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2004년 시즌 중 발생한 프로야구 선수들의 대거 병역비리 사건. 각종 언론들이 프로야구는 이제 망했다!라는 논조의 기사들을 연이어 쏟아낼 정도로 KBO 리그 역사상 최악의 대사건이며 흑역사이다.비단 프로야구 뿐 아니라 광복 이후의 한국 스포츠 역사 속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사회적으로도 큰 충격을 준 사건으로 스포츠계에서 이 사건의 파장을 넘어서는 사건은 아직까지 존재하지 않았고 앞으로도 존재하지 않을 듯하다. 일단 구속 수감되어 실형을 살게 된 현역 선수의 숫자만 무려 25명이다. 그리고 공중파 9시 뉴스와 일간지 사회면을 도배한 끝에 병역법이 개정되고 병무청 심사 기준이 엄격해져 이 사건 이후 병역자원의 신체등급 책정이 이전보다 까다로워지게 되었을 정도로 정도로 사회 전반에 큰 영향을 미쳤다.
사건이 발생했던 당시에는 '병역비리 사건'이라 불리지 않고 프로야구 병풍 사건이라고 불렸다. 따라서 이 사건에 대한 당시 언론 기사 등을 검색하려면 '병역비리'보다 '병풍'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것이 더 낫다. 하지만 세월이 흘러 병풍이라는 유행어의 수명이 끝나 버린 2010년대 이후에는 병풍사건이라고 부르는 사람이 거의 없다.
2. 발단
페넌트레이스의 막바지에 다다른 2004년 9월 4일 오전, 서울지방경찰청이 "야구선수 50명이 브로커 2명과 짜고 병역비리를 저질렀다"라고 발표한다. 처음은 LG 트윈스 소속 선수 4명이었으나 곧 8구단 전체로 확산되어 한 달간 실시간으로 사건이 보도될 지경이었으며 심지어는 경기 중에 경찰서로 끌려가는 등의 일이 일어났다.안 그래도 K리그가 2002 FIFA 월드컵 한국/일본에서의 4강 신화로 큰 인기를 끌었던 데다 한국프로야구 최대의 스타였던 이승엽이 일본프로야구 치바 롯데 마린즈로 이적하면서 프로야구의 인기가 지구 바닥을 뚫고 들어갈 기세였는데, 사건의 규모와 파장이 엄청날 것으로 예상됐기 때문에 언론은 물론 팬들도 한 마음 한 뜻으로 "프로야구 망했어요!"를 외칠 지경이었다.[1]
이로 인해 포스트시즌을 앞두고 치열한 순위 싸움을 벌이고 있던 한국프로야구는 순위싸움도 포스트시즌도 한국시리즈도 그냥 망했다. 어느 코치는 사건 직후 텅 빈 관중석을 보며 "차라리 남은 시즌 경기를 모두 취소하고 사회봉사를 하는 게 낫겠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 결과는 2002년 시즌과 비슷한 230만명대의 관중 수. 대략 프로야구 초기인 1983년 시즌과 비슷한 셈이다. 그나마 2004년 한국시리즈가 9차전까지 가는 명승부가 나온지라 간신히 흥행 성적을 유지할 수 있었다.
3. 수법과 적발 과정
병역면탈에 사용된 수법은 사구체신염을 조작하는 것이었는데, 그 과정은 아래와 같다.- 1. 개인병원에서 약물[2]과 혈액을 섞은 소변을 제출, 소변검사를 통과한 병사용진단서를 발급한다. 알부민은 섞은 이유는 단백뇨로 속이기 위함이었고, 혈액을 섞은 이유는 혈뇨로 속이기 위함이었다.
- 2. 종합병원에서 소변검사뿐아니라 조직검사도 거치므로 이를 통과하기 위해 검사 전날 저녁부터 검사 3시간 전까지 공복 상태에서 짙은 농도의 커피를 다량 섭취. 이럴 경우 콩팥에 이상이 있는 것으로 보아 사구체신염으로 판정되어 종합병원 쪽에서도 병사용진단서를 발급받을 수 있었다.
- 3. 위의 두 과정을 거치면 병무청에서 최종 검사, 즉 검사관을 동행한 상태에서 소변 채취를 거쳐야 하는데 검사 전 약물과 혈액이 담긴 식염수통을 미리 준비해 자신의 요도에 약물과 피를 직접 주입한 상태로 소변을 봤다.
- 4. 사후에 이루어질 병무청의 불시검사를 대비하여 6개월에서 1년 정도 허위치료 과정을 거쳤다.
2000년대 초반은 이전 시대와 달리 단순히 뇌물을 제공하는 것만으로 병역면탈이 거의 불가능한 시대였다. 따라서 어떻게든 면제가 가능한 질병을 조작하여 겉보기에 이상 없는 진단서를 병무청에 제출할 필요성이 있었는데, 수법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사구체신염은 다른 질병에 비하면 조작이 매우 쉬운 편이라는 게 특징이었다. 당시 대중들 사이에서도 은밀하게 '커피를 많이 마시면 신체검사에서 이상이 발견되어 면제받을 수 있다'는 식의 입소문이 돌 정도였다. 물론 위에서 보듯 실제로는 단순히 커피를 마시는 것만으로 사구체신염 진단이 나오는 것은 아니기에 아무 일반인이나 사구체신염 진단으로 병역을 기피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원래 사구체신염, 사구체성신증은 하나의 특정한 질병이 아니라 신장과 관련된 질병으로 인해 나타나는 증상이다. 즉, 사구체신염이 진단되더라도 그것에는 여러가지 원인, 특히 콩팥에 중대한 원인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이고 신부전등의 중대질병으로 진행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그 발병 원인을 찾아내고 치료하기 위한 후속 의료조치가 반드시 따라야만 한다. 이로 위험성으로 인해 사구체신염이 당시 병역면제가 가능한 질병에 포함된 것이었다.
사구체신염이 프로야구 선수들 및 다른 종목의 운동선수들이 종전에 병역기피 수단으로 사용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다른 질병들보다는 훨씬 쉽게 조작할 수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 기존의 방법들은 대체로 관절이나 디스크 수술 등의 외과적인 방법이었기에 과정도 험난했고 선수로서의 생명을 담보로 잡을 수밖에 없었는데, 사구체신염을 조작하는 수법은 그런 위험성이 덜했다.
병무청 또한 바보는 아니어서 사구체신염을 통한 병역면탈이 쉽다는 점을 잘 알고 있었기에 쭉 사구체신염을 중점질환으로 분류하고 감시와 관리를 해 왔던 상황이나 사람이 개입하는 일이기에 21세기 이전까지는 병무청 직원이 직접 병역면탈 수법에 가담할 경우 이를 방지하기가 쉽지 않았다. 이로 인해 박노항으로 대표되는 병무청 내부 인사를 통한 병역비리가 만연했던 것. 이에 21세기 초에 행정 전산화를 거쳐 병무청 직원이 직접 개입, 조작하는 것이 불가능하게 만들었고, 이에 안심한 나머지 사구체신염을 중점질환에서 제외했다.
병무청의 업무가 전산화된 기록을 읽어보는 수준으로 단순화되다 보니 이 사건과 같이 민간 병원 차원에서부터 진단서를 조작할 경우 이를 알아차리기 쉽지 않았다는 것이다. 사실상 병무청이 하는 일은 3단계에서의 병무청 최종 소변검사와 민간병원의 진단기록을 믿는 것이 전부나 마찬가지였고 이런 허술한 면을 틈타 브로커와 선수들이 당시로서는 신종수법이었던 위의 방법을 통해 병역면탈을 성공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이 사건 발생 이후 병무청이 이런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사구체신염을 다시 중점질환에 포함시키고 중앙병역판정검사소에서 병무청 자체 검사를 거치게 만들었으며 생화학분석기를 구입해 이를 통한 약물검사까지 거치도록 바꾸었다.
병역면탈 초창기에는 극소수의 선수들 사이에서 은밀하게 이루어지던 것이 시간이 지날수록 입소문이 나면서 가담자가 점점 늘어났다. 그런데 사지멀쩡하고 건장한 2~30대 운동선수들 사이에서 원인불명의 사구체신염이 유행하며 사구체신염 진단 이후의 의학적 검사나 치료도 부실하고 심지어 일반 대중들 사이에도 어렴풋하게나마 신장이상을 통한 병역면제에 대한 소문이 돌았다면 누구라도 이상하게 생각할 수 밖에 없었던 상황임에도 병무청 쪽은 전혀 몰랐다. 병무청의 무능에 대해 책임을 묻는 당시 신문 사설이다.
이 사건을 처음 밝혀낸 곳은 서울경찰청이었는데, 최초로 적발된 것은 LG 트윈스 소속 4명의 선수와 브로커 2인뿐이었다. 그리고 경찰에서도 이들이 구속된 이후 브로커들의 장부를 통해 비로소 이 사건이 프로야구 선수 및 일반인, 연예인 등 80명이 관련된 초대형 사건임을 알게 되었고, 이에 수사가 확대되었다.
4. 원인
- 당시에는 경찰 야구단이 없어서 선수들이 야구와 군대 문제를 병행해서 해결할 수 있는 수단이 상무밖에 없었고, 그나마도 상무가 프로선수 입단을 해금한 것은 불과 5년 전인 1999년이었다.
- 2003년 당시, 김재박 감독이 이끌던 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이 삿포로에서 치러진 아테네 올림픽 아시아 대륙 예선에서 1승 2패의 초라한 성적을 거두며 결국 조 3위로 2004 아테네 올림픽 출전권을 따는 데 실패했다. 앞으로도 한국이 올림픽에서 메달을 딸 수 있으리라는 보장도 없고, 군대 문제가 시급한 젊은 선수들이 국대로 뽑힌다는 보장도 없었다. 삿포로 참사(야구) 참조.
- 야구계 전반의 인식이 현역으로 가면 기량이 쇠퇴한다여서 대부분의 선수들이 입대를 꺼렸다.[3][4]
- 사건에 연루된 대부분의 선수들이 1970년대 후반 출생인데, 바로 이전 세대인 1970년대 초반생까지는 방위나 면제 판정이 굉장히 쉽게 나왔기 때문에[5] 이후 세대들의 군 문제에 대해서 상대적으로 관심이 덜했다. 프로야구 초창기 때 선수 수급을 쉽게 하기 위해서 프로야구 선수의 경우 방위병으로 복무하고 방위병 근무가 끝나는 저녁 6시 이후 홈 경기에 한해 출장할 수 있게끔 하는 제도가 있었는데[6], 이 제도가 1996년 이후로 폐지된데다가 상무 입대 자격이 부여되는 실업야구팀들은 도미노처럼 해체되었고, 프로야구 선수들의 상무 입대가 허용된 것은 1999년부터인지라 1996~1998년 사이에 고교, 대학을 졸업한 선수들은 합법적으로 병역을 수행하면서 선수생활을 이어갈 방법은 거의 없었고, 상무 전역후 프로에 입단하거나[7] 면제 아니면 닥치고 현역 OR 공익이라는 극과 극 선택지 밖에 없었다.
- 브로커 중 한명이었던 김도윤이 한때 한화 이글스의 선수였기 때문에 야구계 인맥을 잘 알고 있었다.
- 2000년대 초반까지 사회 전반적으로 온갖 방법으로 병역비리를 저리르는 행태가 만연했는데, 스포츠계에서는 더욱 심했다. 스포츠에서는 특히 입대연령과 육체적 전성기 연령이 겹치기 때문에 병역문제가 곧 자신의 커리어와 생계에 관련된 문제였기 때문이다. 심지어 2004년 사건으로 걸린 면제 수법과 선수들 외에도 다른 병역비리자가 숱하게 존재했으며 이들은 운 좋게 빠져나간 것뿐이라는 의혹마저 존재한다. 가장 흔한 방법은 무릎 연골 수술이었다고 전해진다.당시 익명의 전직 선수 인터뷰 한마디로 프로야구계 전반에 병역문제와 관련하여 도덕적 해이가 만연한 상태였던 것. 실제로 정민태나 서용빈 같은 스타 플레이어들이 병역비리 사건으로 구속 수감되었던 적도 있고, 홍원기, 박진만 등은 부모가 브로커에게 돈을 건네 준 혐의로 구속 수감되거나 불구속 기소되었고, 성영재, 박철홍의 경우 의병제대를 위해 브로커에게 돈을 건네 구속되었으며, 심지어 위재영의 경우는 소속팀 현대 유니콘스의 홍보부장 정모씨가 허리디스크로 군면제를 받아내기 위해 국군수도병원의 의무관에게 수천만원의 뇌물을 제공했다가 적발되는 등 이미 숱하게 문제가 터져나오고 있었다.
이런 상황임에도 각 구단이나 KBO는 군대는 선수 개인의 문제정도로 인식해 왔다. KBO는 말 그대로 방관했다. 정민태, 서용빈 등 먼저 적발된 선수들에 대해서도 규약이 없다며 아무 징계도 하지 않았다. 각 구단들은 대체로 두 가지 유형으로 나뉘어 있었는데, 대부분의 프런트와 감독들은 병역문제를 팀 차원에서 관리할 생각을 아예 하지도 않았다. 그런 와중에 실무진인 하위직 프런트나 코치진 중 일부에서 은밀하게 선수들에게 병역면탈을 권유하거나 소개시키는 행각을 벌이고 있었다.
5. 브로커
구속된 브로커는 두 명으로, 38세의 우모 씨와 29세의 전직 야구선수 김도윤이었다. 사건이 발각된 초기에는 의료기관이나 병무청 내부에 공범이 있을 수 있다는 의혹이 있었으나 결국 밝혀지지 않았다. 증거를 남기지 않아 잡아내지 못했을 수도 있지만, 실제로 공범이 없었을 가능성이 높다. 전문 의료인이나 병무청 관계자의 도움이 없이도 충분히 범행이 가능한 방식이었다.우모 씨에 대해서는 나이 외에는 알려진 것이 없는데 특별한 언급이 없는 것으로 보아 이전에 야구와 관련된 직업을 가진 적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김도윤은 1998년 드래프트에서 7라운드 2순위로 한화 이글스에 뽑힌 대졸 출신이었는데, 드래프트 순위에서 알 수 있듯이 기대치가 낮은 무명선수였으며, 1군 경기는 단 한 차례도 뛰어보지 못한 채 은퇴한 선수였다. 원래 김도윤은 선수 시절에 우모 씨의 고객이었으나 은퇴 후 우모 씨의 동업자가 되었고, 다른 야구선수들에게 우모 씨를 알선시켜 주는 역할을 맡게 되었다고 한다.
놀랍게도 이들은 1심에서 달랑 징역 3년형이라는 가벼운 처벌을 받았는데, 그 이유는 '죄질은 안 좋지만 전과가 없고 수사에 협조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일반 대중들의 생각과는 달리 박노항, 원용수 같은 현역 군인이 아닌 이상 민간인 병역비리 브로커들은 대체로 이 정도의 징역형, 즉 2년에서 3년 정도를 선고받는 게 대부분이었다. 따라서 이들이 특별히 무거운 처벌을 받은 것도 아니고 가벼운 처벌을 받은 것도 아니었다. 이들은 이후 처벌이 지나치다며 항소했으나, 2심 재판부는 죄질이 안 좋다 보니 형을 더 깎을 수 없다고 판단해, 1심 그대로 3년이 확정되었다. 사건에 연루되어 실형을 살거나 군복무한 선수들이 리그에 복귀하는 데 대체로 2년에서 3년 정도가 걸렸는데, 선수들이 리그에 복귀할 무렵에 브로커들 역시 수감생활을 마치고 사회로 복귀하였을 것이다.
6. 선수
자세한 내용은 2004년 프로야구 병역비리 사건/명단 문서 참고하십시오.7. 반전
수많은 선수들이 연루된 것은 물론 선배가 후배에게 브로커를 소개시켜 주고 심지어는 코치가 브로커를 소개해 주는 야구판 전체의 도덕성이 어느 수준인지 보여주는 막장이었다.
하지만 당시 모든 언론들이 프로야구 멸망급의 대사건이라는 식으로 언급했으나, 한 달도 못 돼 사회 면에서 관련기사를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묻혔다. 그리고 10월이 되고 포스트 시즌이 시작되자 언제 이런 일이 있었냐는 듯 언제나처럼 2004년 한국시리즈 경기에 암표가 나돌았다. 당시 기사[8]
당시에는 사법처리된 선수들 대부분이 듣보잡들이었다. 해당 팀 팬들이나 이름을 알 정도였을 뿐, 일반인들은 누가 누군지도 몰랐던 상태.[9] 시간이 지나자 관심이 적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이름을 알 법한 선수들은 공소시효가 지나 공소권 없음으로 처분된 탓에 언론에 노출이 되지 않았다. 시즌 종료 후 하나둘씩 재검받고 군대 끌려가는 것을 보고 "아 쟤도 비리였구나"라는 식으로 알려졌을 뿐.[10]
사건이 발생한 지 일주일도 되지 않아 초대형 실드가 등장했다. 송승헌, 장혁, 한재석 등 유명 배우들의 병역비리가 발각되면서 어그로가 한 방에 그 쪽으로 쏠렸다. 송승헌 등도 공소시효가 지나 공소권 없음 처분되어 법적으로는 무죄였지만 여론은 그렇지 않았다. 송승헌은 드라마 《슬픈연가》 촬영 문제로 입영 연기를 신청했지만, 여론에 밀려 바로 군대에 끌려갔다. 결국 드라마는 주연 배우를 연정훈으로 교체했으나 평균 시청률 15%라는 기대 이하의 성적으로 종영했다.[11]
7.1. 각 구단별 상황
각 구단이나 각 팀 팬들은 우리 팀이 가장 큰 피해자라며 징징거렸지만, 8개 구단 모두 연루된 사건이었다.- 2004년 당시에 불펜진이 대거 이탈한 삼성 라이온즈가 제일 타격이 컸다. 윤성환, 정현욱, 오상민, 지승민 등이 한꺼번에 날아가 버렸으니 덕분에 사실상의 루키시즌을 보내던 권오준[12]과 권혁에 대한 과부하가 발생하고, 결국 반 게임차로 현대 유니콘스에게 1위를 내준다. 2004년 한국시리즈에서도 주전들의 이탈로 당시로는 신인 내지 유망주였던 조동찬, 안지만, 박석민 등을 땡겨썼고 부상으로 출장이 불투명한 박종호가 출전을 강행할 정도였고 이런 불리함 속에서도 9차전까지 가는 명승부를 보여줬으나 우승에 실패했다. 사실 삼성은 사건이 터지자마자 연루된 선수 모두 죄질의 경중을 따지지 않고 군대나 감방을 보내버렸기 때문에 전력 공백이 즉각적으로 나타난 편이었다. 그러나, 그 후에 선동열 감독이 취임하고 나서 그 전력들이 한꺼번에 복귀하여 지옥의 불펜야구는 계속되었고 이는 2005년 한국시리즈, 2006년 한국시리즈 우승으로 이어진다.
- 두산 베어스 역시 타격이 큰 편이었다. 이 때문인지 이후 스토브리그 내내 언론에서 두징징이 흘러나왔다. 그런데도 2005 시즌 페넌트레이스 2위였으며 2005년 한국시리즈에서 준우승했으나 후폭풍은 2006년에 들이닥쳐 포스트시즌 진출에 실패했다. 이후 2007년 한국시리즈, 2008년 한국시리즈 내내 준우승했다.
- LG 트윈스는 숫자상으로 타격이 큰 편이었으나 실질적인 전력이라 할 수 있는 선수는 유망주였던 심수창#과 병풍 당시 이미 부상으로 2군으로 내려간 이동현 정도라서 다른 팀과 달리 그렇게 큰 피해를 입지 않았다. 오히려 당시 4위 싸움을 하던 KIA와 SK가 병풍으로 각각 주전 마무리(유동훈)와 주전 외야수(이진영, 채종범) 등을 잃은 상황이라 반사이익을 얻을 것이라는 예상이 나왔을 정도. 하지만 큰승호, 박용택, 알 마틴, 박경수[13] 등 1군 멤버들이 약속이나 한 듯이 부상으로 모조리 이탈하여 4위 경쟁에서 탈락, 6위로 시즌을 마감하고 말았다. 게다가 당시 4위였던 SK, KIA와 1승밖에 차이가 안 나는 상황에서 9월 15일부터 9월 19일까지 열렸던 SK와의 2연전과 KIA와의 3연전을 모조리 패하고 5연패(추후 현대전 1패 포함 6연패)를 당하며 가을야구 삼파전에서 제일 먼저 탈락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 롯데 자이언츠 또한 제일 크게 타격을 입은 팀 중 하나. 삼성의 피해가 불펜 쪽에 집중되었다면 롯데는 내야(조성환), 외야(김주찬), 포수(최기문), 선발(김장현[14]), 불펜(임경완) 모든 포지션에서 아주 골고루 나가리가 되었다. 하지만 8888577 찍기 바쁜 시절이라 이미 역대급 최악팀에서 선수 몇 명 빠진다고 별 티가 안 났다. 그런데 오히려 이대호와 손민한의 분전으로 이듬해인 2005년에 5위를 기록하며 꼴데를 벗어나기도했지만 다시 귀신같이 연속 최하위권을 기록하였다. 한편 주전 포수인 최기문이 재검+부상 등으로 전력에서 이탈하면서 신인 포수인 강민호가 선발출장하며 급성장하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15]
- 한화 이글스는 비리를 저지르건 말건 기자들이 관심이 없었다. 브로커가 한화 출신이었고 김충 전 코치가 연루되었기 때문에 구단 분위기는 최악이었다고 한다. 그 와중에 2005 시즌 팀을 수습하고 2006년 한국시리즈에 진출했으니 경이적일 정도였으며 사건에 연루되어 공익 판정받은 한상훈을 4년이나 잔류시키며 대인배스러운 모습을 보여주더니, 급기야는 2010년에 입영연기제도에 대해 선수와 구단 아무도 신경쓰지 않은 탓에 송광민이 시즌 중에 훈련소로 끌려가기도 한다. 그런데 현역 생활을 할 수 없는 부상이 발견되어(왼쪽 발목인대 손상) 훈련소에서 조기 퇴소해 재검 후 2011년 3월에 충남교육청 공익근무요원으로 복무 후 2013년 6월 19일에야 소집해제되어 바로 1군에 합류했다.
- SK 와이번스는 야구판에 들어온지 얼마 안 된 탓인지 매우 기민한 반응을 보여줬다. 사건에 연루된 선수들을 체계적으로 관리하며 매의 눈으로 타이밍을 엿보다가 법률적으로 문제가 없을 거라는 점을 확신하고 행정소송을 제기해 주전 선수들을 일단 잔류[16]시키는 데 성공한다. 단, 그 이면에는 무명 선수들에겐 그런 거 없고 방출이라는 흑역사가 존재한다. 그 외에 병역 브로커를 소개의 핵심인물인 이호준과 당시 소개를 받은 SK 선수들과의 사이가 약간 틀어진 듯한 모습을 보였다.
- KIA 타이거즈는 가장 큰 공백이었던 이현곤이 빠르게 복귀했으며, 그 전까지 김종국과 손지환(연루되었으나 면제 판정 받아 일찌감치 돌아왔다)이 돌아가며 땜빵을 맡아야 했다는 것을 제외하면 야수진에서는 피해가 거의 없었다. 문제는 투수진에서 터졌는데, 2004시즌에 120이닝을 던지고 평균자책점 2.98을 기록하며 불펜에서 고군분투한 유동훈이 구속당하면서 불펜진이 붕괴되었다.[17] 에이스 김진우의 2005시즌 성적이 6승 10패 평균자책점 3.91이었는데, 저 6승이 전부 완투승이었다. 그래도 종합적으로 봤을 때 가장 전력 누수가 적었던 팀이다. 애초에 연루된 인원이 딱 2명이다. 이들은 딱히 연루될 인연이 있던 것도 아니라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후폭풍이 없는 것은 아니여서 유남호가 감독을 맡은 2005 시즌 사상 최초로 꼴지를 기록하며 제대로 타이거즈 역사에 먹칠을 했다.
- 현대 유니콘스도 피해가 적었다. 연루된 인원은 평균에 가까웠으나 그 중 주전급은 2명(정성훈, 마일영)뿐이었다. 다만 정성훈이 맡았던 3루수 자리에 마땅한 백업 자원이 없었던 것이 문제였는데 정성훈이 전력에서 빠진 시즌 말과 한국시리즈에서 클리프 브룸바가 3루수 글러브를 껴야했을 정도. 그나마 브룸바가 마이너에서 3루수로 뛴 경험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 불구속이라는 이유만으로 연루된 선수들을 그대로 기용한 구단들도 있었다. #
8. KBO의 뒤처리
KBO는 사법처리된 선수 51명에 대해 남은 기간 출장정지를 내리고, 대국민 사과 성명을 발표했다. 그리고 이듬해 시즌이 시작하기도 전에 출장정지를 풀어 버렸다. 당연히 여론의 비난을 받았지만 이유가 있긴 했었던 것이, 각 구단이 선수가 없어서 경기를 못한다고 하도 징징거린 탓에 울며 겨자먹기로 징계를 풀 수밖에 없었기 때문.사실 출장정지 자체에도 문제가 있었는데, 사법처리된 51명만 적용 대상이었다는 점. 공소시효가 지났다는 그 이유 하나만으로 공소권 없음 처분된 19명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경기에 출장했다.[18]
이 일로 경기할 선수들이 부족했던지 시즌 경기수를 133경기에서 126경기로 줄였으며, 2009년에서야 원상복귀했다. 또, 선수가 부족하다며 외국인 선수를 3명으로 늘리려는 계획까지 추진했다. 당연히 여론과 선수협의 반발로 무산. 이는 2014년에 NC 다이노스와 kt wiz의 창단으로 선수 수급에 어려움이 생길 것을 우려해 외국인 선수 쿼터가 3명으로 확대될 때까지 유지되었다.
그리고 당시 총재 박용오는 선수 부족을 해소하기 위해 "공익근무요원도 경기 출장하게 해달라"고 말했다가 여론의 비판을 받았다.
또 다른 여파로, 임의탈퇴 기간이 60일에서 1년으로 연장됐다. 이는 삼성이 오상민이나 현재윤을 FA 보상선수에서 빼두고 싶어 구치소까지 찾아가 동의서에 사인을 받는 편법을 저질렀기 때문. 즉, 기간을 확 늘려 버리면 함부로 사용하진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었는데... 오히려 더 신나게 악용하도록 만들어 주었다. 현재는 사실상 방출이지만 연봉은 주기 싫을 때, 혹은 쫓아냈지만 다른 팀에서 선수 생활을 이어가는 것을 막아 반강제로 은퇴시켜 버릴 때 사용하는 제도로 악용되고 있다. 결국, 전직 여자 배구 선수인 고유민이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사건으로 인해 도마위에 올라 선수의 동의 없이 해지를 걸 수 없게 바뀌었고 3년이 지나면 자동으로 해지되도록 변경되었으며, 명칭도 임의"해지"로 바뀌었다.
재발 방지 차원에서 야구 조약에 앞으로 병역비리 저지르면 무조건 제명이라는 규약을 삽입했다.
9. 여담
- 2004년 12월부터 2010년까지 대한민국 국회에서 병역법을 무려 22번이나 보완했다.
- 야구계에서는 더 이상 병역이 선수 개인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점을 깨닫게 된다. 덕분에 그 때까지 지지부진하였던 경찰 야구단이 이 사건 덕분에 2005년 말 창단되었다. 경찰 야구단은 최진행과 최형우, 김태완 등을 창단 멤버로 받아들였고 이들은 경찰청에서 복무를 마친 후 좋은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경찰청 홍보자료에 따르면 1999년에도 창단 검토가 있었으나 예산과 타 종목 형평성 등의 문제로 없던 일로 되었다고 한다. 또한, 이 때부터 KBO는 공인구를 바꾸거나 리그 일정을 조정하는 등 국제 대회를 열심히 대비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결과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대박이 터졌다.[19]
- 각 구단은 이 사건의 교훈으로 신인 선수들의 병역 문제를 구단 차원에서 체계적으로 관리하고 있다. 성장이 지체된 모습을 보이는 유망주들은 병역을 먼저 해결하도록 지원해 주는 바람직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몇몇 선수들이 상무나 경찰청을 다녀와서 한 단계 성숙한 모습으로 팀의 에이스가 되거나 없어서는 안 되는 경우가 보인 이후로는 신생 팀의 전력보강 선수 지명이나 FA 영입 관련 보호선수 명단 사항도 있어서 군대 가는 것을 권장하기도 한다. 대표적인 예가 양의지, 박희수, 박정권, 손승락, 민병헌, 우규민, 모창민, 최형우, 최진행 같은 경우이다. 육군이 1년 6개월로 단축된 이후에는 현역 입대도 증가하는 추세다. 물론 한화 이글스 같이 한상훈을 나이가 찰 때까지 안 보냈거나 송광민 처럼 신경을 안 써서 시즌 도중에 끌려가는 불상사같은 사례도 있지만. 그리고 군 팀 입대를 적극적으로 추진하려던 구단의 말을 안 들었다가 결국 몸 관리가 제대로 안 되어 폭망한 김진웅 같은 사례까지 있어서, 군 팀들은 정말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 선수들의 인식도 변했으며, 더 이상 군대가 프로 선수의 무덤이 아니라는 점을 깨닫게 되었다. 특히 사건에 연루되어 공백기를 가졌던 선배들이 멋지게 부활하여 활약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대표적으로 손시헌, 조성환 등이 있다.
- 팬들 또한 유망주가 기대한 만큼 터지지 않으면 예전과 달리 오히려 먼저 병역을 해결하는 게 좋겠다며 걱정해 주기도 한다. 이를 잘 활용하는 팀이 화수분 야구로 유명한 두산 베어스. 여기는 일단 장기적으로 키울 자원이다 싶으면 무조건 병역부터 해결시킨다. 그 결과, 20대 군필 자원들이 매년 구단으로 돌아오며 기대에 부응하는 이들도 꽤 많다. 이 대표적인 예시로 양의지, 민병헌, 유희관, 허경민, 박건우 등이 있고 최근 들어 돌아온 유망주들은 이현호, 박세혁, 김인태, 이우성, 류지혁 등. 물론 오재원, 이원석, 홍상삼, 이용찬, 정수빈 같이 데뷔시즌 때부터 어느 정도 이상 해 주며 주전이든 백업이든 1군에 붙어있던 선수들은 예외다.[20] 두산같은 경우 화수분처럼 유망주가 쏟아져 나왔다보니 병역을 빠르게 해결한 사례와 그렇지 않은 사례가 가리지 않고 많았다. 2020년대 이후부턴 LG의 이지강이나 키움의 이주형 처럼 바로 자리를 잡지 못하면 20대 초반에 빠르게 입대하는 사례도 많아졌다.[21]
- 이 사건은 2010년 들어 어느 정도 잊힌 사건이 되었다. WBC 이후 유입된 야구팬들은 이 사건에 대해 잘 모르고, 올드 팬들은 응원팀 선수가 대거 연루된 이 사건에 대해 언급 자체를 꺼린다. 가끔 롯까들이 네이버 뉴스 댓글로 조성환의 흑역사를 들먹였을 때만 빼고. 야구 팬들은 이 사건 이후 다시는 야구계에 불미스러운 사건이 일어나지 않기를 기원했으나 2012년에는 이에 못지않은 프로야구 승부조작 사건이 터지면서 흑역사를 갱신한데 이어, 2017년에는 최규순 게이트가, 2021년에는 NC 다이노스 원정숙소 방역수칙 위반 사건이 터졌다.
- 2020년대에 들어섬에 따라 사건에 연루된 대부분의 선수들이 은퇴했으며, 2024년 현재 현역으로 남아있는 선수는 노경은 뿐이다.
[1] 지금으로서는 상상하기 어렵지만, 이 당시가 K리그가 KBO 리그를 실질적으로 위협했던 유일한 순간이었다. 텅 빈 사직 야구장에서 자전거를 타는 사진도 이 즈음 촬영되었다.[2] 알부민이라는 단백질을 사용하는데, 알부민은 예전부터 세계적으로 영양제로써 잘못 알려져 있는 상황이라 구입이 어렵지는 않았을 것이다.[3] 이는 현역으로 군복무를 하면 인기가 떨어질 것을 우려한 연예계도 마찬가지였는데, 프로야구 병역비리 사건 2년 전에 터진 유승준 병역기피 사건으로 인해 이를 반면교사로 삼아 남자 연예인들의 '병역의무에 대한 인식'이 바뀌게 되었다.[4] 지금도 야구선수들 사이에서는 상무 야구단이나 사회복무요원을 가는 것이 현역에 비해 선호된다. 현역으로 가면 기초체력 테스트에서는 사회복무요원 출신보다 유리하다고 하지만, 복무 중 다른 부상을 만들어 와서 문제가 생기는 경우도 꽤 있기 때문.[5] 1990년대 초반에는 병역 인력의 적체 현상이 심했던 탓에 신검에서 현역 1급 받고도 방위병으로 가는 사람들이 속출했다.[6] 이종범, 이대진, 염종석 등이 마지막으로 이 혜택을 받았다.[7] 마해영이 이런 케이스다.[8] 그리고 그 다음해인 2005년에는 프로야구 관중이 100만 넘게 증가한다. 이것은 사건사고에 2020년대처럼 그렇게 민감하지는 않았다는 것도 있었다. 사실 이성적으로 생각해 보면 비리를 저지르는 것과 야구 관람과는 상관은 없는 것이다.[9] 2000년대 초중반까지는 프로야구 암흑기여서 이영우, 조성환, 유동훈 같이 팀의 주축으로 활약했던 선수들조차 야구팬들에게나 익숙했지, 대중에겐 듣보 그 자체였다. 사실 프로야구가 부활해서 자리잡은 2020년대에도 류현진, 추신수 같은 스타급 메이저리거나 이대호같이 경력과 캐릭터가 모두 확실한 스타선수 아니면 프로야구 주전이어도 대중에게 듣보인 건 마찬가지다. 실제로 야구팬들이면 모를 수가 없는 박용택, 최정은 일반인들에게 있어서 인지도가 엄청 적다. 최형우나 박병호도 물어보면 모르는 사람들이 많을 정도다. 일반인들에게 인지도가 높은 야구선수는 최동원, 선동열, 박찬호, 이종범, 이승엽, 류현진, 추신수, 이대호가 거의 전부다. 예능에 자주 비치는 양준혁, 홍성흔이나 황재균은 높은 편이다. 최근엔 최강야구로 박용택, 정근우 등이 확실히 눈도장을 찍었다.[10] 축구선수 이동국도 병역비리와 관련이 있었지만 모르는 사람이 매우 많았다. 이동국 정도면 인지도가 어지간한 야구선수보다도 훨씬 큰데도 묻혔다.[11] 송승헌 장혁 둘 다 문제가 있긴 했지만 해결했기 때문에 지금까지 좋은 활동을 보여주고 있다.[12] 2000년에 일단 군대를 가서 2003년에 전역했다. 그런데 일단 가기로 해서 다녀온 데가 해병대였다.[13] 2004 시즌 당시에는 상위타선에서 쏠쏠하게 활약하였다. 훗날 kt wiz로 이적하며 2004년 못지 않은 커리어를 기록한다.[14] 이 당시 김장현은 롯데에서 상당히 밀어주던 선발 유망주였지만 복무 후 2009년에 웨이버 공시된다. 그가 구속된 후 대타로 나선 투수가 이명우였다.[15] 한편으로는 이게 롯데 포수 육성에 안좋은 기조를 마련한 계기가 되었는데 강민호가 FA로 이적 후 비어있는 포수 자리를 강민호처럼 신인 포수들을 주전으로 박고 굴리면 알아서 클거라 기대하고 무작정 신인 포수를 라인업에 넣다가 그르치거나 십자포화를 맞게된 사례가 많아졌다. 대표적으로 장성우, 나균안을 꼽을 수 있다.[16] 단 이호준은 죄질이 강하여 빨간줄이 그였다.[17] 이 때문에 몇몇 KIA 팬들은 저때 유동훈이 깜빵 가서 쉬는 바람에 혹사도가 덜해 09년 우승이 가능했다는 말을 종종 하고는 한다. 물론 그의 몫은 신용운과 한기주가 다 뒤집어써야 했다.[18] 사법기관에서 처벌받지 않은 선수를 무턱대고 범죄자 취급하여 정지시키는 것도 문제다 보니 어쩔 수 없었던 면도 있다.[19] 다만 1회 대회를 마지막으로 WBC 병역 특례는 사라졌다.[20] 오재원의 경우는 2014년 인천 아시안게임에서 금메달을 따 병역 특례를 받았다. 2014 시즌 이후 이용찬과 이원석은 상무로 입대, 홍상삼은 경찰청으로 입대, 정수빈 역시 같은 시기 입대 예정이었으나 구단의 만류로 유예되어 2016 시즌 이후 입대했다.[21] 두 선수의 입대 당시 나이를 보면 대학교를 1년 다니고 휴학한 후 입대한 일반인과 거의 동일한 시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