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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3-30 22:11:54

2004년 프로야구 병역비리 사건


주의. 사건·사고 관련 내용을 설명합니다.

이 문서는 실제로 일어난 사건·사고의 자세한 내용과 설명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1. 개요2. 발단3. 수법과 적발 과정4. 원인5. 브로커6. 선수7. 반전
7.1. 각 구단별 상황
8. KBO의 뒤처리9. 후폭풍

1. 개요

2004년 시즌 중 발생한 프로야구 선수들의 대거 병역비리 사건. 각종 언론들이 프로야구는 이제 망했다!라는 논조의 기사들을 연이어 쏟아낼 정도로 KBO 리그 역사상 최악의 대사건이며 흑역사이다.

비단 프로야구 뿐 아니라 광복 이후의 한국 스포츠 역사 속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사회적으로도 큰 충격을 준 사건으로 스포츠계에서 이 사건의 파장을 넘어서는 사건은 아직까지 존재하지 않았고 앞으로도 존재하지 않을 듯하다. 일단 구속 수감되어 실형을 살게 된 현역 선수의 숫자만 무려 25명이다. 그리고 공중파 9시 뉴스와 일간지 사회면을 도배한 끝에 병역법이 개정되고 병무청 심사 기준이 엄격해져 이 사건 이후 병역자원의 신체등급 책정이 이전보다 까다로워지게 되었을 정도로 정도로 사회 전반에 큰 영향을 미쳤다.

사건이 발생했던 당시에는 '병역비리 사건'이라 불리지 않고 프로야구 병풍 사건이라고 불렸다. 따라서 이 사건에 대한 당시 언론 기사 등을 검색하려면 '병역비리'보다 '병풍'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것이 더 낫다. 하지만 세월이 흘러 병풍이라는 유행어의 수명이 끝나 버린 2010년대 이후에는 병풍사건이라고 부르는 사람이 거의 없다.

2. 발단

페넌트레이스의 막바지에 다다른 2004년 9월 4일 오전, 서울지방경찰청이 "야구선수 50명이 브로커 2명과 짜고 병역비리를 저질렀다"라고 발표한다. 처음은 LG 트윈스 소속 선수 4명이었으나 곧 8구단 전체로 확산되어 한 달간 실시간으로 사건이 보도될 지경이었으며 심지어는 경기 중에 경찰서로 끌려가는 등의 일이 일어났다.

안 그래도 K리그2002 FIFA 월드컵 한국/일본에서의 4강 신화로 큰 인기를 끌었던 데다[1] 한국프로야구 최대의 스타였던 이승엽일본프로야구 치바 롯데 마린즈로 이적하면서 프로야구의 인기가 지구 바닥을 뚫고 들어갈 기세였는데, 사건의 규모와 파장이 엄청날 것으로 예상됐기 때문에 언론은 물론 팬들도 한 마음 한 뜻으로 "프로야구 망했어요!"를 외칠 지경이었다.

이로 인해 포스트시즌을 앞두고 치열한 순위 싸움을 벌이고 있던 한국프로야구는 순위싸움도 포스트시즌도 한국시리즈도 그냥 망했다. 어느 코치는 사건 직후 텅 빈 관중석을 보며 "차라리 남은 시즌 경기를 모두 취소하고 사회봉사를 하는 게 낫겠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 결과는 2002년 시즌과 비슷한 230만명대의 관중 수. 대략 프로야구 초기인 1983년 시즌과 비슷한 셈이다. 그나마 2004년 한국시리즈가 9차전까지 가는 명승부가 나온지라 간신히 흥행 성적을 유지할 수 있었다.

3. 수법과 적발 과정

병역면탈에 사용된 수법은 사구체신염을 조작하는 것이었는데, 그 과정은 아래와 같다.위의 과정이 설명된 당시 기사 내용이다.

2000년대 초반은 이전 시대와 달리 단순히 뇌물을 제공하는 것만으로 병역면탈이 거의 불가능한 시대였다. 따라서 어떻게든 면제가 가능한 질병을 조작하여 겉보기에 이상 없는 진단서를 병무청에 제출할 필요성이 있었는데, 수법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사구체신염은 다른 질병에 비하면 조작이 매우 쉬운 편이라는 게 특징이었다. 당시 대중들 사이에서도 은밀하게 '커피를 많이 마시면 신체검사에서 이상이 발견되어 면제받을 수 있다'는 식의 입소문이 돌 정도였다. 물론 위에서 보듯 실제로는 단순히 커피를 마시는 것만으로 사구체신염 진단이 나오는 것은 아니기에 아무 일반인이나 사구체신염 진단으로 병역을 기피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원래 사구체신염, 사구체성신증은 하나의 특정한 질병이 아니라 신장과 관련된 질병으로 인해 나타나는 증상이다. 즉, 사구체신염이 진단되더라도 그것에는 여러가지 원인, 특히 콩팥에 중대한 원인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이고 신부전등의 중대질병으로 진행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그 발병 원인을 찾아내고 치료하기 위한 후속 의료조치가 반드시 따라야만 한다. 이로 위험성으로 인해 사구체신염이 당시 병역면제가 가능한 질병에 포함된 것이었다.

사구체신염이 프로야구 선수들 및 다른 종목의 운동선수들이 종전에 병역기피 수단으로 사용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다른 질병들보다는 훨씬 쉽게 조작할 수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 기존의 방법들은 대체로 관절이나 디스크 수술 등의 외과적인 방법이었기에 과정도 험난했고 선수로서의 생명을 담보로 잡을 수밖에 없었는데, 사구체신염을 조작하는 수법은 그런 위험성이 덜했다.

병무청 또한 바보는 아니어서 사구체신염을 통한 병역면탈이 쉽다는 점을 잘 알고 있었기에 쭉 사구체신염을 중점질환으로 분류하고 감시와 관리를 해 왔던 상황이나 사람이 개입하는 일이기에 21세기 이전까지는 병무청 직원이 직접 병역면탈 수법에 가담할 경우 이를 방지하기가 쉽지 않았다. 이로 인해 박노항으로 대표되는 병무청 내부 인사를 통한 병역비리가 만연했던 것. 이에 21세기 초에 행정 전산화를 거쳐 병무청 직원이 직접 개입, 조작하는 것이 불가능하게 만들었고, 이에 안심한 나머지 사구체신염을 중점질환에서 제외했다.

병무청의 업무가 전산화된 기록을 읽어보는 수준으로 단순화되다 보니 이 사건과 같이 민간 병원 차원에서부터 진단서를 조작할 경우 이를 알아차리기 쉽지 않았다는 것이다. 사실상 병무청이 하는 일은 3단계에서의 병무청 최종 소변검사와 민간병원의 진단기록을 믿는 것이 전부나 마찬가지였고 이런 허술한 면을 틈타 브로커와 선수들이 당시로서는 신종수법이었던 위의 방법을 통해 병역면탈을 성공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이 사건 발생 이후 병무청이 이런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사구체신염을 다시 중점질환에 포함시키고 중앙병역판정검사소에서 병무청 자체 검사를 거치게 만들었으며 생화학분석기를 구입해 이를 통한 약물검사까지 거치도록 바꾸었다.

병역면탈 초창기에는 극소수의 선수들 사이에서 은밀하게 이루어지던 것이 시간이 지날수록 입소문이 나면서 가담자가 점점 늘어났다. 그런데 사지멀쩡하고 건장한 2~30대 운동선수들 사이에서 원인불명의 사구체신염이 유행하며 사구체신염 진단 이후의 의학적 검사나 치료도 부실하고 심지어 일반 대중들 사이에도 어렴풋하게나마 신장이상을 통한 병역면제에 대한 소문이 돌았다면 누구라도 이상하게 생각할 수 밖에 없었던 상황임에도 병무청 쪽은 전혀 몰랐다. 병무청의 무능에 대해 책임을 묻는 당시 신문 사설이다.

이 사건을 처음 밝혀낸 곳은 서울경찰청이었는데, 최초로 적발된 것은 LG 트윈스 소속 4명의 선수와 브로커 2인뿐이었다. 그리고 경찰에서도 이들이 구속된 이후 브로커들의 장부를 통해 비로소 이 사건이 프로야구 선수 및 일반인, 연예인 등 80명이 관련된 초대형 사건임을 알게 되었고, 이에 수사가 확대되게 되었다.

4. 원인


이런 상황임에도 각 구단이나 KBO군대는 선수 개인의 문제정도로 인식해 왔다. KBO는 말 그대로 방관했다. 정민태, 서용빈 등 먼저 적발된 선수들에 대해서도 규약이 없다며 아무 징계도 하지 않았다. 각 구단들은 대체로 두 가지 유형으로 나뉘어 있었는데, 대부분의 프런트와 감독들은 병역문제를 팀 차원에서 관리할 생각을 아예 하지도 않았다. 그런 와중에 실무진인 하위직 프런트나 코치진 중 일부에서 은밀하게 선수들에게 병역면탈을 권유하거나 소개시키는 행각을 벌이고 있었다.

5. 브로커

구속된 브로커는 두 명으로, 38세의 우모 씨와 29세의 전직 야구선수 김도윤이었다. 사건이 발각된 초기에는 의료기관이나 병무청 내부에 공범이 있을 수 있다는 의혹이 있었으나 결국 밝혀지지 않았다. 증거를 남기지 않아 잡아내지 못했을 수도 있지만, 실제로 공범이 없었을 가능성이 높다. 전문 의료인이나 병무청 관계자의 도움이 없이도 충분히 범행이 가능한 방식이었다.

우모 씨에 대해서는 나이 외에는 알려진 것이 없는데 특별한 언급이 없는 것으로 보아 이전에 야구와 관련된 직업을 가진 적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김도윤은 1998년 드래프트에서 7라운드 2순위로 한화 이글스에 뽑힌 대졸 출신이었는데, 드래프트 순위에서 알 수 있듯이 기대치가 낮은 무명선수였으며, 1군 경기는 단 한 차례도 뛰어보지 못한 채 은퇴한 선수였다. 원래 김도윤은 선수 시절에 우모 씨의 고객이었으나 은퇴 후 우모 씨의 동업자가 되었고, 다른 야구선수들에게 우모 씨를 알선시켜 주는 역할을 맡게 되었다고 한다.

놀랍게도 이들은 1심에서 달랑 징역 3년형이라는 가벼운 처벌을 받았는데, 그 이유는 '죄질은 안 좋지만 전과가 없고 수사에 협조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일반 대중들의 생각과는 달리 박노항, 원용수 같은 현역 군인이 아닌 이상 민간인 병역비리 브로커들은 대체로 이 정도의 징역형, 즉 2년에서 3년 정도를 선고받는 게 대부분이었다. 따라서 이들이 특별히 무거운 처벌을 받은 것도 아니고 가벼운 처벌을 받은 것도 아니었다. 이들은 이후 처벌이 지나치다며 항소했으나, 2심 재판부는 죄질이 안 좋다 보니 형을 더 깎을 수 없다고 판단해, 1심 그대로 3년이 확정되었다. 사건에 연루되어 실형을 살거나 군복무한 선수들이 리그에 복귀하는 데 대체로 2년에서 3년 정도가 걸렸는데, 선수들이 리그에 복귀할 무렵에 브로커들 역시 수감생활을 마치고 사회로 복귀하였을 것이다.

6. 선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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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반전


수많은 선수들이 연루된 것은 물론 선배가 후배에게 브로커를 소개시켜 주고 심지어는 코치가 브로커를 소개해 주는 야구판 전체의 도덕성이 어느 수준인지 보여주는 막장이었다.

하지만 당시 모든 언론들이 프로야구 멸망급의 대사건이라는 식으로 언급했으나, 한 달도 못 돼 사회 면에서 관련기사를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묻혔다. 그리고 10월이 되고 포스트 시즌이 시작되자 언제 이런 일이 있었냐는 듯 언제나처럼 2004년 한국시리즈 경기에 암표가 나돌았다. 당시 기사[9]

당시에는 사법처리된 선수들 대부분이 듣보잡들이었다. 해당 팀 팬들이나 이름을 알 정도였을 뿐, 일반인들은 누가 누군지도 몰랐던 상태.[10] 시간이 지나자 관심이 적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이름을 알 법한 선수들은 공소시효가 지나 공소권 없음으로 처분된 탓에 언론에 노출이 되지 않았다. 시즌 종료 후 하나둘씩 재검받고 군대 끌려가는 것을 보고 "아 쟤도 비리였구나"라는 식으로 알려졌을 뿐.[11]

사건이 발생한 지 일주일도 되지 않아 초대형 실드가 등장했다. 송승헌, 장혁, 한재석 등 유명 배우들의 병역비리가 발각되면서 어그로가 한 방에 그 쪽으로 쏠렸다. 송승헌 등도 공소시효가 지나 공소권 없음 처분되어 법적으로는 무죄였지만 여론은 그렇지 않았다. 송승헌은 드라마 《슬픈연가》 촬영 문제로 입영 연기를 신청했지만, 여론에 밀려 바로 군대에 끌려갔다. 결국 드라마는 주연 배우를 연정훈으로 교체했으나 평균 시청률 15%라는 기대 이하의 성적으로 종영했다.[12]

7.1. 각 구단별 상황

각 구단이나 각 팀 팬들은 우리 팀이 가장 큰 피해자라며 징징거렸지만, 8개 구단 모두 연루된 사건이었다.

8. KBO의 뒤처리

KBO는 사법처리된 선수 51명에 대해 남은 기간 출장정지를 내리고, 대국민 사과 성명을 발표했다. 그리고 이듬해 시즌이 시작하기도 전에 출장정지를 풀어 버렸다. 당연히 여론의 비난을 받았지만 이유가 있긴 했었던 것이, 각 구단이 선수가 없어서 경기를 못한다고 하도 징징거린 탓에 울며 겨자먹기로 징계를 풀 수밖에 없었기 때문.

사실 출장정지 자체에도 문제가 있었는데, 사법처리된 51명만 적용 대상이었다는 점. 공소시효가 지났다는 그 이유 하나만으로 공소권 없음 처분된 19명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경기에 출장했다.[19]

이 일로 경기할 선수들이 부족했던지 시즌 경기수를 133경기에서 126경기로 줄였으며, 2009년에서야 원상복귀했다. 또, 선수가 부족하다며 외국인 선수를 3명으로 늘리려는 계획까지 추진했다. 당연히 여론과 선수협의 반발로 무산. 이는 2014년에 NC 다이노스kt wiz의 창단으로 선수 수급에 어려움이 생길 것을 우려해 외국인 선수 쿼터가 3명으로 확대될 때까지 유지되었다.

그리고 당시 총재 박용오는 선수 부족을 해소하기 위해 "공익근무요원도 경기 출장하게 해달라"고 말했다가 여론의 비판을 받았다.

또 다른 여파로, 임의탈퇴 기간이 60일에서 1년으로 연장됐다. 이는 삼성이 오상민이나 현재윤을 FA 보상선수에서 빼두고 싶어 구치소까지 찾아가 동의서에 사인을 받는 편법을 저질렀기 때문. 즉, 기간을 확 늘려 버리면 함부로 사용하진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었는데... 오히려 더 신나게 악용하도록 만들어 주었다. 현재는 사실상 방출이지만 연봉은 주기 싫을 때, 혹은 쫓아냈지만 다른 팀에서 선수 생활을 이어가는 것을 막아 반강제로 은퇴시켜 버릴 때 사용하는 제도로 악용되고 있다. 결국, 전직 여자 배구 선수인 고유민이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사건으로 인해 도마위에 올라 선수의 동의 없이 해지를 걸 수 없게 바뀌었고 3년이 지나면 자동으로 해지되도록 변경되었으며, 명칭도 임의"해지"로 바뀌었다.

재발 방지 차원에서 야구 조약에 앞으로 병역비리 저지르면 무조건 제명이라는 규약을 삽입했다.

9. 후폭풍



[1] 다만 2004년에는 실제 관중 수는 238만 명으로 K리그(240만명)와 큰 차이가 없었다. 다만 당시 K리그가 신생 시민구단이 창단된 것을 감안해야 한다.[2] 알부민이라는 단백질을 사용하는데, 알부민은 예전부터 세계적으로 영양제로써 잘못 알려져 있는 상황이라 구입이 어렵지는 않았을 것이다.[3] 물론 2008 베이징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기는 했지만 이 대회를 마지막으로 야구는 올림픽에서 퇴출되었다. 그러다가 야구 인프라가 강한 일본에서 열린 2020 도쿄 올림픽에 야구가 개최국 추가종목으로 포함되기는 했지만 실망스러운 경기력으로 노메달의 수모를 당했다.[4] 이는 현역으로 군복무를 하면 인기가 떨어질 것을 우려한 연예계도 마찬가지였는데, 프로야구 병역비리 사건 2년 전에 터진 유승준 병역기피 사건으로 인해 이를 반면교사로 삼아 남자 연예인들의 '병역의무에 대한 인식'이 바뀌게 되었다.[5] 지금도 야구선수들 사이에서는 상무 야구단이나 사회복무요원을 가는 것이 현역에 비해 선호된다. 현역으로 가면 기초체력 테스트에서는 사회복무요원 출신보다 유리하다고 하지만, 복무 중 다른 부상을 만들어 와서 문제가 생기는 경우도 꽤 있기 때문.[6] 1990년대 초반에는 병역 인력의 적체 현상이 심했던 탓에 신검에서 현역 1급 받고도 방위병으로 가는 사람들이 속출했다.[7] 이종범, 이대진, 염종석 등이 마지막으로 이 혜택을 받았다.[8] 마해영이 이런 케이스다.[9] 그리고 그 다음해인 2005년에는 프로야구 관중이 100만 넘게 증가한다. 이것은 사건사고에 2020년대처럼 그렇게 민감하지는 않았다는 것도 있었다. 사실 이성적으로 생각해 보면 비리를 저지르는 것과 야구 관람과는 상관은 없는 것이다.[10] 2000년대 초중반까지는 프로야구 암흑기여서 이영우, 조성환, 유동훈 같이 팀의 주축으로 활약했던 선수들조차 야구팬들에게나 익숙했지, 대중에겐 듣보 그 자체였다. 사실 프로야구가 부활해서 자리잡은 2020년대에도 류현진, 추신수 같은 스타급 메이저리거나 이대호같이 경력과 캐릭터가 모두 확실한 스타선수 아니면 프로야구 주전이어도 대중에게 듣보인 건 마찬가지다. 실제로 야구팬들이면 모를 수가 없는 박용택, 최정은 일반인들에게 있어서 인지도가 엄청 적다. 최형우나 박병호도 물어보면 모르는 사람들이 많을 정도다. 일반인들에게 인지도가 높은 야구선수는 최동원, 선동열, 박찬호, 이종범, 이승엽, 류현진, 추신수, 이대호가 거의 전부다. 예능에 자주 비치는 양준혁, 홍성흔이나 황재균은 높은 편이다. 최근엔 최강야구로 박용택, 정근우 등이 확실히 눈도장을 찍었다.[11] 축구선수 이동국도 병역비리와 관련이 있었지만 모르는 사람이 매우 많았다. 이동국 정도면 인지도가 어지간한 야구선수보다도 훨씬 큰데도 묻혔다.[12] 그나마 송승헌과 장혁은 갔다 오고 나서 여전히 활동 잘 하고 있다. 문제는 있었지만 해결은 했으니 대중들이 용서해 준 것이다. 아예 안 간 유승준MC몽은 말 그대로 나락에 빠졌다.[13] 2000년에 일단 군대를 가서 2003년에 전역했다. 그런데 일단 가기로 해서 다녀온 데가 해병대였다.[14] 2004 시즌 당시에는 상위타선에서 쏠쏠하게 활약하였다. 훗날 kt wiz로 이적하며 2004년 못지 않은 커리어를 기록한다.[15] 이 당시 김장현은 롯데에서 상당히 밀어주던 선발 유망주였지만 복무 후 2009년에 웨이버 공시된다. 그가 구속된 후 대타로 나선 투수가 이명우였다.[16] 한편으로는 이게 롯데 포수 육성에 안좋은 기조를 마련한 계기가 되었는데 강민호가 FA로 이적 후 비어있는 포수 자리를 강민호처럼 신인 포수들을 주전으로 박고 굴리면 알아서 클거라 기대하고 무작정 신인 포수를 라인업에 넣다가 그르치거나 십자포화를 맞게된 사례가 많아졌다. 대표적으로 장성우, 나균안을 꼽을 수 있다.[17] 단 이호준은 죄질이 강하여 빨간줄이 그였다.[18] 이 때문에 몇몇 KIA 팬들은 저때 유동훈이 깜빵 가서 쉬는 바람에 혹사도가 덜해 09년 우승이 가능했다는 말을 종종 하고는 한다. 물론 그의 몫은 신용운과 한기주가 다 뒤집어써야 했다.[19] 사법기관에서 처벌받지 않은 선수를 무턱대고 범죄자 취급하여 정지시키는 것도 문제다 보니 어쩔 수 없었던 면도 있다.[20] 다만 1회 대회를 마지막으로 WBC 병역 특례는 사라졌다.[21] 오재원의 경우는 2014년 인천 아시안게임에서 금메달을 따 병역 특례를 받았다. 2014 시즌 이후 이용찬이원석은 상무로 입대, 홍상삼은 경찰청으로 입대, 정수빈 역시 같은 시기 입대 예정이었으나 구단의 만류로 유예되어 2016 시즌 이후 입대했다.[22] 두 선수의 입대 당시 나이를 보면 대학교를 1년 다니고 휴학한 후 입대한 일반인과 거의 동일한 시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