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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edc89,#444444><colcolor=#670000,#FFCECE> 시기 | 1019년 (현종 10년) 1월 3일 | |
장소 | 고려 금교도 금교역 (現 황해북도 금천군 금천역 위치로 추정)[1] | |
원인 | 소배압의 고려 침공 | |
교전국 | <rowcolor=black> 고려 (수세) 승 | 요 (공세) 패 |
주요 인물 | 지휘관 지휘관 불명 | 지휘관 [[요나라| 遼 ]] 야율호덕 (부상온) |
병력 | 고려군: 100명 | 요군: 300명 |
피해 | 피해 규모 불명 | 군 전멸 |
결과 | 고려의 승리 | |
영향 | 거란군의 철수 귀주 대첩 발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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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금교역 전투는 제3차 여요전쟁에서 소배압이 보낸 거란 기병 3백명이 금교역에서 고려군 1백명에게 전멸한 전투다.2. 배경
1018년 12월 10일(음력), 제3차 여요전쟁의 본 전쟁이 발발했다. 소배압은 삼교천 전투에서 큰 피해를 입었지만, 직도전략으로 계속 남하하기로 결정한다. 12월 중 고려군이 자주와 마탄에서 요격전을 벌였으나 거란군은 부대 하나씩을 내어줄 뿐 주력군의 남하를 멈추지 않았다.1018년 12월 26일(음력), 이를 파발로 전해 듣게 된 현종(고려)은 개경을 제2차 여요전쟁처럼 버리지 않고 맞서 싸우기로 결정하며 계엄령을 선포한다. 성 밖의 민호를 거둬들여 성 안으로 들인 후 들판을 비워놓고(청야전술), 적들을 기다렸다.
1019년 1월 2일(음력), 고려군 상원수 강감찬은 병마판관 김종현에게 정예 기병대 1만을 주어 개경에 들어가 호위하게 했으며, 고려 동북면 병마사도 군사 3300명을 보내 개경을 지키게 했다. 다만 이들은 금교역 전투 무렵까진 개경 근처에 당도하지 못 했기에, 금교역 전투는 순수히 개경의 병력이 거란의 본대와 맞서 싸운 전투가 되었다.
3. 전개
금교역 전투 포진 추정도 [2][3] |
1019년 1월 3일(음력), 소배압의 요나라군은 개경에서 100리 떨어진 신은현(新恩縣: 황해도 신계군)에 이르렀다.신계군은 개경에서 100리가 넘는다. 따라서 본대는 신은현에, 선발대는 100리 밖(금교~영파 일대)에 온 것으로 추정된다. 한반도 북쪽에서 개경으로 가는 길은 금교역(금천군)의 협곡 외길 뿐이다. 따라서 남하하는 군대는 그 앞에 우선 정지하여 이 협곡을 통과해도 되는지 살펴야만 한다
소배압은 야율호덕(耶律好德)을 개경으로 보내 통덕문(通德門: 개경 북서쪽 대문)에 이르러 '군사를 돌리겠다'고 아뢰는 한편, 몰래 척후기병 3백명을 금교역으로 보냈다. 고려는 모든 군을 서북면에 보내서 개경은 모든 성벽을 지킬 군사조차 없었다. 군사를 돌리겠다는 의향을 전하면 고려군 내의 작전회의를 위해서라도 더 병력이 줄어들게 된다. 제2차 여요전쟁 이후 수차례 국지전이 있었으나, 거란군이 직접 개경까지 남하한건 이번이 처음이다. 따라서 새로 나성이 변경된 점에 대해 직접 척후(정찰)이 필요하다. 300의 척후기병은 개경의 외성을 둘러 탐색하다가 수비가 가장 허술한 곳을 파악하면 결사대로 들어가 잠입해 성문을 여는 전략을 편 것이다.
밤, 현종은 군사 1백명을 금교역으로 파견하였다. 고려군은 밤을 틈타 금교역에 있던 거란군을 기습했고 이들을 전멸시켰다. 상식적으로 개경의 병력이 충분함을 보이려면 더 병력을 보냈어야 했을 것이나, 이는 개경의 수비병력이 적었음을 은유한다. 이 100기가 거란군에게 당하거나 호각이었다면 소배압도 승산이 있다고 여겨 무리한 개경 공성을 택할 수도 있었기에, 현종으로선 엄청난 도박수를 건 것이다. 따라서 이 100명은 현종의 최정예 근위대를 포함한 개경의 그야말로 모든 전력으로 볼 수 있다. 이후 현종은 영파역에서 귀주 대첩에서 대승한 고려군을 맞이하는 누각을 짓고 주연을 베푼다. 따라서 금교역~영파역에 걸쳐서 본 전투가 일어났을 수도 있다.
4. 결과와 영향
규모는 크지 않았으나, 금교역 전투는 거란군이 고려 측의 청야전술과 개경의 방위가 삼엄하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퇴각하는데 영향을 준 전투였다.청천강까지 약 15일, 서경까지 약 7일 거리이므로, 거란군은 1월 8일 무렵까지도 약 4~5일 추가로 척후를 하며 개경의 약점과 전력을 분석해보다가 퇴각했을 수 있다.
단 100명의 군사로, 9만의 거란군을 되돌려 보낸 셈이 되었다. 다만 1018년의 흥화진 전투가 보여주듯, 고려의 축성술은 거란이 도저히 뚫기 어려웠을 것이다.
소배압이 이끄는 거란군이 철수하자 고려군은 추격하기로 하며, 거란군은 해안길이 막혀 내륙길을 통해 북쪽으로 철수했으나, 귀주성 앞 평원에서 고려군이 막아서자 양 군이 대치해 전투를 벌이기로 하며, 개경을 지키기 위해 남하한 김종현의 고려군은 이 때 거란군의 후미를 타격하는 역할을 해 고려의 승리로 이끄는데 크게 활약했다.
5. 대중 매체에서 등장
드라마 고려 거란 전쟁 30화 후반 ~ 31화 초반에 다루었다. 소배압이 개경을 향해 기병 300을 보내라고 부하에게 명령한다. 척후병들을 유방, 지채문, 노전이 기병대를 일부 죽였으며 나머진 척후병들은 이자림과 황보유의의 지휘하에 있는 궁병의 기습으로 전멸시켰다. 소배압은 척후부대가 오지 않아도 개경이 비었을 것이라 판단해 진격하지만, 현종이 청야전술로 들어온 개경의 모든 백성들과 함께 불빛을 들어 수만의 군사인 것처럼 다시금 소배압을 속이자, 소배압이 공성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하여 회군한다.[1] 고려 시대 금교도에 속한 역참으로 강음현(江陰縣) 오조천(吾助川)에 위치해 있었다가 조선 초에 금천(金川)으로 위치를 옮겼다. 고려시대 금교역의 위치는 황해도 금천군 금천역 위치로 추정되고 있다.[2] 개경 밖 100리의 거란군 선발대가 금교역 일대에 매복했으나, 개경에서 나온 고려군이 이를 격파했다.[3] 금교역(金郊驛)은 강음현(江陰縣) 오조천(吾助川) 일대로 기록되므로, 현 금천군 금천역 위치로 추정한다. 영파역(迎波驛)은 우봉(牛峯) 일대로 기록되므로, 현 금천군 우봉면 위치로 추정한다. 현대 토목공학의 큰 다리들이 놓이기 전 북서쪽 평주(平州, 평산군)로 가기 위해선 예성강이 얕은 곳으로 건넜을텐데 그럼 우봉면에 이르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