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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30 10:41:19

전원개발계획

1. 개요2. 제1차 전원 개발 계획(1962~1966)
2.1. 전력 현황2.2. 계획 수립 과정2.3. 제1차 전원개발계획의 성과2.4. 제1차 전원개발계획의 한계
3. 제2차 전원 개발 계획(1967~1971)
3.1. 전력 현황3.2. 계획 수립 과정
3.2.1. 토마스 조사단과 한전의 논의
3.3. 제2차 전원개발계획의 성과3.4. 제2차 전원개발계획의 한계
4. 제3차 전원개발계획(1972~1976)
4.1. 계획 수립 과정4.2. 제3차 전원개발계획의 성과
5. 참고문헌

1. 개요

전원개발계획은 안정적인 전력 공급과 장기적인 에너지 수급을 목표로, 발전소 건설과 송배전망 확충을 체계적으로 설계하기 위해 대한민국이 시행한 국가적 정책으로 경제 개발 5개년 계획과 동반하여 추진되었다. 1961년 이후 2010년까지 지속적으로 증가하는 전력수요에 대응하기 위한 목적을 지녔으며, 본 페이지에서는 박정희 정부 시기에 이뤄진 1차 전원개발계획부터 3차 전원개발 계획의 내용을 다룰 것이다.

2. 제1차 전원 개발 계획(1962~1966)

2.1. 전력 현황

1960년대 초, 한국의 전력 상황은 매우 열악했다. 발전 설비의 총 용량은 약 36만 kW에 불과했고, 이는 주요 도시의 기초적인 전력 수요조차 충족하지 못하는 수준이었다. 전력 공급은 도시 중심으로 제한되었으며, 농어촌 지역은 사실상 전력망에서 제외되어 경제활동과 생활 수준이 크게 제한되었다. 한국전쟁의 여파로 발전 설비는 심각하게 손상되었고, 기존의 송배전망은 지역 간 연결이 취약해 안정적인 전력 공급이 불가능했다. 이러한 상황은 박정희 정부가 추구하는 산업화의 걸림돌이 되었고, 국가 주도의 전력 체계 확충이 절실히 요구되었다​​.

2.2. 계획 수립 과정

한국전력(이하 한전)은 산업화를 지원할 안정적인 전력 공급 체계를 마련하고자 이 계획을 주도했다. 당시 한전은 최대 전력 수요를 약 43만 5000kW로 추정했으며, 매년 12%의 수요 증가를 예측하여 1966년까지 80만 2000kW의 전력 설비를 확보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그러나 기존 전력 설비가 36만 kW에 불과하여 이를 충족하기 위해 5년 내 약 60만 7400kW를 추가 확보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계획은 화력발전에 중점을 두고 추진되었다. 이는 한국의 전기기술자들이 전력체계 구상의 기본원칙으로서 고수했던 이른바 “수주화종(水主火從)”, “수화병존(水火竝存)” 정책과는 큰 차이가 있었다.[1]

한전이 화력발전 중심의 전원 개발을 추진한 이유는 화력발전이 공사 기간이 짧고 자금 조달이 용이하며 단기간에 높은 발전량을 확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부산화력, 영월화력, 삼척화력발전소 등이 주요 건설 대상으로 선정되었으며, 이러한 발전소들은 외자와 내자를 통해 추진되었다. 특히, 긴급한 전력 수요를 해결하기 위해 목포에 소형 내연발전소를 설치하고 부산항발전함을 도입하는 등 단기적인 대책도 병행되었다.
그러나 계획은 수립 초기부터 여러 한계에 직면했다. 가장 큰 문제는 외자 도입의 지연이었다. 한전은 미국의 AID를 통해 차관을 유치하려 했으나, AID는 단순히 차관 제공에 그치지 않고 한전의 경영 안정성과 재정 건전성을 요구하며 협상을 지연시켰다. AID는 한전이 투자보수율을 3%에서 10%로 상향 조정하고 전기요금을 75% 인상할 것을 요구했다. 이는 당시 경제 상황에서 민감한 문제였고, 협상 과정에서 차관 지급이 늦어져 발전소 건설 일정에 차질을 빚었다.
자금 부족도 계획 수정의 주요 원인이었다. 군사정부는 내자와 외자를 병행하여 자금을 조달했으나, 막대한 전력 설비 투자 비용을 충당하기엔 역부족이었다. 이에 따라 발전소 건설 목표와 최대 전력 수요 예측치는 점차 하향 조정되었고, 계획 목표는 축소되었다. 기술적 문제와 공사 지연도 계획 수정에 영향을 미쳤다. 예를 들어, 부산화력발전소는 설계와 공정 관리의 미흡으로 공사가 늦어졌으며, 이로 인해 계획이 차질을 빚었다. 더불어, 발전소 건설에 집중한 계획은 송전 및 배전망 확충을 소홀히 했고, 이는 이후 전력 공급의 안정성을 저해하는 요인이 되었다.

결국 제1차 전원개발계획은 여러 차례 수정되었고, 최종적으로 최대 전력 수요 예측치는 80만 2000kW에서 70만 kW로, 실적 목표치는 38만 kW로 조정되었다.
파일:Original and Final Plan of the 1st Power Development Plan.png

2.3. 제1차 전원개발계획의 성과

제1차 전원개발계획은 1965년 섬진강 수력발전소가 마지막으로 준공되며 공식적으로 완료되었다. 이 계획은 산업화와 경제 성장을 위한 전력 기반 확충을 목표로 하였으며, 화력발전과 수력발전을 중심으로 총 9개의 발전소(광주내연, 왕십리내연, 제주내연, 영월화력, 삼척화력, 부산화력, 신규 영월화력, 춘천수력, 섬진강수력 총 화력발전 7개, 수력발전 2개)가 건설 혹은 증설되었다. 이 과정에서 약 350MW의 신규 발전 설비가 추가되었고, 기존 설비의 보수와 효율성 증대를 통해 총 430MW의 전력 공급 능력을 확보하였다.
특히 1964년 4월, 부산화력발전소 준공과 함께 한국 최초로 무제한 전력 공급이 실현되었다. 이는 전력 부족으로 인한 생산성 저하를 극복하고 각 산업 분야에서 시설 확장의 의욕을 자극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무제한 송전은 경제 개발과 국가 전력망 운영의 안정화를 가져오며, 계획 목표년도까지 산정된 전력 수요를 초과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이 계획의 실행 과정에서 약 5천만 달러의 외자와 60억 원의 국내 자본이 투입되었으며, 이를 통해 국내 전력 공급 체계를 단기간에 안정화하는 데 성공했다. 신규 발전소 건설은 전력 공급량을 크게 확대했을 뿐 아니라, 국내 기술자들이 발전소 설계와 건설 경험을 쌓는 기회를 제공하여 한국 전력 산업의 기술적 역량을 강화했다.

제1차 전원개발계획은 초기 한국 산업화의 필수적 에너지 기반을 마련하며 국가 경제 발전의 중요한 발판이 되었다. 이는 중화학공업과 제조업 같은 에너지 집약적 산업의 성장 기반을 마련하고, 전력 부족으로 인한 경제적 제약을 해소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2.4. 제1차 전원개발계획의 한계

제1차 전원개발계획은 한국의 산업화 초기 전력 문제를 해결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지만, 여러 한계와 문제점도 드러냈다. 주요 한계는 다음과 같다.
① 외자 의존의 심화
발전소 건설 자금의 상당 부분이 외국 차관과 원조에 의존했다. 약 5천만 달러의 외자가 투입되었지만, 미국 AID와의 차관 협상 과정에서 한전의 재정 건전성과 경영 효율성을 개선하라는 요구가 있었고, 이는 계획 실행의 지연 요인으로 작용했다. 외자 도입 과정에서 미국 등 외국 기관의 기술적·재정적 요구를 수용해야 했으며, 이는 한국의 독립적 전력 개발 능력을 제약하는 결과를 낳았다.
② 배전망 확충의 부재
발전소 건설에만 집중한 나머지, 송전 및 배전망의 확충은 소홀히 되었다. 이는 발전소에서 생산된 전력이 안정적으로 전국에 공급되는 데 한계를 가져왔으며, 특정 지역에 집중된 발전소로 인해 지역 간 전력 불균형 문제가 발생했다. 특히, 1964년 무제한 송전 이후에도 정전 사고가 빈번하게 발생하며, 전력망의 불안정성을 노출했다.
③ 화력발전소 의존
석탄화력발전소에 지나치게 의존한 점도 문제로 지적된다. 화력발전은 건설 기간이 짧고 초기 투자 비용이 상대적으로 적은 장점이 있었으나, 석탄 의존도가 높아져 장기적인 에너지 자원 고갈과 환경 문제를 야기할 가능성을 내포했다. 수력발전소와 같은 장기적이고 지속 가능한 전력원 개발이 상대적으로 소홀히 다루어졌다.
④ 기술 및 관리 역량 부족
발전소 건설과 운영 과정에서 기술 및 관리 능력의 부족이 드러났다. 특히, 초기 단계에서는 대부분의 발전소 건설이 외국 기업에 의해 이루어졌고, 국내 기술자들은 부수적인 역할에 그쳤다. 화력발전소의 대규모 설비가 전력망에 연결될 때 심각한 진동 문제 등 기술적 문제가 발생하였으며, 이러한 문제를 사전에 예방하거나 해결할 체계가 미흡했다.

⑤ 단기적 성과 중심의 계획
군사정부의 경제개발과 연계된 계획이었던 만큼, 단기적 성과를 강조한 나머지 장기적인 전력 체계의 안정성과 지속 가능성은 충분히 고려되지 않았다. 특히, 긴급 전력 대책으로 도입된 내연발전소와 발전함은 단기적으로 효과적이었으나, 높은 발전 원가와 낮은 효율성으로 인해 장기적으로는 부담을 초래했다.

3. 제2차 전원 개발 계획(1967~1971)

3.1. 전력 현황

제2차 전원개발계획이 수립되던 1967년부터 1971년 사이, 한국의 전력 상황은 제1차 전원개발계획을 통해 일부 개선되었지만 여전히 여러 한계를 보였다. 발전 설비는 약 70% 확대되며 주요 도시와 산업단지에 송전망이 구축되어 전력 공급 안정성이 일정 부분 확보되었지만, 송전망과 배전망 간의 불균형으로 농어촌 지역은 전력 보급에서 소외되었고, 전력 손실도 여전히 높은 상태였다. 당시 중화학공업화가 본격화되면서 산업 단지의 전력 수요가 급격히 증가했으나 기존 설비로는 이를 감당하기 어려웠다. 특히, 포항제철소와 같은 대규모 산업단지 건설이 계획되면서 안정적인 전력 공급이 시급한 과제로 떠올랐다. 또한, 제1차 전원개발계획에서 화력발전에 지나치게 의존한 결과, 연료비 상승과 운영 비용 증가로 한국전력공사의 재정에 부담이 가중되었고, 이는 장기적으로 경제적 안정성을 저하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더불어 농어촌 지역은 전력망에서 소외되어 지역 간 전력 공급의 불균형이 심화되었고, 이는 지방 경제 발전의 한계로 나타났다. 이러한 배경은 전력 체계의 지속 가능성을 확보하기 위한 보다 체계적이고 장기적인 계획 수립의 필요성을 강조하며 제2차 전원개발계획의 출발점이 되었다.

3.2. 계획 수립 과정

1960년대 후반, 중화학공업화를 본격적으로 추진하면서 산업화와 도시화가 가속화되었고, 포항제철소와 같은 대규모 산업단지와 도시 지역에서의 전력 수요가 폭발적으로 증가하며 기존 전력 설비로는 이를 충족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이 계획은 한전과 미국 토마스 전력조사단의 논의를 통해 수립되었다. 초기에는 전력 수요가 연평균 약 10% 증가할 것으로 예측되었으나, 급속한 경제 성장으로 인해 수요가 27~34%로 재추산되었다. 이에 대응하기 위해 대규모 발전 설비 확충과 송·배전망 개선을 포함한 종합적인 계획이 마련되었다. 토마스 전력조사단은 대형 화력발전소 중심의 전력 공급 체계를 구축할 것을 권고하며, 농어촌 지역 전력망 확충과 도시-농촌 간 전력 격차 해소를 강조했다. 한전은 이러한 권고를 받아들이면서도 수력발전소와 화력발전소를 병행하여 전력 체계의 유연성을 확보하고자 했다.

그러나 계획 실행 과정에서 급격한 전력 수요 증가와 경제 성장 속도는 계획 수정을 불가피하게 만들었다. 초기 예측과 달리 전력 수요는 폭발적으로 증가하며 기존 계획의 규모를 대폭 확대할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특히, 대규모 산업단지 건설과 중화학공업 중심의 경제 구조 전환은 전력 공급 체계 강화를 절실히 요구했다. 이러한 긴급한 상황에 대응하기 위해, 한국은 전통적인 재정차관 방식에서 벗어나 일본의 상업차관을 적극적으로 도입했다. 상업차관의 활용은 대규모 발전 설비와 신규 발전소 건설에 필요한 자금을 신속히 확보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수정된 계획은 대규모 발전 설비 확충에 집중하며, 특히 화력발전 중심의 설비 증설이 강화되었다. 석유 화력발전소 건설이 두드러졌으며, 이는 당시 국제 석유 가격 안정세와 석탄 수급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전략적 선택이었다. 또한, 장기 과제로 원자력 발전소 건설이 포함되어, 1970년 타당성 조사를 통해 고리 원자력 발전소의 착공이 이루어졌다.
3.2.1. 토마스 조사단과 한전의 논의
1964년, 한국전력(한전)과 미국의 토마스 전력조사단은 한국의 전력 체계와 향후 10년간의 전원 개발 방향을 논의하기 위해 협력했다. 이 논의는 제2차 전원개발계획 수립에 중요한 기초를 제공했으며, 전력 수요 예측, 발전소 건설 방식, 송전망 확충 등 다양한 주제를 다뤘다.
① 전력 수요 및 성장률 예측
토마스 전력조사단: 한국의 전력 수요가 연평균 11.5% 성장할 것으로 예측하며, 산업, 서비스업, 농업 등 경제 전반의 고른 성장을 예상하였다. 특히 농어촌 지역에 전력 공급을 확대함으로써 지역 간 격차를 줄이고 경제 발전의 기반을 마련할 것을 강조했다.
한전: 대동력 수요가 빠르게 증가하는 반면 소동력 및 농업용 전력 수요는 상대적으로 느리게 증가한다고 보고, 전력 수요 증가의 중심은 산업 부문일 것으로 보았다. 또한, 초기 개발 계획에 초과 달성을 목표로 설정한 한국 경제 특성을 반영해, 전력 수요가 계획 초기에는 급격히 증가하다 점차 완화될 것으로 예측했다.

② 수·화력 발전소 건설 비율
토마스 전력조사단: 대규모 화력 발전소 중심의 전력 체계를 주장했다. 화력발전소의 비율을 높이고, 발전소 규모를 대형화하여 경제성을 극대화할 것을 제안했다. 특히 미국식 대형 화력발전 기술 도입이 비용 효율적이라고 주장했다.
한전: 처음에는 발전원 다변화 등을 위해서 수력발전소 중심의 전력 체계를 주장했다. 토마스 조사단과의 논의 후 대형 발전소 건설의 경제성에는 동의했으나, 전력 체계 운영의 유연성을 확보하기 위해 수력발전소의 비중도 늘려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는 전력 부하에 따라 발전소를 유동적으로 운영해 연료비를 절감하려는 전략이었다.
③ 송전망 확충 및 전력 체계 구성
토마스 전력조사단: 농촌과 도시 간 전력 격차를 해소하기 위해 농어촌 지역까지 전력을 공급할 수 있는 송전망 확충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이는 경제적 효율성뿐 아니라 사회적 평등을 위한 필수 과제라고 보았다.
한전: 주요 산업단지와 도시 지역에 송전망을 우선 배치하며, 농어촌은 점진적으로 확대하는 현실적인 접근 방식을 선호했다. 농어촌 배전망 확충은 한정된 자원과 예산 때문에 우선순위에서 밀려날 수밖에 없었다.
파일:Thomas Power Research Group.png

3.3. 제2차 전원개발계획의 성과

1971년 마무리된 제2차 전원개발계획은 급격히 증가하는 전력 수요에 대응하여 한국 전력 체계의 근본적인 변화를 이룩한 중요한 계획이었다. 이 기간 동안 약 1,910MW의 신규 전원이 개발되었고, 1966년에 비해 약 3.4배의 전력 공급 능력을 확보하며 한국 산업화와 경제 성장을 뒷받침했다. 특히, 대규모 석유 화력발전소의 건설이 두드러지며 화력발전이 전력 생산의 중심이 되었다.
당시 석유 가격이 국제시장에서 안정세를 보인 반면, 석탄은 가격 상승과 국내 생산 감소라는 제약으로 인해 발전용 연료로 부적합하다고 판단되었다. 이에 따라 수력발전과 화력발전의 비율은 13:87로 크게 기울며, 석유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졌다. 이러한 화력발전 중심 체계는 전력 공급 확대에 기여했지만, 동시에 석유에 대한 의존이라는 새로운 에너지 문제를 안게 되었다.
또한, 전원개발에 필요한 재원 조달 방식에서도 변화가 있었다. 종래의 재정차관 의존 방식을 벗어나 외국의 상업차관을 과감히 도입하여 대규모 발전 설비 확충에 소요되는 재원을 확보하였다. 이는 이후 대규모 전력 개발의 안정적인 재원 마련 모델로 자리 잡는 계기가 되었다.
특히, 제2차 전원개발계획은 원자력발전소 건설 추진의 기초를 마련한 시기로 평가받는다. 1960년대 후반부터 시작된 원자력발전소 건설 추진은 1970년 타당성 조사를 통해 입증되었으며, 같은 해 착공에 들어갔다. 이는 1970년대 후반 석유 파동으로 인한 에너지 위기 극복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3.4. 제2차 전원개발계획의 한계

제2차 전원개발계획(1967-1971)은 한국의 급격한 경제 성장과 중화학공업화를 뒷받침하기 위해 전력 공급 능력을 크게 확대했지만, 실행 과정과 결과에서 몇 가지 한계를 드러냈다.
① 화력발전에 대한 과도한 의존
계획 기간 동안 석유 화력발전소 건설이 두드러지며, 화력발전이 전체 전력 생산의 약 87%를 차지하게 되었다. 이는 당시 석탄의 국내 생산 감소와 석유 가격의 국제적 안정세에 따른 전략적 선택이었지만, 결과적으로 석유 의존도를 지나치게 높이는 결과를 낳았다. 이후 1970년대 중반 석유 파동이 발생하자, 석유 중심의 에너지 체계는 심각한 에너지 위기를 초래하며 계획의 한계를 드러냈다.
② 지역 간 전력 불균형 지속
도시와 산업단지를 중심으로 전력 공급이 집중되었지만, 농어촌 지역은 여전히 전력망에서 소외되었다. 송·배전망 확충에도 불구하고 농어촌 지역의 전력 보급은 미진한 수준에 머물러, 지역 간 전력 격차를 해소하지 못하였다. 이는 전력 정책이 지역 균형 발전보다는 산업화 중심으로 편중되었음을 보여준다.

③ 자금 조달 방식의 한계
계획 실행을 위해 일본의 상업차관 등 외국 차관에 의존했으나, 이는 장기적으로 한국 경제의 외채 부담을 증가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상업차관은 단기적으로 자금 조달의 유연성을 제공했지만, 높은 이자율과 차관 상환 부담은 한국전력공사의 재정 안정성을 약화시켰다.

4. 제3차 전원개발계획(1972~1976)

4.1. 계획 수립 과정

2차 전원개발 계획은 1967년 수립 당시 5개년 계획으로 설계되었으나, 10개년 계획으로 확장되면서 3차 5개년 계획까지 포함하는 장기적 구조를 갖추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2차 계획이 수정될 때마다 3차 계획도 자동적으로 수정되며 연계성을 유지했지만, 결과적으로 이는 과도한 전력 설비와 부정확한 수요 예측이라는 문제를 초래했다.
3차 계획 기간에 확정된 신규 설비 용량은 약 2,920MW로, 이는 2차와 3차 계획 수립 과정에서의 과도한 전력 수요 예측과 연결되어 있었다. 경제 성장 둔화와 산업 활동의 축소로 인해 전력 수요는 예상보다 낮았으며, 이로 인해 과잉 설비가 발생했다. 이에 따라 전력 수요 예측을 하향 조정하고, 발전 설비 건설 계획을 축소하는 등의 조정이 이루어졌으나 이는 계획 실행의 비효율성과 경제적 손실을 야기했다.

1973년 국제 원유가의 폭등은 3차 계획의 방향에 중대한 영향을 미쳤다. 기존의 석유 중심 전원개발 원칙은 급격히 수정되었고, 발전 연료의 다원화가 추진되었다. 이 시기에는 석탄과 원자력을 중심으로 한 발전 설비 구축이 활발히 진행되었으며, 고리 원자력 1호기의 건설이 본격화되었다. 이는 석유 의존도를 낮추고 안정적인 기저부하 전력을 확보하기 위한 중요한 전환점이었다. 그러나 2차 계획 후반기의 과잉 설비 문제와 1970년대 초반의 경기 침체로 인해 전력 수요의 성장세가 둔화되면서 전력 공급 과잉 문제가 한국 전력산업 전반에 심각한 영향을 미쳤다.

한편, 1976년에 가까워질 무렵 국내 경제가 회복되고 수출산업이 급성장하면서 전력 수요가 예측치를 훨씬 상회하는 급성장을 기록했다. 이로 인해 1976년 말에는 전력 공급예비율이 3.9%까지 하락하며 전력 공급의 안정성이 위협받는 상황이 발생했다. 이는 초기 과잉 설비 문제와 대비되는 상황으로, 전력 수요 예측과 설비 확충 간의 불균형이 한국 전력산업의 주요 과제로 떠오른 사례였다.

4.2. 제3차 전원개발계획의 성과

제3차 전원개발 계획(1972~1976)은 급변하는 경제 환경과 에너지 위기에 대응하며 한국의 전력 산업 구조를 근본적으로 재편한 중요한 시기로 평가된다. 이 시기의 주요 성과는 전력 공급 체계의 안정화, 발전 연료 다각화의 본격화, 그리고 전력산업 운영의 전략적 전환에서 나타난다.

먼저, 제3차 전원개발 계획은 국가 전력망의 균형적 배치를 고려한 적정 규모의 발전소 건설을 통해 전력 공급의 안정성을 크게 강화했다. 기존에는 긴급 상황에서 디젤 또는 가스터빈 발전소와 같은 소규모 설비를 단기적으로 도입하는 방식이 주를 이루었다. 그러나 이 시기를 거치며 장기적이고 체계적인 전력 설비 계획이 수립되었고, 발전소 배치를 국가 전체적으로 조정하는 관점이 도입되었다. 이를 통해 전력 생산과 수송, 공급의 효율성이 개선되었으며, 전력난에 대한 대응 능력 또한 강화되었다.

또한, 이 시기는 발전 연료 다각화를 본격적으로 추진한 시기로, 한국 전력산업의 지속 가능성을 확보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1976년 말 발전 설비의 에너지원별 발전량 구성에서 석유 발전이 92.3%를 차지하였고, 수력과 석탄이 7.7%에 불과한 상황에서, 석유 중심의 전력 생산 구조에 대한 문제의식이 확대되었다. 이에 따라 석탄 화력과 원자력을 중심으로 한 발전 체계를 구축하는 방향성이 제4차 전원개발 계획에 반영되었으며, 이는 발전 연료의 다원화라는 전력 정책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형성했다. 이 과정에서 고리 원자력 1호기의 본격적인 건설과 같은 선도적인 사업이 이루어졌고, 이는 한국이 에너지 위기에 대응하는 능력을 크게 향상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5. 참고문헌


[1] 조선전기학회의 정책 생산에 주도적인 역할을 한 최상층 기술자들이 식민지 시기 대형 수력발전소의 기술자로서 혹은 총독부 관료로서 지식과 경험을 쌓아왔다는 점에서 대형 수력발전소와 고압 송전망이라는 선택지는 이들에게 가장 익숙한 방식이면서 발전된 기술체계의 모범이었던 것이다. 오선실. (2022). 한국 전기기술자 집단의 형성과 1950년대 전원개발계획의 재구성. p.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