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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7 민주의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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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상세3. 기념4. 관련 문서

1. 개요

1960년 3월 17일 자유당 독재정권의 3.15 부정선거에 항거해 성남고등학교 학생 400여명이 "부정선거 다시하라" 등의 구호와 교훈[1]을 외치며 서울특별시에서 최초로 일으킨 학생운동이다. 3.15 의거가 이 시위의 도화선이 되었고 이는 4.19 혁명의 도화선이 되었다. 아직 국가기념일로 지정되지는 않았으나 3·17 민주의거 기념사업회의 노력으로 행정안전부로부터 "3·17서울민주의거는 이미 민주화운동에 포함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는 답변을 받아 2021년 7월 20일에 '서울특별시 3·17민주의거 기념 조례'가 제정 및 시행되었다.

2. 상세

자유당 독재정권이 1960년에 재집권을 위해 국민에 대한 폭력과 협박 등 온갖 불법 행위로 3·15 부정선거를 감행하였고 조작된 선거 결과에 따라 이승만 대통령 후보와 이기붕 부통령 후보가 당선되었다고 발표했다. 이에 3·15 의거가 마산시에서 일어났고 경찰이 시위대를 향해 총격을 가하면서 사망자가 발생하였다. 이 일이 있고 이틀 후인 1960년 3월 17일, 서울특별시 대방동에 소재한 성남고등학교 학생 400여명이 분노하여 영등포로터리 등 시가지로 돌진해 공책을 찢어 자필로 만든 삐라를 뿌리며 "부정선거 다시하라", "경찰은 마산학생 사살사건을 책임져라", "백만학도여 총궐기하라" 등의 구호와 학교의 교훈인 "의에살고 의에죽자"를 외쳤다.

자세한 전개는 다음과 같다. 3월 17일 오후 1시경 서울극장 쪽에서 영등포구청으로 향하던 성남고등학교 학생 200여명과 영등포구청에서 영보극장[2]쪽으로 향하던 성남고등학교 학생 200여명이 합류하여 총 400여명의 학생들이 영등포 로터리를 돌며 플래카드를 내걸고 손수 공책을 찢어 만든 삐라를 뿌렸다. 구호와 학교 교훈을 외치기도 했는데 언론[3]에 의해 알려진 각종 구호와 플래카드 문구는 다음과 같다.
시위하며 경관들에게 맞는 학생이 생기자 경관들을 향해 돌을 던지는 학생도 있었는데 순경 한 명이 학생들에게 얻어맞고 전치 2주의 타박상을 입고 병원에서 치료를 받게 된 일도 발생했다.

학생 대표들은 500여 자의 토로문을 동아일보 영등포지국에 보내기도 했다. 그 속에는 "정부는 마산학생 칠명을 죽인 책임을 지라", "왜놈의 총칼에 선렬들이 쓰러진 자리에 우리학생들은 우리의 경찰의 손으로 죽었다", "우리의 이런행동이 곧 공산괴뢰의 선전자료가 되며 나라의 위신을 떨어뜨린 것을 모르지 않으나 언제까지 않아 있을 수만은 없다" 등의 글귀가 적혀있었다고 한다.

영등포 로터리에서 한창 시위가 이어질 때 정복 경관과 사복 경관 수십명이 경찰차와 소방차를 타고 급히 출동하자 두 무리로 나뉘어 한 무리는 수원으로, 한 무리는 인천으로 향하며 시위를 이어나갔다. 그러나 경관이 늘어나고 공포탄이 발사되자 대열이 완전히 해산되었다. 이후 현장에서 약 100명이 체포되어 영등포경찰서로 연행되었다. 경관들은 당시 골목으로 피한 학생들까지 잡아내 차에 실어 연행하였는데, 20~30명씩 대열을 갖추면서까지 순순히 경찰서로 연행된 학생들도 있었다.

오후 2시 20분경 성남고등학교 교사 9명이 영등포경찰서로 찾아와 이들의 석방을 요구하였고 오후 4시경에는 영등포 출신 민의원류홍윤명운[4]이 영등포경찰서장을 만나 연행된 학생을 즉시 석방하라고 요구했다. 연행된 학생들은 3명을 제외하고 모두 오후 7시경 석방되었는데 연행된 학생 중 주모자인 3명은 도로취체규칙 위반 혐의로 즉결 심판에 회부되어 3일 구류 처분을 받았다. 이후 영등포경찰서는 이 외의 주모자와 선동자를 내사하였는데 당일 석방된 학생 중 2학년 학생 한 명이 다시 경찰서에 연행되어 심문받기도 했다.

이 시위는 4·19 혁명의 도화선이 되었고, 이후 세워진 3·17 민주의거 기념사업회[5]의 노력으로 행정안전부장관[6]으로부터 이 사실을 인정받았다. 하지만 기념사업회가 국회에 청원하는 등 계속된 노력에도 불구하고 국가기념일로 지정되지 못하였고 현재는 서울특별시 조례로써 매년 3월 17일이 3·17민주의거 정신을 계승하기 위한 기념일로 지정되었다.

3. 기념

시위 발생 후 성남고등학교 교정에는 3·17의거기념시비가 건립되었고 매년 3·17 민주의거 정신을 기념하는 행사가 개최되었다. 이 행사는 학교에서 방송으로 훈화하는 기념 행사의 형태로 현재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파일:3.17 민주의거 기념비.jpg

이 시위가 발생한 지 46년이 지난 2006년 4월에는 3·17 민주의거에 참여했던 성남고등학교 동문들이 교정에 3·17의거 기념탑을 건립하고 제막식을 거행하였다. 이 기념비는 2010년대 들어 성남고등학교를 설립한 학교법인 원석학원의 김명선[7] 이사장에 의해 철거되어 학교 창고에 방치 중이다.

2014년 4월에는 3·17민주의거회가 창립되었고 2016년 3월에 3·17민주의거기념사업회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2015년 3월에 3·17 민주의거 정신을 계승·선양하기 위한 기념 행사인 3·17민주의거 제55주년 기념식을 개최하였다.

기념사업회에서 본격적으로 3·17 민주의거가 민주화 운동으로 인정받도록 하기 위해서 서울특별시 김인제 의원에게 기념 조례를 제정해줄 것을 건의하고 서울특별시장[8]에게 조례 제정 건의 공문을 발송하였다. 같은해 8월에 김인제 의원이 대표로 조례안을 발의하고 입법예고되었으나 무산되었다.

서울특별시 조례 제정에 차질이 생기자 기념사업회는 2017년 2월, 국회에 3·17 민주의거가 민주화운동임을 명시하는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법' 개정을 청원하였다. 개정안이 박주민 의원의 대표 발의로 국회에 발의접수되었고 국회 정론관에서 3·17 민주의거 기념사업회 공동 기자회견을 벌여 언론과 국회방송에 보도되었다. 이후 일부개정 법률안이 입법예고되기도 하였으나 무산되고 말았다.

2021년 2월에는 기념사업회에서 행정안전부장관에게 3·17서울민주의거가 민주화운동임을 고시해줄 것을 건의하였고, 당시 행정안전부 장관 전해철은 다음과 같이 답변하였다.
3·17서울민주의거 민주화운동 고시 건의에 대한 답변 (일부)
3. 귀 단체의 민원에 대해 우리부에서 검토한 의견은 다음과 같습니다.
가. 1960년에는 3·15부정선거에 항거하는 3·15의거를 기점으로 전국 각지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시위가 발생하였습니다. 서울, 부산, 광주, 인천 등 전국 각지에서 일어난 항의 시위는 4·19혁명으로 이어지는 연속선상의 한 과정으로 판단됩니다.
나. 따라서 '3·17서울민주의거'는 4·19혁명에 반영되어 이미 현행법에서 정의하는 민주화운동에 포함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으며 법령에 별도 규정하거나 고시하는 것은 다른 사건에 버금가는 역사적 의미가 있는지에 대한 국민적 공감대 형성이 선생되어야 할 것으로 보입니다.
이에 기념사업회는 서울특별시의회에 기념 조례 제정 절차를 다시 추진해 줄 것을 청원하였다. 2021년 7월 2일에 열린 서울특별시의회(정례회) 제5차 본회의에서 서울특별시 3·17민주의거 기념 조례안이 통과되어 같은해 7월 20일에 '서울특별시 3·17민주의거 기념 조례'가 제정 및 시행되었다.

4. 관련 문서


[1] "義에 살고 義에 죽자"[2] 지금의 영등포시장 입구쪽에 있던 극장으로, 지금은 영보주차장이 그 자리에 있다.[3] 당시 조선일보동아일보 등의 언론이 이 사건을 다루었다.[4] 영등포경찰서장을 역임하기도 했다.[5] 설립 당시 '3·17민주의거회'[6] 당시 전해철[7] 법인 및 학교 설립자 김석원의 손자[8] 당시 박원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