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김정일의 성격에 대한 내용을 정리한 문서이다.2. 전반적인 성격
"제가 무슨 큰 존재라고, 아마 적들은 외신들, 그 다음에 저 구라파 사람들이 자꾸 뭐라고 말하냐면, "왜 은둔 생활을 하나? 은둔 생활하는 사람이 처음 나타났다." 난, 세상에 뭐 과거에 중국도 갔댔고 인도네시아도 갔댔고 외국에도 비공개로 갔댔고 헌데 나보고 은둔 생활을 한데? 그래서 김대통령이 오셔서 내가 이제 은둔에서 해방됐다. 하도 모르게 했으니까요."
- 김정일, 2000 남북정상회담 평양 회담에서 -
- 김정일, 2000 남북정상회담 평양 회담에서 -
자신의 카리스마를 대중 앞에 드러내기를 즐긴 김일성과는 달리, 김정일의 통치 스타일은 철저히 비밀주의에 기초하고 있으며 외부에 모습을 드러내기 싫어했다. 어릴 적 소련에서 지낼 때부터 심약하고 내성적인 소년이었다는 증언이 있기도 한 걸 보면 천성적인 성격 문제일 수도 있는데, 홍사중 조선일보 논설고문도 후술할 1994년 8월 30일자 칼럼에서 로마 네로 황제와 비슷한 증세라고도 밝혔으며, 심약한 사람일수록 절대 권력을 지니면 흉포해질 수 있다고도 전했다.
김일성의 과보호를 받으면서 자란 탓에 내성적인 성격이면서도 신경질적이고 잔인하다는 증언도 있다. 김일성종합대학 교수 중 한 명의 증언에 따르면 '잔인한 천재'였으며, 후지모토 겐지라는 요리사의 요리를 좋아해 고용했는데, 막판에는 반 감금까지 했다는 걸 보면 아주 설득력이 없는 이야기는 아닌 듯 싶다. <김정일의 요리사>라는 책에 그의 심정이 잘 드러나 있다. 그의 탈북한 지인들은 우월감이 강하고 즉흥적인 면이 강하다고 여러차례 말했고 이는 남북정상회담 중에서도 드러나기도 했다. 또 미국 CIA 출신 정치심리학자 제럴드 포스트 박사는 2006년 영국 <텔레그래프>에서 그의 심리상태 분석 결과 자아도취, 과대망상, 편집증 기질이 있다고 밝혔다.
김정일 주변 사람들이 증언하는 김정일의 성격은 기본적으로 매우 급하고 변덕이 심하다고 한다. 김정일의 처형이자 아들 정남의 큰이모였던 성혜랑은 “김정일은 기분이 좋을 때는 아주 잘해주지만, 화가 나면 창문이 들썩거릴 정도로 광란을 한다”고 말했으며, 김정일의 전속 요리사였던 후지모토 겐지는 “평소에는 다정다감하게 간부를 대하다가도 화가 나면 간부들을 세워 놓고 소리를 지른다”고 했다.
이를 뒷받침하는 또 다른 증언도 있는데 1996년에 조선중앙텔레비죤에서 근무하던 장해성 기자가 탈북하자 김기룡 당시 조선중앙방송 위원장이 자신의 처지를 크게 걱정하면서 김정일에게 사죄와 용서를 구했다고 한다. 그런데 김정일이 그 날은 기분이 매우 좋은 날이었는지 "그게 어떻게 위원장 혼자 잘못이야? 내가 그 아이들을 잘 하지 못해서 그랬는데."라면서 처벌하기는 커녕 조총련에서 받아온 일제 텔레비전 300대를 김기룡과 조선중앙방송 성원들에게 나눠줬다고 한다.11분 38초 부터
김정일의 경호원이었던 탈북민 리영국은 “젊은 시절에 그는 성격이 급한 데다가 가정적 고심 때문에 술을 많이 마셨다. 그래서 모든 일을 즉흥적이고 과격하게 처리하는 버릇이 있다”고 증언했다. 황장엽은 “김일성은 자기의 정치적 이익을 위해서 독재를 한다는 인상을 주지만 김정일은 독재 자체에서 기쁨을 느끼는 것 같은 인상을 준다”고 증언했다. 김정일은 어느 누구도 믿지 않는 성격을 가졌다고 하며 자신과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이나 권력이 쎈 사람일수록 더욱 철저하게 감시하는 성격이라고 한다.
황장엽은 1979년에 다시 북한 당중앙 비서로 복귀할 때 이전에 가지고 있던 북한 최고 수뇌부에서 일한다는 기쁨과 보람은 없고 '독재의 고압선' 바로 옆에서 다칠세라 걱정하면서 잠시도 긴장감을 풀지 못하고 있는 불안한 생활이었다고 증언했다.
한편 리영국의 증언에 의하면 김정일은 자신이 기분이 나쁠 때면 마음대로 사람을 죽였으며, 오랫동안 자신에게 충성해 온 간부들을 자신이 쓰는 엘리베이터나 재떨이를 썼다는 등의 이유로 로동수용소로 보내는 일도 자주 있었다고 밝혔다.
그는 "김정일이 차를 타고 오고 있다는 소리가 들리면 60-70대의 간부들이 도망가서 풀숲에 숨고는 했다. 그들은 옷에 흙이 묻는 것도 개의치 않았다. 그저 김정일 눈에 띄지 않기를 바랐다"고 말하며, "왜냐하면 간부들은 모두 김정일이 기분이 좋을 때라도 자신들을 함부로 대하거나 사형을 내릴 수도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그래서 그를 두려워했기 때문이다"고 증언했다.
이 경호원은 김정일의 경호원으로 10년을 일했다고 한다. 그는 경호원이 되기 전 혹독한 신체 훈련은 물론 철저한 사상 교육을 받아야 했는데 이 과정에서 김정일을 신이라고 믿어야 했다고 한다. 그는 김정일에 대해 한 마디로 "두 얼굴을 지닌 사람"이라고 회상했는데, 김정일은 기분이 좋으면 금덩이라 해도 내어주지만, 기분이 나쁘면 아무 이유 없이 사형 선고를 내리는 사람이라고 한다.[1] # 심지어 1980년에는 유명 여배우 우인희를 처형하기도 했다.
또한 김정일은 사람들이 화목하게 지내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서 주민들에게 상호간에 감시를 하고 비판을 하게 만들었으며, 상호 비판에서는 김정일의 사상과 지시에 충실하였는가, 충실하지 못하였는가를 기준으로 하기 때문에 상호비판이 강화되고 당원들이 격렬하게 싸울수록 김정일의 권위는 높아졌다고 하는데, 그는 당원들의 생활을 잔잔한 상태에 두는 것을 반대하고 늘 풍파를 일으키고 들볶는 것을 좋아한다고 여러 전문가들은 평가한다.
보안에 굉장히 민감하기도 했는데, 미국이 자신을 암살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가족을 제외한 그 어떤 이도 김정일의 모든 스케줄을 파악할 수 없었다. 내각의 상들이나 로동당 부장들도 김정일이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었다고 하며 김정일이 일하는 서기실의 조직도조차 알지 못했다. 어떤 관료가 자신이 부르지도 않았는데 불쑥 찾아오면 보안이 엉망이라며 서기실이나 호위사령부에 난리를 치는 일도 수 차례 있었다고. 때문에 짬이 있는 관료들은 어느 날 갑자기 결재가 안 내려와도 당황하지 않고 그저 또 어디 외국에 갔나보구나, 지방에 갔나보구나 등등 지레짐작하며 기다릴 뿐이었다. 당연히 자신이 사는 관저의 보안도 매우 엄격했는데, 관저에서 일하는 이들은 본인의 비준(결재)을 받아야만 결혼할 수 있었으며 대개 같은 관저 직원끼리 결혼을 시켰다. 당연히 모든 일거수일투족을 검열당했으며 아주 사소한 것 하나라도 외부(가족 포함)에 발설 시 수용소로 끌려갔다.
의외이지만 워커홀릭이기도 했다. 후지모토 겐지의 증언에 의하면 휴양지에서 쉬는 와중에도 아래에서 올라온 수 백장 이상의 보고서들을 전부 본인이 직접 읽어보고 하나하나씩 결재했다고 한다.[2] 파티할 때도 다른 간부들은 유희와 향락에 빠지게 한 채로 자신은 별도로 마련된 밀실로 들어가 뒤에서 밀린 업무를 봤을 정도였다고 한다. 실제로도 김정일은 당 간부들의 인사권과 검열권을 담당하는 조직지도부장과 보위부장을 본인이 직접 겸직해[3] 막대한 분량의 인사, 검열, 감찰 업무를 본인이 손수 처리했다. 그리고 김정일은 2008년 뇌졸중으로 쓰러진 이후 오늘내일하던 와중에도 사망하기 전 까지 많은 장소들을 현지지도하러 다녔다. 심지어 사망하기 직전인 2011년에도 중국과 러시아를 방문하면서 왕성한 외교활동을 보였으며, 사망 2일 전까지도 평양에 새로 생긴 쇼핑몰을 시찰하기도 했다. 즉, 김정일이 인민들을 위해 불면불휴로 일한다는 북한 당국의 선전은 완전히 거짓은 아니었던 것. 다만 그 일이 북한 인민들을 위한 일이 아닌 전부 본인의 독재를 위해 저지른 일이었다는 점이 문제점이다.
사실 김정일은 완전히 무능력한 인물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특히나 정세를 읽고 전략을 짜는 정치력이 매우 탁월했기 때문에 젊은 시절만 해도 권력 승계 서열에서 후순위에 있었던 인간이었지만 본인의 여러 공작으로 지위를 끌어올리고 북한의 2대 최고 지도자까지 등극할 수 있었다.[4] 거기다가 끝내 김정은에게까지 권력을 승계하는 3대 세습 기반까지 다졌는데 능력이 있지 않고서야 할 수 없는 일이기도 하다. 집권 시기에도 국제정치에서 이 능력을 잘 활용하여, 직업 외교관인 태영호도 북한이 수 차례의 북핵 위기를 넘기고 핵개발에 성공한 것은 김정일의 능구렁이 같은 외교 솜씨 덕분이라고 인정했을 정도이다. 단지 그 능력을 인민들의 생활을 위해 사용하지 않고 자신의 권력과 쾌락을 위해서만 사용했다는 점이 비판받아야 할 부분인 것이며, 경제 분야에서의 심각한 무능이 북한의 경제를 최빈국 수준으로 떨어뜨렸기에 최악의 독재자로 꼽히는 것이다.
[1] 이 경호원은 1994년에 북한을 탈출하려 했지만 발각되어 수용소에서 끔찍한 나날을 보내야 했다, 그러나 김정일의 사면을 받고 간신히 풀려난 후 어찌저찌 재차 탈북에 성공하여 남한에 살고 있다. 여담으로 이 사람은 남한에 온 다음에야 김 부자가 독재자라는 것을 깨달았다고 한다.[2] 참고로 이 수백장의 보고서도 서기실에서 추리고 추린 핵심 보고서들이다. 횡적체계는 없고 오로지 수령에게 직보하는 수직체계만 있는 북에서는 온갖 사소한 보고도 다 수령에게 올라가는데 북한 선전자료들을 보면 무슨 학생 교복 디자인부터 강원도 어디 산골에서 일하던 학생들이 다쳤는데 어떻게 수술해야하는가 따위의, 일반적인 국가원수라면 볼일이 없는 온갖 자료까지 다 수령이 직접 다 챙겨야 한다. 이 때문에 보고서도 전문이 있는 핵심, 내용을 추린 2선급 보고, 아예 제목만 올리는 사소한 보고로 세분화되어 상당수 보고들은 김정일, 김정은은 읽지도 못했다.[3] 권력을 분산시키면 자신에게 위협이 되기 때문에 업무부담을 감수해서라도 자신에게 권력을 집중시켰다고 한다.[4] 김정은 집권 직후까지만 해도 북한 측에서는 김정일의 세습이 순전히 김정일의 능력과 노력으로 이루어진 것이라고 주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