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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7-07 22:21:37

길주성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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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주성 전투
吉州城 戰鬪
<colbgcolor=#fedc89,#444444><colcolor=#670000,#FFCECE> 시기 1109년 (예종 4년) 5월 ~ 7월[1]
장소

동선역
(現 황해도 봉산군 동선면)
원인 동북 9성 확보를 위한 고려과 여진의 충돌
교전국 <rowcolor=black> 고려
(수세)
여진
(공세)
주요 인물
지휘관

파일:고려 의장기.svg 이관진 (병마부사)
파일:고려 의장기.svg 김의원 (병마판관)
파일:고려 의장기.svg 허재 (병마판관)
지휘관

[[금나라|
女眞
]] 지휘관 불명
병력 고려군: 2,000명 여진군: 60,000명
결과 고려의 전략적 승리
영향 * 화친에 의한 성 반환
* 여진의 부흥
1. 개요2. 동북 9성의 격전지, 길주성3. 129일간의 혈전4. 기묘한 계책5. 고려와 여진의 화친

[clearfix]

1. 개요

고려의 여진 정벌 중 벌어졌던 전투로 금나라로 성장한 이후 여진이 고려를 침공하지 않은 이유 중 하나로 꼽힐 정도로 치열했다.

2. 동북 9성의 격전지, 길주성

완안부 지역 여진의 성장으로 인해 고려는 예방 전쟁의 필요성을 느끼고 17만의 별무반은 대규모 정벌을 시도, 그들이 점령하고 있는 지역의 일부를 점령하는데 성공한다. 그리고 윤관은 주요 요충지 9곳에 성을 건설하기 시작하는데 이중 한곳이 바로 길주였다. 길주성은 둘레 1,219m의 성으로 약 2,000여명이 주둔하고 있는, 크진 않았으나 주요 요충지였기에 여진이 가장 끈질기게 공격해왔다. 그리고 이중 가장 규모가 큰 전투가 바로 1109년 5월에 있었던 전투였다.

한편 완안부 여진은 지속적인 고려와의 소모전의 끝이 보이지 않자, 요불과 사현 등을 개경에 사신으로 보내 화친을 요청함과 동시에 길주성에 대한 대대적인 공격도 함께 감행한다. 1109년 5월 여진의 6만 대군은 길주성을 향해 진격한 것이었다. 당시 길주성을 지키고 있던 고려 무관 이관진(李冠珍, ? ~ ?) 그리고 병마 판관 허재(許載)는 수차례 여진의 대군에 맞서 싸워 승리를 거둔 능력 있는 이들이었다.

3. 129일간의 혈전

이관진이 이끄는 2천의 고려군은 여진의 침입을 막기 위해 목책을 둘렀으나, 여진군은 그 목책을 뚫고 길주성을 포위하는 데 성공한다. 6만 vs 2천. 양 군대의 병력 차이는 무려 30배였지만 고려군의 저항은 만만치 않았고 5월에 시작한 여진의 공격은 무려 4달 넘게 이어지게 된다.
그러나 미처 섬멸하지 못했던 적의 잔당들이 장채(場寨=요새)를 설치한 후 길주를 공격해 왔기에 다시 군사들을 독려해 공격하고자 한다.
고려사》 예종 4년(1109년) 5월 계축일
그러나 성의 크기가 작고 병력 또한 부족했고 성벽 또한 서서히 무너졌기에 길주성에서는 고려 조정에 원군을 요청, 예종여진정벌 당시의 부원수였던 오연총에게 7만의 고려군을 주면서 길주성을 구원토록 한다. 고려의 지원 병력이 올라온다는 소식을 들은 완안부 여진은 혼도와 사묘아리, 알새에게 병력을 주며 이들을 막게 했고, 공험진과 갈라수에서 고려의 지원군은 패배했다. 이로써 길주성은 풍전등화의 위기를 맞이하게 된 것이다.

지원 오던 고려군이 전략적 후퇴로 길주성 구원에 실패한 상황, 또한 성벽도 무너지고 바람조차 여진에 유리하게 불어 화공으로 큰 피해를 입은 길주성. 결국 성이 공격당한 지 129일 만에 길주성의 성벽은 무너지게 된다. 하지만 날이 어두워 6만의 여진군은 공격을 중단하고 다음날 다시 공격해 확실히 끝내기로 한다.

4. 기묘한 계책

여진이 다시 원근의 부족들을 모아 길주를 여러 달째 포위하고서 성에서 10리 떨어진 곳에 작은 성을 쌓아 여섯 개의 목책을 세우고 맹렬히 공격해오는 바람에 성이 거의 함락되려 하였다. 병마부사(兵馬副使) 이관진(李冠珍) 등이 군사를 독려하여 하룻밤 사이에 다시 여러 겹의 성을 쌓고 수비와 전투에 임했으나 싸움이 오래 계속되고 형세가 궁해져 많은 사상자가 났다.
《고려사》 오연총 열전
한편 성벽이 무너진 것을 본 병마 판관 허재는 만약 이대로 싸우게 된다면 승산이 없다고 판단한다. 이때 한 가지 전략을 구상하고 실행하는데 바로 "내성을 쌓자."라는 것. 경악할만한 소리였지만 까라면 까야지. 무너진 성벽들과 자재들을 이용해 26칸의 성벽을 하룻밤 사이에 쌓는 데 성공한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완안부 여진은 승리를 확신하고 성문을 뚫어내는 데 성공했지만 성안에 또다른 성벽이 쌓여있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결국 완안부 여진은 더 이상의 소모전은 의미 없다고 판단하고 철수한다.

5. 고려와 여진의 화친

당시 고려와 여진은 길고 긴 소모전으로 인해 서로가 극심한 피로를 느끼고 있었고 때마침 완안부의 사신 요불과 사현 등이 고려 조정을 찾아와 "우리 선조는 고려 출신으로 저희는 고려를 부모의 나라라고 생각합니다. 앞으로 조공을 바치고 기와장 하나 안 던질 테니 이제 싸움을 그만두기를 희망합니다."라고 청하자 고려는 이 의견에 동의하고 동북 9성을 반환했다. 그리고 여진을 한 번도 들이지 않았던 길주성의 성문도 이때 열리게 되었다.


[1] 130일 동안 전투가 지속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