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ki style="margin:-0px -10px -5px" {{{#FED11E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5px -1px -11px" | 당중앙위원회 정치국 | |||
<colcolor=#FED11E> 상무위원 | <colbgcolor=#fff,#222>1980년 10월 6기 1차 전원회의 김일성·김일·오진우·김정일·리종옥 | |||
위가나원 | 1980년 10월 6기 1차 전원회의 박성철·최현·림춘추·서철·오백룡·김중린·김영남·전문섭·김환·연형묵·오극렬·계응태·강성산·백학림 | |||
1982년 8월 6기 6차 전원회의 최영림(승진)·서윤석(승진)[1] [1] 북한의 공식 약력에 따르면 이 시점에서 김만금도 정치국 위원을 지냈으나 언론보도상으론 확인할 수 없음. | ||||
1983년 3월 리종옥(강등) | ||||
1986년 12월 6기 8차 전원회의 허담(승진) | ||||
1986년 12월 6기 8차 전원회의 리근모(승진)·홍성남(승진) | ||||
1988년 3월 6기 13차 전원회의 계응태(재승진) | ||||
1988년 11월 6기 14차 전원회의 전병호(승진) | ||||
1990년 5월 6기 18차 전원회의 최광(승진)·한성룡(승진) | ||||
1993년 12월 6기 21차 전원회의 김영주(복귀) | ||||
후보위원 | 1980년 10월 6기 1차 전원회의 허담·윤기복·최광·조세웅·최재우·공진태·정준기·김철만·정경희·최영림·서윤석·리근모·현무광·김강환·리선실 | |||
1981년 4월 6기 3차 전원회의 강희원 | ||||
1981년 10월 6기 4차 전원회의 계응태(강등) | ||||
1982년 4월 6기 5차 전원회의 홍성남 | ||||
1982년 8월 6기 6차 전원회의 전병호·김두남 | ||||
1983년 6월 6기 7차 전원회의 안승학·홍성룡·김복신 | ||||
1983년 12월 6기 8차 전원회의 김중린(강등) | ||||
1986년 2월 6기 11차 전원회의 홍시학·홍성남(복귀) | ||||
1988년 11월 6기 14차 전원회의 한성룡·홍성남(강등) | ||||
1990년 5월 6기 18차 전원회의 최태복·김철만(복귀)·최영림(강등, 복귀) | ||||
1992년 12월 6기 20차 전원회의 연형묵(강등)·김달현·김용순 | ||||
1993년 12월 6기 21차 전원회의 양형섭(강등, 복귀)·홍석형[2] [2] 이후 정치국 후보위원 김철수가 보선되었으며 그가 송두율이라는 주장이 있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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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북한의 정치인. 대남 공작을 담당한 인물로 보이며, 리선실과 더불어 정치국 후보위원에 까지 오른 전설적인 간첩이다.2. 생애
1928년 4월 4일에 태어났다. 고향은 사실 대구로 일본 유학까지 다녀온 인텔리이며, 해방 이후 대구 10.1 사건에 참여했으며, 6.25 전쟁 중에 오빠와 함께 월북하였다고 하는데 남한에 남은 정경희의 일가족은 안기부에게 잡혀가서 혹독한 고생을 했다고 하며 이것이 1983년 정은복 사건으로까지 비화된다.어쨌거나 정경희 본인의 젊어서 행적은 오리무중인데, 1958년에 이빨을 모조리 뽑고 할머니로 위장하여 남한에 잠입하여 공을 세웠으며, 인천우체국 폭파사건 때 1차례 체포되었으나 공안당국에서 물 3드럼을 마시면서 고문을 해도 독하게 버텨서 석방되었고, 1973년에 북한으로 돌아갔다는 풍문이 전해지지만 이를 뒷받침할 수 있는 공신력있는 자료는 전무하다. 어쨌거나 70년대를 대표하는 북한 공작원으로 알려져있다. 최은희는 북에서 듣기로 남한에서 당한 고문으로 정경희가 한쪽 다리를 절며 불임이 되어서 불쌍하게 여긴 김정일이 정경희 집도 자주 방문하고 서울에 있는 정경희 언니도 3국을 통해서 데려다가 만나게 해주었다고 한다.
1970년 11월, 5차 당대회에서 중앙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이후 1975년에 김정일이 대남분야에 측근인 서윤석을 시켜 무려 6개월짜리 조직지도부 검열을 실시하여 완전히 대남공작을 장악하게 된다. 이때 대남비서직은 일시적으로 폐지되고 대남비서 김중린은 '20만 빨치산이 들고 일어난다고 지껄인 박헌영처럼 감언이설을 늘어놓아 수령을 현혹한 죄'로 숙청되어 남조선연구소장으로 강등되었다. 이때 대대적인 부서 개편이 이루어져 문화부와 대남사업총국이 해체되고 연락부장 류장식도 해임, 후임으로 정경희가 임명되었는데, 이는 김정일이 정경희가 여자라서 남자들처럼 과장보고를 하지 않으리라 여겼기 때문이라고 한다. 한편 김중린은 1977년에 통일전선부가 설치되면서 통일전선부장에 임명되면서 복귀하게 된다. 하지만 김중린과 조사부장 리완기는 김정일의 최측근 대열에 진입하여 총애를 받았으나 정경희는 김정일과 개인적인 친분은 그다지 쌓지 못했다고 한다. 그래도 최은희의 증언을 보면 정경희도 김정일 파티에 참석했다고 나와 있다. 이한영의 증언에 따르면 연락부 제1부부장 리정룡과 함께 백건우, 윤정희 납치를 주도했으나 실패하는 바람에 김정일에게 찍혀서 리정룡을 제외한 관계자 전원이 모가지가 날아갔다고 하는데, 한국 외교부 문서고에 따르면 해당 사건은 1977년에 일어났으므로 이때는 정경희도 무사했던 것으로 보인다.
1980년 10월, 6차 당대회에서 무려 정치국 후보위원으로 승진하였으며 1982년 2월, 7기 최고인민회의에서 대의원으로 선출되었다. 1982년 4월, 김일성 칠순기념 김일성훈장을 받았다. 1982년 4월, 최현 장의위원, 1984년 3월, 김일 장의위원, 1984년 4월, 오백룡 장의위원을 지냈다. 아마도 1984년까지는 정치국 후보위원을 지냈음이 확실하다. 이후 대남공작 분야가 김정일이 발탁한 측근들로 채워지면서 연락부가 사회문화부와 작전부로 분할되었고 정경희는 연락부장에서 해임되어 사회문화부 부부장으로 강등당했다. 1986년 11월, 8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재선되었으나 이후로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리선실과는 다르게 1994년 김일성 장의위원 및 1995년 오진우 장의위원에 위촉되지 못한 것을 보아서 말년에는 별볼일 없이 지낸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다가 1996년 6월 4일에 사망했다. 북한은 일체의 부고를 발표하지 않았으나 애국렬사릉에 '남조선혁명가' 직함으로 그녀를 안장함으로 그가 간첩이었음을 인정하였다.
3. 여담
남한의 여배우 최은희가 납북당했을때 북한에서 정경희를 만난 적이 있다. 반공실화극장에서 정경희로 분했던 정혜선과 똑 닮아서 최은희가 깜짝 놀랄 정도였지만 정경희의 눈매는 매우 표독스러웠다고 한다.4. 매체에서
- 1982년작 KBS1 주간드라마 《지금 평양에선》에서는 김두한의 장녀인 김을동이 분했다. 본편의 에피소드 중 한 장면에서 지도자 동지 들으라고 디스코 음악 틀다가 김정일(김병기)한테 걸려서 싸대기 맞는 장면이 나오기도 했다. 1984년 특집드라마《함정》에서도 같은 역할로 등장, 북한 정권에 의해 납북당한 배우 최은희 (김성녀)를 관리하는 책임자로 등장한다.
5. 참고문헌
- 신평길[1], 김정일과 대남공작(북한연구소)
- 현성일, 북한의 국가전략과 파워엘리트: 간부정책을 중심으로(서울: 선인, 2007).
[1] 북한 대외조사부 부부장 박병엽의 필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