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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edc89,#444444><colcolor=#670000,#FFCECE> ▲ 관음포 대첩 묘사 | ||
시기 | 1383년 (우왕 9년) 5월 | |
장소 | 고려 경상도 남해현 관음포 (現 경상남도 남해군 고현면 북방해안가 근방) | |
교전국 | <rowcolor=black> 고려 (수세) 승 | 왜구 (공세) 패 |
주요 인물 | 지휘관 정지 유만수 윤송 † | 지휘관 [[왜구| 倭寇 ]] 지휘관 불명 |
병력 | 고려 전선: 47척 | 일본 전선: 전방 20척 후방 100척 일본군: 2,000명 |
피해 | 전선 20척 사상 | 전선 17척 격침 |
결과 | 고려의 승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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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383년 고려의 정지가 이끄는 고려 수군이 지금의 경상남도 남해군의 관음포 앞바다에서 왜구를 격퇴한 전투. 진포 해전에 이어 두 번째로 화포가 실전에서 사용되어 그 위력을 발휘한 전투이다. 진포 해전에서는 정박해 있던 함선들을 화포로 격침시킨 것이라면 관음포 해전에서는 이동중인 함선들과 붙어 화포로 격침시켰다는 차이가 있다.그리고 215년 뒤에 왜구들은 똑같은 곳에서 섬멸당한다.
2. 배경
진포 해전과 황산 대첩 이후 왜구의 기세는 눈에 띄게 허약해졌다. 1381년에서 1382년까지 왜구의 최대 함선은 50여 척 정도에 지나지 않았으며, 동해안 부근을 중심으로 어느 정도 활개를 치긴 했지만 그나마도 이전의 무능한 고려군에 비해 1380년 이후의 고려군은 최영이나 이성계 같은 명장의 출현과 국가적 차원의 수군력 강화 그리고 최무선의 화약 무기 개발 등으로 왜구와 싸워 효과적으로 물리치는 경우가 늘어나고 있었다. 조준의 파견으로 경상도가 안정화 되었던 것처럼, 군을 이끄는 지휘관들의 무능 문제만 아니면 당시의 전력으로도 왜구를 상대하는데 큰 문제가 없었을 정도였다. 헌데 1383년, 왜구는 다시 한번 거대한 전력을 일으켜 고려를 쳤다. 이렇게 하여 벌어진 전투가 관음포대첩(觀音浦大捷)으로 불리는 싸움이다.3. 왜구의 규모
1382년 11월을 끝으로 한동안 숨을 죽이던 왜구는 거의 반년이 지난 1383년 5월, 난데없이 120여 척의 대함선을 이끌고 경상도로 침공해 온다. 비록 그 숫자가 1377년이나 1380년 정도의 가공할 수준은 아니었지만 진포에서의 해전 이후 최대 규모의 군대가 갑작스레 침공해 온 일이라 이는 큰 충격을 주었고, 경상도 전 지역은 공포에 떨었다고 한다. 더구나 고려사 정지전의 기록에 따르면, 당시 이 120여 척의 함선은 대선(大船)이라는 표현이 붙은 배들로 120여 척이라고 해도 이전의 왜구 함선보다 더 큰 함선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한 대선들이 120여 척이나 경상도 앞바다에 출몰하니 이는 보통 큰 일이 아니었다.이에 곧바로 반응한 곳은 합포(合浦)의 고려군이었다. 여태껏 대규모 왜선이 출몰하면 큰 피해를 입은 곳은 경상도에서 전라도로 들어가는 곳에 위치하던 합포의 고려군영이었으므로, 합포원수(合浦元帥) 유만수(柳漫殊)는 위급함을 알리며 지원을 요청했다.
당시 가장 가까이에 있던 고려 수군은 정지가 이끄는 수군으로, 정지는 개조한함선으로 이루어진 47척의 함선으로 전라도 나주·목포 부근에서 주둔하고 있었다. 가장 가깝다고 해도 서남해안을 타고 정 반대방향으로 가야했고, 무엇보다 정지의 함선 숫자는 왜구의 대선들에 비해 2~3배의 숫자 열세를 겪고 있었다. 그러나 일단 경상도의 상황이 위급했으므로, 정지는 밤낮으로 병사들을 독려해서 급하게 이동을 했다.
정지(鄭地) |
이리하여 섬진강(蟾津江) 쪽을 지나온 정지는 결전을 앞두고 서둘러 합포의 군사들을 징집하면서 병력을 최대한 불리기 위해 애를 썼는데, 적은 이미 지금의 남해군인 남해(南海) 관음포(觀音浦)까지 와 있어서 더 지체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여기에 더해 정찰을 통해 고려 수군의 숫자가 별거 아니라는 것을 파악한 왜구는 공세로 나오게 되었다. 여기에 더해 비까지 내렸는데 이 비가 딱히 고려군에 이득이 될 것이 없다고 판단한 정지는 지리산신사에[2] 사람을 보내 나라의 존망이 여기에 달려 있다! 신령은 알아서 자기 망신 살 일을 하지 말아라! 라고 일갈하도록 했고 그러자 비가 그쳤다.
드디어 결전의 시간이 되자, 적의 깃발은 하늘을 가렸고, 칼과 창은 온 바다에 번쩍였으며, 적은 사방에서 에워싸고 전진해 왔다(賊旗幟蔽空, 劍戟耀海, 四圍而前). 이런 위급 상황에서 정지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이었는지 전투에 앞서 하늘에 절을 했는데, 그러자 바람이 갑자기 고려군에게 유리하게 바뀌었다. 그야말로 신풍(神風)이라고 밖에 할 수 없는 바람을 타고 고려 수군은 엄청난 속도로 이동해 박두량(朴頭洋)[3]에 이르렀다.
그러자 왜구는 큰 배 20여 척에 배마다 군사 140명을 태워 앞으로 전진하도록 했다. 즉 이 공격에 동원된 왜구의 숫자만 해도 2,800여 명 가량이었던 것이다. 여기에 더해 뒤에 따르는 여타 함선들도 있었을 것이다. 물론 이는 전투에 앞서 여타 병력을 큰 배에 집중시켜 일반적으로 타는 숫자보다 더 태운 숫자였을 테지만 당시 왜구의 대선들이 보통 규모가 아니었다는 점을 추측할 수 있다.
그러나 정지는 왜구와 격렬한 사투를 벌여 적선 20척 가량을 화포를 이용해 수장해 버렸다. 왜구의 사망자는 1만 명 중 2800명이 죽었다. 적의 규모는 확실히 대단했지만 그보다 신무기가 더 대단한 위력을 발휘한 것. 이 싸움에서 병마사(兵馬使) 윤송(尹松) 과 일부병사들도 화살을 맞고 전사할 정도로 고려군도 쉽지 않은 싸움을 벌였지만 그래도 전염병 + 먼 길을 급하게 온 피곤함 + 전력의 열세라는 핸디캡을 안고서도 왜구를 격파하는데 성공했다. 더 많은 함선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대패한 이작도 해전 등과 비교해보면 상징적인 일. 대승을 거둔 정지도 내가 왜구와 싸우기를 참 많이 싸웠는데, 살다살다 오늘처럼 통쾌하게 이긴 적이 또 없었다고 감탄했을 정도의 대승이었다.[4]
여담으로 당시 일본에 왜구 방지를 촉구하기 위해 사신으로 떠났다가 귀국하던 중인 군기윤(軍器尹) 방지용(房之用)은 왜구를 만나 포로가 되어 선박에 갇혀 있었는데, 고려군과 전투가 벌어지자 왜구들로부터 우리가 지면 일단 너부터 죽인다는 협박을 당했지만 싸움이 끝나자 왜구가 모조리 섬멸되어버려 고려군에게 구출되고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4. 결과
여러모로 대승이지만 그 이후인 6월에는 고려 천민들이 왜구를 가장해 강원도와 경상북도 지역에서 횡행하다 소탕되는 일도 있었다. 또 왜구가 길안(吉安)·안강(安康)·기계(杞溪)·영주(永州)·신녕(新寧)·장수(長守)·의흥(義興)·의성(義城)·선주(善州) 등을 공격하는 일이 있었는데, 루트를 분석해보면 이는 왜구가 한꺼번에 그렇게 몰려들었다기보다는 안강, 즉 영일현에 상륙한 왜구가 갈라져서 내륙 지역으로 점점 진출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내륙지역 깊숙히 파고들어 식량을 얻기 위한 행보로 보이는데, 이전의 왜구들이라면 서남해에서 조정으로 올라가는 조운선을 바로바로 해먹으면 그만이었지만 진포와 관음포 등지에서 연달아 당한 패배로 그럴 수 없었던 것처럼 보인다. 물론 내륙으로 침공해 오는 왜구는 심각한 문제이긴 하나, 조정의 입장에서 보면 세미가 올라오지 않아 조정을 마비시키는 사태에서는 이제 한 시름 놓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이 왜구들은 7월 경 대구 부근까지 진출하고, 8월에는 비옥(比屋)·의성 등지를 침략했는데 숫자가 꽤 많아 부원수 윤가관(尹可觀)이 싸웠으나 패하기도 했다. 그러나 거령(居寧)·장수(長水)를 공격하고 전주까지 공격하려던 왜구들은 황보림에게 패하였다. 우왕이 조준에게 감찰관으로의 파견을 다시 권한 것도 이 무렵이었다. 이렇게 내륙각지에서 전투가 이어지는 와중에 8월에는 천 명이라는 상당한 숫자의 왜구가 춘양(春陽)·영월(寧越)·정선(旌善)을 공격했는데, 여기에 더해 동북면에서 호바투(胡拔都)가 침공해 오는 일이 있어 여러모로 정신이 없던 상황이었다. 이 무렵 천여 명의 왜구들이 옥주(沃州)·보령(報令)을 치고 계룡산으로 들어갔다가 왕안덕 등이 이를 물리치는 성과를 거두었다. 이후 9월과 10월 동안 강원도의 공격에 주력한 왜구들은 그야말로 무인지대를 걸어다니듯 마음껏 활보했으나 권현룡 등이 소규모 승리를 거두기도 했다.
이듬해인 1384년 2월 경 왜구는 진포에서 잡은 부녀자 중 25명을 돌려주더니, 거진 반년이 지난 7월에나 공세를 펴기 시작했다. 내륙에 침공해 왔던 왜구의 일부였는지 몇몇 왜구가 충청북도와 전라북도 부근에서 어슬렁거리더니, 이후 황해도 주변에서 조금 깔짝거리는 정도에 머문다. 또 12월에는 몇 년 전만 해도 자기 제 집처럼 드나들던 인천 앞바다에 들낙거리던 왜구가 정말 간만에 나타났는데, 개경을 벌벌 떨게 하던 포스는 어디 가고 해도만호(海道萬戶) 윤지철(尹之哲)에게 당하고 잡은 포로 80여 명을 토해내는 굴욕을 당했다.
1385년에도 몇몇 지역에서 어슬렁거리던 왜구는 9월 경 난데없이 함경남도 함주(咸州)에 150여 척 선단이 출몰했고, 함주·홍원(洪原)·북청(北靑)·합란북(哈蘭北) 등이 휩쓸리고 백성들이 학살되었는데, 이에 심덕부, 정승가(鄭承可) 등이 싸웠지만 패배했다. 이때 여타 장수들이 모두 달아나는 판에 심덕부 혼자 적에게 달려들다가 죽을 뻔 했지만 자신의 휘하였던 유가랑합(劉訶郞哈)이 도와줘서 목숨만 건질 수 있었다. 그리고 조용히 있던 이성계가 출전을 자원했다.[5] 이후의 상황은 뭐…고려 말 왜구의 침입 참조.
1386년에는 왜구가 간만에 쥐뿔도 보이지 않았고, 1387년 향상된 고려 수군의 전력에 자신감을 얻은 정지가 "일본의 모든 백성이 왜구인 것은 아니고, 핵심은 쓰시마 섬과 이키(一岐) 지역이다. 이 곳을 원정해서 쳐야 한다. 지금의 수군은 과거 일본을 치던 몽고나 한군과는 수준이 다르다." 며 원정 공격을 주장하기도 했다. 이는 나중에 대마도 정벌의 복선이 된다.
[1] 바다나 강 같은 물에서 죽는다는 것은 동서양을 통틀어 가장 참혹한 죽음 방식 가운데 하나였다. 진도씻김굿의 제의 가운데 하나로 바다에서 죽은 넋을 건져 육지로 모셔오는 넋 건지기 굿이 있을 정도다.[2] 여담으로 지리산신사에서 모시는 지리산신은 여성으로 고려 태조의 어머니인 위숙왕후 한씨라는 설이 있다.[3] 양(洋)은 견내량, 명량 등에서 보이듯 섬과 섬, 또는 섬과 육지 사이의 해협을 가리키는 한자 양(梁)과 같은 말이다. 우리말에서는 으레 '목'으로 번역되며, 박두량은 '백서량'므로도 불렸던 여수 신덕 앞바다로 비정되며 지도상에서 관음포와는 바로 코앞 거리다.[4] 우연히도 215년 후, 바로 이 곳에서 노량 해전이 벌어졌다.[5] 사실 당연한 일로, 동북면은 이성계의 정치적 기반이며 경제적 기반이자 군사적 기반인 곳이다. 그런 곳에서 왜구가 분탕질을 치고 있는데 개경에서 잠이 잘 올 리가 없었을 것이다. 이성계의 자원은 자신의 기반을 지키기 위한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