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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16 11:12:44

제18대 국회의원 선거

18대 총선에서 넘어옴
파일:대한민국 투표 도장 문양(흰색 테두리).svg 대한민국의 주요 선거·투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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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투표 제6차
1987년 10월 2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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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0년 6월 15일 제3차 개헌으로 부통령직 폐지
** 2014년 7월 24일 헌법재판소가 국민투표법 제14조 제1항 내용 중 일부에 대해 헌법 불합치 결정을 내렸으나 이후 법률 개정이 이뤄지지 않아 2016년 1월 1일자로 효력을 상실하여 시행 불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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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제18대 국회의원 선거
출구조사 발표 영상
{{{#!wiki style="margin: -7px -12px" 2004년 4월 15일
17대 총선
2008년 4월 9일
18대 총선
2012년 4월 11일
19대 총선
}}}
투표율 46.1% ▼14.5%p
선거 결과
파일:제18대 국회의원 선거 결과.svg
{{{#!wiki style="margin: -16px -12px; letter-spacing: -1px"한나라당 153석
81석 통합민주당}}}
<rowcolor=#580009,#cfa547> 정당 지역구
비례대표
총합 비율
[[한나라당|
한나라당
]]
131석 22석 153석 51.17%
[[통합민주당(2008년)|
통합민주당
]]
66석 15석 81석 27.09%
[[자유선진당|
자유선진당
]]
14석 4석 18석 6.02%
[[미래희망연대|
친박연대
]]
6석 8석 14석 4.68%
[[민주노동당|
민주노동당
]]
2석 3석 5석 1.67%
[[창조한국당|
창조한국당
]]
1석 2석 3석 1.00%
[[무소속(정치)|
무소속
]]
25석 - 25석 8.36%
1. 개요2. 배경3. 선거구 획정4. 투표율5. 출구조사
5.1. 출구조사와 결과가 다르게 나온 지역구
6. 개표 결과
6.1. 지역구
6.1.1. 정당별 지역구 득표율
6.2. 비례 대표
7. 결과 분석8. 국회의원9. 여담10. 관련 문서

[clearfix]

1. 개요

2008년 제18대 국회의원 선거를 KBS가 정리한 영상
제18대 국회의원 선거2008년 4월 9일 수요일에 치러진 대한민국 국회의원 선거다. 이명박 정부 출범 바로 직후에 치러진 허니문 선거라 선거 전부터 구도가 기운 상태였고 투표 당일에 전국적으로 비도 내렸는데, 그 결과 역대 전국단위 선거를 통틀어 최저 투표율인 46.1%를 기록했다.[1][2]

여당 한나라당의 압승으로 이명박 정부의 임기 대부분을 국회의 지원 속에서 안정적으로 보낼 수 있게 만들어준 선거다. 야당은 범진보 의석을 다 합쳐도 개헌저지선(100석)에 미달하는 참패를 겪었다.

2. 배경

국회의원 지역구를 인구가 늘어난 경기도의 경우 49석에서 51석으로 2곳 늘리고(243→245), 비례대표를 2석 줄여(56→54) 의원 정수를 현행대로 299명으로 유지하는 선거구 획정안을 확정했다. 선거에 참여한 정당은 통합민주당, 한나라당, 자유선진당, 민주노동당, 창조한국당, 진보신당, 친박연대, 평화통일가정당, 한국사회당 등이었다. 대선이 끝나고 불과 4달 만에 치러지는 전국 단위 선거이다 보니 시간적 여유가 없다는 이유로 모든 당에서 경선을 치르지 않고 공천했다. 덕분에 그만큼 공천 파동도 역대 총선 중에서도 상당한 선거였으며, 이는 다수의 무소속 당선자가 나오게 된 큰 계기가 되었다.

3. 선거구 획정

이때에도 농어촌 지역의 선거구 축소와 신도시 지역의 선거구 증설이 문제가 되었다. 당시 헌법재판소 판례상 인구편차는 3:1까지 넉넉하게 둘 수 있었다. 결국 농어촌 선거구를 어떻게든 유지하고자 하는 거대 양당의 이해관계에 따라 비례대표를 2석 줄이고 지역구를 2석 늘렸다.

한편, # 호남 지역 정가에서는 여수시 갑여수시 을이 유지될 수 있는지에 대한 관심이 컸다고 한다. 원래는 부산광역시 남구대구광역시 달서구 병[3]도 합구 대상이었다고 한다.

4. 투표율

연령대별 투표율은 선관위 공식 통계에 근거한다.
(단위는 %)

5. 출구조사

총선 출구조사답게 이때도 한나라당 과반만 맞추고 정작 의석은 제대로 예측하지 못했다. 이 당시 출구조사는 KBSMBC가 공동으로 출구조사를 진행했고, SBS는 단독 예측 조사를 진행했는데 SBS는 50만명을 표본으로 한 전화여론조사를 진행했다.

KBS와 MBC는 20만명을 대상으로 한 예측 조사를 실시했으며 SBS는 한국갤럽, 한국사회여론연구소(KSOI)에 의뢰해 50만명을 대상으로 전화 예측 조사를 실시했다. YTN은 한국리서치와 손잡고 사전에 판세조사로 경합도를 판정한 뒤 245개 선거구에 대한 1차 조사를 진행하고 경합도가 높은 지역과 판세 변화가 큰 선거구를 대상으로 2차 조사를 진행하여 예측했다.

당시 각 방송사의 예측 결과는 다음과 같다.
제18대 국회의원 선거 출구조사 결과
정당 파일:KBS 로고.svg, 파일:MBC 로고(2005-2011).svg 파일:SBS 로고.svg 파일:YTN 로고(2000-2014).svg


파일:한나라당 흰색 로고타입.svg
154~178 (K: 155~178/M: 154~178) 162~181 160~184


[[통합민주당(2008년)|
파일:통합민주당(2008년) 흰색 로고타입.svg
]]
67~93 (K: 75~93/M: 67~89) 68~85 72~88


[[자유선진당|
파일:자유선진당 흰색 로고타입.svg
]]
13~18 10~18 11~15


[[미래희망연대|
파일:친박연대 흰색 로고타입.svg
]]
5~10 (K: 5~10/M: 5~7) 6~11 6~10


[[민주노동당|
파일:민주노동당 흰색 로고타입.svg
]]
3~7 (K: 3~7/M: 3~5) 2~6 2~5


파일:창조한국당 흰색 로고타입.svg
1~3 0~4 2~4


[[무소속(정치)|
무소속
]] / 기타
19~26[4] 19~30[5] 15~24[6]
보면 16대 총선17대 총선에 이어 방송사에 관계없이(...) 실제 결과와 동떨어진 출구조사 결과를 내 놓았다. 그나마 KBS-MBC의 출구조사가 한나라당/친박연대를 제외한 나머지 정당의 의석 범위를 맞췄고, SBS와 YTN의 예측조사는 그마저도 빗나갔다.[7] 그리고 엇나간 양상이 집권여당 의석 과다예측이라는 점으로 동일했다. 물론 방송사의 출구조사 방식과 데이터의 일반성에도 의문을 제기해 볼 수 있겠지만, 유권자 관점에서 보면 여당 지지자들(단, 어느 정도의 지지율을 유지하는 여당일 경우)에 비해 야당 지지자들은 출구 조사에서 정치 성향을 솔직히 밝히기 꺼릴 가능성이 상대적으로 높다는 방증일 수도 있다.

다만 18대 총선의 경우 약간 특이한 점이라면, 보수 진영인 한나라당 예측 의석이 일방적으로 제1야당인 통합민주당으로 바뀌지 않고, 오히려 친박연대, 자유선진당, 민주노동당 등의 비교섭단체들 및 무소속 의석으로 옮겨가는 경향이 있었다. 결과적으로 출구조사랑 대비할 때, 한나라당은 예측 범위 밖으로 감소하여 턱걸이 과반(153석) 달성, 민주당은 딱 적정 예측 수준(81석) 달성[8], 자유선진당(18석), 민주노동당(5석), 창조한국당(3석), 무소속(25석)은 예측 범위의 최고값 언저리 달성, 그리고 친박연대(14석)는 예측 범위를 뛰어넘는 의석 획득을 했다.

5.1. 출구조사와 결과가 다르게 나온 지역구

18대 총선 당시 KBS-MBC 출구조사와 실제 당선인이 바뀐 지역은 아래와 같다. (앞쪽이 출구조사 1위, 뒤쪽은 실제 당선자) 총 22개 지역. 굵은 글씨는 출구조사에서 경합으로 표시되지 않았는데도 결과가 뒤집힌 지역.

6. 개표 결과

파일:제18대 국회의원 선거 결과.svg
파일:18대 총선 결과 지도.png

6.1. 지역구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제18대 국회의원 선거/지역구 국회의원 문서
번 문단을
부분을
참고하십시오.
제18대 국회의원 선거 지역구 의석 현황
지역 통합민주당 한나라당 자유선진당 민주노동당 창조한국당 친박연대 무소속 <colbgcolor=#eeeeee,#2d2f34> 합계
서울 7 40 0 0 1 0 0 48
인천 2 9 0 0 0 0 1 12
경기 17 32 0 0 0 1 1 51
강원
2 3 0 0 0 0 3 8
대전 1 0 5 0 0 0 0 6
충남 1 0 8 0 0 0 1 10
충북 6 1 1 0 0 0 0 8
광주 7 0 0 0 0 0 1 8
전남 9 0 0 0 0 0 3 12
전북 9 0 0 0 0 0 2 11
부산 1 11 0 0 0 1 5 18
울산 0 5 0 0 0 0 1 6
대구 0 8 0 0 0 3 1 12
경남 1 13 0 2 0 0 1 17
경북 0 9 0 0 0 1 5 15
제주 3 0 0 0 0 0 0 3
전국 66 131 14 2 1 6 25 245

파일:18대총선1.jpg
[13][14]

파일:18대총선2.jpg

파일:18대총선3.jpg

6.1.1. 정당별 지역구 득표율

정당별 지역구 득표율
정당 득표수 의석
득표율
[include(틀:한나라당)] 7,487,776 131석
43.45%
[include(틀:통합민주당(2008년))] 4,977,508 66석
28.92%
[include(틀:무소속)] 1,907,326 25석
11.08%
[include(틀:자유선진당)] 984,751 14석
5.72%
[include(틀:친박연대)] 628,179 6석
3.7%
[include(틀:민주노동당)] 583,665 2석
3.39%
[include(틀:평화통일가정당)] 334,715 -
1.94%
[include(틀:진보신당)] 229,500 -
1.33%
[include(틀:창조한국당)] 72,803 1석
0.42%
[include(틀:기독사랑실천당)] 3,720 -
0.02%
[include(틀:국민실향안보당)] 1,130 -
0.01%
[include(틀:직능연합당)] 881 -
0.01%
[include(틀:구국참사람연합)] 513 -
0.00%
[include(틀:통일한국당(2007년))] 51 -
0.00%
선거인 수 37,796,035 투표율
46.08%
투표 수 17,415,667
무효표 수 212,149

6.2. 비례 대표

비례 대표
정당 득표 수 득표율 당선인


[[통합민주당(2008년)|
파일:통합민주당(2008년) 흰색 로고타입.svg
]]
4,313,645 25.18 15


파일:한나라당 흰색 로고타입.svg
6,421,727 37.48 22


[[자유선진당|
파일:자유선진당 흰색 로고타입.svg
]]
1,173,463 6.85 4


[[민주노동당|
파일:민주노동당 흰색 로고타입.svg
]]
973,445 5.68 3


파일:창조한국당 흰색 로고타입.svg
651,993 3.81 2


[[미래희망연대|
파일:친박연대 흰색 로고타입.svg
]]
2,258,750 13.18 8

파일:국민실향안보당.png
93,554 0.55 0

[[기독사랑실천당|
파일:기독사랑실천당글자.png
]]
443,775 2.59 0

[[문화예술당|
파일:문화예술당 글씨.svg
]]
33,966 0.20 0

[[시민당(동음이의어)|
파일:시민당2006년.png
]]
17,656 0.10 0

파일:신미래당화이트.png
12,122 0.07 0

파일:직능연합당글자.png
16,622 0.10 0


[[진보신당|
파일:진보신당 흰색 로고타입.svg
]]
504,466 2.94 0


[[평화통일가정당|
파일:평화통일가정당 흰색 로고타입.svg
]]
180,857 1.06 0

파일:한국사회당 글자.svg
35,496 0.21 0
총합 17,131,537 100% 54

7. 결과 분석

무소속 당선자들의 복당이 모두 이루어졌다고 가정했을 때의 의회 구도[15]
진보정당 5석 민주당계 90석 제3지대 3석 보수정당 201석
민주노동당 통합민주당 창조한국당 자유선진당 한나라당 친박연대
5석 90석 3석 18석[16] 157석 26석

7.1. 정당별

7.1.1. 한나라당

이명박 정부 출범 바로 직후 치러진 허니문 선거와 이른바 뉴타운 공약을 통한 기회를 살려 결과적으로 과반 의석을 확보한다. 18대 국회 정식 개원 이전인 2008년 5월 이전만 해도 한나라당이 원내 2당이었던만큼, 18대 국회의 정식 출범을 기점으로 이명박 정부가 본격적으로 영향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고 볼 수 있다.

물론 과정이 순탄하기만 했던건 아니라, 총선을 전후해 장관 후보자들의 도덕성 논란이 이어지고[17] 친이계와 친박계와의 갈등이 불거지면서 허니문 선거임에도 지지율이 하락 국면을 보여 우려를 나타내기도 했다. 하지만 전년도 성탄절에 발생한 안양 초등생 유괴 살인 사건으로 인해 아동 안전 관련 이슈가 불거졌을 때, 이명박 대통령은 적극적인 현장행보[18]로 아동 안전 이슈를 선점하는 데에 성공[19]하여, 초등 학부모들로부터 상당한 호평을 얻었다. 이는 한나라당 지지율과 득표율로 그대로 연결되었고, 이는 제6공화국 체제에서 치러진 총선 수도권 지역에서 보수정당이 사상 최고의 성과를 올리는 밑거름이 되었다. 덕분에 친박계 무소속 후보나 친박연대 후보자들이 따로 출마해서 사실상 여당 후보가 둘씩 나온 선거구도 꽤 있었지만, 이를 극복하고 과반 확보에 성공한다. 물론 선거 초반 일부 언론에선 최대 200석까지 내다보는 대승을 예상하기도 했지만, 친박 공천 학살의 역풍으로 영남권[20]충청권[21], 강원권[22]에서 상대적으로 부진하면서 설레발에 그쳤다.

그렇기 때문에 지역적으로 볼 경우, 수도권, 특히 서울특별시에서 크게 약진한 선거로 분석된다.[23] 뉴타운 건설 등 부동산 재개발을 대표 공약으로 내세워서 당선된 친이계 소장파들, 소위 타운돌이들이 대거 탄생한 선거이다. 대표적으로 나경원(중구), 강승규(마포구 갑), 강용석(마포구 을), 진수희(성동구 갑), 김동성(성동구 을), 권택기(광진구 갑), 유정현(중랑구 갑), 진성호(중랑구 을), 정태근(성북구 갑), 김효재(성북구 을), 신지호(도봉구 갑), 현경병(노원구 갑), 권영진(노원구 을), 홍정욱(노원구 병), 정두언(서대문구 을)[24], 전여옥(영등포구 갑), 김용태(양천구 을), 김성태(강서구 을), 김성식(관악구 갑), 이범래(구로구 갑) 등이 있다.

어찌보면 당연하겠지만, 이명박 마케팅이 활발했던 선거였다. 상단에서 언급한 타운돌이들은 물론이고, 다른 지역들에 출마한 한나라당 후보들도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거의 대부분 이명박 마케팅을 주요 선거전략에 포함시켰다. 예를 들어 이명박의 대선 싱크 탱크였던 안국포럼 출신인 김영우(포천시·연천군)의 경우, 전체 11 페이지의 공보물 중 단 한 페이지를 제외한 모든 페이지에서 이명박 대통령을 언급했다. # 앞서 언급된 타운돌이긴 하지만, 대선 캠프 뉴미디어 팀장이자 인수위 전문위원이었던 진성호(중랑구 을) 또한 슈퍼 MB맨을 자처했다. #윤진식(충주시)은 이명박 대선 공보물이 마음에 와닿았는지, 자신의 선거 공보물 1, 2 페이지에서 그대로 패러디하기도 했다. 둘 다 1 페이지에서는 와이셔츠에 파란색 계열 넥타이를 입고 태극기 배경으로 찍은 사진이고, 2 페이지는 주황색 계열 상의를 입은채로 책을 펴놓고 필기구를 들고 있는 모습이다. # ## 심지어 윤영(거제시)의 경우 자신의 외모가 이명박과 흡사하다는 점을 활용해 아예 본인을 거제의 이명박이라고 지칭했다. # 국밥 대신 칼국수를 먹방하는 이명박.

다만 엄밀하게 따지면 이명박 정부가 엄청 만족스러워 할 만한 결과는 아니었다. 범보수로는 202석에 육박하는 대승이었지만[25], 친이계들로 잔뜩 공천한 한나라당의 의석은 153석으로 과반을 턱걸이한 정도였다. 그리고 나머지 49석의 범보수정당 의원들은 한나라당과 이명박 정부에 우호적이지만은 않았다.[26] 또한 친이계를 겨냥한 표심 이반이 간간히 나타나긴 했는데, 박형준(수영구)[27], 정종복(경주시), 이재오(은평구 을), 이방호(사천시)[28] 등의 친이계 핵심들이 친박계와 야권의 공조로 낙선한 것은 당시엔 대단한 충격으로 받아들여졌다. 그 중에서도 단연 압권은 친박에 제대로 찍힌 이방호 전 의원에 대한 대대적인 낙선 운동이 벌어진 결과 사천시에서 민주노동당 강기갑 후보가 당선된 것이었다.[29] 더 놀라운 것은 그나마 이재오는 국민권익위원장특임장관을 역임한 것을 거쳐 2010년 재보궐선거에서 다시 본인의 지역구를 되찾게 되며, 박형준 또한 대통령실에서 정무수석 등 여러 요직에 재임하며 정권의 실세로 잘 자리잡았지만, 정종복과 이방호는 이명박 정부 내내 야인으로 지내고야 말았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대략적인 구도는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와 매우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범여권의 승리가 이루어졌지만 비주류 보수 후보들이 영남충청도를 중심으로 승리를 거두면서 130명 정도의 주류계파[30], 50명 정도의 비주류계파[31]로 나뉘게 되었다. 한편 야권 역시 개헌저지선에서 조금 모자란 정도로 여러 당으로 나뉘어 있었던 것도 공통점이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1996년 당시 50석의 자유민주연합은 임기말의 캐스팅보트로서 김대중새정치국민회의와 연정을 이루어 정권교체 이후 아슬아슬한 역과반을 확보한 데 반해 2008년은 비주류 세력이 한나라당 내외의 친박 세력과 자유선진당 등으로 나누어져 있었으며 김종필과 같은 구심점이 없었다는 것이다.[32] 덕분에 친박계와 선진당은 세종특별자치시 수정안 문제를 제외하고는 캐스팅보트 역할을 전혀 하지 못했으며, 개헌선 캐스팅보트였던 선진당 역시 개헌이 불발되면서 의미를 가지지 못했다.

일단 친이계는 분명 한나라당에서 주류 계파로 부상하는데에는 성공했다. 허나 18대 국회 말기가 되어서는 오히려 여당 내에서의 주도권을 친박에 빼앗기고 마는데 그 이유를 분석하면 첫째, 당내 공천에서의 친박계 대량 학살에도 불구하고 총선에서 친박계가 친이계의 예상을 뛰어넘는 대량 생존에 성공하였으며 둘째, 친이계에 마땅한 차기 대권 주자가 없었다는 것이었다. 친이계에서도 이를 알았기에 이후 정운찬[33]이나 오세훈, 김태호 등을 대권 주자로 만들어 보려고 부단히 노력을 했으나, 친박의 방해로 번번히 실패하고 만다.[34]

7.1.2. 통합민주당

그야말로 흑역사로 남은 선거. 의외로 선거운동기간 중반에는 견제 심리에 힘입어 상당수 지역구들에서 한나라당을 따라잡는데 성공, 공천한 197곳 중 선거 막판 여론조사를 보면 종로구를 비롯해 수도권 상당수 선거구들에서 오차범위 내 접전을 벌였고, 여당 후보가 사실상 둘 이상 나온 경우도 적지 않아 예상 외 선전을 거둘 수도 있겠다는 낙관론이 나오기도 했다. 그러나 막상 선거일에는 우천으로 인해 투표율이 고작 46.8%밖에 안 나온데다, 뉴타운 열풍으로 수도권에서 당 중진들이 맥을 못추며 줄줄이 낙선, 말 그대로 떡실신을 당하고 만다. 결국 최다 의석이 걸린 수도권에서 후보자들이 줄줄히 낙선하여 참패하는 바람에 197석 공천 가운데 겨우 81석밖에 못 건지게 된다. 민주당계 무소속까지 포함해도 90석.

이로서 지난 총선 과반이었던 제1당 상실은 기본, 목표인 개헌저지선(100석)에도 12년만에 미달하며 지선, 대선에 이은 쐐기를 박는 3연패를 당했다. 그래도 일각에선 선거 초반 전망되던 50~60석보다는 많이 건져서 그나마 선전했다는 평을 받기도 했고, 이후 이명박 정부의 실정에 의해 민주당이 야당 버프를 받으면서 재보궐선거에서 족족 이기며 89석까지 확보하면서 사실상의 개헌저지선을 지켜내긴 했다만, 개헌이 일어나지도 않았고, 일반 법안들에서는 계속 끌려다녔으니 큰 의미는 없었다.

이 81석은 역대 제1야당의석 가운데 새정치국민회의(79석) 이래로 최저였다. 새정치국민회의 때는 그래도 전면적인 야권 분열 상황이었고 여소야대라 할 말은 있는 반면, 18대는 야권 분열이 미미했음에도 이런 결과가 나온 것이다. 민주당 81석에 호남 무소속 의원 6석(이무영, 유성엽, 강운태, 박지원, 김영록, 이윤석)과 이후 민주당에 복당하게 되는 강원 속초시·고성군·양양군송훈석 전 의원까지 합쳐 88?석이었으니, 15대 총선의 무소속 제외 새정치국민회의 + 민주당 = 95석에도 못 미치는 역대 최저 수준이었다. 여기에 중도 정당인 창조한국당 3석과 진보정당인 민주노동당 5석을 넣어도 범야권이 개헌저지선에 미달했다.

수도권의 경우, 당 대표였던 손학규를 서울 종로구에, 당 대선 후보였던 정동영을 서울 동작구 을에 배치하고도 떨어지는 등 유력 인사들이 줄줄이 낙선했다. 뒷심이 부족한 민주당 지지율이 선거 막판에 불어닥친 뉴타운 열풍을 맞아 흔들렸고, 이로 인해 경기도에선 한명숙, 서울특별시에선 김근태, 최재천, 임종석, 이인영 등이 낙선했다. 심지어 관악구, 금천구, 구로구, 도봉구 등 서울 서남쪽과 동북쪽의 민주당 아성도 모두 무너졌다. 보통 민주당계 정당이 유리했던[35] 수도권 111석 가운데 고작 26석만을 건지는 대참패를 당한 셈. 그나마 수도권 득표율은 30~40%대로 지난 대선보단 많이 올라왔고, 위성도시에서 상당수 의석을 지켜내어[36] 훗날을 도모할 수 있게 된 건 자그마한 위안이었다.

다만 권역별 내용으로 보면 여권분열에 힘입어 제주특별자치도충청북도, 강원도에서 선전했고, 부울경에서도 지난 총선과 비슷한 2석을 확보하면서 호남 정당으로 쪼그라드는 최악의 경우는 피했다. 특히 무주공산이 된 충청북도제주특별자치도는 계속 석권하는 등[37], 체면치레는 했다. 더불어서 강원도에서도 의석을 확보했는데, 정당 득표율과의 차이를 보면 후보 개개인의 개인기에 가까웠다. 더불어 김해시를 포함한 낙동강 벨트에서의 궤멸도 막았다.

한편, 박지원, 이인제, 강운태와 같은 구 민주당 출신들은 이른바 "개혁 공천"에 따라 낙천되자 무소속 출마하여 대거 당선되었으며, 이후 선진당으로 간 이인제를 제외하고 대개 복당했다.[38] 2009년 재보궐선거에서 탈당한 정동영이 승리 후 이 루트를 밟았다. 신계륜김영환도 무소속 출마에도 불구하고 20%대의 건실한 2위 득표 덕에 결국 복당 후 부활에 성공했다. 정읍시의 유성엽은 19대 총선까지 무소속으로 압도적 득표로 살아남은 후 복당. 이윤석과 김영록도 같은 케이스. "공천 학살" 소리까진 안 나왔지만, 탄핵 사태에 대한 책임을 상당히 물었으니 사실상 (합당을 주도한 인력을 제외한) 구민주계에 대한 복수였던 셈이다.

7.1.3. 친박연대

이 정당은 이른바 "공천 학살"에서 탈락한 서청원, 홍사덕 등의 친박 인사들이 한나라당의 결정에 불복하고 탈당하여 17대 대선 당시 정근모 전 장관을 내세웠던 참주인연합에 입당한 후 당명을 미래한국당을 거쳐 친박연대로 바꾸고 총선에 출마한 당이다. 덕분에 이념이나 정책이 아닌 그저 개인 숭상을 위해 만든 당이라고 극딜을 당하기도 했지만, 비례대표에선 약 13.2%[39]를 득표하며 자유선진당을 제치고 지지율 3위를 기록해 지역구에서 당선된 6석[40]을 비롯해 총 14석의 의석을 확보하게 된다. 게다가 이 숫자에 10여명의 한나라당 내 친박과 김무성을 중심으로 한 이른바 '친박 무소속 연대'[41] 12명까지 더하면 40여명에 이르는 무시 못 할 숫자를 가지게 되었다. 이후 여기서 미래연합, 친박연합 같은 짝퉁들까지 쏟아져나오며 18대 국회의 난장판에 기여했지만, 친박이 한나라당의 당권을 장악하고 새누리당으로 이름까지 바꾼 2012년 19대 총선쯤에 들어서면서부턴 싸그리 정리된다.

7.1.4. 자유선진당

충청 지역 정당으로 사실상 자유민주연합의 바톤을 이어 받은 정당으로, 충청권에서만 14명의 의원을 배출하며 나름 선전했지만, 비례대표는 4명만 당선되며 교섭단체를 이루는 데는 실패한다. 이후 2012년 당명을 바꾼 선진통일당이 새누리당에 합당되며[42] 맥이 끊기게 된다.

7.1.5. 창조한국당

비례대표는 3.8%로 2명의 비례대표가 당선되었고, 당 대표인 문국현 후보가 서울 은평구 을에서 한나라당 이재오 후보를 꺾고 당선되는 이변을 연출하기도 했지만, 민주당계 진영에 힘을 보태기는 한참 역부족이었다. 참고로 자유선진당과 창조한국당은 2008년 하반기 선진과 창조의 모임이라는 교섭단체를 만들었지만, 이후 문국현의 의원직 상실과 2009년 8월 심대평의 탈당으로 교섭단체가 무산되고 만다.

7.1.6. 민주노동당

저번 총선에서 13%의 비례득표를 올리며 화제를 모았던 민주노동당은 이후 노선과 민주당과의 협력 관계 문제로 진보신당이 갈라져나오게 되면서 당세가 쪼그라 들었다.

아래에 언급된 진보신당과 달리 민주당과의 야권연대를 했으며, 그 결과 권영길의 수성과 강기갑[43]의 당선, 그리고 비례대표에서 5.7%를 득표하여 총 5명의 의원을 배출하는데 그쳤다. 하지만 당시 젊은 세대가 투표소에 많이 나오지 않았으며, 그 민주당조차도 지리멸렬했음을 감안하면 나쁘지 않았던 성과다.

7.1.7. 진보신당

위의 사유로 인해 갈라져 나온 정당으로, 민주당과의 연대를 했던 민주노동당과 달리 민주당과의 연대를 하지 않았다. 하지만 당시 민주당에 대한 이미지가 영 좋지 않았고, 오히려 정권에 힘을 실어주는 선거였기에 비록 원외정당이긴 했지만 꽤 선전을 했다.

심상정, 노회찬이 전부 낙선하긴 했지만 그 격차는 6%, 3% 정도로 크지 않았으며, 비례도 2.94%로 봉쇄조항인 3%에 딱 0.06% 정도 모자라면서 수천여표만 더 있었으면 원내에 입성할 수도 있었다.[44]

이로서 최상의 시나리오에선 최대 11석[45]까지 확보할 수 있었던 진보정당은 의석이 원래 10석에서 5석으로 반토막나게 되었다. 이로써 진보정당의 당세가 이전에 비해 크게 위축이 되었다.

하지만 이때는 이 총선 당시가 진보신당의 리즈시절이였을 줄은 그들도 생각하지 못했다.[46]

7.1.8. 기타 정당

기독사랑실천당은 정당해산이 되지 않는 2%를 넘는 득표를 했으며[47], 한나라당과 함께 전 지역구(!)를 공천한 통일교 휘하의 평화통일가정당지역구 0석, 비례대표 1%의 성적으로 해산되었다. 허경영경제공화당은 나오지 않았다.[48]

7.2. 지역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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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국회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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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여담

선거 관련 기록으로는 30세에 최연소 비례대표 1번으로 당선되었다가 선거법 위반으로 의원직을 상실하면서 엄마가 로비해서 가져다 준 비례대표의 나쁜 예로 지목된 친박연대 양정례 전 의원, 경기도에서 벌어진 고작 수백표차의 당선/낙선 사례가 있다. #

18대 총선에서 1위와 2위 후보간 표차가 1000표 미만인 지역구는 총 14곳이다.
총선이 치러진 2008년 시점에서 4년 뒤인 2012년에는 대선과 총선이 모두 치러지면서, 대통령 임기를 조금만 줄이면 개헌이 가능한 상황이 벌어졌으나, 보수 정당들이 개헌선을 넘지 못하면서 결국 개헌은 이뤄지지 않았다.[50] 사실 넘었다 해도 딱히 보수 진영 내에서조차 확립된 개헌안 자체가 없었던 상황이라 흐지부지됐을 확률이 높긴 하다만... 오히려 개헌찬반론자들은 좌우 가리지 않고 뒤죽박죽 섞여있어 진보진영과 연대했을 가능성도 있다. 게다가 해도 국민투표가 남아있어서 말처럼 쉽진 않았다.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당시 MBC의 일부 여론조사 결과 한나라당이 20대에서 53.1%의 지지를 받았다는 기사가 뜨기도 했다는 점이다. # 물론 여론조사란 게 으레 그렇듯 신뢰도에 의문점은 있지만[51], 여튼 이 조사 결과에서는 20대가 30대는 물론 40대보다도 높고 50대와 거진 비슷한 지지율을 보였던 셈. 보통 저연령층에서는 진보 정당의 지지율이 상대적으로 높고 보수 정당의 지지율이 상대적으로 낮은 걸 고려하면 상당히 이례적인 결과였다. 이는 뉴타운 열풍 등 정권 초기 이명박 정부에 대한 기대감이 어느 정도 작용했던 것으로 보인다.[52] 또 투표율이 낮은 편이었다는 것을 볼 때 보수 지지층이 늘어났다기보다 진보 지지층이 잠시 이탈한 점이 크다고 보는 것이 맞을지도 모른다.

사실 실제 투표나 출구조사도 아니고 일개 여론조사를 이렇게 언급하는 이유는 이런 여론조사 결과들이 2010년대 들어 본격화된 20대 개새끼론(...)의 시초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는 19대 총선까지 담론이 이어지면서 "30대 개새끼론", "비수도권 20대 개새끼론"으로 바뀌기도 했다. 실제로 당시엔 결과에 껴맞추기식으로 청소년기에 IMF와 뒤이은 양극화를 맞은 이 세대(1980년대 초반생)가 유독 보수성이 높다는 분석이 나오기도 했다. 하지만 현실은 시궁창.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당시 20대였던 1980년대생들은 되려 가장 진보적인 성향의 세대가 되었다. # 실제 8년 후 20대 총선에서 이 당시 20대였던 30대의 경우, 새누리당 득표율은 14.9%에 불과했던 반면 야권 득표율은 무려 79.5%에 달했다. # 그리고 이땐 보수층에서 강하게 20대 개새끼론을 시전했다(...). 결론은 보수나 진보나 지들 입맛따라 분석이 왔다리갔다리.

결과적으로 이후의 관점으로 보았을 때, 20대가 보수화했다는 당시의 논변은 선거 결과의 충격에서 나온 일회성 분석이었다고 보는 것이 맞다. 진짜 문제는 낮은 투표율. 20대 총선의 20대 투표율은 52.7%[53][54]인데, 18대 총선의 20대 투표율은 고작 28.1%(...)[55]였다. 20대에서 보수 정당 득표율 수치의 뻥튀기가 나올 수 밖에 없는 상황. 고로 당시 정치 구도에 실망한 진보 성향 20대 다수가 투표를 포기했다는 분석이 더 타당하다. 8년 사이 20대 투표율이 2배 상승했는데, 그 표의 대다수는 진보 진영으로 간 것으로 보인다.[56] 이는 제21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나타나, 보수 정당은 대참패를 당하게 된다.

사실 이명박 정부나 한나라당 입장에선 시기상 운이 많이 좋았던 선거이기도 했는데, 당장 해당 선거 직후부터 미국산 쇠고기 수입 논란이 커지면서 총선 당시 50%대를 기록했던 이명박 정부 국정 수행 지지도는 1달 후인 5월 초 20%대, 심지어 6월 초엔 10%대까지 떨어지게 된다. 그야말로 천당과 지옥을 1~2달 사이에 오간 셈.

선거 홍보대사로는 전년도인 2007년 말, Tell Me 열풍의 주역이었던 원더걸스가 위촉되었는데 정작 당시 원더걸스 멤버 중 유권자유빈 1명 밖에 없었다.[57]

무소속 당선인이 무려 25명이 나오며 민주화 이후 총선에서 가장 많은 무소속 당선이 나온 총선이다.[58]

10. 관련 문서


[1] 이는 2002년 6월 13일 제3회 전국동시지방선거의 기록 48.9%를 깨버린 것이다.[2] 심지어 전국단위 선거와 동시에 치러지지 않는 한 어지간해서는 40%를 넘기기 힘든 것으로 악명 높은 재보궐선거도 단독으로 치러졌음에도 이 선거보다 투표율이 높은 선거가 2014년 하반기 재보궐선거(61.39%)와 2019년 재보궐선거(48%), 또 2021년 재보궐선거(55.5%) 세 번이나 있었다.[3] 3개 선거구를 2개로 조정.[4] 진보신당 0석~2석.[5] 진보신당 0석~5석.[6] 진보신당 1석~3석.[7] 일례로 서울 은평구 을에서는 KBS-MBC가 문국현 우세, SBS가 이재오 경합우세, YTN이 이재오 우세를 예측했다. 결과는 문국현의 낙승.[8] KBS-MBC와 YTN의 경우 민주당 예측 범위의 중간값이 80석이다. 실제 81석과 불과 1석 차이. 민주당의 경우 수도권에선 출구조사 예측보다 부진했지만 강원/충청권에서 예측보다 선전한 결과가 나와 서로 상쇄되었다.[9] 최종 개표 결과 129표차로 18대 총선 최소 표차로 당선.[10] 20대 총선에서는 둘다 당선되어 국회에 나란히 입성하게 되었다.[11] 여담으로 심장수는 8년 후 제2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새누리당 공천을 받고 출구조사에서도 근소하게 앞섰지만, 이때도 더불어민주당 조응천 후보가 출구조사를 뒤집고 당선되었다. 개표 진행동안 계속 리드를 유지해 와서 미리 당선증 받으러 선관위 가고 있었지만(...) 사전투표함에서 밀려 낙선했다.[12] 출구조사에서 3위로 예측되었다.[13] 경북 경주시의 지역구 색이 잘못 표시되었다. 친박연대 소속 후보가 당선되었으므로 분홍색으로 표시되었어야 했다.[14] 전남 무안-신안은 무소속 후보 당선 지역이다. 이 기사가 쓰일 당시 승부가 미정이었는지 '접전'이라고 표시되어 있다.[15] 무소속의 경우 민주계 9석, 보수계 16석.[16] 참고로 당시 자유선진당은 보수보단 충청 지역정당으로서의 정체성이 더 뚜렷했기 때문에, 민주당계 인사들도 포함되어있었다. 당선자 중엔 권선택, 이용희, 이상민, 김창수가 그런 케이스.[17] 이건 아이러니하게도 한나라당이 야당 시절에 장관 후보자들을 까다로운 조건을 내세워 낙마시킨 업보가 컸다. 참여정부 시절 장관 후보자들을 한나라당이 위장전입 한두건으로 극딜하면서 낙마 혹은 직전까지 정국을 조성했는데, 한나라당 집권기가 되자 위장전입이 기본 사항이 되면서(...) 역풍으로 돌아오게 된 것이다. 다만 야당 시절 한나라당의 주류는 친박이었고, 참여정부 장관 후보자들에 대한 공세를 주도한 것도 친박인만큼, 이에 대한 업보를 이명박 정부가 지게 되는 것은 친이 입장에서 억울하다고 볼 수도 있다.[18] 안양 사건의 피해 어린이들의 시신이 발견된 지 며칠 후에 일산에서 초등학생 여자아이가 아파트 엘리베이터에서 성범죄 전과자에게 납치당할 뻔한 사건이 발생하자 이명박 대통령이 일산경찰서를 손수 방문하여 관계자들을 강하게 문책했다.[19] 실제로 이명박 전 대통령은 대통령 재임 시절 아동안전에 대해 가장 각별히 신경쓴 대통령으로 호평이 매우 높다. 이명박을 반대하는 사람들도 이것만은 그의 서울시장 재임 시절 버스체계 개편 못지않게 인정할 정도로 말이다.[20] TK친박연대, 부울경은 부산의 거물급 정치인 김무성이 이끌던 친박 무소속 연대에게 일정부분 잠식당했다.[21] 여긴 친이, 친박 갈등보단 충청지역 정당 자유선진당의 영향이 컸다.[22] 여기도 친이, 친박 갈등보단 통합민주당의 약진과 무소속 열풍의 영향이 컸다.[23] 실제 2000년 총선 ~ 2020년 총선에서 보수 정당이 수도권에서 이긴 유일한 선거다. 참고로 이때 수도권에서 당선된 인사들은 주로 친이계였다. 친박계를 공천 학살했으니 어찌보면 당연한 말. 반대로 보면 강성 이미지의 친박계를 학살했기에 수도권에서 압승했다고 볼 수도 있다.[24] 이 사람은 이미 4년 전 17대 총선에서 선거공보물을 뉴타운 장밋빛 공약으로 떡칠하여 당선된 원조 타운돌이이다.[25] 범 한나라당(한나라당(153석)+친박연대(14석)+친박 무소속 연대(12석)+기타 한나라당계 무소속(4석))은 최대 183석. 그 외 자유선진당 18석, 무소속 1석(이인제). 다만 특히 충청권 의원들의 경우 지역주의로 뭉친게 커서 민주당계 성향 의원들도 있긴 했다. 당선자 중엔 권선택, 이용희, 이상민, 김창수가 그런 케이스. 참고로 재보궐선거를 거치고 친박연대와 최종 합당이 마무리된 2012년 시점의 새누리당(한나라당) 의석은 176석이었다.[26] 당장 자유선진당만 하더라도 세종시 문제를 놓고 정권과 갈등을 빚으며 이후 촛불집회에 참여하는 등 오히려 민주당계와 연대할 정도였고, 친박연대뿐만 아니라 한나라당 내부에서도 공천학살을 당했다고는 하나 친이계에 대립하는 당내 친박 인사들이 적지만 일부 살아있었다. 당장 박근혜만 해도 한국미래연합의 쓰린 기억 때문인지 탈당하지 않고 한나라당에 남아 있었다.[27] 이후 이명박 정부에서 대통령실 정무수석을 지냈고 2021년 재보궐선거를 통해 부산광역시장이 되었다.[28] 제18대 국회의원 선거 당시 한나라당의 사무총장으로 친박계 공천 학살을 주도했다는 평을 받았다.[29] 사천시가 속한 서부 경남은 경남에서도 TK와 비슷한 수준의 보수 텃밭이었으나, 농촌에 가까운 지역이다 보니 상대적으로 많은 친박세에 야권세까지 붙으며 대이변이 일어나게 된 것이다.[30] 15대는 민주계(YS), 18대는 친이계. 참고로 15대 국회 시절 종로구 국회의원이었던 이명박은 민주계로 분류되었고, 이후 그의 측근이 된 이재오, 정의화 등과 상도동친박범친이가 된 김무성도 민주계로 분류되어, 민주계의 후신이 친이계라고 평가되기도 한다. 김형오, 이상득, 박희태민정당 출신의 친이계 정치인들 또한 김영삼 집권 당시에서는 '신민주계'라는 이름으로 김영삼의 적극적인 지지 세력이었다.[31] 15대는 자민련, 18대는 친박 + 자유선진당.[32] 좀 더 자세히 말하자면 박근혜이회창이라는 구심점이 있긴 했는데, 둘이 사이가 안 좋았다.[33] 전직 서울대학교 총장으로, 이명박 정부국무총리를 지내며 친이계가 차기 대권 주자로 가장 공을 들인 인물이기도 했다. 허나 원래 민주당계 성향으로 알려졌던 인물인지라 당시 야권 지지층에선 배신자 소리를 듣기도 했다. 훗날에는 KBO 총재가 된다.[34] 오세훈의 경우 무상급식 찬반투표, 김태호의 경우 국무총리 청문회 과정에서 드러난 의혹 등의 영향이 있었다.[35] 2000년 총선 ~ 2024년 총선에서 민주당이 수도권에서 패한 유일한 총선이다.[36] 의정부시남양주시, 하남시, 시흥시, 오산시 8석을 모두 수성했으며, 안양시군포시에서 지난 총선에 획득한 의석을 모두 수성했다.[37] 충북은 거진 전석을 차지했다. 유일하게 패배한 곳이 남부의 자유선진당 이용희 전 의원 정도인데, 여긴 지역 기반이 하도 강해서 대책이 없었다. 이용희 전 의원은 동교동계 출신으로, 5선 의원에 76세의 나이에 당선된 최고령 의원. 군수, 지역 도의원, 군의원 등도 사실상 자기가 직접 고르고, 세습까지도 성공했다. 덕분에 충북 보은군·옥천군·영동군 지역구의 별명이 '이용희 나라'(...)인 적도 있었다. 17대 대선에서 정동영을 지원했지만, 공심위가 매몰차게 버리자 자유선진당으로 들어가 당선되었고, 이후 재탈당하여 복당하면서 차남 이재한을 민주당에 입당시켰다.[38] 이인제는 충청남도 논산시·계룡시·금산군에서 한나라, 민주, 친박, 자유선진당의 네 후보와 모두 싸우며 27.7%이란 18대 총선 최저 득표율로 당선되었다. 반면 광주광역시 동구박주선 전 의원은 구 민주당 출신으로, 옥중 출마에서도 늘 생환한 실력답게 88.74%의 경이로운 득표율을 올리며 18대 총선 최고 득표율을 기록했다.[39] 지난 17대 총선에서 민주노동당이 득표한 비율과 거의 일치한다. 다만 18대는 투표율 자체가 많이 낮은 선거였다보니 총 득표수 자체는 민노당이 많이 앞섰다.[40] 대구광역시 3석, 경상북도 1석, 부산광역시 1석, 경기도 1석. 사실상 경기도를 제외한 나머지 지역들은 보수 텃밭이라는 점에서 친이vs친박 진검승부가 벌어진 셈인데, 영남 지역구 경쟁에선 한나라당이 대거 석권하며 사실상 패한 셈. 다만 이방호, 정종복 같은 친이계 핵심인사들을 떨궜다는 작은 소득은 있었다.[41] 2008년의 김무성은 서청원 다음 가는 친박 핵심에다, 상도동계 출신으로(서청원과 함께 상도동계에서 친박으로 간 드문 케이스) 부울경에서도 정치적 위상이 꽤 높았다. 또한 김무성은 서청원, 최경환, 유승민 등 다른 친박 핵심들과 다르게 독자 생존이 가능했기 때문에 스스로 부울경 지역 친박 정치인들을 모아 무소속 연대를 만들고, 이들 중 상당수가 당선되어 한나라당으로 무사히 복당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렇기 때문에 이 친박 무소속 연대를 친무의 기원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바로 다음 선거 때도 김무성을 중심으로 자유선진당 출신 충청권 의원들과 수도권이나 부울경 지역의 공천에서 탈락한 친이계 의원들이 모여 비박 범우파 신당을 만들고자 했던 시도가 있었으나, 그 때는 워낙 판세가 새누리당에게 불리하게 돌아갔던 때라 보수 분열 대신 힘을 모아주는 결정을 할 수 밖에 없었다.[42] 이때 일부 의원들은 지역정당으로 자유선진당을 지지했던 것이라 합당을 거부하며 민주당에 입당한다.[43] 당시 지역구는 친이계의 거물이었던 이방호의 당선이 유력했지만, 공천 학살을 당한 친박의 앙심이 이방호를 떨어뜨리려는 수단으로 강기갑을 팍팍 밀어주는 촌극 끝에 신승하였다.[44] 이후 이듬해 재보궐선거에서 조승수가 당선되어 원내 진출의 꿈을 이루게 된다.[45] 기존 민노당 5석 + 진보신당 3% 비례 2석 + 노회찬, 심상정 + 조승수, 김선동. 이 숫자는 다음 총선에서 통합진보당이 얻은 13석과 큰 차이가 없거나 오히려 실질적으론 더 많은 것이다. 참여계, 시민사회계 숫자를 제하면 10~11석으로 동일.[46] 이때는 아예 희망고문도 안 될 정도로 처참하게 망했다. 물론 그 사이에 노심조가 탈당한 것도 있었긴 하지만...[47] 이는 17대보다 1% 오른 것.[48] 사실 이 무렵 허경영은 선거법 위반과 명예훼손 혐의로 구속된 상태였고, 추후 복귀한다.[49] 참고로 3위를 기록한 통합민주당 황호순 후보도 1위와 불과 822표차를 기록했다.[50] 2011년 초에 개헌 논의가 이루어지기도 했으나 당시 유력 대선 주자였던 박근혜와 친박연대, 제1야당이었던 민주당의 반대로 무산되었다.[51] 당장 기사에 나오는 여론조사 기관부터가 공신력이 떨어지는 비교적 무명 회사고, 같은 시기 조사한 한겨레의 조사만 봐도 20대의 한나라당 지지가 42.4%로 확 떨어진다. 게다가 당시 각종 선거 결과를 보면 원래 여론조사에서 진보 지지층이 보수보다 한 5~15% 정도 낮게 나온다는 점도 감안해야 한다. 애초에 전체 여론조사가 아닌 이런 여론조사내 세부적인 여론 데이터는 표본이 큰 단위가 아니면 널뛰기가 심하기 때문에 신뢰성이 떨어진다.[52] 사실 박근혜 정부 전후한 2010년대 모든 선거에서 20대~40대 지지율은 꾸준히 민주당 쪽이 높았다는 걸 감안하면, 그래도 이념상 보수 정당 내 민주계 등 개혁보수 세력이 지지하던 이명박 정부에 대한 상대적 젊은층 호감도가 투영되었다고 볼 수도 있다.[53] 20대 초반: 55.3%, 20대 후반: 49.8% / 전체투표율: 58.0%.[54] 20대 초반 투표율이 후반보다 높은 이유는 군인표가 포함되기 때문이다. 이는 어느 선거에서나 동일.[55] 20대 초반: 32.9%, 20대 후반: 24.2%(...)/전체투표율: 46.1%.[56] 20대 총선의 비례대표 출구조사 결과, 20대에서 새누리당 득표율은 16%에 불과했고 野3당(더불어민주당+국민의당+정의당)은 76%가 나왔다. 그리고 위의 본문에도 언급되었듯 30대(8년 전 20대였던 세대)에선 오히려 현재 20대보다 새누리당 지지율이 더 낮게 나온다.[57] 1992년생(18대 총선 당시 고1)인 선미안소희는 말할 것도 없었고, 1989년생인 예은선예 역시 생일이 지나지 않아 18대 총선에 참여할 수 없었다.[58] 반면 바로 직전 총선인 17대 총선에서는 무소속 당선인이 단 2명(신국환, 최인기)에 불과해 민주화 이후 총선에서 가장 적은 무소속 당선이 나왔다. 단 17대 총선의 이 기록은 22대 총선의 무소속 당선자 0명으로 깨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