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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류왕(근초고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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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드라마 근초고왕에서의 비류왕.jpg

1. 개요2. 배우3. 작중 행적4. 어록5.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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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010년 KBS 드라마 근초고왕의 등장인물. 배우 윤승원이 연기했다.

2. 배우

배우 윤승원은 2003년 KBS 드라마 무인시대에서는 최충헌의 가노로서 만적의 난을 주도하는 만적을, 2005년 MBC 드라마 제5공화국에서는 12.12 군사반란의 주동자 중 한 명인 정호용[1]을, 2006년 SBS 드라마 연개소문에서는 김유신[2]을, 2012년 KBS 드라마 대왕의 꿈에서는 당 태종을 각각 맡았다.

3. 작중 행적

원래 왕위 계승 서열에서 멀리 떨어져 있던 인물이었고, 소금 장수를 하며 위례궁주 부여준(계왕)을 모시고 있었으나 분서왕이 암살당한 후 그 아들인 부여준이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아버지인 흑강공 사훌에 의해 왕위에 올랐으며 당연히 부여준과는 철천지 원수 사이.

제2왕후 진사하의 소생 부여구가 나투의 태몽을 안고 태어나 제왕이 될 것이라는 소문이 돌자, 제1왕후 해소술의 소생 태자 부여찬의 안정적인 왕위 계승을 위해, 요서로 내쫓아 소금 장수로 살게 하는 비정한 아버지로 묘사된다.

본작이 시작될 무렵의 배경은 고구려 미천왕과 연합하여 대방군을 함락시켰고, 고구려와 대방을 양분하기로 했으나 고구려 미천왕이 약속을 지키지 않고 대방 땅을 독식한 상황, 이에 군사를 일으켜 대방을 되찾기 위해 고구려와 여려 차례 전쟁을 벌였고, 이번에는 고구려와의 회담을 통해서 대방을 얻으려 하는 상황이었다.

소서노의 사당에서 재례를 지낸 뒤 대방 땅을 되찾을 것을 천명한 뒤, 아버지인 흑강공이 "여찬(장남, 태자)과 여산(3남) 모두 장수는 아니니 여구를 부르라"고 권하지만, 비류왕은 "태자인 여찬이 즉위하고, 그가 성군이 되어 백성들에게 칭송받는 날이 오기 전까지 여구가 백제 땅을 밟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단칼에 거절한다.[3]

그런데 요서와 백제를 오가면서 소금을 팔던 부여구가 잠시 형인 부여휘와 함께 국경에 머물고 있다가 고구려 군사들과 백제 군사들 간의 충돌이 벌어지자[4] 군사들을 구하기 위해 칼을 빼들었고 더 나아가서는 고구려 진까지 달려가 고구려 왕 사유(고국원왕)을 두 차례나 저격하는 패기를 보인다. 이 소식을 듣고 비류왕은 부여구를 소환한 뒤 대노하면서 자신과 태자가 수 년을 걸쳐 준비한 회담을 사고 쳐서 망쳐놓었다며 꾸짖는다.

그리고 소금장수하라고 했더니 감히 무예를 익혔나면서 꾸짖는데, 이에 부여구도 원망이 폭발해서 그럼 소금장수하다가 수적들 손에 잡혀 죽길 바라셨나며 일갈하는데, 비류왕은 매정하게 그게 네 운명이라면 그리 돼야 할 것이라고 대꾸하고, 자신도 아바님 아들이라고 호소하는 부여구에게 한성 뿐 아니라 백제에서 영영히 추방할 것이며 다시 눈에 띄었다간 네 어미와 백성들이 보는 앞에서 참수하여 욱리하에 던져넣을 것이라고 으름장을 놓는다.

그리고 고국원왕과 대방 분할 문제로 정상 회담을 하다가 고국원왕의 뒤통수에 죽을 뻔했지만, 부여구가 달려와서 겨우 죽음은 면했다. 처음엔 또 왕명을 어기고 나타난 부여구를 꾸짖으려 하지만, 상황이 급박한지라 시위들의 호위를 받으며 나가다가 하필 방패의 틈이 벌려진 사이로[5] 들어온 화살을 맞고 중상을 입어 경각에 처한다. 부여구가 데려온 심복 파윤의 전차에 몸을 싣고 서둘러 귀환하여 겨우 목숨을 건진 뒤, 태자 부여찬에게 지휘권을 넘겨 전쟁을 지시한다.

한편 태자 부여찬에게 지휘권을 넘겨줬더니 하라는 전쟁은 안 하고 위례궁의 이간질에 속아 대장군 진고도를 가두고 부여구를 몰아세우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부상 중임에도 다시 갑주를 입고 전장에 다시 행차한다. 그 사이 기대도 안 했던 부여구가 말갈 흑군과 함께 1군을 이끌어 고모리성을 함락했다는 소식을 듣는다. 태자가 전공을 세우길 바랐는데 전공을 세운 것이 부여구라는 소식에 표정이 굳지만, 이내 부여구의 공로를 인정하고, 부여구의 요청으로 원래는 참수하려 했던 말갈 흑군 군장 부간태를 살린 뒤 부여구의 심복으로 하사한다.

한편 부여구의 전공으로 심기가 불안해진 태자가 괜히 성 밖으로 나가 고구려군과 교전을 벌이다가 포로로 잡혀버리는데, 고구려의 사신들이 대방 땅을 전부 내주면 태자를 석방하겠다는 조건을 제시하지만 오히려 태자를 죽여도 좋다는 폭탄 발언을 내뱉는다. 그러나 백제 내부의 정쟁 구도를 이용하려던 국상 조불과 고국원왕의 안배로 태자는 석방되어 항쇄에 차여 돌아오고, 이에 비류왕은 울분을 터뜨린다.

이후 무능한 태자 여찬과 달리 고모리성을 함락시킨 전공을 세운 부여구를 태자로 삼고 백제의 미래를 맡기려 하지만, 태자 건으로 원한을 품은 제1왕후와 결탁한 부여준의 음모로 독살당한다. 태자를 바꾸기 위해 조서[6]를 남당에서 반포하기 전, 자신에게 독을 먹이고 나타난 부여준과 칼부림을 하다가 독으로 인해 기력을 잃고 쓰러진 뒤, 부여구가 나타나자 자신의 일월검을 넘겨주며 후계자로 삼고 사망한다.

그가 반포하지 못했던 조서의 죽간이 해비와 여찬에게 넘어갔다가 후일 부여구가 요서에서 금의환향한 뒤, 여휘에게 넘어가, 진실을 알게 된 부여휘가 부여구에게 바치고, 이를 통해 부여구는 당당히 백제로 귀국하여 계왕 사망 후 백제의 13대 어라하가 된다.

마지막화에서는 근초고왕의 꿈에서 환영으로 등장해 근초고왕에게 지금까지 이루어낸 것만으로 천년의 칭송을 받을 것이며 더이상 자기 자신을 다그치며 애쓰지 말라고 한다.

4. 어록

는 더 이상 왕자가 아니다. 너를 영구히 한성과 백제 땅에서 추방한다. 내가 살아있는 한, 태자가 살아있는 한! 다시는 이 땅을 밟지 마라! 만약 명을 어기고 돌아올 시, 네 어미와 백성들이 보는 앞에서 네놈 목을 쳐서 욱리하에 던져 넣을 것이야!!
한수를 손에 넣는다면 한땅을 경영할 수 있고

서쪽 바다를 손에 넣는다면 중원을 꿈꿀 수 있다.
는 이 아비에 대한 원망에 사로잡혀, 백제는 생각지 않느냐?

가 원망하고, 욕하고, 안타까워하고, 미워하고, 사랑하고 온 마음을 바쳐야 될 대상은 나도, 여찬도 아니고, 여화도 아닌 오직 백제다!
내가 그 때 죽지 않고 살아난 까닭은 의 그 오만한 동정심 때문이 아니라, 백제가 간절히 나를 원했기 때문이다!
소서노 할마님, 당신의 손자 12번째 어라하인 여구를 돌보소서. 여구를...

5. 관련 문서


[1] 여기서 함께 12.12 군사반란을 획책한 노태우를 맡은 배우 서인석은 비류왕의 아버지인 흑강공 사훌 역할로 출연했다.[2] 또 여기서 청년 김유신 역할을 맡은 이종수는 비류왕의 장남인 부여찬으로 같이 출연했다.[3] 부여구와 부여찬이 공존하면 부여구의 외가인 진씨 가문에서 부여구를 옹립하기 위해 부여찬을 지지하는 세력과 권력 다툼을 벌여 백제의 국력이 약화될 것을 우려했기 때문. 실제로 진씨의 수장인 진정의 이러한 속내가 해씨 가문을 통해 부여찬의 귀에 들어가 부여찬이 고구려와의 일전을 앞두고 삽질을 일삼는 원인을 제공한다.[4] 국경 앞 하천에서 물놀이를 하며 노가리를 까던 양측 군사들이 서로 디스전을 하다가 돌을 던지며 충돌이 벌어지고 이에 고구려는 기마대를 풀어버린다. 이에 부여휘는 "미친놈들, 졸들 패싸움에 기마를 풀어?"라면서 경악한다.[5] 극 중 자세히 보면 해씨 가문의 수장인 좌평 해녕이 방패의 틈을 살짝 벌린다. 해녕이 위례궁주 부여준(계왕)의 심복이었기 때문에 그를 옹립할 기회를 찾고자 고구려의 손을 빌어 비류왕을 죽이려 한 것.[6] 내용은 부여찬의 무능함으로 고모리성을 잃었으니 태자의 위에 둘 수 없다. 진비의 소생 부여구를 새로운 태자로 선포하고, 부여찬은 고모리에서 군사 4천을 몰살시킨 죄를 물어 태자의 위에서 폐한 뒤 사사(賜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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