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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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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운용
金雲龍 | Kim Unyong
파일:김운용부위원장.jpg
<colbgcolor=#808080> 출생 1931년 3월 19일
경상북도 대구부
(現 대구광역시)
사망 2017년 10월 3일 (향년 86세)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신촌동 세브란스병원
장지 경기도 광주시 신현동 분당 스카이캐슬 추모공원
본관 김녕 김씨[1]
학력 경동고등학교 (졸업)
연희대학교 (정치외교학 / 학사)
텍사스대학교 엘패소 캠퍼스[2] (행정학 / 학사)
연세대학교 대학원 (정치학 / 석사)[3]
병역 대한민국 육군 소령 만기 전역
종교 기독교
의원 선수 1
의원 대수 16
약력 국기원 원장
세계태권도연맹 총재
국제올림픽위원회(IOC)부위원장
대한올림픽위원회(KOC)위원
대한체육회 회장
국제올림픽위원회(IOC)집행위원
2002년 월드컵축구대회조직위원회 자문위원
국제경기단체총연합회(GAISF)회장
대한태권도협회 회장
새천년민주당 총선기획위원회 위원
제16대 국회의원 (새천년민주당 / 비례대표)
제33대 대한체육회 회장
1. 개요2. 생애3. 선거 이력4. 논란
4.1. 부정부패4.2. 평창 동계올림픽 관련 음모론4.3. 김동성, 안톤 오노 사태 관련4.4. 2015년 올해의 스포츠영웅상 수상
5. 평가6. 여담7. 둘러보기

[clearfix]

1. 개요

대한민국의 前 스포츠 행정가. 대한태권도협회 회장, 국기원장, 세계태권도연맹 총재, 대한체육회 회장, 대한올림픽위원회 위원장, 국제스포츠연맹기구(GAISF) 회장, 국제올림픽위원회(IOC) 부위원장 등을 역임하였다.

1988 서울올림픽 조직위원회 부위원장으로 활동하면서 서울올림픽이 성공적으로 개최되는데 기여했으며, IOC 부위원장을 역임하는 등 국제 스포츠계에서 활발히 활동하면서 대한민국 스포츠계의 위상을 높이는데 기여했다. 특히 태권도 분야에서 활동하며 태권도를 올림픽 정식 종목으로 채택시키는데 공헌했다.

그러나 후술된 부정부패로 말년엔 구속까지 당하는 등 빛과 그림자를 동시에 가진 인물이기도 했다.

2. 생애

연희대학교 정치외교학과 재학 시절 고등고시 행정과 3부(외무고시, 외교관후보자 선발시험의 전신)를 준비하던 중 6.25 전쟁이 발발하여 조선인민군의 서울 점령을 겪었다. 서울 수복 직후 군에 입대하여 미국 육군보병학교로 세 차례 군사 유학을 다녀오기도 했다. 그는 각종 외국어에 능통해 제11대 대한민국 육군참모총장 송요찬 중장전속부관을 맡기도 했다. 텍사스대학교 엘패소캠퍼스에서 행정학을 공부하고 학위를 수여받았다.

1961년 장면 내각의 총리 의전추서관을 역임했고, 1962년에는 동덕여자대학교 강사를 역임하다 1963년부터는 주미 한국대사관 참사관 등을 맡으며 주로 외교관으로 활동했다. 대통령경호실에서도 잠깐 일했다. 1965년에는 제20차 유엔 총회에 한국 대표로 참석하기도 했다.

이후 대한태권도협회를 이끌던 2세대 태권도 원로인 이종우, 엄운규 등에 의해 태권도계로 영입되어 1971년부터 20년 간 대한태권도협회장을 역임했다. 1972년 기존 국제태권도연맹(ITF)의 수장 최홍희가 정권의 탄압을 받았다며 캐나다로 망명을 가 본부도 토론토로 옮기자, 이에 대비되는 단체 격으로 1973년 창설된 세계태권도연맹(WTF)의 초대 총재를 맡게 된다.

WTF 창설 이듬해인 1974년에는 국제 태권도 대회인 제1회 세계태권도선수권대회를 개최했다. 김운용은 태권도의 세계화를 추진하면서, 동시에 태권도가 국제스포츠로서 인정받을 수 있는 공인화 작업을 추진했다. 그리하여 1975년 10월 GAISF(국제경기연맹총연합회)에 가입하여 태권도가 세계 스포츠계에 정식으로 인정받는 스포츠가 되었다. 이어 1980년 8월에는 IOC(국제올림픽위원회) 승인을 받는 쾌거를 이루어냈다. 이어 태권도를 1988 서울 올림픽 시범 종목으로 채택시키면서 체육계에 발을 들여놓았다.

1979년에는 NOF(국제경기연맹비올림픽종목회의)의 의장으로 선출되었고, 올림픽 정식 종목이 아닌 스포츠 종목들의 종합 스포츠 대회인 월드 게임의 창설에 많은 역할을 했다. 실제로 그는 월드 게임을 관장하는 기구인 국제 월드 게임 협회(IWGA)의 초대 회장을 역임하기도 했으며, 그 자격으로 초대 월드 게임인 1981 산타클라라 월드 게임의 개회 선언을 하기도 했다.

1986년 당시 국내 IOC 위원이었던 박종규가 사망하자 그 뒤를 이어 IOC 위원이 되었고[4] 아울러 같은 해에 GAISF(국제경기연맹총연합회)의 회장으로 선출되어 2004년까지 장장 18년 간 회장직을 역임했다. 1992년에는 IOC(수석)부위원장까지 올랐다.

1994년 9월 파리에서 개최된 제 103차 IOC 총회에서 2000 시드니 올림픽에 태권도를 정식 종목으로 채택하는데 많은 영향력을 미쳤다.[5] 이런 국제 스포츠계의 명성을 등에 업고 대한체육회장 겸 대한올림픽위원장까지 되면서 국내 체육계를 대표하게 되었다. 세계스포츠계에서도 한때 후안 안토니오 사마란치의 뒤를 이을 차기 IOC 위원장의 유력한 후보 중 한 사람으로 꼽히기까지 했으나 결국 IOC 위원장직에 오르지는 못했다.

이 시절 그의 직책은 국기원장, 대한태권도협회장, 세계태권도연맹(WT) 총재, 대한체육회장, 대한올림픽위원장, 국제경기연맹총연합회(GAISF) 회장, 국제올림픽위원회(IOC) 부위원장, 국제경기연맹비올림픽종목회의(NOF) 의장 등이었다. 일 제대로 할 수나 있나 물론 간판의 성격이 짙고, 실질적인 업무는 실무자들이 많이 하긴 했다. 예를 들어 태권도 같은 경우엔 엄운규, 이종우 등이 실무적인 일은 많이 주도했다.

김대중 정부가 집권하던 2000년에는 새천년민주당 비례대표 후보로 나와 국회의원까지 했는데, 사실 김운용은 처음엔 체육인이 특정 정당을 지지한다는 시선이 부담스러워 수 차례 고사했으나, IOC 위원장 선거 출마가 예상되는 시점부터 당시 해외 언론의 공격이 거세지자, 당시 김대중 대통령이 김 부위원장을 보호할 수 있는 장치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했고 본인은 자신이 국회의원 되면 체육계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어 응했다고 한다. 다만 국제무대에서 잔뼈가 굵은 양반이 그동안 안하던 정치에, 연이나 성향도 얼핏 멀어보이던 여당으로 진출한건 냉정하게 보면 권력 욕심도 있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하여튼 정치가 정치다보니 당시 야당인 한나라당에 좋은 소린 못들었다.

어쨌든 그렇게까지 하면서 IOC 위원장직을 노렸으나 결국 실패하고, 도리어 후술되어있듯 이때 불거진 부정부패 스캔들로 구속도 당한다. 가석방된 이후엔 비교적 조용히 말년을 보냈는데, 2천년대 후반엔 당시 문대성 선수가 IOC 위원에 도전했을 때 화해했는지 사마란치 전 IOC 위원장 등 옛 지인들을 만나 지지를 부탁하는 등 측면 지원을 해주기도 했다.

2017년 10월 3일 오전, 신촌 세브란스병원에서 노환으로 타계했다.

3. 선거 이력

연도 선거 종류 선거구 소속 정당 득표수 (득표율) 당선 여부 비고
2000 제16대 국회의원 선거 비례대표

[[새천년민주당|
파일:새천년민주당 흰색 로고타입.svg
]]
6,780,359 (35.86%) 당선 (6번) 초선

4. 논란

4.1. 부정부패

사실 김운용의 부패 관련 루머가 어제 오늘 일은 아니었다. 허나 국내에선 그의 스포츠 외교적 역량을 감안해 국제망신 당할까 어느정도 쉬쉬하는 분위기도 있었던게 사실이었다. 허나 해외에선 그런거에 아랑곳할리 없었고, 특히 결정적인 계기가 된 것은 IOC 위원장에 도전할 때로, 국제올림픽 위원회가 복마전 양상을 보이는 와중에 소위 '대권'에 도전하게 되자, 물밑에 있던 개인 비리가 떠오르기 시작한다.

우선 당시 영국 일간지 더타임스가, 김 씨의 미국 거주 중인 아들과 관련된 스캔들로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집행위원 직 사임 압력을 받게 됐다고 보도하는 선공을 가했다. 김운용의 딸 피아니스트 김혜정 씨의 연주회 문제로도 논란을 빚어왔다는 의혹을 제기한 것도 더타임스였다. 1990년 호주 멜버른 시가 올림픽 유치를 준비하던 때 김씨가 멜버른 교향악단과 협연했으며 지난 1996 애틀랜타 올림픽 예술 축제에서도 독주자로 참가했고 솔트레이크시티의 유타 교향악단과 2차례 공연한 대가로 5천달러를 받기도 했다고 보도했다. 또한 김혜정씨가 국제콩쿨 참여시 심사위원을 돈으로 매수한 것도 지적했다.

이런 진흙탕 싸움 와중에도 후안 안토니오 사마란치의 위원장 재임 기간 동안 그의 신임을 받으며 IOC 부위원장으로 소위 2인자 자리를 공인받았으나, 후기 무렵 후계구도를 둘러싸고 갈등은 점점 불거졌다. 2002 솔트레이크시티 동계올림픽의 유치 과정에서 뇌물 스캔들이 드러났고, 김운용 본인을 포함한 IOC 수뇌부 전체가 비판의 대상이 되자 이를 부인하는 과정에서 사마란치와 거리를 두려는 움직임을 본격화했던 것이다. 사마란치: 이시기가? 이 건이 결정타가 되어 사마란치는 김운용 대신 자크 로게를 자신의 후계자로 지지했으며, 김운용은 위원장 선거에서 패배하고 말았다. 이때를 기점으로 김운용 세력은 IOC 내에서 점점 위축되었으며, 특히 2002 솔트레이크시티 동계올림픽 대회를 전후로 김운용 인맥이 상당 부분 IOC에서 쇠퇴, 이듬해인 2003년 평창 동계올림픽 유치전에서는 김운용 본인까지 완전 몰락하게 되었다.

선거 패배로 휘청거리는 김운용에게 마지막 비수를 가한 건 2003년 평창 동계올림픽 유치 과정 스캔들로, 2010년 동계올림픽 유치전에서 밴쿠버에 패배한 후 "동계올림픽 유치 포기 조건으로 IOC 부위원장직 확보", "기자회견 방해", "뇌물수수" 등 각종 음모론성 구설수에 오르면서 언론에서 연일 비난을 받게 되었다. 이 안팎의 공격으로 결국 국내외의 모든 직책에서 사임하고, 2005년에는 IOC 위원 자리에서도 물러나게 된다. 이 때의 충격으로 투병 생활을 하기도 했다.

2004년 1월 28일에는 배임수재, 횡령 등 각종 비리 혐의로 검찰에 의해 구속 수감되었다. 검찰은 구속영장에서 "김 부위원장의 비리는 '횡령 범행의 만물상 수준'"이라며 "세계태권도연맹(WTF) 회장 및 국기원 원장으로 재직하면서 공금 38억4천여만원을 빼낸 뒤 이 같은 개인 용도로 헤프게 썼다"고 지적했다. 또 "이번 검찰 수사와 관련, 변호사 비용도 공금으로 처리했다"고 꼬집었다. 수사 관계자는 또 "김 부위원장은 2001년 11월 국기원 공금 4억원을 WTF에 지원한 것처럼 서류를 꾸민 뒤 IOC 위원장 선거비용과 출장비 등으로 썼다"고 공개했다.
파일:external/img.imnews.imbc.com/DN20040028-00_01123517.jpg
그 후 교도소에서 풀려나긴 했으나, 단기간에 가석방되어서 그에 관한 논란이 또 거세지기도 했다.

4.2. 평창 동계올림픽 관련 음모론

김운용은 2003년 2010 평창동계올림픽 유치가 실패로 무산된 후, 당시 자신과 겨뤘던 자크 로게 위원장 체제에서 본인의 IOC 부위원장직을 지키기 위해 평창 유치를 엿바꿔먹었다는 일종의 음모론에 시달렸다. 맨 처음 '유치방해설’을 주장했던 김용학 의원은 "이번 문제가 정치쟁점화돼서도 안되며 IOC를 결부시켜서도 안된다"면서도 "스포츠계의 거물인 김운용 위원에 대해 지금까지 많은 비리를 덮어왔던 게 사실"이라며 "김운용 위원이 정말 평창의 동계올림픽개최를 원했을까라는 의구심이 생긴다"고 재차 의혹설을 제기했다.[6]

김진선 당시 강원도지사도 이런 음모론을 적극 주장하며 "김운용이 '처음부터' 2014년 도전을 주장했다(=2010년 포기하자)"는 의견을 냈고, 전북 무주 주민들을 위시한 옹호 측에서는 "김운용이 '올해(2010년, 평창 도전)는 어렵고 2014년(무주 도전 예정)은 가능하다'는 IOC 내부 의견을 전했을 뿐인데, 김진선 강원지사 측이 곡해(=평창 재도전하자)했다"고 반박했다.[7]

특히 당시 IOC 부위원장 자리와 대회 유치 포기를 맞바꾸었다는 루머가 끊임없이 반복-재생산되었는데, 이에 대해 김운용은 이런 발상 자체가 지극히 한국적인 사고방식이라 반박하며 억울함을 호소하기도 했다. 한편, 분위기에 편승한 일부 언론이 당시 경쟁국이었던 캐나다(밴쿠버) 언론의 보도까지 인용해 김운용을 비난했던 것 또한 문제의 소지가 있었다.

비록 2001년 IOC 위원장 선거 후 주춤한 면이 있긴 하나, 어찌됐든 간에 30년 동안 김운용측이 쌓아올린 국제 스포츠계의 인맥은 무시할 수 없는 자산인데, 확인되지 않은 정보로 30년 공들인 것을 스스로 내친 격이 되었다는 비판적인 시각도 있었다.[8]

4.3. 김동성, 안톤 오노 사태 관련

2002 솔트레이크 동계올림픽 김동성 사태 당시, 아폴로 안톤 오노의 금메달 강탈로 전국민적인 분노가 치솟던 순간 이 문제를 그냥 유야무야 덮어버렸다는 논란도 있었다. 다만 이에 대해선 오히려 당시 한국 선수단이 "솔트레이크시티 동계올림픽 보이콧"에 나서 당시 대회 운영위원회 및 IOC에서 진화에 나서는 등 적극적인 대처를 했다고 보는 시선도 있다.

이후 2004년 양태영(기계체조), 2008년 박태환(수영) 및 야구 결승전, 2012년 신아람(펜싱), 2016년 김현우(레슬링) 등 사실 국제대회에서의 편파판정 의혹은 꾸준히 제기되는거고, 이에 대한 협회의 대응이 김운용 시절보다 더 못한 경우도 있어서, 이건 딱히 김운용만 욕할 일은 아니다.

4.4. 2015년 올해의 스포츠영웅상 수상

대한체육회는 2011년부터 스포츠 분야에서 탁월한 업적을 보이고 한국 스포츠 발전에 기여한 사람을 스포츠 영웅으로 선정하고 있었는데, 2015년부터 나이제한 규정을 없앤 결과, 김연아도 후보에 올랐고 인터넷 투표에서 김연아가 1위를 차지하였다. 그러나 대한체육회는 김연아의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선정위원회에서 탈락시켰으며나이제한 없앴다며 이게 무슨 소리야, 그 대신에 김운용을 스포츠 영웅으로 선정하였다.

그런데 이에 대해서는 나이가 젊다는 이유로 김연아를 탈락시킨 것도 납득할 수 없지만, 대한민국 스포츠 영웅으로 김운용이 선정된 것도 기가 막힌 일이라는 여론이 들끓었다. 김운용은 세계태권도연맹 후원금 유용 등 업무상 횡령과 외환관리법 위반 혐의 등으로 조사를 받는 과정에서 국회의원직과 세계태권도연맹총재직, 국기원원장직에서 물러났으며, 2004년 1월 법원에서 징역 2년에 추징금 7억 9천만원을 선고 받고 복역한 인물이기 때문이었다.

2005년 6월 30일 잔여 형기 10개월을 남기고 가석방 되기는 하였지만, 이미 2000년에도 김운용은 2002 솔트레이크시티 동계올림픽 유치를 둘러싼 비리 의혹으로 곤욕을 치렀고, 급기야 2002년에 대한체육회장과 대한태권도협회장을 내놓은 적도 있었다. 뿐만 아니라 2010년 평창 동계올림픽 유치를 결정하는 투표를 앞두고 IOC부위원장 재도전을 위해 오히려 유치를 방해했다는 논란에 휩싸여 명예훼손 소송까지을 제기하여 구설에 오르기도 하였다.

김운용의 이런 경력을 보면 장관 인사청문회조차 통과하기 어려워 보이는데, 이런 사람을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스포츠 영웅'으로 선정한 것이 과연 바람직한 일인지, 김운용이 IOC 부위원장을 사퇴할 당시에 벌어진 여러가지 추태를 생각해보면 그를 스포츠 영웅으로 선정하는 것은 국제 스포츠계에서 비웃음을 사기에 충분한 일인데, 대한체육회는 왜 굳이 김연아를 제외하고 김운용을 스포츠 영웅으로 선정하였는지 등의 의문이 제기되었다.

2016년 하반기, 박근혜-최순실 게이트가 터지면서, 11월에는 최순실의 측근 차은택이 주도한 늘품체조 행사에 김연아가 불참한 것과 관련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의혹이 제기되었다. 12월에는 김연아의 소속사(올댓스포츠) 측에서 "늘품체조보다는 2012년, 새누리당이 초청한 행사를 거절한 일이 더 연관있는 것 같다"고 밝혔다.

5. 평가

김운용이 수십년간 한국 태권도계와 스포츠계에 공헌한 것은 사실이다. 스포츠 외교관의 역할이 많이 주목받지만[9], 국내로 한정해서 봐도 1세대가 창시하고 2세대가 구축하고 있던 태권도의 위상을 높이는데 노력했다. 물론 김운용 혼자만 한 것은 아니고 앞뒤에서 노력한 태권도인들이 많긴 했다.

그래도 문인사회였던 조선시대의 뒤를 이어 일제강점기를 지나 현대사회에 들어왔을 때, 그 기조를 이은 무술, 격투기 등은 잘 평가받지 못하던 시기가 있었고[10], 태권도의 뿌리를 제대로 내려야 할 필요가 있었던 시기에 김운용은 그동안 알아온 정재계 인맥 등을 통해 태권도 발전에 유무형의 도움을 줬다.[11]

하지만 상기한 몇몇 논란과 부정부패, 그리고 내부관리 실패와 본인의 탐욕 등으로 인해 본인 스스로 그 명예를 날려먹은 인물이기도 하다. 김운용이 태권도계를 자기 밑으로 잘 화합시킬 수 있었다면 지금처럼 명예가 떨어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물론 상대적인 것은 있어서, 이연택 대한태권도협회장 등의 후임들이 "태권도 용어 공용화 허용" 같은 실수를 저지르고 이합집산이 심해지면서[12] 한동안 구관이 명관이란 소리를 듣기도 했다.

일부 태권도인은 태권도의 발전 방향에 있어서 무도, 격투기적인 면보다는 운동경기 및 보급에 더 치중한 면을 비판하기도 한다. 헌데 김운용 본인은 태권댄스도 좋지만 무도로서의 정신, 전통을 유지해야 된다는 식으로 발언하기도 했다. 국제태권도연맹 측에서도 별로 좋게 취급하진 않는다.

미국 태권도의 개척자 이준구 사범도 "그(김운용)는 태권도의 ‘태’자도 모르는 사람이에요. 나는 평생 태권도 이미지를 고양하기 위해 뛰었는데, 그 사람이 솔트레이크시티 동계올림픽 관련 비리에 연루되는 바람에 태권도의 명예가 땅에 떨어졌어요."라고 김운용을 좋지 않게 평했다.

그래도 도올 김용옥이 저서 '태권도 철학의 구성원리'에서 지적한 맥락과 비슷하게, 최영의라는 희대의 무술가를 통해 세계로 발돋음한 가라테와 달리[13], 인프라적으로 십수년은 처져있던[14] 태권도가 가라테와 차별화에 성공하고 심지어 올림픽에도 먼저 진출한 것은 김운용의 공도 무시할 수 없다. 물론 김운용이 태권도계에 발을 들이기 전부터 이미 태권도계 체계 정립과 통합은 이뤄지고 있었고, 본인 자리 사수하는데만 열을 올려 정작 후계자를 키우지 못했다는 비판도 있다.

6. 여담

7.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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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명숙 김운용 박인상 이미경
박상희 이재정 허운나 최재승
김한길 김방림 김기재 김영진
윤철상 조재환 유삼남 김화중
최명헌 박양수 조배숙 오영식
구종태 안상현 황창주 박종완
한충수 양승부 박금자 이종성
안희옥
자유민주연합
5석
김종필 조희욱 김종호 조부영
안대륜 변웅전
민주국민당
1석
강숙자
15대
17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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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미애 조순형 설훈 함승희 장재식
유용태 이훈평 김성순 심재권 조한천
김경천 강운태 김상현 전갑길 이윤수
안동선 최선영 김영환 박병윤 이희규
박종우 송훈석 유재규 이용삼 이협
장성원 김태식 정균환 김홍일 김충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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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옥두 이정일 한화갑 이낙연 고진부
최영희 장태완 이만섭 김운용 박상희
최재승 김방림 김기재 윤철상 조재환
최명헌 구종태 안상현 황창주 한충수
양승부 박금자 이종성 안희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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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충의공파 27세손 진○(鎭○) 항렬. 족보명 김진운(金鎭雲).(족보(1)족보(2))[2] 대내외적으로 잘 알려진 텍사스 대학교/오스틴 캠퍼스와는 별개의 다른 학교다.[3] 석사 학위 논문: 美國의 對「라틴·아메리카」外交政策(1961)[4] 박종규의 사망 직후 5공의 주요 실세들이 IOC 위원직에 탐을 냈고, 전두환 대통령이 그 중에 한 명을 선택하려 했는데 후안 안토니오 사마란치 당시 IOC 위원장이 친하던 김운용을 고집하면서 무위에 그쳤다는 일화가 있다. 1986년에는 스위스 IOC 본부에서, 1987년에는 청와대에서 전두환이 사마란치를 직접 만나 계속 설득했는데, 사마란치는 "만약 다른 인물을 고집한다면 한국은 IOC 위원이 없는 상태로 1988 서울 올림픽을 치르게 될 것이다."라고 김운용을 적극 옹호하고 나섰다고 한다.[5] 혹자는 김운용 혼자 다했다는 식으로 말하기도 하는데 이건 좀 오바고, 태권도가 막 태동되던 1950년대부터 해외에 진출해있던 많은 태권도 관련자들이 인프라를 다져놨기에 가능했다.[6] 사족으로 김운용은 이때 자신이 기득권 세력으로 몰려, 참여정부를 지지하던 친노 세력에게 찍혔기 때문에 더 고난을 당했던 것 같다고 주장하기도 했으나, 보다시피 현실은 당시 야당에서 더 김운용을 저격했다.[7] 당시 김진선 강원도지사가 사실 관계를 왜곡하면서까지 무리수를 둔 것은 당초 2010년 평창군 유치전이 실패하면 2014년 유치전에는 무주군을 밀어주기로 약속이 됐던 것이 원인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실제로 2003년 유치전 실패 후 부각된 '김운용 뒷거래 스캔들'로 "다시 한 번 평창이 나서야 한다."는 여론이 형성되었으며, 무주 유치전 얘기는 쏙 들어가다시피 했다. 아울러 정부에서 사실상 유치전 참가 자격을 잃어버린 무주 주민들을 달래고자 본래 경주시춘천시로 갈 분위기였던 태권도 공원을 무주군에 유치될 수 있도록 돕기도 했다.[8] 2011년 7월, 남아공 더반에서 경쟁도시 뮌헨(독일)을 38표, 안시(프랑스)를 56표라는 압도적인 차이로 1차 투표만에 개최지 선정을 종결시켜버린 압승을 거두고도, 김진선 강원지사가 부각되지 못하고, 발표자였던 나승연 씨나 김연아 선수가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것이 과연 김 지사의 '겸양' 때문이었을지 한 번쯤 생각해볼 일이다.[9] 20세기에 김운용과 비견할만한 국내 인물은 정몽준FIFA 부회장 정도가 있었다. 둘 다 종국엔 씁쓸하게 퇴장한 것도 비슷하다.[10] 당장 20세기 택견인들의 회고를 보면, 자기가 어린 시절만 해도 발차기하는 택견꾼들 동경해 택견을 배우고 싶었지만, 부모님들이 그런건 건달들이나 하는 거라고 기겁하면서 말렸다고 하는 증언이 있다.[11] 김운용은 과거 청와대 경호실에서 일하기도 해서 당시 경호실장이었던 박종규와 관계가 꽤 깊었는데, 군사정권 시절 청와대 경호실의 위세를 생각하면 김운용이 일종의 백을 둔 셈이었다. 단, 훗날 와서 보면 이런 느낌의 권위적인 감이 이후 김운용에게 안 좋게 작용했다고 보는 사람들도 많다.[12] IOC 위원 중 그 누구도 용어 공용화를 언급한 사람이 없었다는데 알아서 긴 꼴이다.[13] 사실 풀컨택트 가라테(극진가라테) 입장에서 보자면 최영의가 업계를 일으켜세운 인물인게 맞으나, 정통가라테 입장에서 보자면 (유파가 나뉘어있긴 하지만) 전체 파이에선 지금도 더 많은 세력을 거느리고 있기에 완벽히 맞는 설명은 아니다.[14] 사실 오키나와 무술이던 가라테(오키나와 테)가 일본 본토에 본격적으로 자리잡기 시작한건 1920년대 이후부터였다. 태권도와는 약 20여년 정도로 생각보다 엄청 차이가 나진 않는다.[15] 정확하게는 바둑의 단·급 체계를 유도가 도입했고, 이게 유도와 제휴 관계에 있던 가라테에 이식되었다가, 한국에서 가라테를 태권도로 개조하면서 그대로 남겨둔 것이다.[16] 참고로 후안 카를로스 1세와 (1994년 IOC 총회에서 태권도 올림픽 정식종목 채택에 큰 몫을 한) 후안 안토니오 사마란치도 명예 10단이다. 특히 후안 카를로스 국왕은 실력으로 (초단에) 입단한 경력이 있는 진짜 유단자다.[17] YMCA권법부의 윤병인 사범이 당시 경동고등학교 체육교사로서 권법을 가르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