. 이때, 포위를 당한 것이 무릇 70여 일이 되었으며, 병량은 거의 바닥났다. 방호별감(防護別監) 낭장(郞將) 김윤후(金允侯)가 병사와 백성들을 독려하며 말하기를, “만약 힘을 다한다면 귀천을 막론하고 모두 관작(官爵)을 제수하겠다.”라고 하였다. 관노의 부적(簿籍)을 불태워 믿음을 보이고, 또 노획한 소와 말을 나눠주었다. 백성들이 모두 죽음을 무릅쓰니, 몽고군의 기세가 차츰 꺾여 마침내 다시 남쪽으로 가지 못하였다.
고려사절요 권17 > 고종4(高宗四) > 고종(高宗) 40년 > 12월 > 충주가 몽고군의 포위에서 벗어나다
고려사절요 권17 > 고종4(高宗四) > 고종(高宗) 40년 > 12월 > 충주가 몽고군의 포위에서 벗어나다
충주전투는 1253년 몽골의 제5차 침입 때 충주성(忠州城)에서 승리를 거둔 전투이다. 몽골군이 고려의 남부 지역으로 진출하기 위해서는 충주성을 반드시 점령해야 했던 반면, 고려 또한 이를 저지해야 할 명운이 걸린 전투였다.
2. 배경
1253년 10월 몽골의 장수 야굴은 아무간과 홍복원(洪福源) 등을 거느리고 고려에 대거 침입하여, 대동강을 건너 동주(東州) , 춘주(春州), 양근(楊根) · 양주를 함락한 이후 충주성을 포위하였다.3. 전개
이때 충주성의 수장인 방호별감은 앞서 처인성에서 몽골의 장수 살리타이를 사살하여 큰 공을 세운 낭장 김윤후였다. 몽골 군대가 70여 일 동안 충주성을 포위하고 공격하였으나, 충주의 관민들은 힘을 합쳐 굳게 지켜 적을 고전 속에 빠뜨렸다.그러나 포위 당한 날이 모두 70여 일이나 되어 군량이 거의 고갈되어가자 사기 저하로 이어지자, 김윤후는 사졸들을 독려하여 이르기를 “이 싸움에서 승리만 하면 귀천을 가리지 않고 모두 관작 주2을 내리겠다.”라고 하며, 관노 주3의 부적 주4을 불살라 믿음을 보이고 또 노획한 소와 말을 나누어 주었다. 이에 사람들이 모두 죽기를 맹세하여 싸웠다.
4. 결과
결국 1253년 12월에 몽골군은 충주성을 포위한 지 70여 일 만에 그대로 물러갔으며, 더는 남쪽으로 내려가지 못하였다.5. 의의
충주성 전투의 승리는 몽골군의 남진을 좌절시킴으로써 경상도 지역에 대한 전쟁 피해의 확대를 막았으며, 몽골이 화의를 명분 삼아 서둘러 철군하게 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또한 이 전투는 민중의 항전 의지와 훌륭한 지도력이 결합하여 승리로 이끌 수 있었음에 큰 의의가 있다. 그 공로로 김윤후는 감문위 상장군이 되었으며, 충주가 그 이듬해에 국원경(國原京)으로 승격되는 계기가 되었다.6. 참고문헌
- 『고려사』
- 『고려사절요』
- 신안식, 『고려 무인정권과 지방사회』 (경인문화사, 2002)
- 윤용혁, 『고려대몽항쟁사연구』 (경인문화사, 2002)
- 김호준, 「고려 대몽항쟁기 김윤후장군의 3차례 승전의 의의」(『백산학보』 114, 백산학회, 2019)
- 윤용혁, 「13세기 몽고의 침략에 대한 호서지방민의 항전」(『호서문화연구』 4, 충북대학교 중원문화연구소, 198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