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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9-24 15:29:42

애전 전투

파일:고려 의장기 문양.svg 고려의 대외 전쟁·정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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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전 전투
艾田 戰鬪
<colbgcolor=#fedc89,#444444><colcolor=#670000,#FFCECE> 시기 1011년 (현종 2년) 1월 17일 ~ 1월 29일
(양력: 1011년 2월 28일 ~ 3월 12일)
장소 고려 준곡령, 무로대, 이수, 석령, 여리참, 애전
원인 군의 철군.
교전국 <rowcolor=black>
(수세)
고려
(공세)
주요 인물
지휘관

[[요나라|
]] 야율문수노 (요 성종[聖宗])
지휘관

파일:고려 의장기.svg 양규 (서북면 도순검사 형부낭중)
파일:고려 의장기.svg 김숙흥 (별장)
파일:고려 의장기.svg 보량 (중랑장)
병력 병력 규모 불명 병력 규모 불명
피해 피해 규모 불명[1] 군 전멸
결과 요의 승리
영향 고려군 전멸 및 양규, 김숙흥 전사
고려인 포로 3만명 구출
거란의 후퇴 및 제2차 여요전쟁 종료

1. 개요2. 배경3. 전개4. 결과5. 이후6. 대중매체

[clearfix]

1. 개요

고려군이 개경에서 철수해 본국으로 돌아가는 거란의 군사를 추격한 전투로 여요전쟁 시기 중 제2차 여요전쟁 때 일어났다.

추격전이라서 여러 곳에 걸쳐 전투가 벌어진 것이지만 편의상 추격을 지휘한 양규김숙흥이 애전에서 전사했기에 이 명칭으로 부른다.

2. 배경

거란의 군주 성종은 고려의 수도인 개경까지 함락시켰지만 쓸만한 후방 요새는 하나도 건지지 못한 상태였다. 유일한 보급기지인 곽주를 두고 서경을 함락하지 못하였다. 그 와중에 양규가 곽주를 탈환해버리자 거란군은 보급로가 매우 불안정해졌다. 강조의 30만 고려군 중 27만이 곳곳으로 흩어졌으므로 수십만의 고려군이 언제 조직력을 갖추고 나올지 모를 일이 었다. 그리고 겨울이 끝나가고 있어 압록강의 빙판이 서서히 녹기 시작해 시기도 나빠졌고, 또한 전쟁의 명분이었던 강조도 이미 직접 죽였고, 현종도 거란까지 찾아와 입조하겠다고 하니 이를 구실로 후퇴하기 시작한다.

3. 전개

거란의 군사가 개경에서 철수해 귀주 남쪽의 준곡령에 이르렀으나, 여러 날 큰 비가 내려 말과 낙타가 모두 피로해 갑옷과 병장기를 많이 버렸고, 1월 17일에 비가 그치고 날이 개자 협곡을 지나가기로 하지만, 김숙흥과 보량이 습격하자 10,000여 명이 죽는 피해를 입고 협곡을 건넜다.

1월 18일에는 양규가 무로대에 주둔한 거란군을 습격해 2,000여 명을 죽이고 포로 3,000여 명을 구출했으며, 1월 19일에는 양규가 이수에서 거란군과 싸워 석령까지 추격해 2,500여 명을 죽이고 포로 1,000여 명을 구출했다. 1월 22일에는 양규가 여리참에서 세 차례 싸워 거란군 1,000여 명을 죽이고 포로 1,000여 명을 구출했다. 거란군 입장에서는 정체불명의 군대가 수시로 찌르는 데 만날때마다 수천씩 죽어나가고 있으니, 강조의 30만 중 도망친 27만의 고려군이 돌아온 것마냥 불안했을 것이다.

1월 28일에는 양규와 김숙흥이 애전에서 거란군 1,000여 명을 죽이고 포로를 구출했으나, 이번에는 요성종이 이끄는 거란군 친위대를 만나고 만다. 양규와 김숙흥의 군대는 물러나지 않고 마지막까지 싸웠으며 두 장수를 포함해 그들의 부대가 전멸했다. 역사서에는 양규와 김숙흥은 고슴도치와 같이 화살을 맞고 전사했다고 한다.[2]

두 장수의 부대는 전멸했지만 1개월간 7번이나 싸우면서 포로 30,000여 명을 구출하고, 낙타, 말, 병장기를 셀 수 없이 획득해 큰 성과를 올렸으며, 이 날 또 큰 비가 내려 거란군의 말과 낙타가 지치고, 수 많은 갑옷과 병장기가 산실되는 지경에 이르렀다.

4. 결과

양규, 김숙흥 등이 이끄는 군사가 전멸했지만, 황제의 친위대조차 그들을 당해내지 못하고 화살로써 전멸시켜야했으므로 거란군의 피해도 컸을 것이다. 이로 인해 거란군은 고려군을 절대 얕볼 수 없게 되었다.

이후 거란군 북쪽으로 계속 나아가다가 압록강을 반쯤 건너자 흥화진부사 정성이 그 뒤를 공격하자 도망치다가 익사한 거란군이 매우 많았다고 한다.

5. 이후

애전(艾田)이라는 지명은 쑥 애(艾) + 밭 전(田), 쑥밭이라는 뜻인데 실향민 출신 전원곤씨의 말에 의하면 고향인 평안북도 선천군 태산면 길성동 전촌(전씨 집성촌) 부락 근방에 양규가 전사한 고개가 있었고, 거란군과의 전투 후 쑥만 무성한 폐허만 남아 애전현으로 불렀다고 한다.

그러나 고려 멸망 이후에도 고려군의 장렬한 전투는 잊히지 않았다. 조선시대에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 선천에 애전 전투에서 전사한 양규, 김숙흥 그리고 3차 여요전쟁에서 전사한 유백부를 제향한 사당인 삼충사가 기록되어 있다.[3]

6. 대중매체

6.1. 드라마 천추태후


사정상 에필로그 전 최종화 78화 초반에서 다루었다. 김숙흥이 먼저 거란군 본진을 기습을 하면서 야율적렬과 일기토를 벌여 그를 죽였다. 그 다음에 양규성종이랑 마주치고 야율적로와 호위무사를 한번에 죽인 다음 허벅지에 화살을 맞지만 말을 타고 있던 성종을 낙마시키고 죽이려고 하다가 갑자기 소배압이 나타나서 미수에 그치고 만다. 양규김숙흥은 마지막까지 싸우다가 화살을 맞고 전사한다. 이후 성종과 소배압은 철수한다.

6.2. 드라마 고려 거란 전쟁

양규가 서북면의 장수들을 귀주 협곡을 불러 거란군을 매복해 공격할 것을 알려주며, 거란이 개경에서 남하한다는 소식을 듣고 최질이 개경의 거란군을 공격해야 하지만, 양규는 위치를 사수하고 거란군이 압록강을 건너러 올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거란군이 개경을 떠나 북진해 철군해 귀주 방면으로 간다는 소식이 서경성으로 전해지며, 거란군은 귀주 협곡의 군사를 이끌고 지나간다. 양규의 지시에 따라 고려군이 귀주 협곡에서 화살을 날리고 선봉군을 이끈 야율분노는 화살에 맞아 전사하고 군사 1만명이 전사한다.

후방에 고려군이 나타나 귀주 벌판에 자리잡았다는 말을 듣고 소배압은 군사들을 시켜 노전을 붙잡으려 했으나, 노전을 추격하는 거란군을 양규가 공격해 노전은 무사히 도망친다. 양규는 거란군이 여러 방면으로 나누어 산을 넘어갈 것을 예측하면서 적을 공격하면서 포로를 구출할 것을 이야기한다.

화면상으로 확인되는 것으로는 두 차례 숲 속에서 도망치는 거란군을 향해 유격전을 벌여 화살을 날려 포로를 구출하며, 소배압이 성종에게 고려군이 좌익을 3번 공격해 1천의 군사를 죽였으며, 포로를 탈취해서 1만 5천명의 군사를 잃고, 포로는 3만 가까이 잃었다는 것을 보고한다.

양규는 숲속에 숨어 거란을 공격하려 하지만 부하들이 거란의 군사가 너무 적은 것을 보고 함정을 팠을거라 여겨 공격을 만류하지만 양규는 포로를 구출하기 위해 공격하기로 결정한다. [4] 이후 양규가 이끄는 유격대는 신속히 포로를 구출하지만 미리 숨어 있었던 거란의 군사들이 곧 나타나 활을 겨누며 고려군의 대장을 찾아 죽이려 하자 김숙흥이 군사들을 이끌고 효시와 화살을 쏘아 적들에게 이목을 자신에게 집중하도록 하면서 다른 곳으로 도주한다.

거란군은 김숙흥을 공격하다가 미리 파둔 함마갱으로 인해 부상을 입고 고려군이 화살을 쏘자 물러났고, 고려군은 포로를 다른 곳으로 보내는 것에 성공하지만 3만이 되는 거란군의 본대가 도착했다는 보고를 받는다. 요 성종은 항복하면 장수로 받아줄 것이라고 선언하며, 양규는 구출한 포로들을 안전한 곳으로 보내기 위해 화살을 날려 공격 신호를 내리고 양규와 김숙흥이 이끄는 고려군은 돌격해 거란군과 싸운다.

전투를 지켜보던 성종은 3천의 보병을 더 투입해 양규가 이끄는 고려군을 공격하며, 양규는 거란군과 싸우던 중에 목 보호대가 벗겨지고, 김숙흥이 거란군과 싸우다가 창에 배를 찔리고 거란군이 김숙흥의 등을 사정없이 치면서 쓰러진다. 양규도 싸우다가 오른팔에 검을 찔리고 거란군이 등을 사정없이 치며 수많은 부상을 입고도 양규가 일어나자 거란군의 군사들은 두려워해 물러나고 양규가 마지막 힘을 다해 입을 사용해 화살을 날리려 하지만 제대로 날리지 못하고 그 순간 김숙흥이 다시 일어난다.

김숙흥은 맨손으로 거란군을 공격해 거란군이 두려움에 떨고 양규는 부상을 입고도 성종에 다가가려 하자 소배압이 지시해 화살을 네 차례 화살을 날렸으며, 양규가 화살에 맞아 선 채로 먼저 사망하고 김숙흥도 거란군과 싸우다가 화살을 맞은 채 선 채로 죽었다.

이후 정성이 양규의 전사 소식과 거란군이 압록강으로 간다는 소식을 듣고 분노해 흥화진의 군사들을 집결해 거란군을 추격해 후방을 공격했지만, 성종이 이미 압록강을 벗어났다는 것에 절규한다.


[1] 최소 1만 5천명 전사[2] 이와 같은 일은 기병이나 보병으로도 제압할 수 없을 때, 즉, 거란군이 겁을 먹고 다가가지 못하는 상황이 벌어질 때 멀리서 궁병으로 전사시킬 때 일어나곤 한다. 거란군 전체에 비해 소수였을 이들 부대를 굳이 화살으로 제압했다면 더더욱[3]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는 유백부가 양규와 함께 전사했다고 기록했으나, 고려사와 고려사절요에서 유백부는 3차 여요전쟁 중 전사했으므로 이는 오기로 보인다.[4] 여자와 아이들을 앞세운만큼 마지막 포로행렬인 것이 틀림없는 데다, 공격하지 않을 시 평야로 빠질 거란군을 더 이상 칠 수 없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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