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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23 14:57:12

고영환

<colbgcolor=#003764><colcolor=#fff> 제27대 국립통일교육원장
고영환
高英煥 | Ko Yeong-hwan
파일:고영환 원장.jpg
출생 1953년 7월 14일 ([age(1953-07-14)]세)
자강도 강계시 서산리[1]
본관 제주 고씨
가족 아버지 고필용 (1919년생), 어머니 문기섭 (1923년생)
형 고방남, 고영철, 남동생 고영송
누나 고춘희, 여동생 고명희
전처 김연옥, 딸 고은정, 아들 고경림
(남한 가족) 부인 김재숙, 자녀 1남 1녀출처
학력 평양외국어학원 (불어과 / 졸업)
평양외국어대학 (프랑스어문학 / 학사)
경력 북한 정무원 외교부 동아프리카담당 보조지도원
자이르 북한 대사관 3등서기관
정무원 외교부 동아프리카담당 지도원
정무원 외교부 중부아프리카담당과장
자이르 북한 대사관 참사관
콩고민주공화국 북한 대사관 참사관
통일준비위원회 외교안보분과 위원
한국관광대학교 겸임교수
국가안보전략연구원 부원장
국가안보전략연구원 북한연구실장
통일정책연구소 수석연구원
통일부장관 특별보좌역

1. 개요2. 생애
2.1. 학원 시절까지2.2. 아프리카 생활2.3. 탈북 과정2.4. 대한민국에서
3. 기타4. 탈북 전 외교관 경력5. 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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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북한의 전직 외교관, 대한민국의 공직자. 2024년부터 국립통일교육원 원장을 맡고 있다.

1953년북한 자강도 강계시에서 태어나 외교관이 된 후 김일성의 통역을 맡아 승승장구하다가, 김씨 일가에 관한 실언(니콜라에 차우셰스쿠 처형 영상을 본 직후 "우리 조선에서는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인데..."라고 발언)[2]으로 인해 귀국 지시를 받자 생명의 위협을 느껴서 잠적 후에, 1991년에 홀로 대한민국으로 탈북했다.

북한에 있었을 때는 정무원 외무성에서 과장을 역임하고 아프리카 지역의 외교관을 지냈다. 탈북한 이후에는 국가정보원 산하 국가안보전략연구원(INSS) 부원장을 지냈다. 원래 없던 직책이었는데, 2016년 직제 개편을 시행하면서 부원장직이 만들어져서 초대 부원장으로 취임했다. 정년퇴직 후 국가안보전략연구원과 국방부 산하 한국군사문제연구원(KIMA) 객원 연구위원이며 한국관광대학교 겸임 교수로 재직 중이다. 은퇴 이후 연구원 현직일 때보다 활발하게 방송에 출연한다. 2021년 개편 이후 채널A 예능 이제 만나러 갑니다에 고정 출연하고 있다. 윤석열 정부에서는 2023년통일부장관 자문기구인 통일미래기획위원회에 초빙되었으며, 이듬해인 2024년국립통일교육원 원장에 임명되었다.

2. 생애

2.1. 학원 시절까지

자강도 강계시 서산리(이북5도위원회의 행정구역상 평안북도 강계군 강계읍 영동)에서 조선로동당 간부급 직책을 맡고 있던 아버지와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휴전 직후 아버지의 인사 이동으로 개성시로 이사하여 주로 자란 곳은 개성이다.

인민학교(한국의 국민학교)[3] 졸업 즈음에 아버지의 권유로, 그리고 외교관이 되면 외국에 비행기를 타고 다니고 남들이 할 수 없는 것을 할 수 있다는 이유로 외교관의 꿈을 꾸게 되었다. 그 후 당의 간부 자제들만 다닐 수 있는 평양외국어혁명학원(한국의 중고등학교를 합쳐놓은 외고와 비슷하다) 불어과에 전국에서 모인 4,000명 중 50대 1의 경쟁률을 뚫고 80명에 들어 합격했다. 당시나 현재나 평양외국어학원은 부상급(차관급) 이상 토대만 지원이 가능했는데 아버지가 차관급으로 대우 받는 개성시 인민위원회장[4]이어서 가능한 일이었다고 한다.

평양외국어 학원에 다니던 시절에 갑산파 숙청 사건이 벌어지는데, 고위급 자제들이 모여있던 학교였던만큼 자신의 같은 반 친구들이 정치범수용소로 끌려 가는 모습을 교실에서 직접 목격했다고 한다. 고급 소련제 승용차에 양복 입은 남자 둘이 학생을 한 명씩 데려갔는데, 어디 온천이나 바다로 놀러갔나 했지만 보름이 지나도록 돌아오지 않아 그 때가 되어서야 숙청임을 알아차렸다고 한다. 그렇게 2년여 간 불어과 학급 12명 중 5명이 차례로 사라졌다고 한다. 쾌도난마에서 이 일화를 밝혔는데, 울지 않았냐는 박종진의 질문에 울게 되면 자신도 동조하는 것이므로 잔뜩 쫄아서 숨도 제대로 못 쉬었다고 회상했다.

졸업 후에 1972년 평양외국어대학 불어과에 진학한다. 이제 만나러 갑니다의 게스트로 자주 등장하는 강명도씨가 같은 과 6년 후배이며, 대한항공 858편 폭파사건의 범인 김현희가 같은 대학 일본어과를 졸업했다. 평양외국어대학에서 괜찮은 성적으로 5년 과정을 마치고 1977년 졸업하였다.

2.2. 아프리카 생활

1979년부터 북한 정무원 외교부 동아프리카 담당 보조 지도원으로 첫 외교관 생활을 시작했다. 처음 근무했을 때만 해도 김일성의 열렬한 전사가 되어야 한다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고 남북통일은 사회주의 체제 하에서 이루어질 것이라고 확신하였다. 그러나 점차 외교관 생활을 하다 보니 북한 정권의 실상에 대해서도 깨닫게 되었고 그토록 미워했던 한국 외교관도 같은 동포로서 생각하며 적대감이 많이 누그러지고 남한의 경제 발전을 느끼게 되면서 고영환은 점차 가치관의 혼란을 느끼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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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color=#242748> 김일성을 접견한 고영환
파일:캡처_2023_09_07_18_19_50_58.png
<colcolor=#242748> 방북한 부르키나파소 대통령 블레즈 콩파오레를 수행중인 고영환
김일성과 김정일의 프랑스어 통역을 3년 8개월간 하면서 특별히 김일성에게 프랑스어 실력을 칭찬받고 표창을 받았다. 김일성의 포상이 나오자 당시 외무상이 김일성이 직접 하사한 인삼을[5] 외무성 직원들 앞에서 내려 표창했다고 한다. 이 의미는 북한에서 최고의 신분 보증이 되는 접견자가 되는 것으로서, 개인 인사 카드에 김일성의 칭찬과 포상 내용이 가장 첫 페이지에 '모셔'지고 당연히 간부 사업(인사)에서 상급자의 고과 의견 따위는 물을 필요도 없이 요건만 되면 즉시 승진시키는 신분이 된 것이다. 그래서 당연히 나이에 비해서 승진이 굉장히 빨랐다. 특히나 해외 근무는 외무성에서도 상위 20%의 엘리트가 로동당 입당이 허가되고 상관의 추천과 함께 기혼자에게만 주어지는게 규정임에도 홀로 주 자이르(지금의 콩고민주공화국) 대사관 3등 서기관과 북한 정무원 외무성 아프리카 담당국 지도원 과장, 주 자이르 대사관 1등 서기관을 거쳐 주 콩고 대사관 참사관을 역임하는 등 승진은 다른 동기들보다 빨리 한 편. 그 과정에서 외교부장 김영남을 수행하며 아프리카 제 3세계권의 서울올림픽 보이콧 운동 등 여러 가지 일을 하였다. 하지만 북한 체제의 모순성을 계속해서 자각하다 동구권 사회주의 국가의 몰락과 자본주의 경제의 급성장을 보며 체제에 대한 극심한 회의감을 느끼게 되었다.

특히 북한 외교관들은 기껏해야 선물로 인삼주를 받는데에 비해 남한 외교관들은 포니 자동차를 선물받는 것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남한 외교관들이 받는 대우에 더해 남한의 비약적인 공업 발전이 믿겨지지 않았다고 한다.

그리고 권력의 곁을 수행하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김정일과 그의 측근들이 저지르는 각종 부정축재를 직간접적으로 알게 되었다. 특히 그를 충격에 빠지게 만들었던 사건은 1979년, 피로회복관 화재 사고이다. 피로회복관은 겉으로는 '장군님의 피로를 풀어드리는 시설'이라는 명목을 내세웠지만 실상은 김정일의 온갖 유흥과 향락을 위한 시설이 준비된 퇴폐적인 건물이었다.[6] 이 건물의 건설에 북한 외교관들도 동원되어서 해외에서 건설 자재들을 들여오곤 했는데, 완공 단 하루를 앞두고 인화성 물질로 가득찬 건물 안에 불이 나버려서 북한 외교관 100명 이상이 한꺼번에 사망하는 대참사가 발생했다. 고영환은 당시 해외 출장중이었기에 천만다행으로 참사를 피할 수 있었으며, 명색이 한 나라의 엘리트들인데 단지 지도자의 수발을 들다가 목숨을 잃는 광경에 넋을 잃었다고 한다.[7][8]

남북한 아프리카 외교전을 직접 겪었다. 본인이 외교관 생활을 하면서 가장 안타까웠던 것이 북한과 친한 나라들은 대부분 가난한 나라이고 남한과 친한 나라들은 부유한 나라였다는 점이라고. 80년대까지는 김일성의 교시로 아프리카와 제 3세계권 외교에 북한이 중점을 두었는데, 유엔국가 과반수의 지지를 확보하여 주한미군의 유엔군 감투를 벗겨버리면 주한미군 철수 명분을 쥐게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동구권이 무너지고 소련이 해체되면서 아프리카 외교는 본전도 못찾고 북한에서는 미국과의 직통 대화를 추구하는 대미 외교로 선회하게 되었다.

이후 유튜브와 이제 만나러 갑니다에서 밝힌 바로는 전두환 암살 작전에 주 자이르 북한 대사관이 거점 역할을 했고, 공작원들을 태우고 아프리카 각지를 이동하며 추적을 피하는 운송책 역할을 수행했다고 한다. 그 때 일본어를 쓰던 공작원 중 한명이 나중에 아웅 산 묘소 폭탄 테러 사건의 범인으로 미얀마 당국에 체포된 인물이라고 한다.

2.3. 탈북 과정


이제 만나러 갑니다(이만갑) 574회에 '북한 외교관 1호 망명 사건'으로 그의 망명 스토리가 상세히 소개되었다.[9]

대사관에 있던 보위원이 충성의 외화벌이에서 벌어들인 외화 일부를 몰래 빼돌리자고 제안하였으나, 당시 대사관의 당세포 비서였던 고영환이 거절한 일로 앙심을 품었다. 그리고 주위 사람들이 보위부 요원이 고영환을 험담하고 노리고 있다고 조심하라는 충고를 했지만, 고영환은 자기가 그래도 김일성에게 특급 칭찬을 받은 '접견자' 신분인 데다가 김정일이 직접 지시한 전두환 암살 작전에도 참가했고 친형도 조직 지도부에서 있고 하니 "아무리 그래도 고작 보위부 요원 주제에 자신을 뭐 어쩌겠나?"라고 안일하게 생각했다고 한다. 그런 상황에서 동구권에서 김일성의 독재를 따라 배운 니콜라에 차우셰스쿠의 처형 장면을 보면서 "우리 조선(북한)에서도 저런 일이 일어나면 안 되는데…"라고 말하다가 평소 사이가 안 좋던 그 보위원이 "김일성도 저렇게 될 수 있다."라는 말로 곡해하고 왜곡해서 평양에다 보고를 하였다. 훗날 고영환은 이만갑 방송에 출연하여 이 사건을 설명했을 때 "북한의 외교관들은 같은 동료들과의 관계와, 해외의 외교관들과의 관계를 같이 신경써야 한다."라고 이야기를 하였다. 결국 같은 동료들과의 사이가 틀어지게 되면 얼마든지 자신의 등에 칼을 꽂는 배신을 하고 반동으로 왜곡되어 보고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결국 보고를 받은 북한 당국이 고영환에게 소환 명령을 내린다. 명목상으로는 국제회의에 프랑스어를 잘하는 통역관이 필요하다는 이유였지만, 실제 공항에서는 보위원을 기술자로 속여서 체포조로 보냈다.[10] 이에 고영환은 신변에 위협을 느껴 탈출을 결심하게 된다. 훗날 강적들에 나와서 언급하기로는 자신이 탈출을 결심하게 된 계기가 대사의 안색을 본 후였다고 회고했다. 당시 대사가 외국어에 서툴러 만약에 단순 통역 같은 업무로 평양으로 파견을 간다고 하면 평양에 건의라도 해서 자기를 잡았을 사람인데 그런 일도 없었던 데다가, 무전수가 고의인지 호의인지 입국자가 건설 인력이 아니라 보위부 사람이라 말을 했고 대사가 고영환에게 북한에 들어가라는 말을 전하고 표를 3장 끊어오라고 할 때 대사가 웃지도 않고 무표정하게 이야기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본래는 강에 뛰어들어 자살을 할 생각이었지만, 막상 강을 내려다보니 여기저기에 바위도 있고 물살이 세서 뛰어내리면 많이 아플까 봐(…) 마음을 고쳐먹고 강가에 옷가지를 벗어두어 자살로 위장하고 국경을 넘어서 콩고 인접 국가로 갔다.[11] 그 나라는 본인이 외교 분쟁의 소지가 있어서 어느 나라인지는 밝히지는 않았다. 그 나라로 가서 아프리카의 유력한 정치인 친구에게 자신을 보호해 달라고 요청하여 두 달 동안 은신하며 지내게 된다. 그 후 아프리카를 떠날 생각을 하게 되는데, 처음에는 대한민국으로의 망명을 생각지 않았으나 친한 성향의 아프리카 친구가 그에게 한국행을 권유하였다.

그 후 김포국제공항을 통하여 대한민국으로 망명을 하게 되었다. 고영환이 탈출하자 북한에서는 고영환이 수백만 달러의 자금을 횡령하여 도주하였다고 발표했지만, 당시 자이르 주재 북한 대사관 1년 총 유지비가 2만 달러에서 1만 5천 달러로 삭감되어 북한 외교관 부인들은 생활비를 벌기 위해 다른 나라 외교공관에서 파출부로 일했을 정도라고 한다. 고영환이 탈출할 때 수중엔 달랑 100달러만 있었다고 한다.

대한민국으로 오게 된 날은 1991년 5월이지만 망명 기자 회견은 그 해 9월에 하였다. 처음에는 가족의 신변 때문에 언론에 발표하지 않고 조용히 살려고 했으나, 안기부 요원이 언론에 발표하자고 설득해서 결국 4개월 후 망명을 대외적으로 발표하였다. 공개 활동을 하는 북한 출신 외교관으로는 고영환이 최초였다.

2.4. 대한민국에서

파일:리즈시절 고영환.jpg
<colcolor=#242748> 망명한 직후 1991년 기자회견을 가지는 고영환(38세).
이때는 상당히 날씬하고 마른 인상이었다.
망명 초기에는 심적 고생이 대단히 많았다. 북한 특성상 망명한 외교관의 친족들은 당연히 수용소로 보내지는데 그에 대한 죄책감으로 매우 괴로운 나날을 보냈다. 외교관이 됐을 때 가장 옆에서 기뻐해주었던 어머니는 수용소에 끌려간 후 사망했는데 이를 듣고 한참을 오열했다고 하며 지금도 어머니 생각이 나면 눈물이 난다고 한다.

그래도 주위에서 국무총리를 역임한 박태준 회장 등의 응원을 받으면서 힘을 내고 1993년 2월 15일 7살 연하의 의상 디자이너 김재숙 씨와 결혼하면서 점차 한국 사회에 동화되어 갔다. 그 후 국가안보전략연구원(국정원 산하의 국책연구기관) 연구원으로 임명되어 북한 전문가로 활동하다가 상임연구원으로 승진했고, 2016년 1월 1일자로 부원장직에 재직하다가 현재는 정년퇴직 후 객원연구위원으로 일하고 있다. 현직에 있었을 때 못한 방송 출연이나 유튜브 강연도 활발히 진행 중이다.

TV조선이나 YTN의 시사 프로그램의 북한 전문 패널로 자주 출연한다. 과거 추적 60분에도 북한군 문서 관련하여 출연한 바 있다.

이제 만나러 갑니다(이만갑) 574회에 '북한 외교관 1호 망명 사건'으로 그의 망명 스토리가 상세히 소개되었다.

2023년 9월 6일, 통일부 장관 특별보좌역에 위촉되었다. 2023년 10월 31일 조선일보와의 인터뷰에서 본인의 대북관과 향후 정세 예측 및 역대 정부의 대북 정책에 대한 평가를 남겼다. #

2024년 5월 2일, 국립통일교육원장에 임명되었다.#

3. 기타

4. 탈북 전 외교관 경력

1979년 6월 정무원 외교부 동아프리카 담당 보조 지도원
1980년 2월 자이르 주재 대사관 3등 서기관
1985년 2월 정무원 외교부 동아프리카 담당 지도원
1987년 1월 정무원 외교부 중부아프리카 담당 과장
1988년 11월 자이르 주재 대사관 참사관
1989년 11월 콩고 주재 대사관 참사관

5. 저서



[1] 이북 5도 기준으로 평안북도 강계군.[2] 고영환의 발언에 따르면 평소 사이가 나빴던 주콩고 북한 대사관의 국가보위부 파견 요원이 자신의 발언을 '고영환은 수령님도 차우셰스쿠처럼 될 수 있다고 발언함'이라는 식으로 왜곡하여 보위당국에 보고해서 귀국 지시가 내려온 것이라고 한다. 친한 동료들을 통해서 숙청 목적의 송환임을 직감하고 자살로 위장하고 도주했다고 한다. 자세한 내용은 후술 문단 참조.[3] 현재는 한국은 초등학교, 북한은 소학교로 각각 명칭이 바뀌었다.[4] 남한으로 치면 지방자치 시대 이전 관선 시장과 유사하나 북한 체제는 로동당 우위의 지배체제이므로 시당 책임비서보다 낮고, 실질적으로는 당책임비서 밑급인 조직담당 부국장이나 선전부국장보다 떨어진다. 내각의 상(장관)도 로동당 부장보다 낮으며, 부부장급 대우이다.[5] 김일성이 고영환이 너무 말랐다고 몸 보신 하라고 내렸다고 한다. 고영환 자신의 증언에 의하면 고영환을 본 김일성이 “왜 불어하는 놈들은 이리 빼빼 말랐나?”라고 했다는 후문이다.[6] 이제 만나러 갑니다의 MC 남희석은 이걸 듣고 “김정일 쾌락관”이라며 어처구니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7] 당시 북한 당국에선 남편을 잃은 과부들을 외무성 직원으로 특채하면서 일종의 배상을 했는데, 그래서 그 날 이후로 외무성에 여성들이 많아진 진풍경이 펼쳐지기도 했다고 한다.[8] 이후 그 잔해는 김정일의 명령으로 철거되었으며 대신 그 자리에 평양제일중학교가 들어섰다.[9] 방송에서 간략하게 나온 이야기나 생략된 일화나 배경에 대해서는 여러 유튜브에서 밝힌 바가 있다.[10] 북한이 숙청의 대상으로 삼은 외교관이나 외화일꾼을 소환하기 위해 사용하는 전형적인 수법이라고 한다. 두개의 각각 다른 지령서를 내리는데 대상에게는 사업 경과 보고 및 신규 사업 등을 이유로 들어올 것을 지시하는 내용을 보내고, 대사에게는 대놓고 어느 날까지 해당 인물을 평양행 비행기로 탑승시킬 것을 지령하는 ‘친서’라는 것을 보낸다고.[11] 국경을 넘는 과정에서 항구에서 배를 탔다는 점, 그 나라에 친한 정치인이 있었다고 밝힌 점으로 볼 때 콩고 강을 두고 접경하며 자이르와 같은 불어권에 북한과 같은 공산권이었던 콩고 공화국(당시 콩고 인민공화국)일 확률이 매우 높다. 조건을 만족하는 다른 나라들은 1회 주유로 도달할 수 없는 거리를 이동해야 한다.[12] 김일성을 매우 존경한 인물이었다.[13] 이들 중에는 "우리 나라에서도 저런 일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라는 말도 있었는데, 공관에 나와 있던 국가보위부 파견관이 "김일성 주석님도 차우셰스쿠처럼 처형될 수 있다"로 곡해해서 평양 본부에 전달했다고 한다.[14] 국내 정보기관에선 오래전부터 신원이 불분명한 탈북자는 일단 간첩으로 간주하고 무조건 고문으로 조사를 시작하는 관행이 있었다. 이런 악습은 1998년 김대중 집권과 함께 사라졌다. 고영환은 이미 외교관으로 대한민국 정부도 신원을 확실하게 파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고문을 피한 것이며, 이한영은 그 이전에는 전혀 드러나지 않던 인물이라 당시 관행상 고문을 당한 것이다.[15] 북한 기자 출신 탈북자 김길선도 똑같은 증언을 한 바 있다. 자신은 직접 보진 못했지만 당시 북한 엘리트 사이에선 공공연한 비밀이었다고 한다.[16] 사실 고영환이 하던 일은 '정성사업'으로 북한에서 김일성 부자에 대한 '경의'를 표하기 위해 해야 하는 의식이며, 심지어 고영환의 탈북 전 북한은 김일성 초상화에서는 언제나 향기로운 냄새가 풍겨야 한다며 초상화에 향수까지 뿌리던 시절이었다. 후자는 김만철주성하의 증언으로 교차검증까지 되었다.[17] 평양 25시 - 김씨왕조의 내막